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다무자넷]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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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처럼 저들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날이 오지 않을까?

-자네트 플레이버 텍스트 中-


사람들의 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워나갔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라고 생각이 드는 그런 날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능력자들 간의 사소한 파벌 싸움이 크게 번진 탓에 영국 전체 분위기가 꽤 살벌했지만, 회사와 연합의 동맹으로 빠르게 사건은 종결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은 흘러만 갔다.

능력자들이란 사소한 언쟁으로 시작된 싸움이 큰 전쟁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존재들이었기에 비능력자들도, 사이퍼들도 서로 공존하는 법을 배워가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곧 생존하는 것이고, 사소한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은 곧 인류의 멸망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하루를 보내 가는 것이다.


대게 회사에서는 능력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을 정리하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들에게 코드명을 붙이는 일들을 진행해왔다. 얼핏 보면 사소한 일 같아 보이지만, 회사에서 흘러가는 일들은 그들의 규율 안에서 철저하게 일이 처리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개인의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있었다. 회사에 소속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고, 모두가 그런 분위기에 동의하는 듯했다.

헬리오스 회사의 분위기는 제법 평화로운 편이었다. 이따금 다리오의 사무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한 번씩 크게 들려오기도 했고, 그걸 못마땅해 하는 타라의 잔소리가 몇 번 들려오기도 했다. 가끔 건물 뒤편에서 회사의 아이들이 능력으로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회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것이 전부였다. 평화롭다 못해 조용한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다이무스는 꽤 바쁜 모양이다. 최근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사람들은 자선단체, 혹은 홀든가의 거래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무실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다이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인기척을 내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와 거래를 하기 위한 자선단체였다. 다이무스는 서류를 검토하며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거래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하는 것, 잊지 마십시오.”

“그럼요. 저희도 믿고 하겠습니다요.”

눈앞에 거래하는 사람 외에도 꽤 많은 사람이 방문해갔다. 그 숫자를 세어보라고 하면 엄두도 안 날 만큼 수많은 사람이 지나갔다. 이런저런 일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꽤 정신없을 법도 했지만, 늘 그렇듯 흐트러짐 하나 없이 모든 일을 해결해나가는 그였다.

‘흠…. 귀찮게 됐군.’

거래를 끝내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서류가 한가득하다. 다이무스는 책상에 널린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거래인들이 남기고 간 서류를 보며 신중하고 정확하게 결재를 확인하며 업무를 이어갔다. 그의 개인 사무실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오늘 내로 마감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다.


한참 서류와 씨름을 하며 일을 마무리 짓고 있던 다이무스였다. 좀 전만 해도 산더미였던 서류는 이제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조금 전만 해도 과부하로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던 것이 서서히 나아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바쁜 시간을 벗어나 이제 여유를 찾고 잠시 쉬기로 한 그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두 번 정도 울렸다. 다이무스는 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는 문을 향해 들어오라는 말로 인기척을 내었다. 잠깐의 정적이 일더니 천천히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홀든 경, 오늘은 바쁘십니까.”

“아, 크리스티네. 아니다. 지금은 괜찮다.”

좀 전만 해도 굳은 표정이었던 다이무스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자네트는 고개를 가볍게 꾸벅여 그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이무스의 사무실은 언제나 깔끔한 모습이었다. 책꽂이에는 순서대로 서류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짙은 와인 빛을 지닌 암막이 사무실을 조금 더 고품격 있는 곳처럼 보이게 해놓는 것 같았다. 그의 사무실에는 특유의 우디향이 은은하게 퍼져있었는데, 그에게 제법 어울리는 향이었다.

“잠시만 앉아 있어 주겠나.”

다이무스는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홀든 경.”

자네트는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고는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녀의 배려에 다이무스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마저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은 곳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간만에 가지는 휴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다이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같은 회사에 있는데도, 꽤 오랜만인 것 같군.”

“회사에선 늘 바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죠.”

그는 그녀와 같은 소속인 헬리오스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바쁘게 지내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트 역시 그동안 바쁘게 임무를 수행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내 임무도 있었지만, 황실의 임무도 다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희박한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로의 근황을 물어가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시간에 쫓기는 일도 없었기에 이야기는 꽤 오래 이어져가고 있었다. 자네트는 창문너머로 보이는 노을을 바라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이무스는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더니 눈치를 챈 듯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그나저나 크리스.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군.”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말에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주말이라…. 괜찮다.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이무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의 의미였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서로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렵게나마 시간을 내어 서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정했고, 주말에 런던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른 용건은 있나?”

“없습니다. 저는 다른 일도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주말에 뵙죠.”

그녀의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이무스는 사무실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자네트는 그의 배려에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이무스는 그제야 자신의 사무실 문을 굳게 닫았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약속한 주말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와 약속한 런던 광장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시계탑을 주시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까진 여유가 있었지만 한 시라도 그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도 적잖게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무스의 시야에서 자네트가 오는 것을 보았다.

“먼저 나와 계셨군요. 홀든 경,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다. 나도 이제 막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두 사람은 만나고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회사가 아닌 사적으로 만난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회사에서 만날 때마다 갖고 있던 무게감을 덜어내고 만나는 감정은 꼭 과거, 어린 시절에 만나던 감정과 흡사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갈 곳을 고민하다가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다이무스는 시계탑을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광장을 걸으며 근처 카페로 향해갔다. 광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집에만 있기 답답했는지 다들 바깥으로 나온 모양이다. 아이들의 소리와 마차의 소리, 길거리 공연을 하는 무리의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다이무스와 자네트 두 사람 역시 그런 분위기가 제법 괜찮은 모양이다.

“이 시간에 광장은 오랜만이네요.”

“우리 둘 다 워낙 바빴으니. 이 정도 여유조차 즐길 틈도 없었지.”

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짤랑-’, 카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카페에서 날법한 커피 향과 다양한 차들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두 사람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홍차 두 잔을 주문하고는 발걸음을 더 안으로 옮겨 테라스에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과 그 풍경 안에 녹아든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도 사람들로 북적이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다이무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말을 맞이해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제각기 달랐다. 오늘 신문에 실린 메인 기사부터 가십거리를 포함한 다양한 수다들이 대부분이지만, 한 편에는 주말인데도 여전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다이무스는 문득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말없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계속 쳐다보시는 겁니까?”

“사람들의 일상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가 낯선 것뿐이다.”

“충분히 이해 갑니다.”

자네트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서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카페 점원이 걸어왔고, 두 사람이 주문했던 차를 테이블에 놓고는 점원은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테이블에 놓인 홍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잔에 담긴 홍차의 온기가 손으로 전해지는 기분이다. 두 사람은 각자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홍차를 즐기시는 건 변함없군요.”

“특유의 향이 좋기 때문이지. 너도 그렇지 않나.”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트에게 대답을 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차들보다 유독 홍차를 즐기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생각해보니, 시간이 지나며 변해버린 것들도 많았고, 여전히 그대로인 것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참, 홀든 경. 전부터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뭔가, 크리스.”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도중 자네트는 무언가가 떠오른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이무스는 그녀의 질문을 기다리는 듯 특유의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글을 쓰고 계십니까?”

다이무스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글은 쓰고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군요.”

다이무스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고는 테라스 밖의 세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회의와 회상이 함께 묻어나오는 눈빛이었다. 어린 시절, 과거의 다이무스는 글 쓰는 것을 제법 좋아했다. 문학적인 감각도, 어휘력에 대한 재능도 남달랐다. 집안에서 누가 가르쳐준 적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었다.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의 문학적인 감각은 철저하게 짓밟힐 수밖에 없었지만, 자네트가 그의 문학을 가장 좋아했었다.

“조만간 네게 보여줄 날이 왔으면 좋겠군.”

다이무스는 테라스 밖을 바라보다가 자네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그녀가 자신의 문학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모와 형제 모두 자신의 감성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철저하게 외면했을 때 언제나 자신의 글을 읽어주던 사람이 그녀였다. 시, 수필, 소설 등 문학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그의 글은 감성이 풍부해서 좋다고 자네트가 늘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날을 기다려야겠군요.”

자네트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다이무스에게 대답했다.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글이 세상에, 그리고 자신에게 들려오기를 기대하며 테이블의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의 음악이 잔잔하고 조용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오고 나서도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가까운 거리를 둘러보기도 하고, 그 거리에서 공연을 보기도 했다. 이것저것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하루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길을 걷다 공원을 발견했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어가기로 했다. 어느덧 노을이 길게 진 저녁 하늘이 보였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법한 풍경이지만 황혼이 짙게 깔린 저녁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뒤섞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군.’

다이무스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인가 바쁘다는 이유로, 가문이라는 책임감 아래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바라본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홀든 경, 근심이라도 있는 겁니까?”

다이무스의 표정을 바라보던 자네트는 그를 보며 물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노을이 아름다워서 바라본 것뿐이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한 동안 말없이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붉고 푸른색이 오묘하게 섞인 하늘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 거리의 사람들이 다니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부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마차 특유의 수레바퀴 소리도 줄어들어 갔다. 아마 다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인 듯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듣고보니 그렇군. 언제나,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왔으니.”

다이무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을을 바라보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분명 다이무스 그에게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도 어린 시절은 존재했다. 다이무스는 어린 시절에 하늘을 바라보며 느낀 것과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의 하늘은 같은 하늘인데도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책임감을 짊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꿈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게 되더군.”

“….”

다이무스는 어렵게 말을 꺼내놓았다. 자네트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눈빛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는 가문의 책임감과 그에 비롯된 무게감을 늘 짊어지고 왔다. 같은 가문은 아니었지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자네트도 그 무게를 지레짐작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와 같은 처지였기에 조금이나마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 아버지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쫓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본래의 가문을 숨기고 저 자신의 이름까지 숨기면서 여기까지 왔기에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 네게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좀 전만 해도 없던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네트는 그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는 날이 오면….”

“….”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자네트는 질문을 듣고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그 답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언젠가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수도 있고, 여느 전쟁과 다를 것 없이 누군가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네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수년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깊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흠, 그렇군.”

다이무스는 그녀의 대답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질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녀에게 한 질문에 은근한 죄책감을 가진 듯해 보였다. 다이무스는 화제를 돌려보기 위해 다른 이야깃거리를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화제는 없었다. 복잡한 심경에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홀든 경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네트는 그에게 역으로 되물었다. 다이무스는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기 위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무거워진 마음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가 온다면….”

“….”

자네트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이무스는 한 번 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대답을 이어갔다.

“지금의 관계가 아닌, 홀든가와 프리츠가의 검사로 마주했으면 좋겠군.”

“역시 홀든 경 다우신 대답이군요.”

자네트는 그의 대답을 지레짐작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 다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다이무스의 생각을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다이무스는 그녀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으며, 사소한 감정으로 오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네트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어느덧 붉은 노을이 멀어지고 점점 짙고 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 것에 오늘의 아쉬움을 느낄 법도 했지만 두 사람은 다음 약속을 기약하기로 했다.

“즐거웠습니다, 홀든 경.”

“나 역시 즐거웠다, 크리스.”

두 사람은 각자의 인사를 끝으로 서로 가야 할 길을 향해 걸어갔다. 하늘엔 밤하늘의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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