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릭] 산책 두 걸음.

  • 2024년 5월 10일 이전까지 풀린 사이퍼즈 스토리를 기반으로 연성하였습니다.

  • 개인적으로 만들어낸 설정의 어떠한 매개체가 등장합니다.

  • 주의, 시신 언급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릭 톰슨, 그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을 온전히 기댈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릭에게 자유를 주며, 그의 곁을 떠나기로 다짐했었다. 이건, 섬광이 멈추는 때의 나는 더이상 릭과 함께 동행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날부터 생겨난 다짐이였으며, 나의 다짐은 지금까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너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일까?”

인식의 문 너머의 이곳에 도착한 이후에도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은 내가 아직 이곳에서 존재함에 의문을 가져, 그저 새하얀 이곳을 걸어다니며, 이곳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이 끝난 그날부터, 생겨난 이 작은 틈사이로 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틈은 제 주변을 계속 맴돌았고, 언제나 릭의 모습만을 비춰주었다. 이 틈을 건들여보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며, 릭의 이름을 불러도 그에게 닿지 않은 것일까? 그의 반응조차 전혀 없었다. 그저 릭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기에 나는 언제나 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겐 얄팍한 후회가 생겨났고, 점점 후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벨져릭] 산책 두 걸음.

인식의 문을 통해 너머온 이곳은 아무리 걸어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이곳으로 너머 온다면, 내 육신 또한 액자와 같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먼지가 되어 사라진 액자와 달리 나는 남아있었다. 살아있다면, 필히 내가 행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이곳은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은 텅 빈 공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걷다보니 깨달은 한가지가 있었다. 이곳은 안타리우스가 이용한 흔적… 그들이 버리고 간 신도들과 실험체로 보이는 것들의 시신 근처에 피어있는 꽃들은 마치 능력자 마냥 능력을 피워내고 있었다. 어느 꽃은 주변에 작은 소용돌이를 내고 있었고, 어느 꽃은 물방울, 어느 꽃은 빛… 정말 다양한 형태의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유난히 별처럼 반짝이는 여러 꽃송이를 한가지에 무겁게 혹은 가볍게 달고 있는 꽃이였다. 은방울 꽃이였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보았지만, 꽃은 나의 손을 거부하듯 공간을 열어 이리저리 움직이기 바빴다. 이건 마치 릭의 능력과 비슷했다.

“…재미있군.”

재미있는 꽃과의 재회를 마친 나는 또 다시 이 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릭의 능력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그 꽃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공간을 열며 제 주변을 맴돌았다. 꽃은 어느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꽃은 내게 초콜릿 코팅이 된 도넛을 잔뜩 먹고 싶다는 둥, 사실 도넛보다 오렌지를 좋아한다며, 그것도 곱게 잘 갈아 만든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특히 좋아한다 말해 놓고서, 언제나 내겐 오늘은 피곤하니 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언제나 먹을 것 이야기만 잔뜩 하거나, 여기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제법 볼만 하다고, 이곳의 밤하늘은 날이 좋으면 별과 달이 잘보여서 무척 아름답고, 또 이 장소는 커다란 호수를 바라보며 따뜻한 추로스를 먹으면 최고의 장소라며, 여행지가 잔뜩 실린 잡지를 보며, 여행가고 싶다고 말하던 어느 여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 꽃에 손을 다시 뻗으면, 눈치채고 또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꽃송이만 인사하듯이 조용히 흔들뿐이었다.

“정말… 릭 톰슨 같군.”

나는 끝내 그 꽃이 능력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릭과 같다고 결론을 내었다.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연인. 이제 다시 못 만날 내게 가장 따뜻했던… 인물—

그 뒤로도 난, 계속 새하얀 공간을 걷고 또 걸었다. 릭과 같은 꽃 또한 내 주변을 왔다갔다 거렸다. 성가셨지만, 이 무료한 산책을 달래주는 데에는 적합하였다. 어느날,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던 내게 꽃은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매달려 있는 꽃송이를 떨어트리며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꽃송이를 무수히 떨어트려도 금새 또 다시 자라나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꽃을 따라갈 의무는 없었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꽃은 제 근처를 여기저기 공간을 열며 또 다시 정신없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너무나도 성가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꽃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앞서 간 꽃의 움직임이 멈춘 곳에는 어느날 릭과 함께 보았던 수 많은 별들이 떨어지는 밤하늘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발이 그곳에 닿기도 전에 밤하늘은 순간의 강한 빛을 내며, 사라졌고 다시 이곳에는 새하얀 공간만 남겨져 있었다. 그 뒤로도 꽃은 종종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꽃의 뒤를 따라가면, 그곳에는 항상 내가 두고온 그곳의 여러 풍경이 보였다. 낮이기도 했으며, 새벽녘이기도 했다. 또한 숲과 바다, 혹은 도시의 골목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가가면 여전히 흔적 어느 하나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런건가? 넌… 날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군.”

꽃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치 그렇다는 듯이 꽃송이를 살랑 흔들었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난 저곳으로 돌아갈 생각따윈 전 없다.”

이미, 저 곳은 전쟁이 끝난 직후라 충분히 혼란스러울 텐데, 그 와중에 내가 저곳으로 다시 너머 간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혼란만 더 줄 뿐이겠지… 꽃에게 확고히 내 말을 전달한 일은 일절 후회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꽃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 이후 꽃은 내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하루종일 성가시게 했던 것이 사라져 시원한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뭐지? 떠나간게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이곳에선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꽃이 다시 내 앞에 찾아왔고, 꽃은 나의 발 아래에 공간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피할 수 없어, 그저 하염없이 떨어지는 이 공간에서 나는 꽃의 정체가 문득 궁금해졌다. 꽃… 사람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사채 근처에 피어있었던 수 많던 꽃, 그리고 꽃잎들은 각 능력자의 능력과 닮아있었다. 내 주변을 따라다니는 이 꽃은 역시 릭의 능력일까? 이내 제 등 뒤로 폭신한 감촉이 느껴짐에 나는 안전히 두 다리를 디뎌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멀리 제 눈 앞에 보이는 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빛을 따라 온 곳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어보니, 다양한 집들이 줄지어 있는 어느 작은 마을이 문 너머로 보였다. 문은 열었지만, 나는 너머 갈 수 없었다.

그저 작은 마을의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중, 어느 작은 아이가 나를 통과한 후, 문을 너머로 지나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문은 마치 영화처럼 그 아이가 걷는 모습을 자세히 비춰 주었다. 이건 환상일까? 포근해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과 제법 잘 어울리는 녹색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제 입에 달린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모양인지, 무척 행복해보였다. 누군가 닮았다고 생각한 나는 유심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기만 하던 아이는 시간이 흐를 수록 뛰기도 하였고 또 넘어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이 보다 더 시간이 흘렀을 무렵에 아이는 성장을 하였다. 공을 차며 걷기도 하였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움직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공간을 만들어가며 이리저리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때부터는 배경 또한 여러곳으로 바뀌었으며, 나는 비로소 확신하였다. 이 아이는 릭 톰슨이었다. 이 순간부터 문은 무너졌, 작은 틈이 생겨났다. 호기심에 이끌린 난 그 틈에 다가갔고, 그 너머로 보이는 곳은 무척 익숙하였고, 또 익숙한 누군가가 있었다.

“릭… 부상을 입은 것인가?”

저곳의 시간으로 며칠이 지나도 릭은 침대 위에서만 있었다. 큰 부상을 당한 것일까? 생각했지만, 릭은 그래 겉보다는 내면으로 큰 부상을 입은 듯하였다. 답답함에 난 릭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불러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내 귓가엔 작게 내 이름을 부르는 릭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닿지 않으면… 그래 릭을 깨워보고자, 나는 한 손을 겨우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이 작은 틈 사이로 손을 뻗어 보았지만, 이곳일까? 아님, 저곳일까? 나를 막은 무엇인가에 인해 나의 손은 릭에게 닿을 수 없었다. 손을 거둔 나는 그저 가만히 릭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라? 작은 형이 잖아- 거기서 뭐해?”

어째서이지? 저 녀석만 나를 볼 수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릭의 상태가 어떤지 확신이 들었다. 네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일까? 이별의 시간을 주고 떠났어야했나?

“그럼 형은 이곳으로 못와? 뭐, 작은형이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이지만- 저 형씨 저러다 죽을 지도 몰라~”

“그래, 저 꼴을 하고 있어 답답해서라도 나가야겠군.”

“그럴 줄 알았어- 근데, 거기서 나올 수 없나봐? 진작에 저 꼴보고 뛰쳐나오고도 남았을 텐데-”

“문이 열리면 나갈 수 있지 않을 까?”

“뭐? 문이 또 다시 열린다고?”

“문은 더이상 열리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틈이 열리는 걸로 보아선-”

“흠- 그럼 문이 다시 열릴 준비를 하고 있단 뜻이야?”

“글쎄? 이곳은 그저 새하얀 공간뿐이다.”

“하아- 귀찮네, 얼마줄꺼야?”

“네가 죽으면 나오는 일정 금액을 주도록 하지.”

“뭐야- 작은형은 문이 열리더라도 안 나올 생각이야?”

“이곳에 붙잡힌 것인지, 아님 그곳이 날 거부하는 것인지… 이 틈으로 손도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더군.”

“그런거야? 그렇다면 형은 대체 왜 문을 찾은 건데?”

역시 이 녀석의 눈치는 너무나도 빨랐다. 그렇기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아군 중 하나.

“릭 톰슨, 난 단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뿐이다.”

다행이 제 말은 이글의 흥미를 돋게 만든 것 같았다. 가끔 틈을 찾아온 이글은 제 나름대로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였다. 이제 릭이 저 자리에서 일어나, 행해주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릭은 아직 여렸다.

“그치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있지, 무력을 써도 될까?”

“적당히- 내가 지켜보고 있단 걸 잊지말도록.”

“아, 작은형 그리고 이 틈. 여기서만 있는 거 알아?”

“그런거 같더군. 언제나 릭만을 비추고 있어.”

“어쩌면 이거, 이 형씨의 바람이 현실이 된 거 아닐까?”

“웃기지도 않은 군-”

“그냥 가능성이랄까? 그곳에서 나온 여자도 갈망으로 인해 탄생했다며? 그렇다면 공간을 잇는 형씨의 능력과 바람이 그곳에 닿아 만들어진 틈이라면?”

이글의 가능성은 그럴싸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는 손을 뻗을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형 말대로 문이 발버둥을 치고 있더라고…”

“역시 그곳에서 다시 문이 열리고 있나?”

“아니, 아직 문은 열리지는 않지만, 마치 자리를 잡으려는 듯이 어느 장소에 가면 능력자들이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긴다고 하더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 당분간은 그걸 찾아 떠나보려고 해- 심심해도 참아~”

한마디 해주려 했지만, 이글은 눈치를 채고 틈과 멀리 떨어져 손 인사를 가볍게 한 후 떠나갔다. 그리고 이 소음이 오고 가는 와중에도 릭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미동 조차 없었다.

“미안… 하다고 하면 되는건가?”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은 아쉬운 손을 거둔 나는 깊은 잠으로 파고 든 릭을 바라보았다.

“나, 기다렸어? 반가움의 악수라도 할까?”

“농담은 집어 치워라-”

“에이, 반년만 인데 좀 봐줘라~ 그리고 이번엔 꽤 득도 많거든?”

“호오? 어디 들어보지.”

과연 이글의 계획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비록 조금 무식하다면 무식하달까? 하지만, 확실한건, 그래 문은 언젠간 다시 열릴 것이고, 발버둥을 치면 공간이 뒤틀려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이군. 아무래도 이곳에도 능력자와 비슷한 꽃들이 곳곳에 퍼져있으니… 충돌이 일어나는 걸까?

“아, 그리고 우릴 도와준다는 사람도 여러 생겼어-”

“…쓸데 없는 짓을.”

“내일부터 실행할 계획이야. 너무 답답해- 설마, 형 목소리가 안들리는 거 아냐?”

“말하지 않았나? 내 모든 것은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게 평소 행실 좀 바르게 했어야지-”

저 녀석에게 주먹을 날릴 수 없는 현실에 저 녀석은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저 형씨가 움직이지 않은다면… 형은 어쩔 셈이야?”

“릭은 움직일 것이다. 분명히…”

다음날, 이글은 제법 자신다운 방법으로 릭을 끌고 나왔다. 그리고 릭 또한 내 생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글이 모아둔 이들에게 큰 힘을 얻은 듯하였다. 당연한 것 같았다. 그들이 나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한 이유를 듣고 나서 였겠지— 언제나 액자를 놓친 후회 속에서 살았던 릭은 그럼에도 흥미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곤 하였지… 타인의 말 속에서 찾은 자신의 모습은 원동력이 되곤 하니까.

릭은 자신의 마음을 다 잡은 그 날 이후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여행은 목적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고, 릭은 자연스럽게 여행자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낮에는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가, 저녁에는 식당에 가거나 혹은 정보가 많이 모이는 술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정보가 모이면 그 장소로 다음 여행지로 정한 후 떠났다. 능력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가끔은 기차를 타기도 했다. 기차에서 내려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고, 작은 마을에서 잠시 쉬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모습을 전부를 이 작은 틈으로 지켜보았다. 언제나 너는 전쟁이 끝나면 함께 여행하자며, 의지를 다지곤 했었지. 너는 모르겠지만, 우린 지금 함께 여행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릭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햇빛이 강렬한 계절이 지나고 알록달록한 계절도 지나, 새하얀 눈이 내리는 계절이 찾아오고 꽃잎이 떨어지는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릭은 어째서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의지를 다져나갔다.

“포기해라… 릭 톰슨, 네 녀석은 날 찾지말고, 살아가라-”

닿을 일 없는 말을 나는 내뱉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 마음이 불쾌해졌다. 내가 바라는 건…

이게 아닌가?

나는 그 뒤로 틈에서 멀어졌다. 그 근처에서 멀어졌으나, 언제나 늘 그 틈은 나의 곁을 찾아왔다.

아니, 어느순간 내 곁을 떠나갔던 꽃이…

“역시, 네 녀석이 만들어낸건가?”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꽃잎을 살랑살랑 흔들거리던 꽃은 다시 틈을 만들어주었다. 틈은 역시나 릭을 비춰주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릭의 모습. 대단히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것일까? 입가에 소스가 한가득인 것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은 듯한 그 모습이 보기가 좋았지만…

“보기 싫군, 꺼져라.”

그러나, 꽃은 릭처럼 제 말은 듣는 척만 하였다. 내가 닿지 않은 곳에서 틈을 만들었다. 저 꽃에 닿을 수 있다면, 짓밟아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 꽃조차도 나는 닿을 수 없었다. 닮은 것 둘, 전부를 애써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록 내 마음이 편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틈으로 릭의 여행을 다시 바라보았다.

릭의 여행길은 언제나 늘 비슷하지만, 하루하루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결국 릭의 여행길은 나를 찾는 여행이었다. 가끔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이면, 이쯤되면 지친걸까? 역시 포기하지 않을 까? 라고 생각했지만, 릭은 오히려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군, 나는 언제부터 릭에게 일생의 일부가 아닌 전체가 된 것일까? 아니, 전체라해도 그에겐 자신보다 아래에 있겠지만—

그렇다면, 난 릭을 말리고 싶었다. 그가 날 찾는다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이곳에 릭이 오기 전, 릭에게 사실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닿을 수 없은 현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릭이 오기만을 기다려야하는 건가?”

그렇군, 내 불편한 이 마음은 이것이였다. 어째서, 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나는 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인정했다. 그리고 나는 그저 저 틈 너머의 릭의 여행길을 바라만 보았다.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릭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두눈을 반짝였다. 희망을 품은 것일까?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제법 보기 좋았다. 가볍게 여는 공간의 반짝임 또한 릭의 눈동자를 닮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저곳으로 갈 수 있을 까? 싶어 나는 다시한번 손을 뻗어보았지만, 여전히 소용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틈이 더 커진거지?”

꽃이 힘을 키운 것일까? 전과 달리 틈은 조금 커져있었다. 신기했다. 저곳에 있는 릭도 성장을 하였고, 이곳에 있는 릭과 닮은 꽃 또한 성장했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저 가만히 릭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나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하지 않은 가? 그 많던 꽃 중에서 또 다른 공간을 이을 수 있는 꽃도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시도는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한 나는 또 다른 꽃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고, 다시 한 번 발걸음을 새하얀 공간으로 옮겼다. 꽃은 당황한 듯, 틈을 제빠르게 닫더니 제 곁을 정신없이 맴돌기 시작했다.

“네겐 미안하지만, 난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벨져- 그대에겐 조금 휴식이 필요해보여- 잠시 쉬었다 가시오.’

문득 릭의 옛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이건 꽃이 주는 목소리일까? 그게 아니면, 과거의 머물고 있는 내 마음이 가져온 릭의 목소리일까? 하지만 들려오는 릭의 목소리에 나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걷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어떠한 득 또한 없을 것이 뻔하였다.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는 건 역시 싫었다.

‘고집 그만 피우시오. 다쳤잖소? 조금 쉬어-’

“너야말로 고집 그만 피워라.”

나는 옛 릭의 목소리에 대답해주었다. 돌아오는 말은 없을 테지만—

“벨져, 그대는 다 좋은데- 제발 그 고집 좀 꺾어보시오.”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그 연합의 영웅에게 졌으면서-”

“그게 뭐 어쨌단 거지? 다 지난 오랜 일은 신경 안쓴다.”

“그대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도 어찌보면 다 지난 일이잖소.”

“그러니까, 네 말은 쉬고 있어라? 그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소.”

이 말을 끝으로 릭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이건 환청일까? 아니면…

“네 녀석인가?”

제 앞에 놓인 꽃 한 송이의 목소리 일까?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꽃이 펼친 틈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어울려주면 그래, 곧 끝나겠지… 틈 너머의 릭은 여전히 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릭의 모습이 조금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릭은…

“…이제 12살 차이?”

어리석게도 또 다시 나이차이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괜한 걱정하지마라 릭 톰슨. 넌 그저 나의 연인임에 감사함만 갖도록."

—이라고 예전에 내가 말해줬던 것 같았다. 비록 닿지 않겠지만, 그냥 답답해 다시한번 말했다. 그리고, 릭은 또 이상한 추억 속에 잠겨있었다. 내가 고양이 같다는 둥, 복실복실한 털 동물을 싫어한다는 둥.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내가 고양이 같단 말은 기분이 나빠,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릭은 또 다시 말을 걸어왔다.

“벨져- 나 결심했소. 이번을 마지막으로 이 여행을 끝낼 생각이야…"

릭의 다짐을 듣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이 욱씬 거렸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 릭 톰슨, 네가 오는 것을 멈추겠다면, 난 네 걸음을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난 내가 싫다해도 보여지는 네 평범한 일상을 지겹게도 보게 되겠군. 그래, 보여줘- 네가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일상을..."

여전히 닿지 않겠지만, 난 어쩐지 기분이 편해졌다. 꽃의 틈사이로 손을 올려보았다. 그런데 예측과 달리 나의 손을 이곳을 너머 저곳 어딘가에 닿았다. 깜짝 놀란 난 손을 황급히 거두었다.

"대체 무슨 일이?"

분명 순간의 빛이 일렁거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비록 손 뿐이였지만, 나는 잠시 이곳을 벗어났다. 가능성이 보여 나는 꽃이 피워낸 틈을 확인해보았지만, 틈은 닫혀있었고, 꽃 또한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제 눈 앞에는 어느새…

릭 톰슨이 찾아왔다.


한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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