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관 X4 <주종의 재액>
후기 없이 본편 26P 예정 5000원
카이니스 (랜서) 밸런타인과 페그오 메인스토리 2부 5장 올람포스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양쪽 다 숙지하게 읽어주세요.
개인 해석 및 날조가 함유되어 있으니 뭐든 괜찮으신 분만!
CP는
카이니스 X 보다임 (키르슈타리아로 표기했습니다) 베이스
구다(코)마슈 (감정선은 구다 -> 마슈에 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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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탔는데? 먹을 수는 있나? 불길한 상상을 하며 새까만 크루아상의 표면을 누르자 손가락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어? 탄 부분을 조심스럽게 긁고, 버터나이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그릇에 올리니……. 표면만 검게 그을린 거지 제법 그럴싸한데. 떨어진 새까만 부스러기만 무시하면 맛있어보였다. 예술품을 감정하는 감정사처럼,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그릇 위에 올려둔 크루아상을 샅샅이 살핀 뒤, 리츠카는 비장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와. 맛있어.
맛있어! 그리스 시대에는 당연한 거지만 냉장고도 오븐도 없었는데. 서번트로 현현할 때 성배가 주는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그래서 부처가 누구야? 그래서 그, 크리스마스란 건? 기본 상식을 모르는 서번트도 있고. 지식으로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뭔지 몰라 헤매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이 맛과 부드러운 속살은. 진짜 열심히 배웠나봐!
방법을 배운다고 뚝딱 되는 것도 아닌데. 가정 실습 시간에 야심차게 뭘 만들려고 했다가 숯처럼 태워서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팔 걷었다가 결국 보다 못한 선생님이 도와준 기억이 살아났다. 친구들한테는 선생님이 조금 도와준 거고, 내가 다 했다고 허세 부렸지만. 금방 들통 나고 아무도 안 믿어줬지. 리츠카 네가 조금 도와준 거고, 선생님이 다 한 거잖아. 친구들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낄낄 웃었지. 네가 그런 손재주가 있으면 가게를 차리지 왜 여기 있냐면서.
완성품을 만들기까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을지는 모르지만. 리츠카는 자른 크루아상 단면에 버터를 듬뿍 바르면서 아침에 만난 신 소장을 떠올렸다. 오늘 복도에서 마주친 신 소장은 어디 성한 곳 없는 끔찍한 차림이 아니었다. 작은 혹 하나 없이 멀쩡했지. 삭신이 쑤신다면서 어깨나 등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도대체가, 이 칼데아란 것은, 영령이라는 것은 어쩌고저쩌고 불평을 달며 투덜거리지도 않았고.
아무나 막 패고 다니지도 않고. 눈에 보이면 시비부터 걸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이유 하나 없이 짜증을 내고, 상대에게 날카로운 언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신 소장도 그렇고, 카이니스도 그렇고. 과정이 길어지고 실패작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하면 손 정도는 올라갔을 거고, 짜증과 불만을 토해낼 상대긴 했다.
그런데도 평화롭게 완성품을 만들다니. 현대 청소년보다 제과제빵을 잘하는 고대인이라니 신기하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먹은 리츠카는 그릇 위에 나이프와 포크를 뒀다. 탄 걸 긁어내서 생긴 새까만 부스러기와, 주의하면서 먹었어도 잘 부서지는 빵이라 그런가, 흘릴 수밖에 없는 일부분을 빼고는 남김없이 잘 먹었다. 이 정도는 봐주겠지?
“네 말대로 내켜서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 ……마슈에게는 못 줬지만 이해해 줄 거야.”
가지런히 정리한 식기를 앞에 두고 리츠카는 당사자가 없는데도 입을 열었다.
“마슈는 이맘때면 바빠서 나도 잘 못 봐. 매번 엄청난 걸 만들거든.”
처음에는, 재료를 구하는 데만 해도 스물일곱 번이나 레이시프트를 해야 했고, 그렇게 구한 재료로 열일곱 번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한 초콜릿. 두 번째는 초콜릿으로 만든 거 맞아? 눈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화려한 초콜릿 장미와, 마슈 본인을 본뜬 설탕 공예가 올라간 부드러운 스펀지 케이크. 크리스마스, 무슨 기념 케이크에서만 본 적 있는 설탕 공예와 초콜릿 모양에 깜짝 놀랐는데. 칼을 갖다 대니 갖다 댄 방향으로 사르륵 잘 잘릴 만큼 부드러운 케이크에 두 번 놀랐다. 그렇게 잘 잘린 만큼 입에 넣으니 사르륵 녹았고.
세 번째. 저번에 받은 케이크는 세심한 장식도 장식인데. 과일이니 뭐니 올라간 게 참 많았다. 이렇게 올라간 게 많으면 부산스럽고 조잡해 보이기 쉬운데. 절묘하게 배치해 깔끔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센스라니. 리츠카는 먹지도 않고 케이크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선보이며 매번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하고 있는 마슈 선수, 올해는 무엇을 승부로 가져올까요?
그러게 정말 뭐가 나올까? 흥미진진한 호기심 반. 여기서 더 과해지면 조금,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나는 마슈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은데. 걱정 반으로 리츠카는 밸런타인 시즌만 되면 얌전히 마슈를 기다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이랬으면 좋겠다. 짐작 가는 이유가, 짐작 가는? 뻔뻔한 표현에 리츠카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있긴 하지만. 마슈 본인에게 직접 확인할 용기가 없어 묻어둔 탓에 정답을 모르지만. 서프라이즈로 제일 마지막에 건네주고 싶어 하니까. 괜히 가서 초 치지 말고. 이게 뭐야? 진짜 대단해 마슈! 같이 먹을래? 준비가 다 될 때 반갑게 맞아주자. 리츠카가 그렇게 크게 눈을 뜨고 반기면 마슈는 느지막이 웃음꽃을 피우니까.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지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마슈가 부르기 전에, 만나러 가지 않기! 마슈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 생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빵은 오래 두면 금방 눅눅해지잖아. 게다가 수제면 방부제 같은 거 안 넣었을 거고. 보존 마술? 그런 걸 썼다면 미안한데. 나는 했나 안 했나 알아볼 만한 실력도 없고. 당연히 할 수도 없거든. 언제 마슈를 만날지 모르는데 아껴뒀다가 버리게 되면 아깝잖아. 빵은 금방 상하니까.”
빵에 곰팡이가 보이면, 그 빵은 이미 곰팡이가 다 먹은 거라서 건들면 안 된다고 하잖아. 그만큼 잘 상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약간 탄 크루아상을 두고 간 상대가 없는데 리츠카는 열심히 떠들었다. 근데 진짜 맛있더라. 맛있었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건지, 리츠카는 변명처럼 들리는 실속 없는 말을 쏟아내다가 뚝 멈췄다.
기뻐해라 마스터, 네 서번트는 아주 예의가 바르니까.
칭찬을 바라고 으스대는 어린아이처럼.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 세상을 향해 자랑하는 영웅처럼. 호탕한 랜서의 반응에 작게 웃는 상대가 저절로 그려졌다. 마력을 주는 건 후지마루 리츠카가 아니라 칼데아인데도, 이어져 있다는 증명인지. 그들의 과거나 기억이 단편으로 스며들 때가 있었다. 카이니스는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잖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그렇게 스며든 단편 속 인물을 응시한 그 순간, 입 전체에 텁텁함이 고였다.
“……너희는 먹어본 적 없다고 했지.”
고인 텁텁함을 씻어내기 위해 물을 마시고. 리츠카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크루아상을 건네준 카이니스를 생각했다.
그 새끼가 만든 빵은 제법 괜찮았으니까. 너희는 먹어본 적 없지?
그게 아깝더라고.
잠시 눈을 감아 자신만의 밤하늘을 본 카이니스가 그렇게 말했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평범한 사람이라 남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타인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 기술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잔재주가 없어도 눈치 채게 되는 게 있는 법이라서. 진심은 모르고 싶어도 전해지는 법이라서.
신소장님이 준 크루아상이 맛있어서, 이걸 안 먹어본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거구나. 사람들, 구체적으로 누굴까. 너희라, 마슈랑 나에게? 떠오른 대답이 정답이 아니란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슈는 후지마루 리츠카의 첫 서번트니까. 랜서의 ‘너희’ 쪽에 포함 됐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누가, 그 너희에 들어가지?
아마도 같은 마스터인.
켜켜이 층을 내야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못 먹은 게 아깝다는 이유로 랜서가 만들어준 살짝 탄 크루아상. 그런 재주는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을 뭘로 보는거냐? 이정도는 기본이야. 기본. 겉모습만 상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신소장의 재주를 카이니스는 알고 있었고, 부탁할 대상으로 삼은 거지.
리츠카는 크루아상 대신 빈 컵이 올라간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리 최후의 마스터 후지마루 리츠카말고 다른 마스터를 알고 있는 카이니스라면. 황금의 갑옷을 두를 수 있는 신령 카이니스라면.
내가 아는 랜서가 맞아.
근데 왜, 칼데아의 서번트지? 리츠카는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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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기면 내용이 자동으로 머리에 들어와야 하는 거 아냐? 이마를 책상에 박고 리츠카는 쓰러졌다. 하루 종일 책과 글을 보고 있으니까 머리 아파. 처음 칼데아 도서관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아주 자신이 넘쳤는데.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 부근은 다 빌려가자. 부지런히 움직여서 이런 저런 책을 다 가져와 쌓았는데. 막상 읽게 되니 네 권도 안 됐는데 두 손을 다 들었다. 무작정 집어넣겠다고 머리를 쓰면, 뇌가 고장나서 글자는 보이는데 읽히지는 않는 이상한 상황이 되는 구나.
그럼 그림 많은 거부터 볼까. 그림은 읽는 게 아니니까. 크기랑 두께에 맞춰 대충 쌓아올린 탑에서 젠가처럼 한 권 책을 빼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 베이킹 100선. 간단해 보이는 게 없는데? 목차에서 디저트를 찾은 뒤, 페이지를 빠르게 훑었다. 만드는 순서 설명이 스무개가 넘어가면 간단한 게 아니지? 마슈는 어떻게 열일곱 번 도전해서 첫 초콜릿을 만든걸까. 번호가 늘어날수록 미궁에 빠졌다.
좀 더 아껴 먹을걸 그랬어. 초콜렛이니 당연히 달았고. 마슈의 미소와 애정이 듬뿍 담겨져 있으니 입에 넣자마자 음미할 틈도 없이 사르르 녹아내린 탓에, 외형은 기억해도 맛은 막연한 감상밖에 남지 않았다.
마슈가 직접 만든 거야? 이거 진짜 나 줘? 들떠서 뭐 할 틈도 없이, 식당에서 반반씩 잘라 먹었지. 그때 마슈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생생하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중요한 맛이 흐릿했다. 일기라도 써서 남겨둘 걸 그랬나? 써봤자 살육엽병이 칼데아를 습격한 그 날, 무용지물이 됐을 테지만.
아, 이건 되겠다.
밀가루 없이 계란만 넣어서 초코 케이크 만들기. 먼저 초콜릿과 버터를 같이 중탕한 뒤에-.
“초콜릿 케이크가, 드시고 싶으세요?”
문장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이 어색하게 굳고. 방법을 훑던 고개가 기름칠 덜 된 고철처럼 삐걱 이면서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초콜릿이라면 고맙지만 좀 질린다. 더 못 먹겠어.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서번트들이 하나 둘 챙겨준 초콜릿과 답례에 복에 겨운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해서 리츠카는 그 어떤 말보다 먼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 내가 먹을 건 아니고 답례로 주려고.”
“답례라면 이미 받으셨잖아요?”
“받긴 했는데. 아니 내가 주기도 했는데, 그게 아니라.”
남자는 받는 쪽, 여자는 주는 쪽이라는 공식대로 여성 서번트는 마스터에게 초콜릿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단 것을 쥐어주고. 리츠카는 남 서번트를 위한 초콜릿을 만들었다 특별한 날이라서 생긴 분위기에 실제 초콜릿의 냄새까지 섞이는 바람에 2월은 지독하게 단 사랑의 달이었다. 가끔 초콜릿이 서번트가 되거나 초콜릿 공장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사고가 생기긴 하지만.
“화이트데이 준비야, 우리 화이트데이땐 별 거 안하잖아.”
사랑으로 가득한, 달디단 공기로 가득 찬 2월과 다르게 3월은 싱거웠다. 이미 다 줬고 받았는데 더 뭘 하나 싶기도 하고. 초콜릿은 카카오로 어떻게 만들면 되지만, 사탕은 설탕으로 뭘 어떻게 만들지? 감이 안 잡히기도 하고. 리츠카는 한 번 호기심 반, 흥미 반으로 사탕 제조 방법을 알아봤다 얌전히 사탕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뒤로 미룬 화이트 데이지만. 슬슬 챙기고 싶더라. 그렇군요. 마슈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츠카 주변에 너부러진 책을 한 번 살펴보곤 옆 자리에 앉았다.
“이건 준비 작업인가요?”
“아? 응, 뭐 못 먹는 사람들 많잖아. 기어스도 있고 관련 전승이 있어서 기피할지도 모르고.”
“문화 및 종교적인 이유로 피하게 되는 재료도 많죠. 아, 그리스 신화 관련이 많네요. 도와드릴까요?”
“괜찮아!”
도와드릴까요? 마슈가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잡은 그 순간 리츠카는 벌떡 일어나 그 책을 채갔다. 조금이라도 연관 있어 보이면 아무 책이나 다 뺐지만, 이 책은 그런 게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여인. 리츠카는 이걸 보기 위해서 도서관을 찾은 거니까.
이걸 목적으로 찾아왔다가 어느새 생각의 흐름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서 화이트 데이 답례가 됐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됐더라? 아 맞아. 뭐 먹으면서 차분하게 이야기 하면 좋을 거 같아서. 크루아상을 받았으니까, 나도 디저트가 좋을 거 같아서 그랬지.
제일 먼저 읽고 그냥 둔 건데, 그걸 딱 마슈가 잡을 줄은…….
마슈가 잡은 게 왜?
“선배?”
“미안 그냥…….”
그냥, 뭐. 그냥 뭐?
“아니에요 이해해요.”
자기 상태를 모르겠어서 딱ㄸ가하게 굳은 리츠카를 향해 마슈가 밝게 웃었다.
“서프라이즈죠!”
서프라이즈 준비할 때의 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밸런타인 초콜릿 예행연습을 하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크림을 젓는 손이 느려지고. 숨길까? 지금이라도 치울까? 초조해져서 문만을 빤히 바라보게 되고. 재료를 얻기 위해 몰래 레이시프트한 다음날, 리츠카가 레이시프트 신청 기록을 살피고 있으면 안절부절 못했으니까. 그런 경험을 한 마슈기에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화이트 데이에 뭘 한다는 건 알아버렸지만요. 그거말고는, 아니 이것도 포함해서 다 비밀로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선배! 파이팅 포즈가 생각나는 힘찬 제스처를 취하고 마슈가 웃었다.
“마슈는.”
그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뛰다 속 안에 엉켜 있던 무언가가 같이 튀어나왔다.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하면 안 되는데!
얌전히 기다리는 마슈를 보고. 리츠카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마른 공기와 함께 속 안에 자리 잡은 질문을 빼내고, 그 빈자리에 급하게 다른 문장을 채워 넣었다.
“뭐가 받고 싶어?”
항상 마슈가 챙겨주잖아. 그에 비해…… 나는, 항상 받기만 했으니까. 전투 상황에서도 일상 생활에서도 마슈에게 큰 도움을 받았는데. 내 쪽에서 뭘 한 적은 없는 거 같아서. 화이트 데이 답례를 할 거면 마슈를 제일 먼저 찾아가는 게 맞지. 응.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괜찮아요!”
리츠카의 말을 들은 마슈는 과장스럽게 손을 휘휘 저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고 싶어서, 그런 거면 좋겠다. 무심코 떠오른 욕망에 리츠카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정말 괜찮아요. 선배가……. 정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건? 당장 뭘 준비하긴 힘들겠지만. 준비할게. 똑바로 떨어지는 뜨거운 시선에 마슈는 고개를 숙이고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리츠카의 용기에 대답했다.
“그럼 하루만.”
“하루만.”
“반나절이라도 괜찮으니까요…….”
하루만 뭐지. 반나절이라도? 마슈의 말끝을 하나하나 되묻고 싶은데.한 번 해보니 영 아니라서. 리츠카는 조바심을 삼키고 기다렸다. 하루에서 반나절로 줄었는데 여기서 또 말하면 반나절의 반이 될 거야.
“선배랑 같이 있고 싶은데요.”
안 될까요?
부끄러운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마슈를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선배?! 화이트 데이 답례고 뭐고 다 핑계였다고, 다른 목적으로 왔다고. 그런 말 안 하길 잘했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배에게 어떻게 물어봐. 리츠카의 마음 속 저울이 완전히 한 쪽으로 기울었다.
생각도 못한 좋은 약속을 잡아서 실실 웃음이 나오다가도 갑자기 우울이 몰려왔다. 못 물어보겠어. 마슈에게 못 물어보겠어! 이미 다 기운 저울인 줄 알았는데. 혼자 있으니 이리저리 기울고 흔들렸다. 아니 근데 어떻게 물어봐 마슈인데. 괜히 도서관에 가고 책을 읽고 안 하던 짓을 한 게 아닌데!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고 싶었는데. 몰려오는 다양한 감정에 지친 리츠카는 껴안고 있는 베개로 멀리 던지고 벌렁 누웠다.
서번트란 참 복잡하지. 구조나 원리를 보면 단순해 보이는데. 파고 들어가면 어려운 것 투성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닌 인리의 그림자라면서. 지나치게 생생하고 평범하다.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 함께한 기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다른 측면이기도 하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금방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한참 멀었어.
이문대 왕이 이반 뇌제인 이상, 아나스타샤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라서 칼데아에 소환된 아나스타샤는 이문대와 상관없는 범인류사의 아나스타샤였다.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완전 다른 타인인 걸 알고 금방 또래 친구처럼 친해졌지. 그녀가 안고 다니는 인형과 칼데아 미니 서번트가 한 밤중에 몰래 싸운다는 걸 알게 된 날은, 서로 어이가 없고 귀여워서 마주보면서 한참 웃었다.
몸은 이문대에서 만든 로봇이지만 머리는 범인류사 기억 그대로! 이상한 코난 같은 항우도 있고. 어떤 특이점에 가면 그 관련 인물을 기억하는데, 칼데아로 복귀하면 기억이 없어지는 물거품 서번트도 있고. 특이점에서 만난 적 있고 그 관련 기억이 있는 경우. 나는 만난 적 없는데 저쪽은 확실하게 나를 알고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경우.
수많은 케이스 중에서, 카이니스는 으뜸으로 복잡했다. 소환하고 나서 한참동안 고민했을 정도로.
저 카이니스는 내가 알고 있는 랜서인가 아닌가?
3
서번트는 그를 소환한 마스터의 마력으로 현현한다. 기본적인 상식이지만 아종 성배전쟁의 흔한 패인일 정도로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대영웅을 소환해 기분이 고양 되고. 거기다가 서번트가 영웅다운 배포로 자기를 받들어주니까 우쭐해져서. 그게 아니라도 영웅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당하지 못하는 마력에 순식간에 빨려 죽거나 제대로 패를 쓰지도 못하고 허덕이다가 진다. 그렇게 바보 같은 사례가 많아지다 보니, 대비책을 준비해 두는 곳도 늘었다.
칼데아도 그런 대비책이 있었다. A팀은 한 마스터당 한 서번트.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곱 기를 고른다. 수많은 서번트와 협력을 맺게 된 지금은 최후의 마스터 본인이 아니라 칼데아가 그 마력을 충당한다. 이성의 신에게 공상수를 나눠 받은 크립터는. 크립터 본인이 자력으로 해결 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 말고 다른 지원을 바라는 건 뻔뻔하지 않은가?
칼데아와 달리 수많은 영령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서 부담도 적고. A팀으로 있을 시절 다들 이렇고 저런 영령이 가지고 싶어. 된다면 어디가 좋은데. 뭐가 좋아. 구체적으로 희망하는 클래스와 상대가 있었으니 별 문제 없이 소환해 데리고 다닐 테지만.
키르슈타리아 보다임만은 달랐다. 엘리트 마술사. 훌륭한 가계가 배출한 희대의 천재. 친 가족조차 두려워하는 그의 끝없는 재능까지. 그를 수식하는 모든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아니 평범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도 그는 기준 미달이었으니까. 그의 수식어가 초래한 결과였다.
예상한 범위 내라 본인은 대수롭게 않게 여겼지만 그의 랜서는 아 그러냐, 태평하게 넘길 수 없었다. 몸 상태를 알고 계약했고, 그 점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로 퉁칠 일인가? 남의 호흡기를 쥐고 있는 거라고. 그런 부조리에서 나온 분노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태평하게 구는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여간 마스터의 마력이 기준 미달이라 이따금 패스가 고장 날 때가 있으니, 직접적인 수단을 써야할 때가 있었다. 마술사의 몸은 오드가 넘쳐나니까. 그 오드를 지키기 위해서 약한 마술사들이 머리를 기르고 체액을 모아 중요한 순간에 써먹는 것처럼. 키르슈타리아도.
침을 뱉는 것처럼 거칠게 입을 뗀 카이니스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키르슈타리아는 입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그’ 키르슈타리아 보다임인데도 이런 노골적이고 세속적인 수단을 써야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필요한 행위라는 건 알고 있지만 서로 입을 맞춰 점막을 훑는 행위가 부끄러워서.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수많은 추측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카이니스는 자기 마스터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뻔해.
“역시, 혀도 살이군.”
“뭐?”
그리고 그 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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