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KWOOD] 콜 사인

비행사 제이크와 더스크우드 주민 MC(여)

Vernal Pool by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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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모로 '탑건'의 배경을 차용했습니다. 하지만 다~ 팬피셜! 1부터 100까지 날조! AU 아닌 AU!

+ MC로 지칭하고는 있지만 개인 MC설정 및 해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감안해주세요! ㅜ_ㅜ


 "말도 안 돼."

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바 오로라에 드나드는 사람이 몇 명인데, 말해줄 수 없다고?"

 "일급 기밀이니까."

 "전역한 줄은 몰랐는데."

 MC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일부러 쿵, 소리를 냈지만 필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 잔을 사주게 허락한다면 말해줄 수도 있지."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필."

 "난 그냥 여자에게 친절할 뿐이라고."

 MC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다음 대꾸는 없었다. 그는 내려놓은 잔을 필 쪽으로 밀어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내가 이겼을 텐데."

 "사장 입장에서 손님 정보를 팔 순 없잖아. 그럼 반대로 묻자. 내기라는 건 핑계 같고,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한 거야? 군인 취향이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

 "네가 알 바 아니야. 취향도 아니고."

 살짝 올린 입꼬리 그대로, MC는 잠시 흘겨보듯 눈을 가늘게 뜨다 말았다. 작은 한숨 한 번. 이어 주머니를 뒤져 돈을 올려두고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또 올게. 조금 먼 테이블에 그의 친구들이 있던 것도 같지만, 오늘은 모른 척 문을 향했다.

*

 MC는 격납고가 완전히 개방되기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셔터가 천천히 열리는 것 같았다. 덧문이 올라가며 차차 보이는 것. 맨 처음, 노즈 기어와 메인 기어, 그다음 엔진, 앞코에 달린 프로펠러를 넘어 짧지만 곧은 날개와 유리 너머 보이는 조종석…… 매끈한 헤드까지. 경비행기 하나가 완전히 드러나고서야 MC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진 창문 틈으로 지는 햇빛이 침범해 쏟아지고 있었다.

 "네가 이겼어. 코인 다섯 개는 전부 네 거야."

 "아니. 일곱 개였지."

 꼬리날개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늘어졌다. 하나, 둘, 셋의 걸음. 프로펠러에 가까워지자 그림자가 다시 짧아졌다. 넷, 다섯의 걸음. 살짝 튀어나온 후드가 보였다. MC는 거기서 멈췄다.

 "넌 대답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냥 분해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림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덮어쓴 후드 아래, 그림자가 얼굴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감이군."

 "결국 그 정도의 우정이었던 거지."

 "나를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래. 남의 격납고에 무단으로 침입해 비행기를 만지고 있던 사람을 궁금해하는 건 꽤 특별하고 희귀한 감정의 발현이야. 그렇지 않아?"

 남자는 대꾸 대신 눈동자를 슬쩍 굴렸다. 언뜻 파란 빛이 스멀거렸다. MC는 그의 행동을 잠시 응시하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고개도 조금씩 기울었다. 팔을 쭉 뻗으면 손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다시 선 채 MC가 입을 열었다.

 "어때. 다 녹슬었지."

 "겉모습에는 문제가 없어. 역시 연료를 채운 뒤 작동해 봐야만 알 것 같다."

 "이런 데서 항공연료는 못 구해."

 "근처에 공항이 있지 않나?"

 "끌고 갈 방법은?"

 "없지."

 "그래. 없어. 그리고 애초에,"

 내가 태워준다고 허락했던가? MC가 질문하며 그의 목덜미로 눈길을 옮겼다. 움찔거리는 옷깃이 보였다. 긴장한 건가. 짧은 생각은 가볍게 흩어진다. 한철 기억에도 남지 않게. 저녁 식사랑 모포를 가지고 올게. 날이 춥지 않으니 여기서 자도 괜찮을 거야. 바 오로라에서 그랬듯, MC는 쉽게 등을 보였다.

*

 더스크우드의 외곽 지역에는 제법 큰 컨테이너가 있었다. MC는 그걸 격납고라고 불렀다. 안에 들어있는 것이 경비행기였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연료가 말라붙은 지 10년은 지난 고철이다. 주변에 활주로 따윈 없고, 무엇보다 MC는 비행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때때로 방문해 비행기를 살펴보다 돌아가곤 했다. 사정을 아는 친구가 언젠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어봤을 때 MC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유언이라서.

 [이번 주 네 행운 컬러는 파란색이래]

 제시가 보낸 메시지였다. 허구의 이야기에 자주 솔깃해하는 그가 요즘 꽂힌 것은 별자리 운세.

 [나 눈동자가 파란색이잖아.]

 [맞다. 그럼 이번 주 내내 좋은 일만 있겠네]

 제시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나갔고 이른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마트에 들러 며칠 분의 식재료를 샀다. 저녁 식사를 고민하던 찰나 친구들이 불러 바 오로라로 향했다. '그럴 거라고 믿어'라는 응원처럼, 올린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흔한 운세처럼 MC의 삶은 꾸준히 흘러갔다. 뭔가가 생긴다는 건 사건이 벌어졌다는 거지.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게 행운의 증거일지도 몰라. 그런 말이 있었어.

 해가 다 저문 토요일. MC는 또 격납고로 향했다. 가더라도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지만 습관이 그를 움직였다. 홀로 덩그러니 놓인 격납고는 꽤 음산했다. 자주 보는데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잠시 생각하다 말았다. 리모컨을 눌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셔터가 열렸다.

 무언가가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자 형체가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키가 큰…… 섬뜩함이 정수리에서부터 싸늘하게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형체는 도망가지 않았다. 비행기 옆에서, 주날개 끝을 잡은 채로 못 박힌 듯 머물러 있었다. 의 시간이 동시에 멈췄다. 그런데도 는 눈을 떼지 않았다. 차차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것의 형태를 뚜렷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자였다. 탁한 색의 플라이트 슈트를 입은 남자. 왜 하필? 왜 여기에? 의문들을 하나둘 꿰어가며 MC는 멈췄던 숨을 다시 쉬었다. 두렵지 않냐면 거짓말이었지만, 어쩐지 위협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플라이트 슈트에 붙어 있었을 계급장과 와펜은 뜯겨 실밥만 남았고, 그 위에 걸친 재킷 후드를 뒤집어쓴 채 비행기의 날개에 손을 붙이고 있는 남자. 깨진 창문으로는 새나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침입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만큼이나 침묵이 짙었다. MC가 겨우 입을 열었다.

 "훔쳐도 날지 못할걸. 오래됐으니까."

 넓은 공간에 목소리가 울렸다. 긴 적막이 뒤따랐다. 손전등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실수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MC는 침을 삼켰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따라잡힐까? 뒷주머니의 핸드폰으로 구조 요청을 한다면? 이 위치를 알릴 수 있을까? 여긴 인적이 드물어. '때마침' 같은 우연은 없겠지. 어떻게…… 고민이 길어지던 찰나,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대꾸가 돌아왔다. 하? MC가 헛숨을 뱉었다.

 "그게 중요해?"

 "중요하다."

 "당신이 뭘 안다고?"

 "중요하다. 나에게는."

 "네가 누군데."

 "제이크."

 나는 제이크다.

 얼굴을 가리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손전등 불빛에 드러난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일렁거렸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콜 사인 해커." 

 "내 콜 사인은 그게 아니다."

 "알려주지도 않을 거면 그냥 새로 붙여." 

 명백한 농담이었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MC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봉지 안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왜 하필 해커지?"

 "도둑이 좋다면 그쪽으로 해줄까."

 "아니. 해커가 좋겠어. 그래서, 코인은?"

 "쓰지도 못할 거면서."

 MC가 팔을 뻗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자 정확히 일곱 개, 코인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이제 마음에 들어? 덧붙이는 말. 그래. 마음에 든다. 덧붙는 미소. 코인은 짤랑거리며 남자의 재킷 주머니에 들어갔다. 더 이상 숨어다니기는 글렀네. 이내 MC도 그의 옆에 앉았다. 바닥의 먼지가 약하게 피어올랐다. 올려다본 경비행기가 어쩐지 깨끗해진 것도 같았다. 닦아놓은 걸까. 연료 주입구가 활짝 열려있었다.

 "연료가 있어도 오래 못 날 거야."

 "항상 단정 짓는군."

 "언제 봤다고."

 "흠. 코인 다섯 개만큼."

 "두 개나 더 뺏겼네. 바가지잖아."

 "아직 다섯 개만큼인 거라는 생각은?"

 "아. 내가 준 게 아니라, 네가 시간을 팔았다?" 

 캐노피 쪽의 유리는 아직 불투명했다. MC는 아직, 이라는 단어를 몇 번 곱씹었다. 정말 기대하는 것만 같네. 날기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웃지는 않았다.

 "역시 도망칠 거야?"

 병뚜껑을 열던 손이 멈췄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비행기를 띄우려는 생각은 안 하지."

 "도망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왜 너는 이름을 밝히면서까지 낡아빠진 경비행기에 집착하는 거냐고, 무슨 배짱으로 덜렁 마주친 여자를 용인하냐고, 대체 왜 달아나지 않냐고, 무수한 말은 혀끝에서만 맴돌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우리가 그런 걸 물어볼 사이인가? 몰래 고발하거나 돌연 공격하거나, 아니면 갑자기 찾아왔듯 또 갑자기 사라지면 그만인데.

한 뼘만큼의 거리.

 무더위에 잠시 외로움을 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추측들.

 MC는 비닐봉지 안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표면의 물기에 손이 젖었다. 입구를 따서 한 모금 마시니 미지근한 단맛이 돌았다.

 "어떻게든 띄울 생각이지?"

 "응. 그러고 싶다."

 "그래."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

 한참을 생각하던 제시가 말을 꺼냈다.

 "MC. 혹시 남자친구 생겼어?"

 "아니."

 "그럼 날마다 어디 가는 거야? 만나자고 해도 바쁘다고 하고. 아르바이트라도 늘렸어?"

 "격납고에."

 너도 알잖아. MC가 조금 웃었다. 제시는 흐으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그렇게 자주 갔던가?"

 "녹이 슬어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동강 나면 곤란하니까."

 "리치한테 널 좀 도와달라고 할까? 자동차 전문이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어쩐지 수상해. MC." 

 "숨기는 거 없어. 정말로. 그냥…… 그건 할아버지의 유산이잖아. 오히려 늦었지. 살펴보는 거."

 그래봤자 어디에 쓰겠냐만은. 중얼거리며 MC는 남은 술을 마저 털어 마셨다. 그 모습을 본 댄이 휘파람을 불었다. 

 "귀염둥이. 훨씬 터프해졌네." 

 "그런다고 한 잔 사주진 않아. 댄."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 

 "영화 티켓 하나만큼은." 

 "오, 잘 알겠어." 

 "그만해. 댄." 

 화장실에 갔다 온 클레오가 다가와 낮게 말했다.  

 "MC. 필이 할 말이 있다던데. 널 보면 전해달래."

 그래? 그래. MC가 바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지켜보기라도 한건지, 금방 눈이 마주친 필이 윙크를 했다. 한결같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보자." 

 "오늘도 가려고?" 

 "미안해. 조금만 더 지켜보고 싶어."

 "알았어. 잘 가, MC.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야 해?" 

 MC는 손을 흔들곤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텀블러를 흔들던 필이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네. MC." 

 "그래봤자 며칠이지. 용건이 뭐야?" 

 "벌써 며칠이라고도 할 수 있지. 내기는 아직 유효해?" 

 "덕분에 완패. 죄책감이라도 들어?" 

 "아니. 하지만… 늦은 호기심을 채워줄 순 있을 것 같은데." 

 필이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속내가 뻔히 보여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MC는. 

 "'만약 네가 원한다면', 리벤지를 하러 갈 수도 있겠지." 

 "하하. 좋아."  

  그럼 말해 봐. MC가 상체를 기울이자 필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귀 가까이에 닿았다. 어디까지나 손님이 한 이야기야. 네가 말한 군인들 말이지. 그들이 말하길……   

*

 불허不許에 가까울수록 본능이 우선이라고 했다.

 이틀의 시간이 더 흘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와 MC 사이에 특별한 무언가가 끼어들지도 않았고, 충동적으로 건드린 조종간이 작동하거나, 밟고 올라선 날개가 삐걱거리거나, 그리하여 경비행기가 정말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거나, 하다못해 초대받지 않은 친구들이 찾아온다든가 해서 말할 수 없는 이 시간을 들키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야생화가 잿빛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불명예제대의 전제 조건."

 "뭐?"

 남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MC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가리켰다.

 "유죄 아니면 탈영인가?"

 "갑자기 무슨 말이지?"

 잠깐의 응시.

 "그 옷, 군인이지?"

 "아니."

 이제는, 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아니면 그렇게 듣고 싶다는 바람이었나? 단호하게 떨어진 대답에도 MC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널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나. 어릴 때 항상 너 같은 옷을 입고 있으셨지. 자식보다 비행기를 더 사랑했고."

 "이 비행기도?"

 "유산이야."

 남자를 바라보던 시선이 비행기 쪽으로 옮겨갔다. 새어 나온 햇빛이 눈동자의 푸른색을 일부분 지워버렸다.

 "내가 물려받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매일 여닫은 탓인지, 컨테이너 안에 가득하던 먼지가 많이 잦아들었다. 남자가 완전히 닦아놓은 경비행기는 꼭 어릴 적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MC는 표면의 붉은 페인트칠을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벗겨지지는 않았다. 쉽게 떨어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네, 중얼거렸다.

 "네 성씨를 못 들었어."

 "이름은 알려줬을 텐데."

 "보편적인 인사법은 아니지. 그거 알아? 필이 늦은 정보를 주던데. 주변 손님한테 들었다면서. 너같이 말이야, 군 내부에 있지 않은 군인들… 소속도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데 티가 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웬만해서는 좋게 전역시키지만, 죄의 경중에 따라서는……"

 "MC."

 "수감 대상으로 전락한다."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소문은 퍼져. 이어지는 말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숨죽인 채 서 있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MC는 생각했다. 그때는 고려하지 않았던, 고려할 수 없었던 것들. 부정조차 하지 않는 혀에 머무른 말은 무엇인지, 그늘막에 숨은 눈이 무슨 빛을 띠는지, 당황, 불안, 사라지는 희망…… 이름이 붙은 감정들을 하나씩 헤아리면서. 밤에 소나기가 내린다더라. 아무래도 좋을 말들을 이어가면서. 금방 그치긴 해도 꽤 거세다는데. 셔터를 내려도 비는 들어올 거야. 알다시피 창문이 깨졌으니까. 조종석 안에나 들어간다면 또 모르겠지만. 넌 몰랐지. 모를 수밖에 없지.

 "난…… 거짓말은 한 적 없다. 거짓으로 말한 건 아무것도 없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

 "경찰을 부를 건가?"

 이번에는 MC의 입이 다물렸다. 바람이 이명처럼 불었다. 뜨거웠고 조금 아득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

 "무, 뭐?"

 "빌려줄 침대는 없어. 소파 정도는 넘겨줄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소나기로 목욕하다간 다 끝내지도 못할걸. 생수병 세수도 지겨워질 때 아냐?"

 자. 어서. 모두에게 들키기 전에. MC가 팔을 뻗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나? 머뭇거리는 투박한 손이 손끝을 잡았다.

 황혼을 지나 밤이 왔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긴 숲길을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의 손은 뜨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아서, 의식하지 않으면 천천히 잊어버리기 좋은 정도라서, MC도 길을 걷다가 문득 서로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러다 남자가 불현듯 손을 고쳐잡을 때 MC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시선이 잠시 얽히다 멀어졌다. 우주의 빛은 사실 먼 과거의 빛이라고 하던 과학 프로그램이 갑자기 떠올랐다. MC가 문 앞에서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려 할 때쯤에야 손은 떨어졌다. 잡았던 적 없던 것처럼 가벼웠다.

 "화장실 캐비넷에 옷이 있으니, 씻고 갈아입어. 사이즈 미스는 어쩔 수 없고."

 "동거인이 있었나?"

 "'차마 '하루만 입을 범죄자를 위해서 사는 건데요'라고는 말 못했지. 오른쪽으로 가."

 "미안하다."

 "알아."

 남자는 지시받은 대로 오른쪽으로 향했고 MC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천둥이 개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의 눈 깜박임. 정적. 문이 닫히는 소리. 개 같은 기다림 끝에 쏟아지는 물줄기. 비의 소리. 어수선한. 기다리던…… 무엇을? 휴대폰 진동이 울렸지만, 그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대로 멈춰 기다렸다. 창문 밖에서 구름이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남자가 몸을 씻고 나왔을 때, 소파에는 얇은 이불과 베개가 놓여있었다. MC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인기척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금방 그칠 것 같진 않군."

 "아니. 그친다고 했어."

 "호우는 예측하기 어려울 텐데."

 "너보다는 쉽지."

 "무슨 말이지?"

 "모르는 척하지 마. 해커."

 MC가 움직이려 하자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난 곧 떠날 거다, MC."

 억센 비가 창문을 요란하게 때렸다.

 "네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어."

 우렛소리가 꼭 비명 같았다.

 "왜 하필 나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불현듯 머릿속이 섬뜩해졌다.

 MC가 남자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

천척의 무리.

귀울림을 따라 그려지는 궤적. 하나 둘.

저길 봐요 별의 꼬리가 다가오고 있어

등대가 바다의 별이라면 여러분들은 하늘의 유성우일 거예요

절대로 지지 않는 불꽃처럼요

신에게 허락받지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허락된 적 없는 일이었대도

*

 인기척을 느껴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빛에 모든 것이 그늘져 있었다. 그 중심에 MC가 서 있었다. 희미하게 기름 냄새가 났다. 창문틀에 걸쳐진 일출이 마치 그가 놓고 온 불길 같다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깨우러 왔나?"

 "그냥 관찰. 처음 보는 모습이라."

 MC가 남자의 몸 위로 옷가지를 던졌다.

 "건조 기능을 좀 썼어. 따뜻하지?"

 "고맙다."

 "걸으면서 먹는 건 좋아해?"

 "익숙하지."

 "아주 좋아."

 그거 알아?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 덧붙는 말. 그래. 비가 그쳤군. 덧붙는……

 해는 아직 지평선에 묻혀 있었다.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반 잘린 샌드위치를 나눠 들었다. 진창마다 물비린내가 났다. 걸음은 전보다 더뎠고 샌드위치를 씹는 입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간간이 이어졌다. 먹을 만해? 냉장고에 하루 넣어둔건데. 말하면, 나쁘지 않은데. 맛있군. 대꾸하고, 제일 좋아하는 종류야. 으깨지는 느낌이 좋아서. 이어지고, 그런 흔한 반복들. 밤사이 지나왔던 길목에는 소나기의 여파가 가득했다. 둘은 계속 걸었다. 작은 연못이 생겨 크게 돌아가기도 하고, 부러져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발로 꺾기도 하고, 가시밭길 같네, 중얼거리고 마른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습기에 슬슬 땀이 날 때쯤 그들은 공터에 도착했다. 저 멀리 모든 게 시작된 곳이 보였다. 컨테이너. 혹은, 누군가에게는 격납고. 갑자기 남자의 발이 멈췄다. 셔터가 반쯤 열려 있었다.

 "분명 닫고 가지 않았나?"

 "글쎄. 저 건물도 오래됐잖아."

 MC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꼈지만, 남자가 다시 뒤를 따랐다. 가까워질수록 낯선 흔적들이 보였다. 땅을 마구 짓밟고 떠난 타이어 자국이 선명했다. 그 자국은 격납고의 입구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돌아 반대편의 길로 쭉 이어졌다. 그냥 들어갈 수도 있는데도 MC는 리모컨을 눌렀다. 셔터가 끝까지 올라가고 항상 보던 경비행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쪽 날개가 진흙투성이였다. 연료 주입구가 닫혀 있었다.

 "제이크."

 MC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이 얕게 불었다.

"남은 코인 두 개분의 시간도 끝이네."

 아직 휘발되지 못한 기름 냄새가 훅 풍겼다.

 "대체 뭘-"

 "비행기 띄우고 싶다며."

 "연료를 구한 건가? 어떻게?"

 "그게 너한테 중요해?"

 "내 말은,"

 "네 덕분에 이 주변이 왜 공터인지 기억났어. '언제 와도 다시 비행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나무를 잘랐지. 뿌리까지 뽑아서. 결국 한 번도 날아오른 적은 없고, 고스란히 내 유산이 됐지만."

 돌아본 MC가 웃었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작별 선물이라는 것도 말이야. 어떻게 보면 유산이 아닐까 싶지."

 남자는, 제이크는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너, 나는, 이런 걸 원해서 띄우겠다고 한 게 아니다."

 "알고 있어."

 "그러면 왜!"

 "이 마을에 이방인이 낄 자리는 없으니까. 비행 따위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시선이 마주 닿았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라고, ■■는 생각했다.

 "시범 비행 같은 건 없어. 시동키는 의자 위에 놓아뒀으니, 문제없이 날 수 있다면, 그대로 가. 끝까지. 내가 모르는 곳으로."

 "MC."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니. 돌아올 거다. 난 이걸 받을 자격이 없어."

 "네 의견은 내 유언에 반영되지 않아."

 제이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슬퍼하는 건지, MC로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껏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래. 네가 정말로 도망치지 않을 거라면…… 여길 떠난 뒤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MC가 숨을 토했다. 

 "내 콜 사인을 지어 봐. 제이크." 

 

 *

 몸에 밴 감각은 지문과도 같다.

 그토록 간절했던 조종석에 앉아서 조종간을 움직인다. 원래 몰던 것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지만, 어쨌든 창공을 활주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오래 방치했다던 경비행기는 생각보다 잘 움직였다. 서너 시간은 거뜬히 비행할 수 있을 테다. 정말로 방치했던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다가 사라진다.

 어디로 가야 할까. 답 없는 질문을 입 밖으로 뱉는다. 이 역시 흩어진다.

 문득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날개 끄트머리가 태양을 잘라내고 있었다. 시야 가득 햇빛이 들어찼다. 분명 그 격납고 속으로 무참히 쏟아지고 있을 빛을, 제이크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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