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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브x잭]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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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군.”

-잭이 클리브에게


눈꺼풀이 무겁다. 클리브는 깊은 잠에서 겨우 깨어난 기분이 들어 눈을 연신 깜빡였다. 평소에 보던 풍경과는 다른 이질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흐린 탓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시야와는 다르게 이번엔 정신이 흐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는 한숨을 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클리브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았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시야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당장이라도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이명이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하, 어지러워….’

사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다시 한 번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딘가에 갇혀버린 것처럼 온 세상이 하얗다.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기척도, 백색소음에 가까운 작은 소리마저도 없었다. 곧장 질식해버릴 것 같은 고요함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그였다.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

사내는 자연스레 이마에 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에 선명히 묻어나는 붉은 색 피를 바라보았다. 제 의지와 다르게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한숨을 또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흐릿해져가는 감각과 조금만 움직여도 현기증이 밀려오는 머리를 붙잡으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분명 특종을 잡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도중 사건 현장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뒷골목 능력자들에게 휘말렸던 것 까진 기억이 난다.

“아마 큰 싸움이 일어난 것 같은데….”

클리브는 그 싸움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하아….”

사내의 탄식이 섞인 한숨이 허공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을 부숴갔다. 클리브는 그제야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하얗고 적막한 공간이 숨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거긴 특종 현장이 아니라 내 무덤 이였나.’

사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늘 이러면 괜찮겠지, 저 정도는 괜찮겠지, 늘 그런 식이였다. 특종을 위해서 몸을 사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난…. 여기까지인가.’

클리브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그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버틸 만한 힘도, 버티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가슴 한 편이 미친 듯이 답답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져갔다. 손을 들어 올리는 감각들도 점점 무뎌져갔다. 자신이 죽어가는 고통에서 비롯된 괴로움인지, 과거의 선택의 후회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서서히 꺾여가고 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던 그 때였다.

“클리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와 느리면서도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듯, 그러나 공허함과 이질감이 가득한 낯선 목소리였다. 하얀 공간에 흥얼거리며 건조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클리브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꼴이 엉망이군.”

한 남자가 클리브를 내려다보며 작게 읊조리듯 대답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에는 살기와 공허함이 가득했다. 클리브는 제 앞의 남자를 바라보고는 묘한 이질감에 소름이 돋아 시선을 회피했다. 제 자신을 복제한 것처럼 닮은 모습이지만 분명히 자신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상반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몸을 낮춰 클리브의 시선을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은 그는 클리브의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클리브의 얼굴을 잡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살아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보였다. 클리브는 그의 시선에 담긴 공허함과 살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뭐야, 너는….”

자신을 계속해서 관찰하는 그에게 클리브가 물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관찰하는 그의 행동이 적잖게 짜증이 났는지 말투에는 불쾌함이 제법 서려있는 듯 했다. 그는 피식하고 작게 웃는가 싶더니 금세 차가운 표정으로 바꾸고는 클리브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서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오히려 적반하장 식으로 반문을 하는 그의 태도에 클리브는 할 말을 잃었다. 언제 마주친 적이 있던가, 모든 기억을 뒤져봐도 눈앞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클리브의 대답을 기다리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클리브는 그의 태도에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분위기를 압도하는 살기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태도들이 클리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결국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아버지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그래, 아돌프 박사. 이쯤이면 눈치 챌 법도 할 텐데.”

그의 말을 들은 클리브는 순간 무언가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얽혀있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뒤를 쫓던 시간, 그리고 멜빈에게서 제 자신을 닮았지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격을 보았던 시점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제야 자신이 평소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던 이유가, 자신의 내면에 잭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리브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어쩔 생각입니까?”

“흐음, 뭘?”

“결국 당신도 제 인격 중 하나잖습니까.”

사내는 그런 말을 하고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이 죽으면 세상에 클리브라는 자아는 사라질 것이고 잭이 자신의 자아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 공존하는 것도, 자신이 사라지고 잭만 인격체로 남는 것도 최악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떠한 결말이 되어도 최악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클리브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영원히 잠들고 싶은 건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잭은 사내에게 의미심장한 말로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결말이 뭡니까?”

“흐음, 글쎄?”

잭은 미소를 지으며 좀처럼 알기 힘든 대답으로 그의 말을 일관했다. 잭은 몸을 일으키고는 어디론가 갈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내는 클리브의 어깨를 툭, 잡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슬슬 게임을 시작해야지.”

“그게 무슨….”

“복수극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과는 다르게 눈빛은 공허하고 서늘했다. 클리브는 의식을 붙잡을 수 있는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었다. 깊은 상처에 의해 죽던,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처참하게 살해되건, 어떤 결말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눈빛이었다.

“어차피, 너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리고?”

“너를 죽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어.”

그는 잭을 유심히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과 마지막 말들이 영 미덥지 않는 듯 했다. 잭은 변수가 가장 큰 상대였다.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언젠가 역으로 목에 칼을 겨누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상대였다. 잭은 클리브의 눈빛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군.”

“….”

클리브는 잭을 바라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아끼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생각 외로 냉정한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잭은 서늘한 눈빛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품에서 메스를 꺼내들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영원히 존재할 수 없었겠지.”

“….”

“네가 당했던 것들 그대로, 그들에게 똑같이 돌려주지.”

편히 쉬라는 말을 끝으로 잭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클리브는 본능적으로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깊은 상처 탓에 클리브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는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도심 인근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주위를 살펴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병원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고, 병실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다. 군데군데 감싸진 붕대와 상처들을 꿰맨 흔적들이 선명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불편함을 호소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 어찌 살아남긴 했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제법 큰 상처들이 군데군데 있었고, 붕대로 감싼 곳에는 피가 맺힌 곳도 상당했다. 자잘한 상처들도 꽤나 많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은 없었지만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의사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차트에 그의 상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더니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하곤, 약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오겠습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의사는 병실 밖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자 고요한 정적만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클리브는 병실 문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의문점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똑같이 돌려준다는 말,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라는 그 표현들이 눈앞에서 지켜본 것처럼 선명했다. 클리브는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잭의 말을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썩 유쾌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라 지레 짐작하는 그였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다행인가.’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나의 존재 안에서 섞일 수 없는 인격끼리 공존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가끔씩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편두통의 원인이 그였다는 것도,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시선을 돌려 병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제법 흐린 것이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의 연속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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