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밟기

마비노기 기반

Vernal Pool by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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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망치는 이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로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매년年마다 수백 일日. 그 속의 수천 시간. 끝없이 쪼개지는 분과 초. 연속된 도망의 굴레는 어디까지 가 닿을까요. 비어버린 들판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구별의 법은 지어냈지만, 한때의 터를 부를 이름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항상 공백을 지어냈습니다. 틈 생기면 무너질 주제에. 백지를 그리워했고. 처음부터 천체의 결함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곧 소멸할 별이 가장 빛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저 외로웠을 뿐이라- 그래요 너무도 외로워 같이 무너질 이들을 찾았고 마침 떨어진 꽃잎 한 장이 거기에 있었고 불현듯 화마가 번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운 좋게 결이 같았을 뿐인데도 자꾸만 의미를 만들려 했습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이었을까요? 눈두덩은 마르지 않는데, 무엇보다 환한 척,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잿빛 터 엉킨 굴레 햇살의 늪

저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 


저기 아직도 꽃을 사랑해? 

네 병실에 최초로 머물렀던 꽃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아?

πρασιά

*

그때라는 건 언제의 현재지? 

실수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다. 

두번째, 숨을 멈추자 바람도 멎는다. 

허공에 맴도는 마나를 가늠한다. 고요해진 상황이 마냥 우연이라 볼 순 없다고 의심한다. 답지 않은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바람은 불지 않는다. 말들 사이로 지나가지도 않고, 버려진 단어들이 사라질 조짐조차 없다. 모든 것이 고정되었다. 발치에, 너와 나의 사이에, 그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공간으로 따지자면 갈비뼈 바로 아래, 내장이 들어차는 요충지에 선 기분이다. 사방이 뚫린 집결지. 다른 날이 들어찰 가능성은 외부의 침략뿐인 곳. 그러니 이 정적 속에서, 바람이라는 뼈를 핑계로 "미안해. 안 들렸어. 방금 뭐라고 했더라?" 같은 회피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마주 보고 있으며 너의 말이라는 칼은 수월하게 침범한다. 잡아 줄게. 속절없이. 등 뒤에 서린 석양빛이 뜨겁다. 역광에 늘어진 그림자가 그의 다리를 뒤덮고 있다. 쏟아진 피처럼.

―잡혔다!

섬뜩함이 눈앞을 덮친다. 

실수했어.  

네번째, '또'라고 중얼거린다.

 

또 미래의 이야기를 했다. 그전에는 잠깐 생각했을 뿐이라고, 한 차례 벽이라도 세웠다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 과거와 현재 중 어디에 서 있냐는 논의에 너무 빠졌던가? 불찰의 시초를 되짚는다. 그때 가서… 보다도 더 먼 과거에. 선언? 아니. 추억? 애매해. 대체 어디서부터…… 장면들을 헤집을수록 확신이 줄어든다. 결국 '비슷하지만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의 집단이 모인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거지. 어쩌면 불쾌감을 느꼈을 때 물러나는 게 옳았을지도 몰라. 한데 이제 와서 생각해도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우리는 현재를 사는데. 

꾸준한 건드림이 결국 성공했음을 칭찬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선뜻 말하지 않은 건 감정이 먼저 치민 탓이다. -네가 내게 친구로서 바란 것은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을 터다. 좋은 정보 값이 되지도 않고,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을 안부 같은 것들. 그렇다면 이건? 호기심의 연장선? 파악을 위한 파괴? 아니면 이것조차 아무래도 좋을 일이니까? 여전히 내가 과거의 유령 같으니, 살아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단순한 착각 때문에? 바라는 게 없다면서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거절하면서, 존중한다고 말한다. 너를 예감할 수 없다. 한 번 휘청이면 두려움을 알게 되지. 불확실의 파도 앞에서도 즐겁지 않아. 못 박힐 수밖에 없다면 인정해야 한다고…… 마음을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말에 휘둘려서 여지를 남기고, 돌아온 대답에 흔들린다. 지금껏 들어온 확신 중 제일 참혹하리만치 무신경한데도. 

무감無感과 무참無慘은 얼마나 비슷한지. 

너는 저 말을 지킬 것이다. 

잡아 줄게, 그 때에.

"확신에 유예를 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변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달램인 건지." 

네가 또 네 감정에 휩쓸려서,

"확실한 건, 두 개는 이미 저질렀다는 거야." 그림자가 차차 길어지고 있다. 

선언을 낭비하고

"남은 예언은 하나 뿐이네. 아론." 

 희망에 사로잡힌다 해도. 

불현듯 네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

자, 다시 술래는 너야 언제나처럼 

쫓지는 않아도 돼 어차피 남겨질 건 

너뿐이니까 

그런데 꽤 희미해지지 않았어?

그림자 말이야 

꼭 시간이 흐른 것처럼

설마, 움직인 건 아니지?

여전히 열을 세는 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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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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