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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약속 미스라 드림

꼼님 커미션!

잠깐 by 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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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니까. 할 일을 마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섭리고 당연한 복지 아닌가. 뭔지는 모르지만 이 세계는 거대한 재액이라는 게 있어서, 이게 방치되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인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까 일단 데려올게! 세계를 구할 중요 인사니 각국은 널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대할 거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의식주는 아무것도 걱정 안해도 돼. 그런 설명 없이 냅다 데려온 거니까. 할 일을 다 하면 돌아가는 시스템 자체는 당연히 있어야하는 장치였다. 살아갈 세상이 다른 걸. 정령도 마력이라는 것도 없고 마법사도 없는 세상이 현자의 원래 있을 곳이니까.

근데 왜 기억도 없어지는 걸까? 현자의 마법사는 저번 현자에 대한 걸 기억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마법사들이, 특히 북쪽 마법사들이 그런 걸 기억하고 기념하는 타입도 아니고. 수천수백년을 산 그들에게 일 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라 비유적으로 말하는 줄 알았는데. 새 현자가 오면 저번 현자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어 사라졌다. 물을 쏟으면 당장은 그 쏟은 흔적이 남지만, 닦고 치우다 보면 어느새 휘발되어 물이 있던 흔적도 남게 되지 않는 것처럼. 히스클리프는 현자에게 선물로 준 오르골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아서는 자기를 동생처럼 아껴준 현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되는걸까?

영혼이 박살나긴 했지만 일단 세기의 지자고 모든 학문의 어버이라고 할 수 있는 무르 하트도 현자와 현자의 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이방인인 모리 아이리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지만. 감히 추측해보자면……. 마음때문이 아닐까.

마음이라는 건 뭘까? 사람마다 내리는 정의는 다 다르지만. 일단 마음가짐, 각오, 다짐 뭐 그런 걸 위주로 가정하고 얘기해보자면.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쓴다. 하늘을 날고 싶다고 다짐하면 하늘을 날 수 있고. 강하게 내리치고 싶다고 바라면 강하게 내리칠 힘을 갖게 되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 먹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빛무리 필터를 실시간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하지만 인간과 별 차이가 없어서. 아니 똑같은 사람이라서 마법을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는 없어보였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자산이니까. 평범한 사람도 짜증나거나 초조해지면 다급해져서 될 일도 안 될 때가 수두룩하고. 우울해지면 움직이기도 싫어지는 것처럼. 마법사도 다급해지면 생각한대로 잘 못하고. 우울하고 침울해지면 마법이 잘 안 나오고 그런다.

그런 그들에게 이미 떠나서 없는 존재한테 마음 쓰지 말라고. 여력을 남겨두지 말라고.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기억이 날아가도록 누가 프로그래밍 한 게 아닐까?

봐봐. 싸우다가 갑자기 적이… 저번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충격에 빠지겠지만. 다들 기억 못한다면 평범하게 싸울 수 있겠지. 저번 현자와 함께 했던 추억을 말해도 기억 안나니까 소용 없을테고.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저번 현자님이 좋았는데, 이번 현자님은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소리가 안 나올테니까. 얼마나 좋아. 이미 간 전임을 찾는 것만큼 팀 분위기에 안 좋은 일도 또 없었다. 저번 현자님은 끔찍했는데 이번 현자님은 마음에 들어. 이런 것도 없을 거 아니야. 비교할 대상이 기억 안 날 테니까.

이거 제법 그럴싸한데. 현자의 마법사를 위해서, 그리고 현자를 위해서. 모든 이의 만전을 위해 기억을 날리는 거구나. 섭섭한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납득 할만한 이유를 떠올리고 아이리는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할 수 있으면 내가 마지막 현자고, 다 끝내고 돌아가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고. 정말 그렇게 끝낸다면, 거대한 재액이 없어지고 나서도 현자가 올까? 모르겠으니. 그냥 정석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나는 돌아가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니까. 그걸 핑계 삼아서 못되게 굴거나 그러지 말아야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들 잘해야지.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지. 신학기 OT 듣는 신입생처럼 그렇게 다짐했고.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어떻게든 해내고 무사히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현자로 있을 무렵에는 이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적어도 송별인사는 하고 헤어지고 싶다. 졸업식처럼 기분이 이상할 거 같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서운하고 허전해서 엉엉 울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숙취 온 것처럼 머리가 멍해,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나 마법관에서 집으로 온 거야? 꽐라가 돼서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날 동기 애들이 택시 태워서 보내준 게 아니라? 아니 진짜. 마법사가 있는 세계에 갔긴 했나? 너무 갑작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와서, 여태까지 즐긴 비일상이 다 꿈만 같았다. 

다른 세계에 훅 떨어져서 당황했던 것도. 친해져서 울고 웃었던 날도. 서로를 알아간 것도. 진짜 죽을뻔해서 말도 안 나왔던 추억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이럴때는 꿈 속에서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나비였는데. 호접지몽이 더 맞는 말인가?

그치만 꿈은 아니야. 날짜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은 아이리는 손등에 있는 기묘한 흔적을 발견했다. 현자의 마법사가 됐다는 증표, 검은 백합의 문장이 남아있는 건 아니고. 어린애들이 장난치다 사인펜으로 그은 거 같은 검붉은 선이 손등과 손바닥에 일직선으로 남아있었다. 

이게 뭐냐면. 그 흔적을 발견한 아이리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미스라의 피잖아!

저기요. 이리와보세요. 표현은 공손한데 태도와 목소리는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미스라가 아이리를 불렀다. 그리고 아이리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라고 묻기도 전에 팔을 끌어당겨 가까이 가게 시키더니. 갑자기 손을 이리 달라고 하고 뭘 그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슥슥 그어서 무슨 마법으로 그리는 줄 알았는데. 익숙한데 생소한 냄새가 자꾸 나서…. 철 비린내가 코 끝을 찔러서….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을 참고 물었고. 미스라는 매개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머리카락은 짧아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금 피로 네 손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인정했다.

마법사들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많이 보긴 했지만. 살다살다 타인이 자기 피로 손에 그림을 그리는 경험은 처음 해봐서. 어떻게 반응 해야할지 몰라 딱딱하게 굳은 아이리에게 미스라는 딱 두 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기억하세요.

저는 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그랬지. 그리고 그 뒤에 이 손에 대해서 상담하고 싶어서 오즈를 찾아가다가 갑자기 시야가 휘청거렸고. 정신을 차리니 집에 돌아와 있었다. 

꿈인가? 현실인가? 알 수 없으면 볼을 꼬집어보고. 아프면 현실, 안 아프면 꿈이라고 구분하는 건 흔하지만. 남의 피가 내 손에 발라져 있어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다니.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일에 아이리는 웃으면서 일단 손을 닦았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고 미스라도 까먹겠지만. 다음 번에 만나면 이러지 말라고 해야지. 놀라니까.

뭐야 그 사람 벌써 돌아갔어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네…….

현자의 마법사가 저번 현자를 잊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 고민을 안 한 사람이 있을리가 있나. 북쪽은 수십 수백을 현자의 마법사로 살아온 이들이 많았고. 다른 마법사들도 한 번쯤 의문을 가질 주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 같은 답을 내렸다. 마음 때문 아닌가.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쓴다.

저번 현자는 쓸만했는데. 이번 현자는 영, 글러먹었군 이런 놈이랑 누가 같이 싸우고 싶겠냐? 사기가 떨어질만한 요소를 배제한 거겠지.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할 수 없으니,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마법사뿐만 아니라 현자에게도 저번 현자는 기억 못하는 게 좋았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너말고도 많이 했다는 안정성과 보편성이 보장되면서, 이러면 된다 저러면 된다 어느 정도 매뉴얼이 있는 거니까. 자기 마음대로 내 페이스대로 척척 하면 되는 일인데. 어디서 막히면 저번 사례를 참고할 수도 있어. 마음 편히 세상을 구할 수 있겠지.

현자와 현자의 마법사의 효율성과 마음을 고려해서 기억이 날아간다면…….

기억하는 게 더 좋을 경우는, 기억이 남나?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이면 당연히 남아야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으나 시도 해볼만 한 일이었다. 

저번 현자는 언제부터 기억 안났더라. 아서나 히스클리프 카인이면 모를까. 북쪽 마법사는 마법관에 같이 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기억이 흐릿했다. 스노우와 화이트는 저번 현자 말이냐? 리먼이라고 했다. 아직 어린데 성실하고 조금 엉뚱했지. 교류가 있어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둘에게 질문해서 알게 될 바에는 그냥 대충 어림짐작 하는 게 나았다. 

뭐 안 잊을 거니까 상관없나.

저는 뭐든 할 수 있고 못하는 게 없어요. 에이스거든요 에이스.

다른 세계에서 현자를 데려왔다면, 이 세계와 그 세계를 잇는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거고. 공간과 공간을 잇는 연결 고리를 찾아서 열어내는 건 미스라의 특기였다. 어느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북쪽 나라에서 중앙 나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미스라는 전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문을 가지고 있었으니. 세계를 대상으로 문을 여는 것도 자신 있었다.

처음에는 잘 안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되겠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까 실패해도 괜찮아. 그런 생각으로 도전하려는 게 아니었다. 안 될리가 없어. 내가 연다고 했으니까. 이쪽에 가까웠다. 그야 미스라는 북쪽의 에이스였고, 할 수 있는 아이니까. 그 사람만 현자만 기억하면 됐다. 나는 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미스라 본인이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한, 그 자신감과 믿음은 고스란히 마음이 되어 힘이 된다. 처음 시도해보는 일이니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매개가 될 피도 표식으로 남겼으니 못 찾을리가. 현자의 방 문을 노크하는 걸 상상하며 미스라는 크게 주문을 외웠다.

미스라는 떠올리면 안심 되는 추억 있어요? 그러니까 혼자 있어서 외롭거나 기운 없을때 이걸 생각하면 기운 좀 난다. 좀 덜 외롭다. 그런 거요. 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가요?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아이리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빠르게 화제를 이어갔다. 의외로 미스라는 대화를, 그러니까 상대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걸 좋아해서. 말의 템포를 하나 올려 조잘조 떠들면 들어는 준다. 대화 내용을 이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아 뭐어 귀찮은데요를 반복하지 않고 얌전히 들어주잖아. 그러면 된 거지? 대화라는 건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립하는 거니까.

아마도 정말 아마도 추측이지만, 미스라는 타인과 대화해서 새로운 걸 알아가거나 전달 받고 싶은 일반적인 유형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유형 아닐까. 따분한 듯이 목을 괴지도 않고 잠자코 듣는 미스라를 보면서 아이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속도가 적당하고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소리가 좋은 거지. 자기 전에 차분하고 평화로운 노래를 듣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급박하고 격렬한 노래를 듣듯이. 흥분 했을때는 느리고 조용한 노래를 들으면 좋고. 울적할때는 신나고 과장스러운 노래를 들으면 좋듯이. 미스라는 적당한 길이와 크기를 가진 목소리를 듣는 게 좋은 거야.

보르다 섬에 나타난다는 과거를 비추는 이상 현상을 설명하면서 가볍게 얘기하는 주제기도 했고. 다른 마법사들이면 몰라도 미스라니까.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리가 슬슬 마무리 짓고 다른 이야기 해야지. 화제를 바꾸려는 순간 미스라가 입을 열었다. 

딱히 없는데요. 

역시 그렇죠? 미스라는 마음대로 하잖아요.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그냥 있고. 자유롭고 마음대로 하는 게 북쪽 마법사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치만 정말 없어요? 진짜 하나만 딱 하나만 더 없나요?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별 거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아이리는 더 캐묻고 싶다는 마음과 저정도라도 대답해준 게 어디야, 넘어가자는 자아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다. 외로울때 미스라가 뭘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 이 상황을 조금 얼버무리고 싶은 마음도 있는 건, 내가 언젠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현자라서 그런 거겠지. 

느닷없이 찾아온 만큼 전조도 없이 팍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알고 싶은 만큼 외면하고 싶은 거겠지?

아이리가 혼자 정반대의 마음을 다듬고 있는 사이. 가만히 잘 있던 미스라가 갑자기 쾅하고 벽을 내리쳤다. 잘 있다 난데없이 큰 행동을 취하는 건 미스라를 비롯한 북쪽 마법사의 특성이고.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 아이리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이럴땐 무슨 일 있어요? 보다는 왜 그러냐고 묻는 게 효과적이지. 

……왠지 막. 좀 간지러워서요.

간지러워요?

치렛타랑 있을때도 종종 이랬는데. 왠지 모르게 막, 이런저런 게 간지러워서. 

간지러워요? 아이리는 그 말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고. 미스라는 짜증내면서 여기저기가 간지럽고 뭐 어떻다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스라 답지않게 자세하게 풀어 말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앞 뒤 중간 가리지 않고 자른 두서 없는 내용이 됐는데. 아이리는 집중해서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린이가 자기 상태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 뭔지 모르겠을 때는 무조건 아프다고 하고. 갓난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울고 보는 것처럼. 상식과 교육으로 아이리는 미스라의 이상 상태를 바로 깨달았다. 미스리도 모르는 감정이 있으면 가장 강한 감정을, 짜증을 내는구나. 의외로 사람 말을 듣는 걸 좋아하는 미스라가, 누군가와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을때 간지럽다고 짜증을 내. 그럼 지금 미스라는 뭘 모르는 걸까?

미스라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자유롭지만, 남과 어울려 사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야.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어울리면서 생기는 상황이나 감정을 분류할 방법을 모르는 거야. 짜증나요 귀찮아요 모르겠어요. 거기서 더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크게 크게 대충 넣어두고 잊어버리는 거겠지. 

아이리는 전공대로 그리고 사적인 이유로, 미스라의 손을 잡았다. 

루틸과 나랑 함께. 마법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미스라가 감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좋겠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짜증나요. 행동이 거슬려서 짜증납니다.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서 짜증납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괜찮으니까. 미스라가 좀 더 세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많아지면 좋겠어. 뭐든지 아는 게 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게 되면 분명, 미스라의 힘이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미스라가 자기 손을 내치지 않는 걸 좋은 신호로 여기면서. 이 마음을 상대는 모르지만, 몰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아니 내가 분명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어 응 엄마. 응 잘 지내지. 아 뭐? 안 보내줘도 돼. 지금 냉장고 꽉 찼어. 저번에 보내준 반찬도 아직 덜 먹었는데 또 뭘 보내. 진짜 괜찮다니까. 아니 굶고 안 지내. 아…… 사양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다고. 아니, 그, 아니 혼자 사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한 입이 두 입 됐다고 많이 달라지겠어? 우리 언니 그렇게 많이……. 아니 많이 먹긴 한데. 내가 많이 안 먹잖아. 그래서 남아. 진짜 괜찮아. 나 끊는다. 어어 잘 지내 걱정 마. 어어. 

요즘 연락이 뜸한데 잘 지내냐는 동기의 안부 문자가 정신 차리니 교수님이 네 근황이 궁금하시단다로 이어져 연말 약속이 잡혔다. 이리저리 치이다가 첫 차 시간을 기다려야하는 이른 아침과 늦은 새벽사이.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귀갓길. 엄마한테서 온 안부 전화를 받은 아이리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원래 가족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이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애틋해진다고 하지만. 너무 애틋해졌다. 저번 주에 온 택배도 반이나 남았는데. 또 뭘 보내. 원래 쓰던 본가 방보다 조금 넓은 방에 그렇게 큰 냉장고가 있을 리가 없는데……. 

혼자 자취할 때는 안 이랬는데. 동거인이 생긴 이후로는 뭐 부족한 거 없냐고 고맙고 부담스러운 전화가 늘었다. 혼자 살때는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네가 동거인을 구했다고 해서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몰라.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치만. 처음에는 느닷없이 동거인을 구했고 저번 달부터 같이 살겠다고 고백한 딸한테 엄청 잔소리 했으면서. 순식간에 손바닥을 뒤집는 태도가 참.

동거는 잘 생각해보고 해야 하는데. 누구랑 하니? 같은 과? 다른 친구? 관리비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요즘 세상도 참 흉흉한데. 여자애 둘이서 괜찮겠어? 같은 대학 아이면 걔는 원래 어디서 지냈는데? 무슨 골치 아픈 일 있는 건 아니지? 괜찮아?

고생했던 그 당시를 떠올린 아이리는 헛웃으면서 휴대폰을 들고 아무 숫자나 눌렀다. 아무 번호나 여덟 번 누르고 기다릴 것. 그게 아이리와 동거인이 한 규칙 중 하나였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보다 늦게 되면, 당장 연락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용무가 끝나 집에 돌아갈 때는 반드시 신호를 보낼 것. 신호를 보냈으면 그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릴 것.

"오늘은 늦었네요."

그래야 마중 올 수 있으니까. 인적 드문 역사에 발걸음 소리도 없이 거목같은 인영이 나타났다. 비쩍 마르고 크고 긴 몸체에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미스라. 많이 졸려요? …자다 왔어요?"

"네에 뭐. 당신이 없으면 대체로 자니까요. 일 다 끝난 거죠?"

혹시 몰라 집에서 나올 때 가져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아이리는 주변을 살피고 손에 들고 있는 담요를 미스라의 어깨에 둘렀다. 

이른 시간 마중 온 미스라의 얼굴보다 먼저 상체에 시선이 닿았다. 뼈가 보일만큼 비쩍 말랐는데. 유독 살이 오른 부분이 있다. 목이 덮이는 건 싫어요. 갑갑해서 짜증나니까. 미스라의 요구대로 대부분 파인 옷을 산 과거를 후회할 정도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크게 출렁거리는 가슴이. 진짜.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진짜.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네…….

평소에는 그래도 새빨갛고 긴 머리카락과 기이다란 체격에 시선이 분산 되니까 괜찮은데. 인적 드문 곳에서 단 둘. 그것도 졸린 상태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온 미스라는 조금, 살짝……. 

아니 좀 많이…….

"안 가요?"

"아, 아뇨 가요. 가죠. 어서 가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시선을 맞추기 위해 미스라가 무릎을 굽히자 아무런 고정 장치가 없는 가슴이 자극적으로 튀어올라 순식간에 아이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자극적인 동거인이 생겼냐 묻는다면. 

그러게? 

……아이리의 바람대로 미스라는 자기 감정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영문도 모르겠는데 온 몸이 간지럽고 짜증나는' 게 외로움의 반응이라는 걸 깨달았다.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 미스라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이니까. 

가장 자기다운 선택을 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면 되는 거죠. 그 말처럼 미스라는 차원을 뛰어넘는 대 마법을 성공 시켜 위대한 재앙이 떠있는 세계가 아닌, 아이리가 사는 세계로 찾아오더니 외로움이 채워질 때까지 남겠다고 선언했다.

잠깐 왔어요. 곧 갑니다. 그랬으면 미스라와 다시 만난 재회가 마냥 반갑고 그랬겠지만. 여기서 한동안 지낼 거라고 하니 마냥 당황스러운 아이리는 미스라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시도를 했다. 

미스라 여기서 지내려고 하면, 여러 가지 지켜야하는 규칙이 있는데요. 뭔데요?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듣기만 하고 지켜주지 않으면 제가 곤란해져요. 일단 돌아가 주세요. 지킬게요. 정말 지킬 수 있어요? 지키겠다니까요?

"저희 세상에서는 남녀 둘이서 동거하기 힘들어요. 약속한 사이가 아니면, 저희 집에선 불가능에 가깝고요."

결혼도 일종의 약속이니 거짓말'은' 안 했어. 이러면 돌아가겠지. 아이리가 안심하기 무섭게 미스라의 입에서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그럼 약속할게요.

그런 말이면 충격이라도 덜 했을 텐데.

"아 그래요? 귀찮은 세상이네요. 동성은 어떤데요?"

"네?"

"동성은, 상관없나요? 변신 마법을 상시로 쓰는 건 귀찮지만. 뭐, 여기까지 오는 것보단 쉬우니까 됐어요. 또 다른 규칙은 뭔데요?"

"네에?!"

187cm 미스테리어스하고 변덕스러운 색기를 내뿜는 미청년이 순식간에 185cm 미스테리어스하고 변덕스러운 색기를 내뿜는 다른 종류의 미청년이 될 때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고.

가릴 생각이 없는 건지, 검은 와이셔츠를 제대로 잠그지 않아 보이던 흉흉한 목과 가슴의 흉터 자국은……. 둥글게 부풀어오른 살에 부각 되어서……. 검은 와이셔츠 단추에 봉긋하게 솟은, 무언가의 흔적을 보자마자 아이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미스라!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짐승 같은 남성도 문제지만 짐승 같은 여성은 더더더 문제구나. 문제투성이지만 나쁘지 않은 동거 생활은 그렇게 시작 됐고. 시작에만 좀 당황했지. 지금은 신호를 보내 마중 와달라고 할 정도로 적응했다. 

이상한 동거 생활엔 적응 해도 미스라의 모습엔 적응 못했지만. 이건 남성 여성 상관없이 아이리에게 자극적이라 어쩔 수 없는 거니. 무시해도 되는 문제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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