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불릿트레인

쪼빵

쓰레기장 by 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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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 | OSAKA

“지금? 역이지. 신칸센 타고 도쿄에서 내립니다~”

조재석은 한국에서 구매한 패스와 여권을 보여주고 도쿄로 향하는 오사카발 신칸센 티켓을 끊었다. 얇고 작은 종이를 받아든 그는 잃어버릴 새라 지갑에 꽂으며 휴대폰을 어깨로 받쳤다. 에어팟은 엊그제 하나를 잃어버리고 오늘 막 남은 한쪽까지 호텔에 두고 나온 참이었다. 그의 2박 3일 일정은 마침내 종착역으로 향해 밤열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환승하면 공항 인근 숙소였다.

[“교진이 형이 ‘뭔 상담 받겠다고 일본을 가? 돌았냐?’라고 전해달래.”]

전화기 너머 음성이 박교진의 껄렁한 말투를 흉내냈다. 재석은 폰을 제대로 잡고 매대에 있는 도시락 샘플을 기웃거리면서 말했다.

“수진아. 도전적이고 긍정적인 사고가 사람을 ‘고운 말 양파’로 만든대. 막 뇌파가 반응한다나?”

[“돌팔이 아냐? 유사과학이잖아.”]

“이건 비유거든? 선생님 말씀대로 일을 멀리하고 쉬니까 요즘 번뇌와 오욕이 희미해진다⋯. 불안할수록 몸 굴리는 걸 벗어나야 해. 난 사토 상을 만나고 인생을 배웠다고.”

[“언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고 인생을 깨우쳤다며.”]

“대박. 역시 평생 학습 시대. 암튼 구내매점인데 뭐 먹을래?”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골라줄 사람도 필요없으면서 재석은 꼭 그렇게 물었다. 학교 다닐 적 생긴 버릇이라곤 하지만 수진은 그냥 그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기차 모양 도시락 앞을 서성이던 재석은 눈물을 머금고 구경하는 어린아이 손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 통 진짜 갖고 싶은데. 저기 담아 먹으면 장난 아닐 텐데. 하지만 쥐똥 만한 내용물을 고려하면 좋지 못한 선택이 분명했다. 그는 충분히 유치한 성인이지만 밥도 못 먹고 다닐 순 없는 관계로 두툼한 장어 도시락과 돈까스, 캔맥주를 담았다.

[“금주 지켜.”]

“으응~ 당근 끊었지.”

재석은 울적하게 아사히를 내려 놓고 메론소다를 집었다.

“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로 했잖아.”

하여간 그랬다. 조재석의 거창한 새해 계획 ‘건강하게 오래 살기’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될 줄 알았다면 우수진은 결코 신년에 재석과 같이 절에 가지도, 소원 풍등을 날리지도 않았을 거였다.

15개월 전 큰 부상을 입은 재석은 거의 병원에서 살았으며 반년을 재활에 쏟아야 했는데, 그의 동료들은 모두 ‘지구가 멸망할 뻔한 시기’라 회고했다. 그 시기의 조재석은 상당히 망가져 있었다. 또 어느 순간 스스로 회복하긴 했지만 올초 갑자기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휴직계를 내고 2주에 한 번씩 오사카의 심리 상담소를 오가기 시작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재석 그 자신조차도. 어느새 벚꽃이 만발한 4월이 된 여지껏그의 기행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지금이라도 국내선 비행기 타는 게 어때?”]

“당장 이타미까지 어떻게 가냐? 이미 저녁도 샀어.”

그럼 좀 곤란해 질⋯ 하고 우수진이 말을 잇는 찰나, 통화에 정신이 팔린 재석은 한쪽 어깨에 맨 보스턴 백으로 험상궂은 아저씨의 위협적인 이두박근을 때리며 튕겨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본능적으로 도시락 든 종이가방만은 사수한 그는 거친 수염과 살짝 곱슬거리는 단발머리 서양인의 성난 눈발과 마주하자마자 인자한 불상 표정을 짓고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멘나사이.”

재석도 사무소 밖에서 기죽어 본 적 없는 184의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저 굵은 팔뚝은 질식하기 딱 좋아 보였다. 다행히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는 콧김 한 번 내뿜고 지나쳐갔다.

“후!”

재석은 한숨 푹 쉬고선 자판기 밑까지 미끄러진 휴대폰을 무릎 꿇고 주웠다. 관절이 아니라 합성 고무를 접었다 펴는 느낌이 났다. 부상은 완치됐어도 여전히 이질감이 잔여해 있었다. 사토 상 왈, 마음의 평화가 곧 고통의 탈피입니다. 이너피스, 이너피스.

소매를 당겨 액정을 슥슥 닦았다. 통화는 끊기지 않은 채였고 재석은 소리를 키워 귀에 붙였다. 소음을 듣지 못했는지 수진의 말소리가 죽 이어지고 있었다.

[“⋯네가 대신 들어가야 해. 어쩔래?”]

“엉? 잠시만.”

재석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뗐다. 흐트러진 짐을 정리하면서 맥락을 파악하려 애썼다. 처음부터 말해줘, 덧붙이려는 때였다.

잠시 후 도쿄 행 열차가 11번 플랫폼에—

역내 전체를 휘젓는 안내 방송이 고막을 때렸다.

“어. 들어가야겠다.”

도도새 부리 같이 생긴 잘록한 차체가 플랫폼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수진이 반색했다. 높아진 톤으로 뭔갈 묻는 것 같았는데 주변 진동이 커 들리지 않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안정적으로 정차했다. 재석이 이용하는 노선에서 두 번째로 빠른 이 상행은 머리칸부터 1호차-12호차로 이어지는 구성이었다.

[“오케이. 감독님껜 네가 한다고 할게. 근데 챙겼어?”]

다시 휴대폰 스피커로 수진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재석은 컨테이너 벨트 위 수하물처럼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만드는 승객들을 따라가느라 생각을 놓쳤다.

“장어 에키벤? 아! 가라아게도 살 걸. 개아까워.”

[“그거 말고, 혹시 총 챙겼냐고. 밥은 맛있게 먹어.”]

그는 4호차 승강구에 서서 지갑을 뒤적였다. 티켓에 쓰인 지정 좌석은 마지막 열 E, 2인석 창가 자리였다. 한산한 플랫폼을 둘러보니 옆자리에 누군가 앉을 것 같진 않았다.

“사토 상이 심중의 불을 다스리는 동안은 화기를 가까이 하지 말라더라.”

재석은 손목에 낀 나무 염주를 아련하게 쓸었다. 제발 라이플 좀 두고 다니라 애원하다시피 하던 사수가 반짝 스쳤다. 전직 국회의원을 따라다니며 파파라치 노릇을 해야 했을 때에는 아예 감독님이 효율적으로 하자 재석아. 라며 22구경 자동권총 이하의 도구만 허락해서, 기타 가방을 내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부 부끄러운 과거일 뿐이다. 조재석은 새해 그 사찰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휴직과 동시에 자식 같이 아끼던 저격소총을 봉인하고!

[“아주 은퇴하게?”]

“놉. 형이 돌아오기도 전에 백수 될 순 없지.”

수진은 합죽이가 됐다. 업계 사람들은 그가 형 얘기만 꺼내면 입을 다물고 위로의 말을 추렸다. 아직도 실종 처리된 형이 살아 있을 거라 믿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하지만 그건 재석에게 남겨진 유류품과 같았다. 유품이 됐다가 분실물이 됐다가 하는 거였다.

승객 여러분. 11번, 문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심부름만 할 거야. 복직해도.”

[“음⋯ 이 일도 간단하긴 해.”]

영 떨떠름한 공백이 끼워져 있었으나 재석은 한 귀로는 일본어 안내를 들어야 했다. 의문을 갖기엔 머릿속이 바빴다. 드디어 열차가 개문됐다. 그는 4호차 내로 들어갔다. 재석의 앞에서 헬로키티 캐리어를 끌던 여자가 객차 연결부에 딸린 짐 보관소로 사라졌다. 좌석은 도쿄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여 있었고 그는 3인석과 2인석 사이에 난 통로로 걸어가 맨끝 창가에 앉았다.

그는 시트에 붙은 미니 테이블을 펼쳤다. 도시락 종이백을 올려두고 느긋하게 폰을 귀에 댔다. 이제야 잡음 없이 통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진은 그새 무언갈 하는 모양인지 키보드 타자음이 들렸다.

“퇴근 안 해? 벌써 9신데.”

[“출근하자마자 너한테 연락한 거야. 외국 나간 직원이 잠적하진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하셔서⋯”]

“쑤⋯ 사무소가 아니라 날 걱정하는 거 맞지?”

재석은 손잡이에 휴대폰을 고정하고 도시락을 꺼냈다. 두꺼운 장어가 올라간 밥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야간 근무로 옮겼구나. 재석이 떠난 15개월 동안 직장은 매일 꾸준히 바뀌었다. 시간의 한정성은 병상 위에 누운 재석을 괴롭히는 끔찍한 적이었다. 누구나 서서히 흩어집니다. 우주의 섭리란 그런 것이죠. 유한한 축복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토 씨의 부드러운 음성이 계시처럼 내렸다. 아멘. 그는 어설프게 기도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20분 후에 교토에서 내려. 의뢰인이 거기 있어.”]

재석은 한껏 베어문 오통통한 장어를 뱉었다.

“넹?”

얼빠진 물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혓바닥에 묻은 달콤짭짜름한 간장 양념만이 현실 감각을 되찾아주었다.

“의뢰가 왜 있어? 난 휴직 중인데?”

[“아니 네가 방금 대타 뛰겠다고⋯ 너 설마 안 들었어?”]

재석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서야 뒤늦게 조금 전 하려던 말을 기억해냈다.

“처음부터 천천히 말해주라.”

때마침 신칸센이 덜컹 육중한 거인의 기지개 소릴 내면서 역사 바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길한 템포였다.

🚄 Shin-Osaka → Kyoto

🍄 요약 : 의뢰 배당자가 교통사고로 실려가서 펑크. 우연하게도 재석이 탄 신칸센이 접선 장소 인근을 지난다!

♫ 약속을 잘 지키는 어린이가 되자 삐뽀~ 뭔 등신같은(깜찍한) 경찰차 캐릭터가 객차 모니터에 경광등을 들이댔다.

“와씨 망했다⋯.”

창 밖은 야경과 벚나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명화 같았으나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재석은 싹 비운 도시락을 치우고 메론소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쿨럭어훜!” 탄산 왤케 쎄. 달달한 음료인 줄 알았더니 그의 신세와도 다르지 않은 따가운 맛이 났다.

교토역까지는 아직 약 10분 가량 남았다. 그는 초조하게 보스턴 백을 뒤졌다. 챙겨 온 여행짐 중 쓸만한 건 만년필, 볼펜, 덕트 테이프, 다이소 철사와 다용도 칼이었다. 감독님이 ‘효율적인 호신 용품’이라 우기곤 하는 도구들이었다. 그는 빨간 후드와 5부 카고바지에 버킷햇 차림이어서 주머니 곳곳에 잘 집어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재석은 괜히 주윌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고개를 고정했다. 가방 깊숙한 곳에 장전되지 않은 발터 P22가 있었다. 형이 쓰던 것과 동일한 기종으로,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 거였다. 재석은 다소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권총이 든 짐가방을 통째로 선반 위에 올렸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업자 중에서는 드물게 주사위의 신에게 사랑 받는 인간이었다. 15개월 전에도 분명 죽어야 할 사고였는데 버젓이 살아나지 않았는가? 이걸 써먹어야 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낙관하기. 참 잘했어요. 선생님의 칭찬이 들리는 듯했다가 상상 속의 사토 씨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재석, 쉬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하⋯ 쌤, 금지사항이 넘 많아요.”

재석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접었다. 비관하지 않기, 비방하지 않기, be폭력하지 않기.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왠지 요원한 목표였다.

그는 미리 출입문에 서 있으려 했다. 이 신칸센은 각 역에서 1분씩만 정차하는데다 교토처럼 큰 정류장에선 5분 가량 여유를 줬지만 그마저도 빠듯할 게 분명했다. 일어서려는 그때 이동판매원이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 재석은 엉거주춤 기다렸다. 판매원과 시선이 마주치면 구매하겠냐 물어올 게 뻔했으므로, 눈을 빙그르르 굴렸다.

저 너머 3호차에서 불쑥 머리가 솟았다. 아주 키 큰 남자였다. 2m는 되어 보이는 덩치는 군살 없는 체형으로 길쭉했다. 밝은 갈발은 자연모 같았고 시건방진 분위기가 있었다. 남들을 깔아보는 게 키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온몸에 명품 상표를 두르고 있는 그 자는 재석이 가려 했던 3-4호 사이 자동문 앞으로 나와 서더니 그대로 등을 기대고 자리잡았다. 재석은 인상을 팍 썼다.

마침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 5호차를 향해 돌았다. 복화술하듯 빠르게 혀를 움직였다.

“수쥔아. 좆돼써.”

[“? 브리핑해야 하니까 짧게 말해.”]

“코요테가 보여.”

[“자세히 길게 말해 봐.”]

코요테

현금수송차가 지나는 길목 옥상에 진을 치고 얼마안가 해가 떴다. 삼각대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박교진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걸어왔다.

「징크스 있냐?」

재석은 자세를 유지하느라 어깨와 허리 안 뻐근한 구석이 없었지만 업계 선배, 그것도 감독님 라인의 동료 직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엄, 아마도요? 그런 거 안 키우고 싶긴 한데 1년 중 108일째 되는 날은 항상 안 풀리더라고요.」

「108일은 또 뭐야. 웃기네. 야, 난 저 새끼가 징크스야.」

그의 저격소총은 1.5km 거리에서도 유효한 명중률을 자랑했으나 스코프는 고작 600m 떨어진 창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튼 처진 어두운 내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재석은 그곳에 집중하면서도 교진이 누굴 가리키는지 알았다.

「코요테만 나타나면 일을 망쳐. 내 생각엔 저격수보다 쟬 먼저 쏴야 돼.」

사실 재석은 코요테가 오늘도 무슨 짓을 해댈지보다 교진이 망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곧 의심을 거뒀다. 레인저 훈련을 받은 박교진은 함정 전문가로, 곳곳에 트랩을 설치해 이 작전에 투입된 전원의 동선을 제한해뒀다. 근거 있는 여유였다. 재석이 떨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했다.

「전 소문만 들었어요, 형. 의뢰를 이중삼중으로 받아서 경매가로 일한다는 사람. 맞죠?」

「실력이 있긴 해. 근데 몸값이 존나게 거품이야. 본명은 지국민인데, 윤 감독님이 가르친 놈이래.」

「헐. 선배였네.」

코요테는 업계에서 꽤 경력을 쌓은 전문가답게 별명이 많았다. 그중엔 블랙홀이라는 별명이 특히 유명했다. 돈 처먹는 블랙홀. 코요테는 어떤 보안이라도 뚫고 침입하는 솜씨가 일품이라 상류층이 많이 찾았다. 문제가 있다면 매수 전략이 아주 잘 먹혀서 돈을 몇 배로 쥐여줘야만 하는 프로였던 것이다.

「에이. 그래도 대형은행이 오퍼한 임무인데 뒤통수를 치겠어요?」

「하긴 그렇지?」

교진과 재석은 눈빛을 주고 받으며 픽 웃었다.

재석은 미리 전달받은 건물 구조 도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성인 남성 기준 열다섯 걸음 깊이의 방 안으로 발사할 탄도를 가늠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현금수송차 GPS를 확인하던 지국민이 갑작스레 역저격수인 재석이 있는 곳으로 레이저 포인터를 쐈다. 

「저 씨발새⋯」

둘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탄환 여러발이 망원경을 뚫었다. 교진이 쓰러지는 기척을 느끼며 심장이 차갑게 굳었다. 재석은 의식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심장 박동을 호흡과 일치시키고, 탄이 날아온 곳들을 향해 저격했다.

600m 밖 건물 창문이 깨져나갔다. 배치된 저격수가 전멸했을 때 지국민은 이미 현장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京都 | KYOTO

“교진이 형 말이 맞아. 코요테가 징크스야.”

재석은 버킷햇을 꾸욱 눌러 쓰며 문간에 서 있었다. 당시만 해도 범죄 컨설턴트로 전향하기 전이었던 우수진은 태평히 대꾸했다.

[“그게 3년 전이랬나. 코요테가 널 미끼로 쓰긴 했지만 어쨌든 매수당한 척하고 그 강도단을 전부 붙잡은 임무였잖아. 보수도 두둑했다며.”]

그 돈으로 애마를 장만했지⋯ 재석은 무심코 끄덕였다.

[“널 알아보는 것 같아?”]

“모르겠다. 교토에서 내릴 모양인데 설마 아니겠지?”

[“교토가 좁아터진 서울보다 넓어. 우연일걸.”]

수진은 묘하게 자신감이 사라진 톤이어서, 달래는 시늉도 소용없었다. 전통 건축물과 봄꽃이 한데 어우러진 교토 시내는 어둑했다가 웅장한 역사가 가까워지자 밝아졌다. 신칸센이 급격히 흔들렸다. 범퍼카 부딪치는 소릴 내면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정차를 눈치챈 수진이 빠르게 설명했다.

[“벤치에 앉은 트렌치코트를 찾아 가. 암호는 에잇볼(8-ball). 이번 네 인식명이야.”]

안내음과 함께 자동문이 열렸다. 고작 한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이라 내리는 사람은 재석뿐이었다. 섬식 승강장은 동선이 자유롭지 못했다. 탑승하는 승객을 거슬러 벤치로 걸었다.

[“물건 받은 다음 다시 타. 도쿄역에서 회수하겠대. 앞으로 종점까지 2시간 반 정도만 무사하면 돼.”]

무사하라니. 정말 불안한 어휘였다.

늘 그렇듯, 재석은 곧바로 트렌치코트를 발견했다. 회사를 다니는 것과 도둑질 하는 걸 구분하지 못하는 부류는 하나같이 카르마나 죄악 따위의 종교적 업보를 짊어지고 있다 광고하는 우중충한 인상을 풍겼다. 재석은 얼른 여길 벗어나고 싶어졌다.

“반가워요.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아 전 에잇볼이구요. 인상착의 대충 들으셨을 테고. 가져갈게요.”

재석은 트렌치코트 옆에 놓인 은색 트렁크 손잡이를 턱 잡었다. 코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오우. 과묵한 심부름꾼인가 보다. 그는 트렁크를 집어 들었다. 허벅지를 받치고 있던 트렁크가 빠지자, 코트의 신형이 옆으로 무너졌다.

급성 중독에 시달린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에 입과 귀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동공 반응이 없었다. 재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수진아 지인짜 좆됐나 봐.”

비관하지 않기

🚄 Kyoto → Gifu-Hashima

어떻게 다시 기차에 탔는지 정신이 없었다. 재석은 5분의 제한시간을 기억해냈고 납덩이같은 발을 뗐다는 것만 분명했다.

[“의뢰인이 죽은 거 말고는? 물건은 진짜야?”]

수진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아주 큰 문제를 작게 취급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묻어나는 투였다.

“야. 난 이 트렁크를 5분 전에 처음 봤다고⋯.”

재석은 5호차 화장실에 있었다. 트렁크를 세면대 위에 올리고 변기 커버에 걸터 앉았다.

“독극물에 당한 것 같음. 접촉은 최소 몇 분에서 몇 주 전까지도 가능하고, 훔쳐 갔다면 가짜를 가져다 놓을 가능성은 적으니까 이 물건과는 상관없는 죽음일 수도 있겠지. 아 미친, 내가 방금 ‘죽음’이라고 말한 거야? 사토 쌤과 상담한지 고작 5시간 지났는데.”

그는 버킷햇을 짜증스레 벗어 던졌다.

[“잠금 장치가 어떻게 생겼어?”]

“깔끔한 단면에 특별한 마감. 엄청 비싸 보임.”

[“특수 제작된 금속만 기억해서 반응하는 자물쇠야. 그게 배달해야 하는 트렁크가 맞아.”]

수진이 뒤늦게 덧붙였다. 손 꼼꼼히 씻어. 위로가 되진 않았다.

[“일단 알아볼게. 재석이 넌 도쿄까지 가는 것만 생각해.”]

통화 종료를 알리며 숫자가 깜빡였다. 재석은 심호흡을 하고 트렁크를 옆구리에 꼈다.

화장실 밖엔 다행히 줄을 선 승객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10여분을 기다리다 다른 홀수 객차로 이동했을 수도 있었다. 흔한 변비 환자라 여겼길 바랄뿐이다. 그는 우선 4호 객실로 돌아갔다. 손님이 여럿 탔으니 검표를 하는 승무원이 돌 때가 됐다. 여전히 그의 옆 좌석은 비어 있었다. 재석은 지나는 승무원에게 꼬깃한 티켓을 보여주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단 하나, 재석의 발치에 추가된 은색 트렁크만 달랐다.

창 밖 반대편 선로에서 신칸센이 쏜살같이 지나쳐갔다. 시속 280km의 쇳덩이가 공기를 뚫고 나가자 천둥이 구르는 듯했다. 그건 어떤 폭발과도 닮아 있어서 귓가에 이명이 꼈다. 삐이이이. 재석은 이럴 때일수록 바깥을 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는 창문에 머릴 붙이고 이국의 전경에 집중했다. 평화로웠다. 이곳엔 불꽃에 휩싸여 침몰하는 선박도 새까맣게 탄 숯덩이도 없었다.

출국 신청을 했더군. 결정했나. 3개월 전 그를 부른 윤 감독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재석에게 업계 출신인 상담사를 소개시켜준 건 그였다. 결혼하면서 성을 바꿨지만 한국인이고 이쪽 사정을 다 아니 상담은 더 편할 거랬다. 네. 시도는 해볼래요. 출국 승인은 다음날 났고, 재석은 망설이다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 왜 일본이에요? 윤 감독은 답지 않게 한참 머뭇거렸다. 널 보고 싶어하더군.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이바라역이 보였다. 잠시 의식이 끊겼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일었다. 재석은 괜히 졸린 척 하품을 하고는 기지개를 펴며 고개를 통로로 쭉 뺐다.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또다시, 아까 그 자리에 서는 코요테가 객차 사이 유리로 비쳤다.

직감이 들었다. 지국민은 교토에서 내리려던 게 아니었다. 올라타는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누군갈 찾고 있는 것이다.

“젠장.”

지국민은 분명 조재석을 발견했다. 다행히 윤 감독의 제자인 젊은 스나이퍼가 사경을 넘나들다 쉬는 중이라는 건 좁은 바닥에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1년 넘게 복귀하지 않았으니 의심을 받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어쨌든 의뢰가 겹치진 않는 것 같았다. 신칸센이 정차한 내내 쭉 저기 서 있었다면 그가 수상한 트렁크를 들고 타는 걸 보았을 텐데, 국민은 4호차로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어쩌면 닮은 녀석이라 생각하고 말았길 바란다.

1분이 지나 그들이 탄 신칸센은 마이바라역을 빠져나갔다. 다음역인 기후하시마는 교토-마이바라 간격보다 훨씬 가까워서, 코요테는 객실로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 걸까? 코요테는 징크스라는 교진의 말이 얹혔다. 재석은 만년필을 손에 쥐고 일어났다. 상체를 낮추고 뒷칸으로 갔다.

5호차로 입성한 그는 오후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대부분 졸고 있는 승객들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몇몇은 아예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눕다시피 잠들어 있었다. 재석은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곯아떨어진 장년이 그물망에 끼워둔 신문 뭉치를 빼들었다. 당연히 일본어였으므로 십자말풀이를 즐길 용도는 아니었다. 그는 접은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어슬렁 복도로 나왔다. 6호와 7호차 사이에는 흡연실이 껴 있었다.

8호차부터는 자유석이고 승무원들이 대기하며 옮겨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드나들지 않는 게 좋았다. 재석은 고맙게도 빈 흡연실로 들어갔다. 재떨이가 깨끗한 것을 보아 치운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재석은 흡연실에 난 비행기 같이 작은 창문으로 나무와 낮은 지붕 다음 나타나는 승차장을 봤다. 기후하시마는 볼것 없는 역이었지만 열차 간 사정으로 5분 동안 정차했다. 다음부터는 억만금을 주더라도 가장 빠른 등급을 이용해야겠다 다짐한 재석은 끊긴 전화를 이어가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대기하고 있었는지 수진이 바로 받았다.

[“나쁜 소식과 나쁜 소식 중에 뭐부터.”]

岐阜羽島 | GIFU-HASHIMA

“나한테 섭섭한 거 있냐고 우수진⋯.”

재석은 슬슬 울먹이고 싶었으나, 재석이는 슬퍼 작전을 세 번쯤 써먹은 뒤부턴 수진에게 통하지 않게 됐다. 수진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죽은 의뢰인 말이야, 하청의 하청이야. 역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꼬아져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함정 수사거나 거물이거나. 하지만 외국 사무소까지 엮어 들어왔다면 상당한 거물인 쪽일 거였다. 재석은 배회하는 코요테가 더욱 거슬려졌다.

“아까 보니까 코요테가 아직 같은 열차 안에 있더라. 자꾸 뭘 찾는 것처럼 행동해. 다음 걸로 바꿔 타도 돼? 나고야에서 무정차로 도쿄까지 가는 차편이 따로 있을 텐데.”

[“⋯감독님께 물어볼게.”]

현장 직원에게 초조한 느낌을 줘선 안 된다. 목소리로 전달되는 감정이 옅은 우수진은 청부 중개인이자 자문가로서 꽤 자질이 있었다. 그런 수진조차 찝찝함을 버리지 못하고 동조하는 걸 듣자 재석은 오히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재석은 흡연실의 두꺼운 유리문을 두드린 인기척의 구둣발을 돌아봤다. 지국민은 아니었다.

“써도 될까요?”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빳빳한 쓰리피스 정장을 착용한 남자였다. 둥근 눈매가 또렷하고 이목구비가 바르게 주차됐다, 하는 감상이 절로 떠올랐다. 재석은 무심코 비켜주었다. 남자가 개폐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재석은 조금 놀랐다. 그가 올려다 볼 일은 잘 없었기 때문이다. 재킷을 벗은 남자는 유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재석은 그제야 한국어라는 걸 인지했다.

“아! 한국 분이시구나⋯악”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태평한 생각으로 가득한 머리가 강하게 뒤흔들렸다. 재석은 발을 헛디뎠다. 출발한 신칸센이 달리는 방향으로 넘어진 것이다.

남자가 가뿐히 그를 받았다. 거의 품에 안긴 재석이 놀라 눈을 댕그렇게 떴다. 쿵쿵쿵쿵.

가지런한 앞머리가 살짝 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고개 숙인 남자는 재석을 내려다보며 나직히 말했다.

조심해요.

재석은 별안간 찌릿한 두통이 났다. 거북함이 치솟았지만 클래식 정장의 남자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강렬한 위화감에 시야가 쪼개어져 분리될 것만 같았다. 뭘까 이건. 이것도 후유증인가? 어지러운 척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체격이었는데, 빠듯한 셔츠 앞섶은 물론이고 팔까지 단단했다.

“어, 우와,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네.”

재석이 얼떨떨하게 일어나며 남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의 미소가 물을 탄 것처럼 흐려졌다.

“많이 흔들리네요. 지하철 정도 생각했는데, 빨라서 그런가.”

“그쵸. 이 기차가 노후된 거라⋯ 다른 노선에선 이미 퇴역한 차종이래요. 관심사는 아니고 몇 번 타다 보니 외워져서, 아, 볼일 보세요!”

재석은 일부러 민망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떨어트린 신문을 줍고 좁은 흡연실 벽에 바짝 붙었다. 이만 나가 보겠다는 기미를 팍팍 풍겼다.

“어디까지 가요?”

팔에 걸쳐둔 코트에서 담뱃갑을 꺼낸 남자가 붙임성 좋게 물어왔다.

“어⋯ 도쿄요,”

“같이 내리겠네. 난 7호차예요.”

재석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그냥 알아두라는 듯이 말하곤 돌아서 궐련을 물었다. 베스트가 가로지르는 뒷모습은 솔직히 등빨이 죽였다. 내심 감탄한 그는 흡연실을 나서면서도 종잡기 어렵게 분위기가 바뀌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쾌활히 웃다가도 그 뒷모습은 묘하게 색바랜 느낌이 났다. 상자 속에 넣어둔 걸 잊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 Gifu-Hashima → Nagoya

지정 좌석으로 돌아온 재석은 트렁크 위에 읽다 만 것 같이 신문을 대충 덮었다. 이러니 홀아비가 두고 내린 짐 같았다. 폰 메신저를 열어 ‘버섯맨’을 클릭하고 생존신고 했다. 곧이어 톡이 읽혔다. 몇 분 기다리자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야?”]

“한국 여행객이랑 마주쳐서. 너무 가까웠어.”

[“뭔 신칸센에 한국인이 그렇게 많아.”]

내 말이. 재석은 등받이를 쭉 젖혀 기대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고야에서 환승하는 건? 감독님이 뭐라셔.”

[“안 된다는데⋯”]

“대체 왜?”

[“계획이 틀어진다고. 더는 오차를 늘릴 수 없대.”]

“으아아 돌하르방. 여기에 내가 투입된 것부터 오류난 거 아니냐고요. 계산기 고장났나 봐.”

수진은 침묵했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하는지 가늠하는 모양새였다. 재석은 발끝으로 톡 트렁크 가방을 쳤다.

“들어있는 거 약은 아니지?”

[“돈이겠지.”]

신뢰라곤 가지 않는 말투였다.

[“정보일 수도 있고, 장물일 수도 있고.”]

수진은 변명처럼 말을 흘렸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쪽을 더욱 시답지 않게 말하는 건 그의 습관이었다.

“자고 싶다 그냥.”

재석은 웅얼거리며 한탄하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박교진?”

[“그 형은 또 왜?”]

“아니, 전화가 오네. 잠만.”

화면 상단에 박교진이라 적힌 알림이 떠 있었다. 재석은 수락 버튼을 누르고 여보세요, 물었다.

[“재석아. 지국민이랑 있냐?”]

숨이 거칠었다. 웅웅 말소리가 울렸다. 음악과 차 배기음이 들리는 걸 보아 밖인 듯했다.

“네⋯ 한 30m쯤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사무소 사람들 다 알아요? 소식이 형까지 갔으면.”

[“사고난 애 때문에 출국하다 들었다. 씨팔⋯ 그 새끼 결국 거기까지 갔네.”]

빠아앙. 너머에서 클락션이 시끄러운 비명을 질렀다. 교진이 실력도 없으면서 업자라 설치는 떨거지들에게 매몰차긴 해도 재석을 앞에 두고 흥분하는 일은 잘 없었다. 재석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형. 무슨 일이에요.”

그가 단호히 묻자, 교진은 진정하려는지 크게 날숨을 뱉었다.

[“걔가 찾는 거 사람이야. 내가 아는 녀석.”]

“제발 부탁인데 그게 전 아니죠?”

재석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너 말고.”] 교진이 말을 고르듯 뜸들였다.

[“‘고리’. 전문 도둑 중에 자물쇠 따는 놈 있잖아.”]

낯익은 별명이었다. 네*버에 검색한다고 나올 리도 없는 터라 재석은 사고 이후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이마를 꾸욱 눌렀다. 요새 누가 다이얼 돌리냐, 고리한테 시켜서 디지탈로다가⋯

“그 금고에 미친 작업자?”

[“어, 사정이 긴데, 걘 진짜 전문가야. 사짜 말고 찐 공학 기술자. 걔가 지국민 등처먹었거든. 몇 달 전부터 코요테가 고리를 쫓아다녔어. 넌 쉬느라 몰랐겠지만.”]

“당연히 몰랐죠!”

재석은 최대한 목소릴 억눌렀다. 4호칸 내에는 영상 송출 기기에서 나오는 공익 광고 테마송만 흘러나왔다. 그의 대각선에 앉은 노부부는 쉽게 잠에서 깰 것 같지 않아서 안도했다.

[“하아. 고리가 지금 일본에 있단 말이야.”]

“잠깐. 그러니까 혹시 고리가 이 신칸센을 타기라도 한단 거예여?”

충격이 닥치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게 천성인지라, 재석은 놀랍도록 차분하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고리 그 놈이 특수 제작된 잠금쇠라면 환장하거든? 꽂히면 종일 그 얘기만 하는 진상이니까 알아보긴 쉬워.”]

“아니지금제가특수금속어쩌고트렁크를들고있는데요”

교진이 뭘 마시고 있었는지 대차게 콜록거렸다.

[“⋯빡빡이 보이면 걍 피해 다녀라. 도벽 있어 걔. 구본영⋯ 아씨. 고리도 윤 감독님 제자였거든.”]

그가 진심으로 동정하는 듯 첨언했다. 재석은 범죄컨설턴트로 화려하게 왕년을 보낸 윤 감독 밑으로 꼬인 개족보에 탄식했다. 오직 실력만 보는 계산기 밑으로 별별 미친놈들이 많다 할 때 세 번 말고 두 번만 부정할 걸 그랬다. 문득 재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 둘은 원수라고 치고요, 형은 왤케 잘 알아요?”

[“아는 게 가오라고 생각하냐 모르는 게 꿀이라고 생각하냐?”]

줄줄 흐르는 무식에 경탄했지만 재석은 긍정의 힘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가오죠.”

[“⋯⋯구본영이랑 같이 지국민 작업친 게 나야.”]

재석은 그럼 그렇지, 생각했다. 복수는 또다른 원한을 낳는다는 사토 상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아아 21세기의 소크라테스 누님.

[“그때 서로 휴대폰 GPS를 주고 받았는데, 설정을 깜빡했는지 아직 접속이 되더라고. 너 어디냐? 그 자식 위치가⋯”]

재석은 마침 기내 전광판에 뜨는 영문을 읽었다.

“나고야요.”

⋯에 있는 걸로 뜨는데. 대화에서 정확히 세 글자가 겹쳤다. 재석은 후드 모자를 꾸역꾸역 덮어썼다.

“아 우울해. 형은. 진짜 바보멍청이해삼멍게말미잘이에요.”

비방하지 않기

名古屋 | NAGOYA

신칸센이 거대한 빌딩 안으로 진입했다. 저 멀리 운행을 멈춘 관람차가 빌딩 불빛을 반사하며 서 있었다. 나고야역 일대의 고층 빌딩은 모조리 하늘 이불을 덮은 통유리 커튼 월로 되어 있어서 멍하니 보고 있으면 반짝거리는 달의 바다 같았다. 혼잡한 플랫폼으로 신칸센이 덜컹거리며 들어갔다.

코요테는 이번엔 사냥에 성공할지도 몰랐다. 섣불리 이빨을 드러냈다간 고리가 역사 안 백화점으로 도망칠 수도 있으니, 최대 시속 285km로 달리는 하차 불가능한 열차를 거대한 덫이자 철창으로 쓸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지국민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정차 후 1분이 지났을 때다.

재석은 아차 후회했다. 정작 중요한 걸 묻지 않았다. 교진은 구본영에게 지국민이 타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을까? 그런데도 본영은 이 기차에 타야만 하는 건지, 아예 듣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 교진도 펑크난 선수를 수습하느라 바빠 보였으니까. 역시나 교진은 그새 휴대폰을 꺼놓았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청부업자 오프라인 -일본편> 시트콤 같은 일이 벌어진다니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소망인가 빛인가 하는 이름을 달고 음침한 인간들을 태운 신칸센이 완전히 정차했다. 단 1분. 이제 재석의 오늘치 운세가 시험대에 올랐다. 고리가 되도록 1•2호칸 특실에 오르길 바랐다. 그래야 코요테가 기체를 횡단하지 않을 거였다.

재석은 애물단지 트렁크를 뻥 차고 싶다가도 과격한 화풀이는 심신에 해롭다는 사토 씨의 가르침을 기억해냈다. 그 정도면 종교 아니냐. 언제 한번 수진이 떨떠름히 한 말이었다. 재석은 지인들이 왜 달라진 그에게 기겁하는지 그들보다 명쾌히 알았다. 조재석은 원래 복권 한 장을 사더라도 오직 제가 고른 숫자로만 채워 넣는 자기 확신으로 똘똘 뭉친 부류였다. 비대한 자아를 접고 타인을 끼우다니 그건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죽는 건 마음대로 못해도 삶은 얼마든지 튜닝할 기회가 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 후 이지가 어느 정도 돌아와 번뜩 든 결론은 그거였다. 어떻게 죽을지 어느 타이밍에 죽을지 인간은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사는 것은 쉽다. 망치고 실패하고 무너져도 인생은 계속된다. 그럼 망가져 보는 게 이득이다. (정신 나간 귀결임은 인정한다.) 여하튼 재석이 폐인처럼 지낸 몇 달은 그랬고 ‘완치’ 판정에도 그는 여전히 도전 중이었다. 나로 살지 않기. 선생님은 이 계획의 훌륭한 핑계였다. 당신에게만 두 번째 삶이 주어진 이유를 찾고 있군요. 그 물음에는 유의미하게 감응하지 못했지만.

고속열차가 굉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재석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마침 아슬아슬히 신칸센에 올라탄 야구모자 쓴 까까머리가 4호차 마지막 열 A석 차표를 들고 뒷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통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3인석 창가에 앉았다. 노부부의 스카프를 어깨 너머로 주워주며 옷깃 브로치를 먼지 털듯 떼어 가져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동북아인이라면 달고 태어나는 한중일 구분 레이더가 원망스러워졌다. 200% 한국인처럼 보이는 손버릇 나쁜 빡빡이와 마주한 그는 남는 신문 한 장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엄마 보고 싶다⋯⋯.

🚄 Nagoya → Shizuoka

구본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동 판매원을 불러세워 물티슈를 받을 수 있냐 물었다. 판매원이 물티슈를 꺼내려 고개 숙인 사이 과자와 탄산수를 훔쳐 립스탑 재킷에 찔러 넣고는 역시 일본의 철도 기술과 서비스는 세계 제일이라며 따봉을 날렸다. 하는 꼴을 보아 북한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것 같았다.

그때 앞문이 열리며 어째 익숙한 버킷햇이 나타났다. 재석은 신문 위로 눈만 빼꼼 내놓고서 그가 화장실에 내팽개쳐둔 모자가 2m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광경을 봤다. 코요테가 재석의 모자로 낯을 가리고 당당히 통로를 걷고 있었다. 이런 젠장. 지금이라도 이동할까? 재석은 스리슬쩍 트렁크 손잡이를 쥐었다.

그순간 허공에서 일치된 시선이 수십배의 중력으로 작용했다.

‘어이, 나와.’

지국민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에 쥔 동전 두어개를 휙 던졌다. 재석의 어깨가 움찔했다. 100엔짜리가 제각기 굴러 퉁퉁 좌석 다리에 부딪치다가 기어이 고리의 발밑까지 굴러갔다. 본영이 동전을 밟아 납작히 눕혔다. 그가 허리를 숙인 순간 지국민은 태연히 그들을 지나 4호차를 빠져나갔다.

재석은 어쩔 수 없이 트렁크를 쥐고 그를 따라나갔다. 두고 가기엔 너무 쫄렸다. 걔 도벽 있어. 어깨에 앉은 미니 악마 박교진이 속삭였다. 제기랄.

4-5호 사잇길에 코요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태평히 아는 척했다.

“오랜만이다 꼬맹아.”

재석은 후드 주머니에 든 만년필을 굴리면서 순진한 척 눈을 깜빡였다. 정말정말 사양하고 싶지만 만약이랄 상황이 온다면 기습으로 한 번에 끝내야 했다.

“아 진짜 상도덕 없으시네요. 저 일 쉰지 꽤 됐는데 이런 식으로⋯”

“트렁크 뺏기고 얘기할래, 좋게 말로 할래.”

“형. 뭐 필요하세요?”

국민은 코웃음치고는 물었다.

“척 봐도 일하는 모양이고만. 지금은 뭐냐?”

그는 고집스러운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답했다.

“지금은 에잇볼요.”

“마일오보단 낫네.”

“아씨. 그렇게 부르지 맙시다!”

마일오. AK-15. 그게 업계에 알려진 재석의 별칭이었다. 도대체 누가 지었는지 걸리면 거기털을 밀어버리리라. 심지어 조재석의 애착 라이플은 AK시리즈도 아니었다. 사실 그보다 지국민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긴 했지만, 어쨌든 당장은 에잇볼이었다. 행운이 따른다는 에잇볼. 아 이거 부정탄 거 아니야?

“심부름?”

“짐을 좀 맡았어요. 형은요?”

지국민은 고민하는 듯이 불량한 눈썹을 까딱거렸다.

“너. ‘닥터’라고 아냐?”

“닥터? 지성이 느껴지는 별명 흔치 않은데.”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이 기분 나빴다.

“아니 생각해 봐요. 전문적인 별명일수록 위험하다니까? 당장 유명한 ‘악사’도요. 같은 업자만 노리기로 유명하잖아요. 되게 위험한 사람 쫓나 싶지.”

“개소리가 묘하게 설득력 있네.”

재석은 쪼오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쵸? 암튼 전 안전제일이거덩요. 그런 사람 모름요. 누군데 그래요?”

“고리랑 일한다는 놈. 의료 사고 전문이라던가.”

“헐. 닉값 쩐다.”

“그런데 말이다⋯ 고리랑 닥터가 원하는 게 과연 뭘까? 이 열차를 탄 이유가 있지 않겠냐.”

지국민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아도 그를 내려다보면서 굳이 고개를 살짝 비꼈다. 재석은 트렁크 손잡이를 꽉 쥐며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줬다.

“저어기, 형? 이건 원래 신칸센에 탈 물건이 아니었는데⋯ 진짜 피치못한 사정으로! ⋯아무튼, 넵,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니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저 시즈오카에 내릴까 봐요.”

그가 재석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내리는 건 알아서 하고. 그건 두고 가라.”

“제 물건을 왜 두고 가라 마라세요 형⋯”

재석은 비굴한 표정, 또는 우스꽝스런 웃음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어디 꿀려 본 경험이 많던가? 국민의 눈이 반짝였다. 재석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는 지금 대단히 도전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직감한 순간 그는 트렁크를 놓았다. 텅, 하고 떨어지는 먹잇감으로 코요테가 주의를 튼 찰나 재석은 짐 보관함 선반을 밟고 몇 발을 뛰어 덤블링하듯 날라찼다.

be폭력하지 않기

국민은 피하지 않고 막았다. 재석은 발이 잡히자마자 다리로 그의 어깨를 감고 떨어졌다. 둘이 같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얼얼한 등판을 무시하고 일어나 쥐고 있던 만년필 뚜껑을 땄다. 이번엔 지국민이 빨랐다. 코요테가 주머니칼을 뽑아 간결히 찔렀다. 후드 소매가 조금 찢겼다. 재석은 뒤로 굴러 만년필을 뽑았다. 촉이 달리지 않은 그것에서 투명한 와이어가 주욱 늘어졌다.

그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재석은 선반을 뒤지는 척했다. 지국민도 다를 건 없었다. 청소 트레이를 끄는 직원이 연신 스미마셍, 하며 지나갔다. 재석은 길을 비켜주며 만국공용어 스마일로 대처했다. 그러며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신칸센이 뭐가 엿같은지 알아요?”

“어, 지금 알겠다.”

“승객 짐 검사를 안 한다는 거.”

직원이 나가자마자 재석은 쥐고 있던 헬로키티 캐리어를 집어 던졌다.

앙증맞은 외관과 달리 묵직한 타격감에 지국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튕긴 캐리어가 살짝 벌어지고 무거운 공구들이 우당탕탕 요동쳤다.

“씨발, 전기 드릴은 왜!”

“그 여자분 보부상의 기운이 느껴지더라고⋯!”

재석은 빈 반려견 이동장을 발판 삼아 뛰어올라서 와이어를 그의 목에 걸고 매달렸다. 목이 뻣뻣이 잡아당겨진 채 국민은 휘청거렸다. 와이어를 뜯어내려는 손이 피부 거죽을 벅벅 긁어댔지만 얇은 줄은 잡히지 않았다. 지국민은 혈관이 불거지고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이를 악물더니 힘을 짜내 팔꿈치로 재석의 복부를 연신 가격했다.

아 젠장. 너무 쉬었나. 재석은 생각만큼 버텨주지 않는 몸을 느꼈다. 잠깐 느슨해진 틈을 타 코요테가 주머니칼로 제 귀 밑을 잘랐다. 베인 살에서 피가 흘렀지만 뚝 끊기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국민이 그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앞으로 팽개쳤다. 재석은 두어바퀴 굴러 박혔다.

나고야-시즈오카가 열차 이동구간 중 가장 긴 무정차 구간이라 다행이었다. 대략 1시간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덕분에 승객들이 쏟아져나올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나쁜 소식이 될 것 같았다. 그를 발견해줄 선량한 사람이 없었다. 뼈마디가 욱신거릴 법도 했지만 당장은 아드레날린이 솟고 있어 통증이 덜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쉴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지 곧장 지국민이 벽에 쓰러진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쥐어 관자놀이를 쳤다. 순간 눈이 크게 뜨이며 입이 벌어졌다. 그가 주머니칼을 접어 손잡이로 머릴 몇 번 더 내리쳤다. 당장 잘 보이는 안면에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수작 같았다. 인간의 두개골은 너무 튼튼했다. 존나게 아팠지만 두드러지는 외상은 없었다. 재석이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체중으로 몸을 누른 그대로 재석의 목에 팔뚝을 단단히 감았다. 억누른 신음은 빠져나가지 못했다. 숨통이 꽉 조였다. 점차 머릿속이 뿌얘지고 뇌가 멈추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그때 성가와도 같은 문턱 쓸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살덩이로 된 올가미가 턱 풀렸다. 재석은 급히 콜록거리며 반쯤 엎어지려는데 지국민이 얼른 배를 받쳐주며 부축하고 있던 척했다.

“야, 일오야. 그러게 이상한 거 주워먹지 말라니까.”

대사까지 좆같았다.

“⋯무슨 일이세요?”

눈앞이 핑핑 도는데다 꽉 붙들려 있어서 행인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목소리가 낯익었다. 심지어 한국어다. 물론 체감상 이 열차 승객의 반은 한국인 같았지만. 아니 기분탓이라고 치부하기엔 이렇게 부드럽고 살집과 가래가 느껴지지 않는 고운 성대가 흔할 리 없었다.

“아, 오지 마시고. 얘가 발작을 하네⋯”

지국민은 중얼거리듯 대꾸하면서 난장판인 주위를 눈짓했다.

“승무원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니까. 어차피 말도 안 통해요.”

“하지만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럼 제가 통역이라도⋯”

“씹⋯ 필요없다고 하잖아.”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뻔한 의식을 붙잡아 척수 언저리에 붙여 놓길 성공한 재석은 본능적으로 코요테가 개같은 성질을 발산하기 직전이란 걸 깨달았다.

자고로 외국에서 가장 무서운 건 같은 한국인이랬다. 실제로 그 증거가 재석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사토 씨 왈, 세상은 아홉의 악의보다 하나의 선의로 굴러가는 법입니다. 저렇게 친절하고 선량한 보기 드문 시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차올랐다. 사실 처맞은 게 징하게 아팠고 꼴받기도 했다. 나 휴가라니까?

재석은 순간적으로 휙 허릴 펴면서 단단한 두상으로 그의 턱을 쥐어박았다. 컥, 하는 눌린 신음과 턱관절 나가는 소리가 났다. 재석은 멈추지 않고 반바퀴 돌며 팔을 휘둘렀다. 손을 눕히듯 펴 손끝만 오므린 채 손바닥으로 턱을 돌려버렸다. 사람은 그리 놀랍지 않게도 여길 잘못 맞으면 기절한다. 무수한 연습 과정이 있었긴 한데, 내레이션은 생략하자.

눈이 풀린 거구가 푹 넘어갔다. 재석은 제 어깨로 들쳐매려다 발이 끌리는 대로 뒀다. 그럼에도 겁나 무거웠다. 그리고 조금 뻘쭘히 어깨 너머를 힐끔 봤다.

“어?”

“괜찮아지셨나 보네요.”

거기엔 한줌 놀람도 없이 웃는 7호차 남자가 서 있었다. 재석이 지국민을 반쯤 껴안고 비틀거리자 그가 매우 태연히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静岡 | SHIZU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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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다 지키고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재석은 남자의 도움을 받아 5호차로 지국민을 옮긴 뒤 중간열 빈좌석 사이에 앉히고 양손과 발목을 덕트 테이프로 칭칭 감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5호차엔 점잖은 승객들밖에 없어서 다들 노트북이나 산문집을 들여다보느라 주위엔 관심이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학생의 캐비지에 든 웬 이구아나가 이쪽으로 주름진 목을 쭉 빼고 있을 뿐이었다. 어릴 때 풍뎅이를 키우고 싶다 조른 적 있었지. 재석은 잡스런 상념에 잡혀 있다가 거들려는 손을 거절했다.

“아 형, 제가 할게요. 느슨하게 두면 안 되니까.”

“피가 안 통하는 거 같아요.”

“이 정도론 안 죽더라고요.”

순간 죽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눈을 질끈 감고 떨쳐냈다. 정말이지 슬픈 일이었다. 인류에게는 원죄가 있다. 아아. 세상을 굴리는 카르마여.

그리고 지금 조재석은 7호차에 그와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4호차로 돌아가긴 고리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흔쾌히 재석을 데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첼로 케이스 때문에 3인석을 전부 샀어요. 편하게 앉아요.”

정말 인격자구나! 재석은 평화롭다 못해 아늑한 3인석에 앉았다. 그는 악기함을 바깥으로 두고 재석을 창가로 앉힌 다음 가운데에 앉았다.

“저, 형 그게요⋯”

“이름이 어떻게 돼요?”

“조재석입니닷. 그러니까 아까는⋯”

“전영중이에요.”

“아, 넵. 영중이 형. 말 놓으시옵소서⋯.”

“그럴까.”

넹! 하고 주인 생긴 개과 동물처럼 대답하던 그는 문득 영중이 말을 돌리고 있단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재석은 일단 다른 화두를 던지기로 했다.

“혹시 첼리스트 같은 거예요?”

영중은 첼로 케이스를 쓰다듬으며 뜸들였다.

“어⋯ 직업이지.”

“와. 그럼 일본엔 무슨 일로 왔어요? 공연?”

“부탁 받은 게 있어서.”

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그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깊어진 눈빛이 그랬다.

“아는 선배가 동생을 맡겼어.”

영중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감회가 새로운 듯이, 또는 마주하기 낯간지러운 시선으로 허공을 훑었다. 영중은 분명 재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그렇게 볼 이유는 없었으므로, 재석은 이 젊은 첼리스트가 과거 어딘가를 되짚고 있다 생각했다. 눈치껏 딴곳을 보는 사이 신칸센이 번화가로 접어드는 게 보였다. 

“그으, 시즈오카에서 내릴 생각은 없어요?”

“도쿄로 간다지 않았어?”

“다음 걸로 갈아타는 게 어떨까 하고요⋯ 그쪽이 더 빠른 노선이고 이러다 코요테가 깨어나면 영중이 형까지 위험하니까⋯”

코요테라는 말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재석은 아차 싶어 농담인 척했다. 지국민을 본 누구나 이리를 떠올리긴 쉬울 테니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영중은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원체 시원시원한 인상이 나긋해졌다. 귓가에서 미터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방어력 미쳤다⋯.

“여기선 앉아만 있어도 종점에 도착할 수 있지만 내리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재석은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를 이쑤시개로 찔러봤다.

“제가요⋯ 정말 중요한 사정이”

“같이 있어줄게.”

그는 무력히 끄덕였다. 선량하게(콩깍지다) 웃는 사람을 두고 내릴 수 있는 뻔뻔함? 아무리 양심을 선택적으로 탈착하고 사는 그라지만 지금은 발휘할 때가 아니었다. 그를 도와주려다 휘말린 사람 아닌가? 재석은 쓸쓸히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형 내가 지켜 줘야겠네⋯⋯.

재석은 가방 손잡이를 내려놓았다. 1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정차한 열차 문이 닫혔다.

그들 뒤로 서류가방을 든 탑승객이 7호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 Shizuoka → Yokohama

재석은 창문에 비치는 길쭉한 승객을 힐끔댔다. 가지런히 정리한 머리와 강박적인 때깔의 구두, 와이넥 티셔츠에 펑퍼짐한 장코트를 걸쳤고 버버리 선글라스를 썼다. 충분히 난잡하게 보일 수 있는 복장이었는데도 차분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였다.

선글라스는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재석은 승객의 주의가 어디로 향하는지 기민하게 느꼈다. 그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한 박자 늦게 승객이 그를 바라봤다. 그건 기분탓도 우연도 아닌 것 같았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두 사람이 앉은 좌석 옆에 멈추었다. 그 순간 영중이 허리를 숙여 우롱차 페트병을 집었다.

“저, 1호차는 어디로 가야 하죠?”

영중은 태연히 눈을 내리깔고선 페트병 뚜껑을 돌리고 있었고, 남자는 자연스레 눈이 마주친 재석에게 물었다. 꼬리칸 방향에서 올라온 걸 보아 차번호가 헷갈린 듯했다.

“이건 머리칸이 1호예요. 앞으로 쭉 가시면 탕비실이 나오는데, 거기 승무원에게 표 보여드리심 특실로 안내해주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한국인이었군. 새삼 속으로 중얼거린 재석은 으쓱였다. 남자는 조금 미적거리더니 목례만 남기고 지나쳐갔다.

어째 신칸센에서 서울보다 사람을 많이 만난다. 재활을 마친 후에도 가끔 사무소 형들과 연락하거나 우수진을 만난 게 다였으니까. 연초 참여한 원정사의 신년행사가 그나마 올해중 가장 시끄러운 일정이었던 것 같다. 거길 왜 갔었더라⋯ 재석은 얼굴을 찡그렸다. 가속이 붙어가는 열차 소음과 맞물리는 이명을 인지했다.

“신칸센, 많이 타봤다고 했지.”

원정사는 재활 중에도 종종 들른 곳이다. 도심 가까이 있고 산을 오를 필요도 없는데다, 구석진 암자가 보이는 법당 외진 계단에 앉아 있으면 제법 숲처럼 꾸민 정원에서 노란 잎새가 바람결에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 재석의 귓가를 배회하는 것은 비명에 가까운 경고음이었다.

삐-삐- 프로펠러가 사납게 돌아갔다.

“일본은 자주 들르는 것 같던데.”

... ... ! ...타... 얼른... 헬기... 대기 중...까...!

우롱차를 내려둔 영중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밖에 없었는데 이상했다. 재석은 무심코 귀를 짚었다. 진동 같은 게 윙윙 울었다. 귓속을 긁어봤지만 꺼지지 않았다.

...오래 못... 가야 돼!

“⋯재석 씨?”

애가 어딨어, 미친 새끼야! 타라고!

“재석아.”

재석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모든 소음이 흡입기에 빨려들어간 듯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흰 천장을 배경으로 의사가 물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것도⋯.

“아~ 선생님 만나러요.”

그는 무의식 덩어리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어물한 긍정은 끝에서 평소의 또렷한 발음을 되찾았다.

“뭐라더라, 소개해주신 분이 현대인에게 상담사는 필수라고⋯”

일부러 눈을 맞추었을 땐 둘 다 표정을 갈무리한 후였다.

“오가기 부담스러운 거리 아니야?”

“엄청 좋은 쌤이에요. 그것도 있고, 첫 안식년이니까. 못할 짓도 해보고 싶고.”

“안식년?”

“휴직 중이거든요. 형은요? 쉴 때 뭐해요?”

영중은 입꼬리를 밋밋하게 놓았다. 그는 독특한 사람이다. 웃고 있으면 온통 흐리고, 간혹 짧게 인상을 굳힐 때에야 가장을 한 겹 벗겨낸 것 같다. 허영적이고 섬세하다. 연주가에겐 필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재석과 같은 직업에도.

“쉬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영중의 대답은 신선하면서도 납득가는 면이 있었다. 아무렴, 그에게 느끼는 묘한 친근감이 설명되기도 했다.

재석도 얼마 전까지, 대략 15개월 전에, 병원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대책 없는 일 중독자였다. 그는 사건과 사고, 쌔끈한 강철과 플라스틱 총기가 내뿜는 가스, 그 뜨겁고 간결한 살인으로 오늘과 내일을 꿰멨다. 배워먹은 것도 그거뿐이었고 불행하게 재능이 있었다. 재미있었는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입력된 목적이랄 게 일밖에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잘’하고 싶었다.

“형, 휴식은 아주 중요한 거래요.”

재석은 아마도 그가 수백 번은 들어봤을 조언을 했다. 그리고 그의 손마디를 좇았다. 저 굳은살은 창조의 가능성을 품은 것인가. 아무래도 청부사의 그것은 무언갈 생산해낼 수 있는 손이 아니지. 죽여 없애는 행위. 오로지 타인을 축내고 소모하기만 하는, 그저 유기화합물에 불과한 고깃덩이니까. 그게 조재석이 달성한 인생의 전부다. 나로 살지 않기. 리셋 하고 싶은가요? 저는 그냥 실패해보려고요. 좋은 연습이군요. 늘 고마워요, 쌤.

“쉬면 생각이 많아지잖아.”

실없이 웃어 넘길 줄 알았던 영중이 제법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원래 신중한 사람일까, 내게 신중한 걸까? 재석은 불쑥 든 상념이 우습게 느껴졌다. 

형은 참 똑똑하다고 감탄할 뻔했다. 병상에 앉은 반년 간 생각이 많아지긴 했거든. 그런데 생각이라는 게 할수록 괴로운 거였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겉멋 든 지론으로 살아왔지만 확실히 침대에 누워 머릿속이 복잡한 날 치고 웃었던 적이 없다. 맞나 보다. 재석은 동의했다.

“일 말고도 마음 비울 거리를 찾아야져.”

“취미는 있는데⋯”

그 다음은 도저히 예상치 못한 거였다.

“편지를 써.”

“오.”

뜻밖에 낭만적인 얘기였다. 재석은 할 수만 있다면 타임을 부르고 클락을 멈춰두고 싶었다. 우선 이 남정네가 체구에 어울리는 큼직한 손, 첼로 활을 쥐던 오른손으로 자그마한 연필을 부러뜨릴 듯 잡고는 단정한 편지지에 흑연을 살살 덧바르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 할애할 시간이 길었다. 

재석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을 최대한 말랑하게 유지했다. 늦지 않게 감탄사를 흘려냈다. 궁금증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십수가지 질문 중에 하날 골랐다.

“누구에게요?”

“죽기 전에 생각날 것 같은 사람.”

왠지 웃음이 났다. 이번에도 의외였다. 하지만 영중의 눈동자는 난색이고 시시한 소릴 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그 난기에는 몇 겹의 계절이 묻어나서 재석은 그가 진실하게 편지를 써 왔다는 걸 알았다.

“달라지기도 해요?”

“가끔은?”

“오. 그럼⋯”

아주 소중한 상대겠다고, 짐작하면서도 말을 걸렀다.

“많이 보고 싶은 사람이겠네요.”

“그런가.”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다면”

“후회할 거리를 찾겠지. 잠들기 전처럼.”

재석은 그제야 아까 그의 눈이 어디를 짚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련과 미결 어드메쯤 되는 곳. 조재석은 밟지 않는.

“미운 사람이었다가, 미안한 사람이었다가.”

재석은 어쩐지 그 둘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단지 편지를 쓸 핑계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석의 경험은 달랐다.

“아니던데⋯.”

영중이 돌아봤다. 재석은 주의를 돌려 아까부터 거슬리던 그의 발치를 가리켰다. 그가 바닥을 훑다 손바닥보다 작은 얇은 종이 한 장을 집었다. 영중이 재석에게 글씨가 보이도록 들어주었다.

그건 명함이었다. 정보값은 간결하다. 알코올 중독 클리닉, 최면가, 이휘성. 영중이 명함을 내밀었다.

“줘?”

“아, 그냥 뭔가 싶어서여. 아까 길 물었던 분인가 봐요.”

명함이 구겨졌다. 쓰레기를 곱게 집어 넣은 그가 안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확인하며 일어났다.

“잠시만.”

재석은 같이 가자 말하려 했지만, 막상 입술을 떼자 말을 바꿨다.

“다녀오세욥.”

알림이 쌓인 휴대폰 화면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닥터

이 업계는 소문을 좋아한다. 그것이 신빙성을 높여주진 못하지만, 소문엔 언제나 단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는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스포츠 선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겨누는 건 림이나, 골대나, 과녁이더라도 그들에겐 오늘의 친구도 경쟁자가 된다. 그러니까 사무소를 옮겨 다니는 저니맨의 동향과 최근 몸값이 치솟는 업자를 알아두는 것 역시 업계 생활의 일부였다.

은퇴한 의뢰 중개인이 차린 술집은 늘 그 바닥 인간들로 북적였는데 여기선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그가 이름을 날린 것도 반절은 술꾼들의 공이다. 어쨌거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주취자들에 비하면 그는 닥터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의료 사고를 위장할 줄 안다는 것은 놀랍게도 사실인 듯했으나 그가 아는 한 닥터의 지명도는 실패한 뇌 수술 따위에 있지 않다.

그의 별명, 고리는 열쇠고리란 뜻이었다. 구본영은 공학도면서 웬만한 세관 경비 시스템을 뚫어 본 자다. 그가 전문 업자가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도벽이 고쳐지질 않아서 그랬다. 그리고 닥터는 비밀을 캐내는 데 선수였다. 재워 놓고 몇마디를 속삭이면 국회의원이든 회장님이든 그날 아침 화장실 어느 칸을 썼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닥터와 고리. 모기와 바선생만큼 끔찍한 조합이군. 아마도 훔치지 못할 게 없을 테다. 머릿속에 든 것이든, 트렁크에 든 것이든.

본영은 배터리를 분리한 디바이스를 내려놨다. 그러고도 손아귀에는 아까 계산하고 나간 아저씨의 손목시계가 들려 있었다. 주머니엔 지갑 두 개와 반지가 들었다. 고리의 나쁜 버릇이다. 닥터에게도 버릇이 있다.

그는 전자기기가 전부 차단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의뢰야.」

「출장지가 일본?」

「어차피 한국에선 일 못하고 있다며. 지국민 때문에.」

「그건 그래, 망할 블랙홀 새끼.」

그들 같은 프리랜서는 따로 고용하지 않는 이상 컨설턴트가 없다. 한때는 함께 ‘계산기’ 밑에서 배웠지만 옛일이다. 계산기도 옛말이지. 작전 중 블라디보스톡에서 동해로 들어오는 배가 가라앉을 뻔하고 이 바닥에서도 귀한 스나이퍼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건 알음알음 퍼진 이야기였다. 복귀 소식은 없었으니 벌써 은퇴했을 수도 있다.

「저거 감독님네 애들이지?」

이휘성이 잔을 들다 말고 까딱이자 본영은 조심스레 고개만 돌려 뒤를 봤다. 가게 입구에 버섯머리가 보였다. 또 아는 얼굴이 있을까 재빨리 스캔했다. 마인크래프트 대가리는 없었다. 서울엔 업자들끼리 편하게 일 얘기를 할 만한 공간이 몇 없다. 한국 어딜 가나 마찬가지긴 했다. 우연한 만남이 쉽게 이루어진단 의미다.

흥미를 잃은 본영은 오징어를 질겅 씹었다.

「버섯 쟤가⋯ 폭발물 처리 전문이던가.」

「폭탄 다루는 거 말곤 실전은 영 별로라더만. 다른 꼬마는 안 보일 거고.」

「어느 꼬마?」

「마일오. 산송장 됐다던데.」

「AK-15?」 휘성은 아깝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그만한 저격수 구하기 힘든데.」

「뭐. 저격도 필요하냐?」

「금번은 필요없어. 물건만 가져오면 되는 거라.」

「그 얘기 마저 해 봐.」

휘성은 주점 사운드를 채우는 70년대 사이키델릭 록 음악에 맞추어 잔을 내려놨다.

「간단한 운반 임무야. 가방을 하나 가져와달래. 어디에 숨겨 두든 우리 둘이면 어렵지 않을걸. 특이한 단서가 붙긴 했어.」

「무슨 단서?」

「장소가 신칸센이야.」

건너편 창고 문을 열고 나온 주인장이 막 이휘성을 발견했는지 신호를 보냈다. 휘성은 손을 들어 인사 오려는 그를 거절하고 목소릴 낮췄다.

「이미 일본 사무소가 동원됐는데, 의뢰인이 중간에 채오라더라.」

「아 이거⋯」

본영은 찝찝한 입맛을 다셨다. 의뢰를 이중으로 넣는 건 보통 밀수품을 옮길 때다. 국내 인력은 실패로 후려쳐 반값에 쓰고, 외국 사무소를 통해 빼돌린 목표물을 배 태우면 나중에 걸리더라도 도난당했다고 우길 수 있다. 단순한 금괴나 마약은 이런 방법까지 쓰지 않는다.

고리는 콧등을 찡그렸다.

「안에 든 물건이 뭐길래?」

「글쎄.」

방아쇠를 당기기 전 숨 돌릴 틈을 주듯이 멈춘 휘성은 느릿하게 소근거렸다.

「한국으로 들어갈 물건이라던데.」

横浜 | YOKOHAMA

쿵!

세워 둔 트렁크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옆으로 엎어졌다. 신발과 벽 사이 비스듬히 기대 있던 게 미끄러진 것 같았다. 처음 집었을 때도 무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트렁크를 가득 채운 100달러 뭉치라기엔 가볍고 비닐로 감싼 가루라 치기엔 부피감 없는 가방이다.

“응, 듣고 있음. 트렁크가 넘어져서.”

전화 너머로 우수진이 잔소리를 했다. 두고 다니지 말고 잃어버리지 말고. 뻔한 이야기였다.

“정신 없어서 그래. 코요테랑 한바탕 했다니까.”

[“네가 운이 좋은 편은 맞나 보다. 코요테 상대로도 멀쩡하고.”]

오랜 훈련에서 비롯된 실력이라느니, 평소 같았으면 쏟아냈을 너스레가 내키지 않았다. 살짝 도움을 받았단 말을 꺼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리는 왜 하필 여기⋯ 목표가 진짜 이 가방인가? 위치추적기라도 달린 거 아니야?”

수진은 조용했지만 그는 대개 그렇고, 재석은 긍정 또는 동의로 해석하는 편이었다.

“이거 대체 뭐야?”

수진이 조금 늦게 대꾸했다.

[“반드시 도쿄역으로 가야 할 물건.”]

“예예~ 다다음이 도쿄고요. 이젠 내릴 마음도 안 듭니다.”

재석은 바로 세운 은색 트렁크 표면을 툭툭 차면서 볼멘소릴 냈다.

“코요테가 닥터도 언급함. 아는 거 있냐?”

[“닥터? 우리 사무소 출신이잖아.”]

오~ 석까. 같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부처시여.

“이 학연카르텔이 적폐의 온상 같다 친구야⋯.”

재석은 이마를 턱 짚었다. (여기서 수진은 ‘친⋯구.’거리며 히죽 웃었다)

“말이 돼? 280km/h로 달리는 밀폐 공간에 코요테, 닥터, 고리가 있어.”

[“힣⋯ 큼. 정신 차려 봐. 선생님이 낙담하지 말라곤 안 해?”]

“지나친 완벽주의는 나를 괴롭히는 거래.”

[“나도 네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고 돈 받고 싶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원래 터치보드만 만지지 컴퓨터 타자는 영 젬병이었는데 많이 늘었다. 재석은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사토 상은 존경할 만한 분이다. 조재석을 평화주의자로 만든 업적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고리를 코요테한테 넘겨.”]

“미친개 먹이주기 금지.”

[“괜히 중간에 껴서 두 배로 처맞지 말고 서로 싸우게 만들라고. 닥터의 동기들은 모두 유명한데 그중에 코요테는 없어. 기수가 달라. 사이가 좋진 않을걸.”]

“감독님 제자가 또 있어?”

[“있잖아. 업자들 잡고 다니는⋯.”]

재석은 우뚝 멈췄다. 머릿속에 전등 하나가 켜졌다. 수진이 사흘째 당직 선 간호사처럼 건조하게 읊었다.

[“악사 말이야.”]

재석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옆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빈 좌석을 사이에 두고 큼직한 첼로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별달리 갈등이 일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 허리를 숙여 좌석 등받이에 팔을 지탱했다.

“우리 사원이었으면 독립해도 프로필 남아 있지?”

[“어, 옛날 데이터 뒤지는 중. 닥터 뽑아줄게.”]

재석은 망설임 없이 지퍼를 잡았다. 확인하고 다시 닫으면 된다. 걸리는 건 없다.

“야, 수진아.”

지익. 지퍼가 내려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놀랄 일은 없었다. 어렴풋이 알던 병증을 확진 받은 기분일 뿐이다. 그가 텅 빈 첼로케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악사도 알아봐 주라.”

재석은 완전히 일어나 트렁크를 들어 올렸다. 요코하마 역내가 보였고 열차가 정차했다. 그는 7호차 뒷문을 열고 나갔다. 하차 방향으로 출입문이 열린 복도에 통하는 공기가 피부를 간지럽혔다. 눅눅한 밤공기와 역사 안내 방송이 스몄다.

수진은 그가 이동하는 걸 알아챈 듯 물었다.

[“어렵진 않지. 근데 너 뭐해?”]

“밸런스 게임. 거짓말하고 성실한 내담자 되기 vs 솔직하고 약속 어긴 내담자 되기.”

[“넌 정직하게 산 놈은 아니야.”]

“오키. 그럼 솔직해야겠다.”

[“#!$%^&@”]

재석은 불평을 무시하며 짧은 정차시간이 끝나기 전에 문턱을 넘었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승강장이었지만 난간만큼 낮아 열린 개찰구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였다. 열차와의 간격이 넓어서 스크린도어를 나갈 필요가 없었다. 재석은 그대로 꺾어 차체를 거슬러 올랐다. 흡연실은 6-7호 사잇길에 있고, 마주치지 않고 4호차로 되돌아가려면 밖에서 4-5호차 복도로 들어가면 됐다.

“프로필 찾아서 바로 메시지 넣어”

전화를 끊을 필요는 없었다. 재석은 그를 낚아챈 힘에 의해 잡아당겨졌다.

떨구어진 휴대폰이 승강장 보도블럭을 요란하게 뒹굴었다. 깨진 배경화면의 숫자가 바뀌자 거센 바람을 뚫을 준비를 끝낸 신칸센이 출발을 알렸다.

버섯

띠링. AI 스피커가 통화 종료음을 내보냈다.

어슴푸레한 스탠드 불빛이 어질러진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직원 몇이 출근해 있었고 그는 유리벽 안에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명패는 방을 배정 받은 날 치웠다. 구긴 캔과 껌통이 대신 차지했다. 탐정 사무소인 척은 해야 했으니 서랍엔 명함 꽂이가 들었다. 사설탐정사 우수진이라 적힌 평범한 명함이 꽂힌.

수진은 안경을 벗었다. 렌즈 없이 모양만 잡힌 안경이었지만 이걸 써야 일할 맛이 난다. 어릴 땐 막연히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은 글쎄. 미납청구서 수집가가 됐다는건 확실하다.

그는 현관에 쌓인 고지서를 묻어두기로 한다. 잡스런 고민거리는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집중력을 흩트려 놓기도 했다. 수진은 턱을 괴었다가 의식해 바른 자세로 고쳐 앉으면서 마우스를 끌었다. 일어나자마자 디스크 관련 건강 기사를 본 탓이다.

바다 건너 청부업자 다섯을 실은 살벌한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고 동갑내기 동료 한 명이 타고 있단 사실에 사고 용량을 많이 할애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들 사이엔 넓직한 동해가 흐르고, 우수진은 뽑아낸 자료를 신속히 보내주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매뉴얼 대로 해야 한다. 효율적으로.

수진은 빈 메시지 창을 노려보며 속으로 악사의 이력서를 요약했다. 접근 불가. 썅. 이걸로 될 리가 있나.

“어디서 락이 걸린 거지?”

수진은 중얼거리며 지저분한 책상을 더듬어 서류철에 묻힌 휴대폰을 쥐었다. 연결된 스피커가 노래방 20대 남자 인기 순위에 뜰 법한 느끼한 발라드를 부르다가 컬러링을 끊었다.

[“지금 나리타야. 바쁘다.”]

 “형, 급한데요. 재석이가 부탁한 건데 보안이 안 뚫립니다.”

[“뭔 보안?”]

“사원 조회요.”

[“야이씨. 그걸 왜 나한테 묻냐? 감독님한테 말해야 할 거 아냐, 새꺄.”]

“감독님도 한국에 안 계십니다.”

[“아 그랬지.”]

수진이 대꾸 없이 기다리자 우회하겠다는 기사의 말이 들렸고 교진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네가 못 보는 건 사무소 자체 보안 아니야.”] 

“네?”

[“야 진짜 바쁘니까 이제 알아서⋯ 씹, 차 돌려!”]

“교진이 형?”

아스팔트에 타이어 바퀴가 크게 마찰하는 소음이 터졌다. 재석은 뚝 끊어진 전화를 2초 가량 쳐다보다가 내팽개쳤다.

그는 접근 방식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수진의 권한으로도 열람 불가한 인원을 한데 정렬하고 개중 5년 이상 지나 폐기된 데이터를 제외했다. 그러면서 다른 모니터로 교진의 GPS를 추적해 움직임이 있는지 확인했다.

잠시 후 로딩이 끝난 창이 조건에 맞는 단 두 사람을 추려냈다. 4번 파일 악사의 성명을 지나친 마우스 커서가 멈추었다. 수진의 손아귀가 순간 힘이 빠졌다가 으스러질 듯 쥐었다. 파일명 16이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럼 또 말이 되네 씨발⋯.

수진은 쓰다 만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쨌든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가장 급했다.

👤 8ball

> [(첨부파일(2)) 근무 이력 조회 안 됨. 정부가 막아둔 것 같다. 민간인 아닌 듯⋯] ➣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낱말을 오려 붙이면서도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 복잡한 퍼즐이 제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 Shin-Yokohama → Shinagawa

팔뚝이 재석의 목을 휘감았다. 소매와 옷자락을 보아 코트였다. 재석은 끌려가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짙은 선글라스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남자는 키가 아주 컸고 한국인이며 분명 일등칸 티켓을 쥐고 있었다.

이쯤되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지. 이 알코올 중독 치료사가 닥터다. 재석은 지국민을 욕했다. 이런 지성이 느껴지는 페이스 흔치 않은데. 재석에게 시비만 안 걸었어도 첫눈에 닥터를 찾았을 거고 그가 휘말리기 전에 닥터든 고리든 신칸센 밖으로 던지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주변을 볼 줄 모르는 타입과의 팁업이라는 게 이렇다.

박치기는 무리. 목을 감은 닥터의 큼직한 손바닥이 귀까지 쥐어틀고 있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다행히 오른손은 자유롭다. (왼손엔 트렁크가 있다.)

재석은 숨을 자제하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볼펜을 뽑아 팔 바깥쪽 급소에 박아 넣었다. 생각보다 깊게 박히지 않았다. 살갗만 파고든 것 같았지만 목을 옥죄던 힘을 허물어뜨리는 덴 충분했다. 재석은 뒤돌아보지 않고 트렁크를 휘둘렀다.

닥터는 트렁크를 피했고 그와 동시에 무릎으로 허리를 찍었다. 재석은 넘어지듯 벽에 붙어 섰다. 맞은 부위가 얼얼하다 못해 째진 듯 따가웠다. 3주는 달고 살 멍이 질 게 분명하다.

“타임. 타임!”

“몰아서 푹 쉬자.”

들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싹한 느낌에 활어처럼 몸을 뒤집어 돌자 그가 기대 있던 자리에 니들홀더가 꽂혔다. 가방에 스쳐 선글라스가 벗겨진 웃음기 없는 민낯은 조금 사나워 보였다. 가는 눈매가 얄따랗게 좁혀졌다.

“진짜 닉값⋯.”

재석은 천장을 보며 한숨 쉬고 트렁크를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사람 몇 담가 봤을 드러머가 날붙이를 스틱 삼아 내리꽂았다. 재석은 트렁크를 핸들처럼 휙휙 돌려가며 공격을 막다가 좁은 모서리를 세워 찍었다. 명치를 맞은 그가 뒷걸음질치면서 니들홀더를 던졌다. 재석은 묘기하듯 허리를 꺾어 피하고 상체를 튕겼다. 새 블레이드 꺼낸 휘성이 경동맥을 노리고 들어왔다.

턱 밑에 실선이 그였다. 몽글몽글 핏방울이 맺혔다. 재석은 트렁크를 그의 관절에 걸치며 시선을 유인한 후 전통적인 대화법을 썼다.

주먹질했단 뜻이다.

퍽. 제법 묵직한 타격음이었다. 재석은 그가 몸을 추스르기 전에 옷깃을 잡고 스텝을 밟아 넘겼다. 2m의 거구가 힘겹게 돌았다. 재석은 곧바로 누운 안면에 ‘대화’를 꽂아 넣었다.

주먹이 차체 바닥에 박혔다. 휘성은 좁은 통로에 온전히 누울 만한 체격이 못 됐고 애매하게 구겨진 자세는 반격하기 용이했다. 그가 유연하게 피한 뒤 재석을 걷어찼단 의미기도 했다.

“윽!”

재석은 엄살 반 진심 반으로 벌개진 코를 잡고 다시 벽에 붙었다. 이번엔 반대편. 한 바퀴 도는 동안 그가 얻은 건 까진 손등과 코피, 얕은 자상 그리고 닥터의 터진 얼굴뿐이었다. 이쪽이 손핸데도 교환비가 괜찮게 느껴지는군.

휘성이 드디어 컨셉을 버리고 제대로 된 칼을 꺼냈다. 버린 건 아닌가? 중세 의사 컨셉도 나쁘지 않다. 오늘이 할로윈이었다면. 그가 이마를 쪼개줄 것처럼 치료의 손길을 뻗었다. 재석은 가까스로 트렁크를 머리 위에 갖다댔다.

챙! 아까의 깡통 부딪히는 효과음과는 달랐다. 눈알을 굴리자 손잡이에 걸린 칼이 덜걱거리고 있었다. 재석은 얼른 가방을 놨다. 무게가 얹힌 칼날이 밑으로 꺾였고 닥터의 상반신이 숙여졌다. 재석은 본능적으로 뒷목을 깠다. 당수가 죽여주게 들어갔다. 잠깐 의식을 잃은 휘성이 쿵 떨어졌다.

재석은 멍하니 감탄했다.

“할렐루야”

그는 트렁크를 줍고 얼른 문을 열어 객차로 들어갔다.

얼마 없던 승객들마저 요코하마에 내린 듯 객차는 텅 비어 있었다. 재석은 긴 다리를 뻗어 걸으면서 이상함을 인지했다. 그는 빈 좌석 통로를 가로질러 문간에 서서 문에 적힌 차번호를 확인했다. 5호. 여긴 5호차였다. 그가 방금까지 닥터와 교전한 복도가 5-6 사이였다는 것이고. 재석은 을씨년한 빈 의자들을 재차 훑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이 객차는 완전히 비었다.

코요테가 사라졌다.

재석은 지국민을 앉혀뒀던 좌석 열로 뛰어갔다. 주름진 시트와 잘린 테이프 조각만 남아 있었다. 시트를 짚자 미지근했다. 떠난지 그리 오래 지난 시점도 이른 발견도 아니란 뜻이다. 코요테가 탈출하고도 재석의 멱을 따러 오지 않았다면 고리를 노리고 이동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4호차에 있을지도 모른다. 고리 vs 코요테(+나)? 괜찮은 전력이다. 재석은 행복회로를 돌렸다.

4-5 복도로 나가자 지국민과 뒹굴었던 짐칸은 반듯하게 정리가 된 상태였다. 서비스직의 물밑 노력이란 하해와 같은 법이다. 재석은 중문에 바짝 붙어 4호칸을 들여다봤다. 역시나 승객이 없었다. 불쑥 솟은 머리통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막혀 일직선으로 난 강철의 길이다. 도망칠 곳은 없다. 앞서가거나 뒤쳐질 뿐이다.

고리가 도주했을까? 운이 나빴다면 지금쯤 화장실 같은 곳에 싸늘하게 식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폭력적인 상상은 하지 말자. 이너피스, 내면의 평화, 정신통일! 재석은 묽은 코피를 훌쩍거리며 생각했다. 그는 젖어가는 빨간 후드를 내려다봤다. 곧 좋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내면의 빡침이 지펴졌다⋯⋯.

지나온 복도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두 개의 문 너머에 있는 강도는 벌써 정신을 차렸을 테다. 재석은 4호차로 돌아왔다. 그곳은 두 시간 전과 다를 바 없어서 바깥과 분리된 평범한 열차 같았다. 그는 고리가 앉아 있던 마지막 열과 저녁에 구매한 좌석을 번갈아 본 다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선반에 올려둔 짐가방을 끌어내렸다. 지갑과 여권을 따로 챙긴 뒤 가방에 손을 넣은 채 불청객을 기다렸다.

이 열차는 이번 역에 정차하지만 일정을 맞추기 위해 대기할 뿐 승하차를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조차 앞지르며 질주하던 쇳덩이가 멈춘 순간이 하이라이트가 될 거였다.

品川 | SHINAGAWA

시나가와는 불야성이다. 조도를 낮춘 신칸센 안으로 푸르른 밤의 필름과 붉은 네온사인이 겹쳐졌다.

(긴 열차는 화면에 다 담기지 않는다. 하늘에서 비추던 어둑한 카메라가 물부리 같은 머리로 다가간다. 기장실을 지나 인적이라곤 없는 일등석을 차창에 붙어 주욱 훑는다. 엉킨 두 인영을 지나며 속도가 붙는다. 달리는 누군가를 재쳐버리고 신칸센 안으로. 막힌 통로를 뚫고 한 청년의 뒷모습을 잡는다. 레디, 액션. 이휘성의 등장.)

그를 쫓아온 끔찍.최저.최악의 스토커가 정장 입은 디즈니 악당처럼 느긋하고 재수없게 4호차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well, well, well 따위의 진부한 대사를 칠 것만 같다. 이런 역할은 인간보단 퍼리가 제격이지. 꼽자면, 얄상한 늑대 캐릭터? 아 이럼 코요테랑 이미지가 너무 겹치는데.

재석은 히어로 영화 특유의 의미심장한 음악을 깔고 눈맞춤을 길게 하는 씬을 찍을 의사가 1도 없었으므로, 곧장 사람을 너그럽게 만드는 마법을 썼다.

“얘기 좀 해요.”

그가 P22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검푸른 그림자를 휘장 마냥 두른 휘성이 두 손을 올리는 덴 0.6초면 충분했다.

“일본에 총을 들고 와?”

미친놈이니? 재석은 오랜만에 듣는 감탄사를 음미했다. 하여튼 업계 인간들은 수줍음이 많아서 칭찬도 거칠게 하는 편이고, 재석은 무슨 말이든 평화롭게 소화해낼 준비가 돼 있다. 이너-피스. 나무아미타불. 아멘.

“이 동네도 수틀리면 총알 갈기는 거 몰라요?”

재석은 급 한국이 그리워졌다. 약도 부패경찰도 혐오범죄도 다 있지만.

“한국 가고 싶다⋯.”

닥터의 낯이 더욱 우울해졌다. 그가 환자 달래듯 물었다.

“무슨 얘기.”

플라스틱 총신이 내뿜는 열기와 탄환을 품은 22mm 구멍은 사람을 부드럽고 친절하며 배려심 넘치는 신사로 탈바꿈시킨다. 재석은 딱 들어맞는 그립을 습관으로 다져진 교본 같은 사격 자세로 쥐면서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그는 숙련된 사수고, 한국 최고의 사수이기도 했다. 이건 좋지 못한 신호다. 부러 떼어놨던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는 거니까.

“형 맞죠? 사무소 선배라고 들었어요.”

휘성이 영 모르겠다는 눈을 하자 재석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므을오.”

“아, AK-15.”

이휘성은 독특한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버릇인 듯 굵은 링을 손톱 끝으로 일정하게 두드리며 고민했다. “살아 있었네.” 팅, 팅, 팅⋯ “감독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혼잣말은 단조로워서 권태롭게마저 느껴졌다.

“우리 오해가 좀 있는 것 같거든요? 하나씩 묻고 답해주는 거 어때요.”

“그 트렁크 어디서 났어?”

민첩하다. 계획은 내 질문이 먼저였는데.

“교토역에서 받았죠. 원래 제 거 아녜요. 저 땜빵이라구요.”

“원래 일본 사무소가 맡은 의뢰니까. 윤 감독님이 그걸 가로채는 비생산적인 지시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돼⋯.”

“잠만, 이제 제 차례요. 매너겜 합시다.”

“그러던가.” 닥터는 뜻밖에도 매우 관대했다. 이것이 총⋯ 아니 ‘설득’의 힘이구나.

“그냥 비슷하게 생긴 가방일 수도 있잖아요?”

“특수 합금 기억 장치. 고리가 지난 주부터 기대했다.”

진실로 은혜가 넘치는 상황이다.

“⋯도쿄까지만 휴전합시다.”

재석은 안전장치를 푸는 시늉하며 말했고

“꼬마야.”

반지 긁히는 소리가 그쳤다.

“그런 말은 한 발 쏘고 하는 거라고 안 배웠어?”

그순간 휘성의 손 끝에서 붉은 빛이 쏘아졌다. 재석은 반사적으로 의자 등받이 뒤로 뛰어들려 했으나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빨간 반점이 먼지를 비추면서 이마에 찍혔다. 레이저 포인터였다. 휘성이 보란듯이 마술처럼 손을 쥐었다 펴자 포인터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고 빛줄기는 같이 깜빡거렸다. 당했다. 상대가 뭘 쐈는지도 모를 때에 겨눈 총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건 명백히

“탄 없네.”

“자, 진정해요 형. 사토 상이 가르쳐준 건데, 명상하는 법 알려드릴게요. 과도한 경쟁사회가 마음을 병들게 한대요.”

“아니. 쉬라니까.”

영원히요?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재석은 미소 지을 수도 P22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휘성이 아주 느리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땅에 붙었다가 벽에 붙었다가 천장에 붙었고, 또다시 일정한 간격으로 놋쇠 그릇 퉁기는 듯한 울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닥터는 코앞까지 왔으며 또 멀어졌다. 그는 오감이 제대로 작동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세상의 물리법칙이 5분 전과는 달랐다.

시야가 고장난 물리 엔진처럼 일그러졌다. 고개가 젖혀졌고 그대로 넘어갔다.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누군가 3호차와 연결된 문을 거칠게 열고 뛰어 들어오는 환상을 봤다. 재석은 차가운 밑바닥에 닿지 않았다. 넉넉한 품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영중이 속삭였다.

조심해야지.

재석은 어떤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각했다. 잠겨 있던 편린이 두둥실 유영했다.

에잇볼

「조심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설원이 보이는 술집에서. 포켓볼 게임을 하는 손님들은 각각 달러와 맥주를 들고 몇 명씩 뭉쳐 큐대를 들고 있었다.

「화물선에 탄 공작원만 사살하면 되는 거라며요. 쉽네. 컨테이너에 올라가서 방아쇠 당기기만 하면 되는데.」

「공작원 말고 타깃.」

그가 차분히 정정했다. 이건 대북 방첩 작전이 아니라 사고가 돼야 하니까. 두터운 코트는 버건디색이었다. 언제나 검은 정장을 고수하는 건 그의 드레스 코드였지만 재석은 종종 그에게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매어주는 상상을 했다. 

재석은 크바스를 홀작이며 흥얼거렸다.

「정부와 일하면 프로, 아니면 전부 아마추어인 게 이 업계잖아요. 우리 형 프로인 것도 알고 용산 외주도 받는 거 보면 감독님은 역시 정보사? 아님 국정원 출신?」

「그만.」

「넵, 은퇴하고 제 2의 인생 설계 중인 분께 무례했죠.」

도저히 배가 뜰 것 같지 않은 날씨였다. 창 밖으론 눈발이 휘날렸고 바다마저 얼어버릴 듯했다. 재석은 턱을 당겨 패딩에 발갛게 튼 얼굴을 비볐다.

「이상하긴 하다.」

「뭐가.」

그는 두마디 이상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재석 앞에서만 그랬다.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직원과 스몰토크를 나누는 걸 몇 번 보았다. 재석은 그의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그가 정부와 엮인 중개인이고 관짝 같은 항공용 악기함을 소지하고 있으며 가끔 창백한 인간을 넣어둔다는 것밖에는.

「겨울에도 사람이 죽는다는 게요.」

그래서 재석은 뜬금없는 소릴 여느 때보다 자주 했다. 동토를 밟은 뒤론 쭉 제멋대로 떠들고 마음껏 우중충했다가 헤프게 웃었다.

「날은 더럽게 춥고, 피는 흐르지 않고, 눈에 파묻히면 박제될 것 같은데⋯.」

그는 아직 김이 솟는 홍차를 마셨다. 그의 눈빛은 가끔 조재석을 외계인으로 만들었다. 그게 또 우스워서 말을 고쳤다. 그의 주파수에 맞추어.

「얼어붙은 땅에서도 사람이 추위 아닌 무언가에 죽는다는 거. 신기하지 않아요?」

재석은 테이블에 놓인 에잇볼 장식에 시선을 뒀다. 반질반질한 둥근 공 모양 장식품은 8이라 쓰여 있었고 물비늘 같은 구체의 표면은 재석을 윤기 나는 해파리로 비추었다. 살짝 돌리자 그가 나타났다. 똑같은 해파리다.

「추위가 낫지. 열기보다는.」

해파리는 영생을 살기도 한다. 그도 영생을 살고 있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로 모든 날들이 그의 삶을 지독히 끈질기도록 치장했을 테니까. 재석은 은반지를 낀 약지를 보며 그의 사연을 각색했다. 배가 뜨지 않아 이곳에 고립된 몇 주 동안 만든 취미였다.

「소방관이었어요?」

「파일럿.」

추락은 폭발을 동반하곤 한다.

「군인이었구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재석은 그 침묵이 좋았다. 어설픈 거짓말을 할 바엔 입을 다물어버리는 태도가. 이 미망인未亡人 또한 그녀와 같은 군인일까. 최소한 그랬거나.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형.」

재석은 조심하라는 상투적인 말에 무엇이 담길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도 같다.

「저 운은 A급이거든요.」

🚄 Shinagawa → Tokyo

클래식이다. 비발디 사계 겨울 1악장. 포근하고 푹신하다. 가죽인지 면인지 모를 기차 냄새.

끝인 줄 알았던 순간이 기억 났다. 그건 상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다. 편안하다. 이래서 죽을 위기를 겪으면 신을 믿는 거라고.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광막한 우주에서 마침내 흩어져 사라진다는 것은 그렇다. 이젠 이해할 수 있겠다. 미우면서 미안한 것. 그리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년도 더 바래버린 그를 끄집어내자 알 것 같았다. 그는 반지를 쓰다듬듯이 나를 봤고, 그건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죄책감.

재석은 몽롱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거치대에 낯선 휴대폰이 음악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닥터의 이마가 의자 손잡이에 박혔다. 우지끈. 재석은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타격음이 바이올린 연주에 어우러지더니 너른 등짝이 가까워졌다.

재석에게 넘어진 영중이 탄력 있게 일어나 넥타이로 휘성의 팔을 걸고 꺾었다. 그동안 볼이 납작히 눌리긴 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불리한 위치에 있던 터라 밸런스가 흐트러진 그는 다시 재석이 누운 좌석 틈새로 처박혔다. 칼침을 핏물 밴 넥타이를 펼쳐 막고서 조금씩 떨리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고개를 팍 돌렸다.

“조재석, 깼으면 정신 차려!”

“우리 구면이네여⋯?”

풀어진 눈을 느리게 여닫은 재석이 어물어물 말하자 영중은 인상을 굳혔다.

“애한테 뭘 먹인 거야?”

어느새 칼날은 꽤 가까이 붙어 볼을 그어내리고 있었다. 휘성이 발끈했다.

“나 알코올 중독 클리닉 해. 약물을 썼겠어?”

“지금 이러는 건 의사다워?”

“너야 말로 구본영은.”

“내가 안 했어.”

주의가 분산된 찰나 영중이 힘껏 칼을 멀리 쳐냈다. 그는 휘성의 정강이를 구두로 찍고는 선반을 잡고 매달려 가슴을 걷어찼다.

“코요테가 볼 일 있어 보이길래 풀어 준 거지.”

후, 영중이 내려서면서 튿어진 셔츠를 다듬었다. 창가로 처박힌 휘성은 주저앉은 채로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너였네. 판 다 꼬아 놓은 게.”

“나도 고용된 거야.”

“지국민도?”

“⋯⋯고리가 여기 있을 거라고 흘리긴 했는데. 걘 진짜 자기 성질 못 이겨서 온 거라.”

휘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동인지 기분탓인지 드르륵거리며 묵직한 물체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착각은 아닌 듯했다. 전영중도 자신이 들어온 문을 봤다. 작은 창으로 직원 모자가 솟았다. 둘은 짧은 순간 시선을 교환했다.

영중은 헤벌레 한 재석을 가리며 섰고 휘성 역시 아무데나 앉았다. 망가진 선글라스를 대충 써 피딱지를 가렸다. ‘겨울 1악장’을 끈 찰나 통로가 열렸다. 카트를 끄는 이동판매원이었다.

“우롱차 마실래?”

“물.”

영중은 200엔을 꺼내며 말했다.

“우롱차 주세요.”

중년의 직원이 방긋 웃으며 멈춰서서 허리를 숙여 냉장고를 열었다.

그 다음, 양손에 소음기 단 단총을 꺼내 들고 탄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연신 억눌린 가스가 작렬했다. 시트와 바닥, 벽재가 너덜너덜하게 뚫렸다. 창문에 균열이 일었다. 영중은 재석의 짐가방을 반대편으로 던지고 트렁크를 꼭 쥔 재석을 안았다. 원 형체를 잃고 천쪼가리가 된 가방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화약내가 진동했다. 재석은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건너편에서 바짝 엎드린 휘성이 눈빛으로 쌍욕을 했고, 영중은 어떻게 해보라고 조용히 닦달했다. 휘성이 레이저 포인터를 재차 쥐고 다섯부터 손가락을 접었다. 전부 접혔을 때 직원의 눈을 향해 광선을 쐈다. 여자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영중이 의자를 짚고 넘어 카트를 밀어찼다.

카트에 치인 직원이 주욱 밀려나며 넘어졌다. 허공에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재석은 간신히 고개를 내밀었다. 때마침 휘성이 프리어를 던져 총구를 틀었다.

영중은 음료수를 집어 넥타이로 감고 있었다. 곧바로 천에 묶은 코카콜라 캔을 휘둘러 직원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대개 종결을 알리는 소리다. 그는 잔떨림만 남을 때까지 행위를 의무적으로 반복했다. 핏방울이 튀었다. 김빠지는 소리와 동시에 찌그러진 캔에서 콜라가 샜다. 달짝지근한 감미료향이 넘실댔다. 그가 볼의 핏기를 훔쳤다.

“언제 바뀌었지?”

“오사카에서도 이 분이었어요.”

“처음부터 잠입했겠지.”

휘성은 널부러진 카트를 넘으며 얼음물을 주웠다. 찌뿌등한 왼쪽 얼굴을 냉찜질하면서 열린 냉장고를 닫았다.

“일반인 아냐.”

“저걸 노린 건가?”

그가 재석을, 정확히는 트렁크를 쳐다봤다. 확실히 이것 말곤 특이점이 없었다. 일면식 없는 일본 업자의 표적이 될 이유로는.

“별 관심 없었는데, 이젠 알아야겠다. 대체 어디서 나온 물건이길래 총질하는 벌레가 꼬여?”

“⋯폴로늄. 테러리스트 물건이야.”

영중이 지친 음성으로 털어 놨다. 그는 차라리 해방감을 느낄 뻔했다. 휘성의 눈이 커졌다.

“국내에 들여오는 순간 너도 고리도 수배 돼. 그땐 감독님도 커버 못 해주셔. 그러니까 이만 손 떼, 휘성아.”

휘성은 놀란 기색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차분히 되물었다.

“아직도 윤 감독님이 우릴 관리해?”

사뭇 긴장감이 일었다. 이휘성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어찌 됐건 그는 일을 방해 받았으니까. 눈치껏 듣고 있지 않은 척 딴청을 피우던 재석은 죽은 직원의 유니폼에서 단말기를 찾아냈다.

축 늘어진 손을 가져다대 지문 인식을 풀었다. 운이 좋다는 생각도 잠시 현타가 왔다. 돌팔이, 도벽, 블랙홀을 가까이하는 게 이렇듯 참 해롭다. 그는 혹시 몰라 통화 내역과 메신저를 죽 훑었지만 아예 깨끗한 것이 업무용인 것 같아서 메시지 창를 띄우고 외운 번호를 꾹꾹 입력했다.

🍄 +82 10********

[살아 있음 폰 잃어버림]

午後 11 : 11 [폴로늄이 뭐야?]

휴대전화를 끄고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너흴 감시한 게 아니라⋯.”

영중은 피곤히 눈가를 문질렀다.

“용산이 사무소에 맡긴 일거리가 있었는데, 영역이 약간 겹친 거야. 잠입해 있던 우리쪽 내부 정보원이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캐스팅도 그래서 아신 거고. 말했잖아. 나도 고용됐어.”

“저 꼬마 돌보는 거에?”

그들이 동시에 재석을 쳐다봤다. “저용?”

“⋯어. 사지 멀쩡히 데려오라셔서.”

“네가 감독님 하청인 줄은 몰랐네.”

닥터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부류다.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그래야겠지만. 휘성은 무어라 쏘아붙일 것처럼 바라보기만 하더니 깊은 날숨을 뱉었다. 그렇게 뜨겁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내보낸 것처럼 돌아섰다.

“구본영 어딨어?”

“1호차에 있더라. 어디 가?”

“코요테 잡으러.” 신경질적인 어조였다. 충격을 받아 고장났는지, 총탄이 그리로 잘못 튀었는진 몰라도 닫히지 않은 복도 문은 열려 있었다. 이휘성은 무감하게 직원의 시체를 넘어가면서 피묻은 권총을 주웠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핏방울이 옅어졌다.

기어이 산 자는 둘만 남은 공간에서 재석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하지만 당장 뭘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영중이 힘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동안 재석은 주머니에서 철사를 빼내어 적당한 길이로 풀었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영중이 돌아본다. 재석은 막듯이 그의 등을 짚었다. 단추를 풀어내려 헐렁해진 셔츠가 드러내 놓은 목, 경직된 등을 타고 내려와 무수히 편지를 썼을 손마디를 훑었다. 왼손은 비어 있었고 약지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그럼⋯ 이 트렁크가 저한테 들어온 것도. 형들이 제가 있는 신칸센에 탄 것도”

밤의 장막은 딥블루지만, 격자 무늬를 입은 고층 빌딩이 샛노란 빛을 내뿜으면 도심의 풍경은 해수의 녹색이다. 세상은 심해처럼 시리게 물들어 있다. 붉은색만이 선명해지는 시간이다. 창 밖으로 도쿄 시내가 펼쳐졌다. 네온 간판은 삐뚤빼뚤 쌓아올린 책장 같이 겹겹이 이어져 있고 열차 안으로 불빛이 쏟아졌다. 강렬한 마젠타. 빨강이 그들을 뒤덮는다.

“전부 우연 아닌 거죠?”

안타깝게도 심장 박동은 손끝에 와닿지 않았다. 그가 호흡을 멈추는 것만이 느껴졌다.

“그래.”

재석은 트렁크를 발치로 던졌다. 쿵. 영중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체가 낮추어졌다. 의도한 높이였다. 재석은 곧장 영중의 어깨를 틀어쥐고 목에 올가미 같은 철사를 감았다.

“컥⋯!”

팽팽히 당겨진 얇은 와이어의 진감이 소름끼치도록 완벽히 올무를 꿰었음을 알려주었다.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가장 많이 연습한 방식은 맞았다. 영중은 철사를 붙잡으며 뒤로 쓰러졌다. 그의 신음, 불규칙한 숨, 실을 긁어대는 리듬이 현을 울렸다. 그가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면서 발장구쳤다. 재석은 아랑곳않고 그를 질질 끌었다. 영중은 첼로케이스에 알맞게 들어가진 않을 것 같았다.

끅끅거리며 철사를 연주하는 영중의 짧은 손톱이 점점 지저분해졌다. 따뜻한 피와 굳은 피가 엉겨붙은 탓이었다. 곧 벽이 등에 닿았다. 재석은 막다른 길까지 영중을 끌고 온 채로 객차를 보았다. 온통 탄내와 단내가 났고 탄흔이 가득했으며 찢긴 면직물과 쓰러진 카트, 쏟아진 간식들 위로 갓 퇴직한 시신이 누워 있었다. 맨들맨들한 통로 바닥은 핏물을 흡수하지 못해 잉크 터진 화이트보드 같았고 영중이 끌린 길만 닦여 있었다.

“모두 짜여진 상황인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불꽃도 헬기 소음도 기울어지는 컨테이너에 숨어든, 숯덩이가 될 설익은 인간도 없었다. 전영중은 그때도 거짓말을 했다. 거기엔 정말 어린애가 있었다. 아마 밀항하는 가족들이었겠지. 계획보다 컨테이너 수가 초과됐고 타깃은 하필 조심성이 많았고 우린 그 불법 적재물을 터트리기로 합의했다. 어쨌든. 선원들은 구조됐지만 화물로 분류된 자들은 불속으로 가라앉았다. 과연 몇십 명이나 그날 화물로서 거기 있었는지. 그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

“제가 어떻게 겁을 안 먹어요⋯.”

재석은 벽에 기댄 채 철사를 미끄러지듯 놓았다. 가해지는 압력이 줄자 영중이 벌겋다 못해 창백한 안색으로 기침했다. 그는 심장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밭은 쉰 소리를 뱉으며 웅크렸다. 재석은 반쯤 주저앉아서 속으론 반격을 대비하며 말했다.

“감독님이 영중이 형을 골랐을 리 없어요.”

살인은 매번 어렵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떨리지 않았다.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 사실이 문득 혐오스럽곤 했다. 조재석은 태어났다. ‘새로’나 ‘다시’ 같은 수식어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형은 사람 지키는 덴 소질 없으니까.”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재석은 세상이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누굴 떠올릴까. 미운 사람이었다가 미안한 사람이었다가 하겠지. 어쩌면 둘 다거나. 그에게 죽음과 잃어버림은 같은가 보다.

영중이 어물거렸다. ‘개자식아⋯’인지 ‘재석아’인지 입모양만 봐서는 알기 어려웠다. 목을 뱅 두른 철사에 쓸린 빨간 자국이 꼭 그의 손가락에 있어야 했을 결혼반지 흔적을 닮아서, 재석은 결국 줄을 끊어주었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네 말 맞아.” 바싹 마른 공기를 여럿 토해낸 영중은 마침내 대답했다.

“내 의뢰인은 윤 감독님 아니야. 그분은 통보만 받으셨지.”

재석은 재빨리 일어서려 했지만 이번엔 영중이 빨랐다. 그가 빗장뼈 바로 위 승모근 부근을 꽈악 붙들고는 주먹으로 옆구릴 가격했다. 욱 헛구역질이 났다. 그는 한동작으로 비켜 일어서며 엎어뜨리려 했다. 무릎을 짚고 손바닥을 세워 팔을 쳐내자 영중은 종아리를 걷어차 자세를 무너뜨리면서 후드를 눌러 씌웠다. 시야가 좁혀진 틈에 머리가 돌아갔다. 고통보다 어지러움이 컸다.

팔꿈치로 머릴 비껴친 영중은 재석의 후드를 들어 다시 일으켰다. 포장된 사탕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청록색 필터 속 빨간 빛을 내는 눈동자는 그럼에도 진한 묵색이다.

“그래도 내용은 같아. 약속했어. 널 무조건 도쿄로 보내주겠다고.”

정말 뭐든 믿고 싶어지는 눈이다. 힘이 쭉 빠졌다. 영중은 진중히 말을 이으려 입술을 모았다가, 목이 아파서 일단 한 대 더 팼다. 괘씸한 새끼. “억!” 재석은 얼얼한 턱을 크게 벌렸다 닫았다. 습, 꼴사납게 흐를 뻔한 침을 삼켰다. 재석은 조이는 후드 고무줄에 두 겹이 된 턱으로 간신히 물었다.

“누군⋯데여?”

“근데 재석아.”

그가 후드를 아래로 박았다. 재석도 철퍽 안면부터 엎어졌다가 익은 염통 꼬치처럼 빙글 뒤집혔다. 영중은 찡그리며 웃었다. 입술은 호선을 그렸지만 이마에 핏줄이 섰다. 아주 나긋하고 듣기 좋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내가 보모는 아니잖아. 또 겁날 거 같으면 총 집어.”

‘그땐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라는 말이 우아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재석은 홀린 듯 도리질쳤다. 영중이 짙게 웃는다. 본 것 중 가장 선명한 미소였다.

아, 코피.

악사

달가운 정적이 찾아왔다. 소강 상태로 접어든 둘은 숨을 고르면서 각자 기물에 기대 앉아 있었다. 이제 창 밖은 빽빽한 빌딩숲으로 조경되었고 조명은 따뜻한 난황색이 짙어졌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빨리감기 한 비디오 테이프보다는 통돌이 세탁기 같았다. 창문에 성에가 낀다. 겨울 2악장. 인물이 나타난다.

환자복을 입은 조재석이 돌아가는 5대의 드럼세탁기를 멍하니 보며 평상에 쭈그려 있다. 그는 하루 5시간 정도는 그러고 있다. 세탁기가 멈출 때마다 동전을 넣었다. 딱히 얼이 빠졌던 건 아니다. 그건 턴테이블을 돌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세탁기 안을 비추는 전등. 익숙한 작동음. 비눗물이 돌아간다.

그러나 지금 유리문에는 환자가 없다. 칠칠치 못하게 코피를 훌쩍이는 재석과 고급스러운 원단만 남은 너덜너덜한 정장 차림의 영중이 비쳤다. 세탁기와 해파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쿄와 첼리스트도 그랬다. 그가 더는 미망인이 아니기 때문인가. 

“반지는”

재석은 소매로 피를 대충 문대고 정적을 참지 못하는 척 혀를 뗐다. 한때는 그 고요로 도피했었지만.

“왜 안 꼈어요.”

“처음부터, 3년만 끼기로 했던 거야.”

영중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 같은 호흡으로 말했다. 타워의 누런 등이 달빛처럼 그를 비추다가 건물에 가렸다. 별안간 그가 눈꺼풀을 느리고 정직하게 끔뻑이면서 뻣뻣이 재석을 바라봤다. 재석은 눈을 데굴 굴렸다.

“다는 기억 안 나구요. 비상 점멸등 정도? 껌뻑껌뻑.”

솜사탕 씻은 라쿤이 충격 어린 표정을 했다. 재석은 괜히 따봉했다. “최면 치료 효과 끝내주네요⋯.” 영중이 총을 찾을 것 같아서 어느새 굴러와 있는 P22를 발끝으로 밀었다.

“왜 하필 3년이었는데요?”

아득한 빛줄기를 받는 그의 낯은 시시각각 푸르죽죽했다가 수족관 같았다가 일렁이는 불길을 앞에 둔 것처럼 변했다. 도쿄와 첼리스트는 어울리지 않지만 동경의 파노라마는 전영중과 닮았다.

“아내가 날 감시한 기간이 3년이었거든.”

누구든 조용히 죽어가는 설원에서와 달리 그는 종착역을 향해가는 열차 안에선 침묵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또는 15개월 전처럼, 헤어질 즈음 재석이 잊어줄 거라 믿는 걸지도 모른다.

“용산을 나왔을 때⋯ 사람을 붙일 거라는 건 알았어도. 그렇게 고전적인 방법일 줄은 생각 못했지. 나는 그냥, 남들 보기엔 가정이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내가 괜찮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어.”

“그래서 미웠어요?”

“음. 응.”

영중은 쉽게 동의하고 매우 어렵게 변론했다.

“아무도 아내의 진짜 인생을 몰라. 그 여자는 원치 않은 상대와 원한 적 없는 결혼을 했는데,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불려간 것도 장기기증 동의서에 사인한 것도 나야.”

그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이름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딱 그만큼만 돌려주고 싶었나 봐. 내 아내로 산 만큼, 내 아내로 죽어 있게.”

재석은 이 허영적이고 섬세한 남자를 보고 있으면, 정말 첼리스트가 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재능 있는 청부업자라는 걸 상기하곤 했다. 그는 타자를 파괴하는 데 대단한 재주가 있었다. 그런 이들은 본인을 파괴하는 데도 주저가 없다. 재석은 어쩌면 그에게 산산히 부서지고 싶은 것 같았다.

깨어지려면 가까이 부딪혀야만 하니까. 그리고 망가지는 건 무섭지 않다.

“저한테도 좀 쓰지 그랬어요.”

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석은 내심 머쓱히 덧붙였다.

“⋯편지여. 밉진 않아도 미안해 할 순 있잖아요.”

퍽 진지한 얼굴이던 영중은 곧 피식거렸다.

“수신인 비워둘 때도 많았어.”

“그럼 아무거나 한 장 꺼내서 내 이름 써주면 되겠다.”

“청첩장이야? 양식 있고 이름만 써넣게?”

“사토 상이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했을 때 비슷하게 써봤는데, 받는 기분 괜찮았거덩요.”

“너 진짜”

미쳤니⋯. 영중은 묵음 처리된 끝말을 내뱉지 못했다. 다리를 안고 무릎에 볼을 기댄 꼬마가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다들 형처럼 생각할 거 같죠? 아뇨. 사람들 엄청 단순하게 살아요. 멍청하고 무모하고 무턱대게.”

“널 보면 느끼긴 하는데⋯”

“그분도요. 마지막 순간에 영중이 형은 떠올리지도 않았을걸요. 아주 그리운 것들만 떠올려도 부족했을 테니까.”

조재석은 전영중과는 다르게 생겨먹은 인간이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미워하지도, 미안해 하지도 않았을 사람을 당신 우주 속에 잔해물로 남겨둘 필요는 없다.

“⋯.”

신칸센이 속도를 늦추며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어둠이 닥치는 듯했다가 금세 밝은 전등으로 채워졌다. 영중은 구태여 마무리짓는 대신 땅을 짚고 일어서며 살짝 비틀거렸다가 바로 섰다. 그가 이해했는진 중요치 않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기도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행을 베풀기도 하고 이해 받지 못하기에 좋아하기도 한다.

영중이 바닥에 내려둔 트렁크를 가져왔다. 그가 재석의 손아귀를 힘주어 벌리고 손잡이를 세워 쥐어주었다.

“자유석 칸엔 승객이 있을 거야. 뒤로 가서 내려. 섞일 수 있게.”

그가 재석을 밀고 가 복도 문을 열었다. 정거장을 알리는 전광판이 종점을 띄웠다. TOKYO. 드디어 도쿄역이었다.

“영중이 형은 같이 안 가요?”

“거기까지 하면 야근이야.”

재석은 떼어지지 않는 신발 밑창을 죽 끌었다. 어쩐지 가야만 한다는 직감이 들어서 미적댈 수 없었다.

“잘 가”

영중은 군더더기 없는 음성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는 마침표마저 지운 채 인사했고 재석은 생각했다.

다시 만났을 땐, 이 형 내가 잡아 줘야겠네⋯⋯.

東京 | TOKYO

자정이 가까운 시각, 인적 드문 역사는 을씨년했다. 재석은 트렁크를 쥐고 몇몇 승객들 틈에서 종착점에 내렸다. 그는 후드를 꾹 눌러써 행색을 가렸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을 사로잡혔다.

멈춘 원형 시계가 걸린 기둥 밑에 검은 헬멧에 라이더 자켓을 착용한 남자가 서 있었다. 보일 리 없었으나 눈이 마주친 느낌을 받았다. 역은 한산했으나 사람들이 매우 빨리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잔상을 남기며 지나쳐 가는 동안 오직 헬멧의 남자만 뚜렷하게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엔 빨간 자판기가 있었다. 그는 멀리 있는데도 자판기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의문스런 기시감이 맴돌았다.

재석은 헬멧에게로 다가갔다. 늑대가 수풀을 밟듯이 유연하고 은밀하게 걷다가 탁 트인 평야에 닿은 듯이 점점 뛰었다. 속도가 붙었다. 그러다 단 1초도 흐르지 않은 시계를 보았을 때 다시 천천히 걸었다.

지척에서 본 남자는 재석보다 컸다. 그에게선 낯선 냄새, 시원하면서 탁한 바람 냄새가 났다. 헬멧은 내내 미동도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더니 불투명한 고글에 재석이 비칠 정도가 되어서야 약속된 암호를 말했다.

“에잇볼.”

헬멧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아주 흔한 것 같다가도 묘하게 거슬렸다. 재석은 그새 떼가 탄 트렁크를 건넸다. 남자는 가죽 장갑 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트렁크를 넘겨 받았다. 그러고 보니 저게 폴로늄이랬지. 귀한 거긴 한가 보다.

재석은 수진에게 연락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제야 아까 주운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11통. 재석은 문자 알림을 가려버린 부재중을 죽 내리곤 우선 우리 수습 컨설턴트를 안심시키로 했다. 연결음이 두 번 이어지기도 전에 우수진이 전화를 받았다.

[“야. 전화를 왜 안 받아?”]

어디냐고 안 묻는 걸 보니 위치는 벌써 땄네.

“어, 진짜 많은 일이 있었어⋯ 죽겠다. 방금 물건 넘김.”

재석은 휴대폰을 귀에 대며 돌아서다가 인기척이 아직 가시질 않았단 걸 깨달았다. 헬멧의 남자가 여전히 고장난 시계 밑에 서 있었다.

[“수고했어. 거기⋯”]

재석은 기기를 조금 떨어트리면서 헬멧을 쳐다봤다. 또다시 그가 눈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헬멧에 비치는 건 조재석 자신뿐이었는데도. 그러나 왠지 떠나길 종용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하염없이 열차도 시계도 멈춘 역에 멈춰 있었다. 그건 잠깐의 일탈과 같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재석은 반응하지 못했다. 헬멧의 남자가 재석의 후드 위를 쓰다듬었다. 장난스럽게 문지른 손길은 금방 떼어졌다. 그러고 나서야 남자는 돌아섰다.

[“조재석! 듣고 있어? 교진이 형 만났냐고.”]

“어, 어? 아니.”

넋을 놓고 있던 재석이 대답했다가 뒤늦게 헬멧이 있던 자리를 보았을 땐 그림자조차 없었다.

“교진이 형이 여길 와?”

[“어. 아, 감독님도 같이 계신다고 함. 잘 몰라. 사고 난 사원 있다는 병원 간댔다가 갑자기 감독님이랑 합류했다더니 또 너한테 간다 그러던데.”]

불현듯 묻어 둘 뻔했던 억울함과 분노가 솟아 올랐다. 휴가지에서까지 팔자에도 없던 추가 근무에 시달려 사토 상과의 약속마저 깨고 폭력과 유혈이 낭자하는 시간을 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겠지, 애초에 사고 따위 없었겠지⋯! 와 진짜. 감독님이 날 속였어. 내가 오사카는 가도 제주는 가나 봐라. 우씨.”

[“얘가 많이 힘든가.”]

“야 수진아. 정말 노망 나신 거면 어쩌지. 내가 배려해야 하냐?”

[“감독님 저번 달에만 온라인 포커로 3천 버셨어.”]

“나 사직서 양식 좀 보내주라.”

수진은 다년간 다진 먹금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했다.

[“근데 폴로늄은 왜 물어본 거야?”]

“아 맞다. 있지, 실은”

[“그거 방사능인데. 생화학 테러용으로 가끔 쓰이고. 엄청 희귀하고 비쌈.”]

잠시 뇌가 트래픽 초과 현상을 겪었다.

재석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쪽팔림이고 뭐고 없었다. (그것을 밟고, 차고, 던지고, 품에 안았던 모든 순간들이 반복 재생됐다.)

이런 씨발. 그는 두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꾸우욱 눌렀다.

눈물이 났다. *아주 찔끔*

에필로그

대표 윤 경 택. 비싼 오동나무 데스크에 기대 두꺼운 안경을 닦는 그는 대표라 불리는 법이 잘 없다. 잘나가는 컨설턴트지만 직업으로 불리지도 않았다. 대개는 그를 감독이라 불렀다. 연결된 통화 속 이 청년 역시 그랬다.

「일본에 도움을 주실 만한 선생님이 계세요. 재석이 보내주세요 감독님.」

윤 감독은 지금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째 잠입 임무 중인 사원이 무리해서 연락해오는 것도, 청년을 다급하게 만든 원인은 그의 책임 하에 벌어진 임무 중 사고라는 것도, 부탁 내용도.

「한국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의지가 약한 녀석은 아니니.」

「알아요. 저도 아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윤 감독은 독종이지만 한 아이가 나약해지는 모습을 즐길 만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

「제가 보고 싶어서요.」

그가 아끼는 제자의 하나뿐인 형제라면 더더욱.

「재석이가 보고 싶어요, 감독님.」

[CAST]

에잇볼(마일오) 조재석

악사 전영중

코요테 지국민

버섯 우수진

닥터 이휘성

티모 박교진

고리 구본영

윤 감독(계산기) 윤경택

그리고

파일명16 조형석

동경⁸ 불릿트레인

憧憬 | BULLET TRAIN

이사카 고타로 저 <마리아비틀>과 데이비드 리치 <불릿 트레인(2022)>을 모티브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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