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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Vernal Pool by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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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 들판, 산들은 인간 앞에 완전하게 현존했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 현존성 안에서 계속 머무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들이 겨울을 향해서 미끄러질 때에도 그것들을 기억해줄 인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그것들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그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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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망치는 것도 전진의 일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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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조리해요, 선생님. 꽃은 열두 달 중에서 한 달도 살지 못하잖아요. 그것들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예측하겠죠? 질 걸 알면서도 원치 않게 자라고 말겠죠? 그러면 우리가 그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이에요? 살면서 찰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모르는 사람의 손에 잘리거나 말라비틀어지는 게 전부잖아요. 지금 화병에 들어찬 시신들처럼요. 그거 아세요? 원래 병문안 선물로 꽃은 피하는 게 좋대요. 쉽게 조각나니까요. 선명한 색이 사람의 파편과 닮았으니까요. 결국 먼저 쓰러지고 마니까요.

선생님. 저는 아직 이 세상과 달의 거리도 제대로 잴 줄 몰라요.

선생님. 남이 꺾어버린 시신도 거름이 될 수 있을까요?

선생님, 선생님…… 사람은 태어나는 계절에 따라 삶의 척도가 결정된대요. 그럼 설원이나 사막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떡하죠. 저는 봄에 태어났는데도 들판을 볼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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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껏 치밀었던 감정이 녹아 가슴 안으로 고인다. 맥동과 유동이 얽혀 비슷한 소리를 낸다. 비슷한 속도로, 흘러내리고 있다. 호흡보다 느리게. 잠깐 눈을 감으면 그대로 끝날 것만 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던 발을 다시 되돌린다. 몰려오던 생각들을 끊어내자 침묵이 빈 자리를 대신한다. 등을 할퀴던 햇빛은 잔열만을 남기고 구름 뒤로 물러난다. 웅성거림. 불규칙한. 목소리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흘러가기만 했다.

그 중심에 네가 있다. 너의 말들이 귓가를 떠나질 않아서.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대서. 정말로, 일말의 긍정이나 감정도 없어서. 오히려 더 질긴 덫이 되어 발목을 붙들어 맨다. 사냥도 그렇지 않던가. 틀린 방향에서 짐승이 걸어오거나, 빗겨 쏜 탄에 죽는 사람이 더 많듯 한 번 뚫린 구멍은 갈라질 일만 남았고. 박힌 단어가 이따금 속을 찌른다. 내면이라는 것은 참 비효율적이라, 육체만큼 쉽게 재생되지 않는다. 파편을 밀어내는 힘도 없고 더 단단히 아물 줄도 모른다. 비슷한 말이 건드리기만 해도 다시 피를 쏟는다. 막연함과 나약함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하다 만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희망에 대해서였지. 참 듣기 좋은 말이지, 희망. 어떤 일을 이루기를 바라거나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 반대로는 절망. 끊어버린 가능성의 잔해. 모든 것은 가능성이라는 형태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그럴듯한 것들을 전부 통용하는 단어. 채 오솔길이 되지 못한 길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원망할 수 없는 거짓 진리. 그런데도 인간에게 필요한 어떤 신앙. 처음부터 일부였다는 것처럼 스며들고, 배회하며, 사실 맞지 않는 피라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물들어 있는 독. 방어기제는 문드러져 그만두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어쩌면…… 조금만 더…… 따위가 입에 맴돌아도 혀 끝에 닿는 것은 쓰린 모래 뿐. 그것은 희망이 욕심과 동일한 결을 달리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는 행위가, 작은 성취들이, 계속해서 다음을 바라게 만든다. 꿈은 꿈일 뿐인데.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전제 조건 중 하나가 '세계에 영향을 끼치려는 욕망'이라고 하던가. 그것이 무슨 재난을 불러올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따진다면, 잔존은 절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쌓인 추억들로 도식을 만들고 가장 비슷한 틀에 꿰맞춘다. 저 사람은 이렇게 다가왔으니 이런 말을 건네자. 가장 보편적으로 좋아하던 행동을 해주자. 적절히 의견을 내고, 줄 수 있는 것들을 내어주다, 마침내 당신이 충만해질 때쯤…… 나를 두고 간다. 당연한 흐름이라 손조차 흔들지 않는다. 머무를 거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본래 삶은 전진하는 거니까. 원한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으니까. 

대개, 우리들은 만족할 수 없는 부류다. 성향에 따라서 분류되기는 해도 기본적인 짜임은 같다. 같은 이야기의 같은 주인공들. 죽지 못하는 영혼. 한계가 없다는 것. 달리 말하면, 밑 빠진 독. 벽이 있어야 균형도 있다. 하다못해 신도 죽는 존재인데. 가장 무른 정신조차 문드러질 수 없는 우리는, 나는, 어느 축에 서 있는 건지.

언젠가 남겨두고 가는 연습을 내게 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왜냐고 묻는 너에게 답하지 않았고 그건 최초의 회피였다. 왜 하필 너였냐고 묻는다면, 알 수 없다. 충동이었나? 무의식적으로 예감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너는 때때로 예측의 궤도를 크게 벗어났고, 어쩌다 보니, 친구라는 명칭으로 첫 매듭을 엮었고, 가장 처음의 낭만이 되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이 이어지다 못해 나는 이제……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 두렵다. 백 년조차 아득해 짐작조차 못하는 네가, 당신이, 저 사람이 내뱉는 말이 꾀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냥 한 번 내던지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내뱉을 답은 간단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질려하던 불멸과 필멸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네 말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해. 결국 잊어버릴 거잖아. 내게 어쩔 수 없음을 상기시킬 거잖아. 외치기만 하면 지난한 굴레는 끊긴다.

영원히 현재에 머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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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다음에 눈을 뜨면 밭지기가 되고 싶어요. 열매가 자라는 걸 보고 싶어요. 꽃의 결실이 열매라면서요. 저는 아직도 못 믿겠으니 믿음을 가지고 싶어요. 어떤 경계선에서는요, 눈 덮인 산 아래에 흐드러진 야생화와 따뜻한 연못이 같이 있다던데요. 해 지는 하늘처럼 검거나 보랏빛을 띠는 꽃이 가득하대요. 그런 곳에는 백 년,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과실이 있대요. 먹으면 평생 아름답거나, 영원히 살거나,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거나…… 그런 말들이 있어요. 꽃이 천 년을 살 수 있다면 인간은 만 년을 견딜지도 모르죠. 어쩌면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몰라요. 같은 곳을 찾아왔으니 닮은 점도 있겠죠. 우리는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거고, 분명 그게 봄이라고 불리는 행위일 거예요.

눈을 뜰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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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에는 자성이 있다고 했다.

피하려 할수록 실현에 가속이 붙는다는 말이다. 

일순간, 아뜩해져 입을 열다 말고 눈을 감는다. 그 탓에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미미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싶은 것을 참는다. 숨을 한 번 뱉고, 천천히 시야를 연다.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꼭 손을 뻗듯이 읊조린다.

앞으로도?

헛숨을 뱉는다. 네가 꺼리던, 얼굴만 바뀌며 반복되는 것 중 하나. ―앞으로도 널 잊지 못할 것 같아. 답을 구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말. 천 년 하고도 절반이 더 흐른 시간 동안, 셈하기도 포기한 꿈. 그 많은 밀레시안도 모두 나를 떠나고 잊었는데, 단순히 같은 사건에 휘말린 네가 기억해 줄 리가 없다. 처음에 말했던, 그저 밀레시안 중의 하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있는 줄도 모르는 어떤 공백으로 화할 것이다.

이 희망은 나를 또 죽일 것이다.

겨우 떠오른 예상이 슬퍼서 조금 웃는다.

"정말 새삼스럽네. 너무 새삼스러워서, 원래는 어땠는지 떠오르지 않을 뻔했어."

손가락을 한 번 튕기고,

"하나, 나도 이야기해 볼까… 그런 말이 있던데. 이 손짓 한 번에 64번 정도의 찰나가 지나간다고. 찰나마다 모든 것이 생기고 멸하기를 반복한다고 하지."

말을 이어갈수록 불안이 발치를 맴돈다.

"어쩌면 영원의 찰나가 아니라 찰나의 영원일 수도 있겠어. 너와 나는."

그럼에도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끊임없이.

"그러니…… 기억해줘, 아론. 내가 너를 잊어본 적 없듯이."

어쩌면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앞으로도. 분명히."

잡아줄 손이 있으니까,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 엉터리 같은 가능성을 떠올린다. 이미 끊어진 길목을 향해 고개를 든다. 

어떻게든 떠밀려야 한다면 차라리 낭떠러지가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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