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던밀레/톨비밀레] 별을 비추는 것(下)
2021.12월 연성/밀레시안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된 아이던, 그 기억에서 만난 이는...
-날조 많으니 주의
- 여 밀레 설정, 아이던밀레/톨비밀레 요소가 있습니다
- 메인스트림 G25 배경으로, [고귀한 의지~가장 빛나는 별] 퀘스트의 사이 정도의 시간선.
- 글 자체가 G25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 밤이 끝난 이후 깨어나지 않는 밀레시안과, 그 밀레시안의 행적을 찾아 나서는 아이던의 이야기. 그 끝에서 본 것은...
- 공식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에 대한 날조와 메모리얼 아이템에 대한 적당한 날조가 있습니다.
얼마나 꼭 쥐고 있었는지 손에 든 십자가가 따뜻하다. 또 며칠인가를 하릴없이 기다리다 이제 막 스튜어트에게서 와달라는 호출을 받고 하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달려온 터였다. 그에게서 전달받은 것을 손에 들고 나서도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아 내내 쥐고만 있던지라, 분명 이대로 손을 펴면 자국이 손금처럼 아로새겨져 있을 터였다.
"생각보다 잘 되어서요. 바로 쓰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아이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른 생각은 그만두기로 한다. 자신이 만든 것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스튜어트는 이내 손을 모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티르 코네일의 라사 선생님께도 도움을 받아서, 마나를 다루기 어려운 사람도 쓸 수 있게 필요한 조치는 해 놓았어요. 그래도 그리 긴 시간 동안 기억을 보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스튜어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근위대장님께선 강한 분이시니 별 탈은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해서 제가 곁에서 지켜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미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다만 이걸 통해 어떤 기억을 보시든,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던 그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내더니 손을 저어 보였다.
"제가 뭘 봤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어떤 기억이 담겨있을지는 알 수 없으니 주의하시라는 뜻일 뿐이니까요."
아마도 어렴풋이 눈치챘을까, 지금의 그가 어떤 심경인지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미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물건에 정신을 집중하시면 됩니다. 보고 싶은 걸 생각하면서요."
밀레시안의 기억을 볼 생각을 하다니, 전에는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늘상 밀레시안의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이렇게 직접 찾아 나설 생각을 한 것도 그로선 놀랄만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근위대 일에 영주 대리일까지 하느라 바쁜 자신을 위해 늘 먼저 찾아오는 쪽은 밀레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제 일이 바쁘다 해도 어째서 한 번도 먼저 들여다볼 생각을 못 한걸까. 아니면 그럴 용기가 없었을까. 그런 주제에 밀레시안이 몇 날이고 보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며 불안해졌노라고 인정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이 감정을 숨겨왔는지. 그러니 더 후회하기 전에 그는 수줍게 손을 내밀어 본다.
'잘 부탁한다.'
십자가에 작은 인사를 건네본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낯선 기운이 몸을 감싸며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약간 괜찮을까 걱정이 스치기도 했지만 곁엔 스튜어트도 있으니. 불안을 내려놓고 더더욱 집중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잃어버린 것을, 꼭 찾아야 하는 이를 안아주러 가기 위해서.
'여긴 어디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느낌이 든다. 약한 현기증이 가시면서 천천히 초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몇 번 젓던 아이던은 눈앞의 낯선 광경에 잠시 다른 생각을 잊은 채 눈을 깜빡였다.
환하게 하늘로 퍼지려던 눈길을 잡은 것은 커다란 [폐허]였다. 마치 이 공간만이 모든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듯한 이질감과 함께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그를 덮치듯 감싸왔다. 에린에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잔해마저 여전한 위용을 과시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자신을 짓누르듯 알 수 없는 묵직한 힘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너무도 고요해서 불어오는 바람에 작은 돌조각 따위가 사르륵 쓸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은 커녕 작은 동물의 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한 것이 을씨년스러울 법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성스럽다.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더 안쪽으로 향했다. 분명 현실의 자신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도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워하던 그는 곧 그가 찾던 이를 발견하고 만다. 커다란 무언가――마치 거대한 관처럼 보이는――에 기대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밀레시안의 모습이었다.
'밀레시안 씨..!'
반가움에 목이 메기라도 했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자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다급히 손을 뻗으려던 그는 이내 다른 이의 기척을 감지하고 우뚝 멈춰 섰다.
"설마, 주무시나요?"
웃음기가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옮기니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하얗고 커다란 한 쌍의 날개와 날카로운 기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움. 한눈에 보기에도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자태는 마치 그 자체가 거대한 검과 같은 형상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엄청난 위압감을 몸에 두르고 있지만, 밀레시안에게 시선을 맞추는 눈길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톨비쉬."
이름을 불린 게 반가운 모양인지, 그 역시 만족스러운 듯 해사한 얼굴로 다정하게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른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주무시면 곤란합니다."
"....자려는 거 아니에요. 성소잖아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다. 말꼬리마저 흐려지며 웅얼거리는 것이, 그가 오지 않았으면 그대로 자 버렸을 터였다.
"많이 지치신 모양이군요."
다시 눈을 스르륵 감는 밀레시안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분명 밀레시안은 잠이 필요 없는 존재인데도. 저렇게 힘겨워하는 모습은 아이던 역시 처음 보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밀레시안의 기억을 보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조금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실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거긴..어딘데요?...그런 곳이 있어요?"
"당신과 제가 만났던 시간의 틈새와 비슷한 공간...이라고 해 둘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돌아오셔도 에린에선 며칠 지난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듯 밀레시안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안심시키는 미소를 짓는 톨비쉬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잠시만 쉬다 올게요. 부탁해요."
"네."
그가 긴 손가락을 뻗자 신성한 기운과 함께 밀레시안의 몸이 환하게 빛났다. 분명 그는 밀레시안을 해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밀레시안이 사라진다는 불안감 탓인지 저도 모르게 뻗으려던 아이던의 손이 공허하게 허공만을 긁어내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의 자신은 영혼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부디, 편하게 쉬시길."
밀레시안의 모습은 어느새 여러 덩이의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꽃씨처럼 공중에서 흩어지는 빛무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
"...................."
놀랍게도 그의 시선은 저를 향하고 있었다.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분명히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아니,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의 저는 그저 밀레시안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니. 그런데 어째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저를, 과거의 사람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이 혼란조차도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살포시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왜 내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냐 묻고 싶으시겠죠."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안심시키듯 웃고 있지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다.
"내가 다른 시간대의 존재와 교감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물론 나라고 언제나 시간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톨비쉬는 잠시 내리깔았던 눈을 뜨고 조용히 눈높이를 맞춰 온다. 하늘을 닮은 맑은 눈동자가 다시 그를 주시한다.
"......나는 절대신 아튼 시미니 님께서 직접 빚어내신 존재. 주신의 첫 번째 검이자, 에린의 질서와 균형을 지켜 온 수호자입니다."
수호자, 아이던은 저도 모르게 그 세 글자를 속으로 곱씹어 본다. 그에겐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어쩌면 그건 밀레시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에린의 수호자. 다만 그게 밀레시안 뿐만이 아니었던 거겠지만.
"어쩌면 한 번쯤은 스쳤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직접 당신 앞에 나타난 적은 없지만, 당신은 간혹 이멘 마하 주점 뒷골목에 모이는 수상한 자들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시지 않았을까요."
무슨 뜻일까? 아이던은 되묻고 싶어졌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모르는 사이 이 톨비쉬라는 자, 아니 신과도 인연이 닿았던 걸까. 어쩌면 이미 밀레시안이라는 존재로 인해 이어져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냥 반가워할 수도 그렇다고 경계를 할 수도 없다. 그걸 아는지, 톨비쉬는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밀레시안 씨는...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 있습니다. 동화책 속에 나오는 다른 세계, 정도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우시겠죠."
다난들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전쟁을 치르느라 많이 지쳤을 겁니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태도로 괜찮다 말하던 밀레시안을 떠올리며 아이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럴듯한 위로조차 건네지도 못하던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식만이 잠들어 있는 것이니 곧 깨어날 겁니다."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던 톨비쉬는 이윽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돌아가서, 며칠 후에 깨어날 밀레시안을 반갑게 맞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항상 밀레시안의 곁에 있을 수 없으니..."
아이던이 고개를 들자, 이만 돌아가라는 듯 톨비쉬가 손을 뻗는다. 살짝 밀어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서서히 주변이 아지랑이가 피듯 일렁이더니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다시 약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아, 이제 이 기억을 보는 건 끝일까. 억지로 꿈에서 깨어나듯, 눈에 담고 있던 광경이 흩어진다.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는 아이던의 귓가에 조용히 뭔가를 억누르는 목소리가 울리다가 사라져 갔다.
"....어차피 ....지막...........함께...........나니까........"
"....님, ....대장....님.."
".............."
"...근위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또렷해져온다. 정신을 차리자, 아이던은 여전히 던바튼 마법학교 안 스튜어트의 방에 서 있었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의 스튜어트가 다가와 다시 그를 부르고 나서야 아이던은 남은 현기증을 털어내고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마지막에 꽤나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길래.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닐까 했어요. 강하신 분이라 잘 버티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요."
안도하는 스튜어트를 따라 아이던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십자가를 거세게 쥐고 있던 터라 손은 온통 땀에 젖어있었다. 억지로 꿈에서 깨워 현실로 내몰린듯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가 기억에서 본 것만은 확실하게 머리에 남아있었다.
"혹시 제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진 않았습니까?"
"아니요. 조용히 기억을 보고 계신 듯했어요. 아마 직접 몸을 움직이시진 못했을 테니까요. 다만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괴로워 보이시긴 했지만...혹시 안 좋은 것이라도 보신 건가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원하는 건 찾은 것 같군요."
다시 한번 스튜어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나온 아이던은 바로 던바튼 성문을 나섰다. 타고 온 말을 찾다 문득 톨비쉬를 떠올린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다른 이의 기억을 본다는 것은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를 들춰낸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런 신조차도 아끼는 밀레시안의 존재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듯한 자신은...
"............."
이어지는 생각을 애써 끊어내며 말의 안장에 올라타 강하게 고삐를 당겼다. 이윽고 말은 이멘 마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모든 걸 다 떨쳐내려는 듯이.
순찰을 하던 근위대장의 시선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골목 어귀 자리한 집의 오래된 담장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덩굴 위로 내리쪼이는 강한 오후의 볕이 잎사귀 위에서 인사하듯 일렁거리는 덕분이다. 아이던은 잠시 아무 생각도 감정도 입히지 않은 채 그 풍경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돌아섰다.
'내가 밀레시안 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때가 되어봐야 알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여유를 부리듯 한숨을 가볍게 쉬어보았다. 그래, 이젠 정말로 지켜보면 될 것 같다. 기다리면 될 것이다. 늘 같은 시간에 도시를 순찰하러 나오는 게 그의 일상이 된 것처럼, 밀레시안도 무사히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대장님!"
반가운 목소리가 저쪽에서 발걸음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길어진 그림자가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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