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덩

[ㅅㄹㄷㅋ/백호군단] 난리법석 요란스런 그 별의 이름은

태양이 뜨기 직전, 붉은 선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노구식은 오랜만의 귀성에도 얼굴을 채 피지 못했다.

이유는 다양하다. 귀성 직전까지 야근에 시달린 탓에 사회인의 고단함이 온 몸에 배기도 했고, 토요일 새벽에 도착했기에 아직 본격적으로 몸을 풀지 못한 탓도 있다. 친숙한 이부자리에 몸을 감싸 오후까지 휴식을 취하고 나면 분명 동태눈깔이 생태로 얼추 돌아왔을 터이나, 아침 댓바람부터 온 전화에 그것마저도 텄다. 노구식은 어머니의 호출에 눈 감은 채로 전화기까지 네발로 기어갔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살의가 피어올랐다. 어떤 자식이야. 이 동네에서 그의 귀성 소식을 아는 이는 손에 꼽았다. 그러나 그놈들일 확률은 적다. 어젯밤에 유성우를 본답시고 뒷산 공터에 모인다 했으니까. 분명 적당히 자리 잡고 하늘 좀 보는 척 하다가 술이나 깠을 거다. 한잔 걸친 이상 이 시간까지 뒷산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게 뻔했다.

이건 추측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쌓은 우정에 기반한 확신이다. 그러니 분명 회사겠지… 죽일 놈들. 주말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고향에 온 김에 그냥 퇴사해버릴까. 앗, 안 되는데, 대리 개새끼 턱은 돌려버리고 퇴사해야 하는데….

그러나 이 순간 회사는 무고했다. 수화기 너머 터지는 목소리는 회사의 그 누구도 아니었다. 애초에 호칭부터가 달랐다. 어른 노구식을 ‘뀨’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친구 노구식만의 호칭이다.

‘뀨식이 일어났냐!’

“…용팔이?”

‘야 우리 지금 호열이 집이거든. 얼른 와라, 긴급 소집이다!’

“너 이 자식 나 새벽에 온 거 알면서 이러냐?”

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이러지! 귓가에 선명한 벗의 목소리에는 요만큼의 미안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거 중요해봤자 직장인의 수면보다 중요할까? 그나마 소리부터 치지 않는 건 용팔 또한 어엿한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이용팔도 얼마 전 수면 문제로 주로 찾던 야식 종류를 바꿨다고 했다. 일단 긴급 소집이란 단어까지 운운했으니 급박한 일이긴 할 거다. 그래도 구식은 듣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

의외로 여기서 대화가 멈췄다. 용팔이 에이씨, 그러니까, 어휴, 따위의 말을 뱉는 게 가늘게 들렸다. 그러다 더 가느다란 목소리가 겹쳤다. 구식이 녀석 아직도 출발 안 한대? 수화기를 뺏어 들었는지 덜거덕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김대남의 굵직한 외침이 구식의 귀에 싸대기를 날렸다.

‘너 빨랑 튀어 와, 지금 여기 백호 왔으니까!’

“강백호가 왔다고?”

걔가 여기서 왜 나와? 예상을 현저히 벗어난 대답에 구식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미국 대학에서 잘 지내고 있을 애가 왜? 갑자기? 자세한 설명은 와서 들으라며 대남이 전화를 끊었다. 구식은 당장 입은 잠옷을 살펴본 뒤 바로 나가도 괜찮다고 결론 내렸다. 모자 하나만 추가하고 달음박질로 호열의 집으로 갔다.

“왔냐.”

문을 두드리자 집주인인 양호열이 나왔다. 미국에 간 놈만큼은 아니지만 그들도 간만에 만난 건데 영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안 나왔다. 호열은 아주 심각하고, 초췌해 보였다. 얼굴이 나올 정도만 문을 연 호열은 양옆을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하나. 구식의 감상은 실내로 들어가서도 한결 같았다.

어두운 부엌에 다 아는 뒤태가 있다. 대남과 용팔이 구식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형광등은 꺼져있지만 식탁에 조명이라도 켰는지 은은한 빛이 두 사람의 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구식은 의아하게 현관과 부엌을 번갈아봤다. 눈에 띄는 빨강 머리, 웬만해서는 숨길 수 없는 커다란 덩치가 없다.

“백호 녀석은?”

강백호 왔다며? 현관을 돌아보며 물었으나 호열은 침착하게 문을 잠그기만 했다. 그의 양손이 하얗다. 두터운 탈지면이 양호열의 손바닥에 덧대어져 있다. 어쩌다 다친 거냐고 묻기도 전에 이번에는 부엌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대남과 용팔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식탁 옆으로 한 발짝 이동했다. 그러자 한가운데에 놓인 조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남이 정확히 조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식아. 인사해라. 백호다.”

…아무도 대남의 말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구식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라움의 표현이 아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이 새끼들 그럼 그렇지. 내가 결국 이럴 줄 알았다.

기어이 약에 손댄 게야.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세 쌍의 시선 앞에, 구식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로를 찾았다. 얼른 이 악의 소굴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웬수 놈들을 보아하니 이미 속내를 들킨 듯하다. 삼 대 일이냐, 비겁한 자식들아. 눈을 질끈 감았다.

산소 때문일까, 수면 때문일까, 아니면 공기 중에 만연할 약을 한 두 모금 마셔서 일까, 조명의 불빛이 몽환적으로 일렁였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유성우가 쏟아져 내린다는 날. 백호 군단 중 셋은 그날 다 같이 유성우를 관측하기로 약속했다.

별빛에 관심 있는 낭만가는 없다. 그저 사소한 이변을 핑계 삼아 만나고 싶을 뿐이다. 일상을 보내기만 하면 자연히 만나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서로 노력해야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멀어질 사이를 방치하려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백호 군단은 주기적으로 근황을 공유하고 간간이 얼굴을 맞댔다. 조금이라도 재밌을 법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서로를 찾았다. 이번에도 누군가 운을 뗐다. 야, 뉴스에서 조만간 별똥별 내린대. 보러갈 사람?

달빛 아래, 별빛 아래, 가로등 불빛 아래, 제각각의 체구를 가진 청년 셋이 산을 올랐다. 그들이 돗자리를 깐 공터는 고등학생 시절 천문학 동아리가 특별한 행사 날 하늘을 관측할 때 찾은 장소다. 지금은 안전 문제로 학교 옥상에서만 관측을 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천문학부는 이곳을 모르고 그 시절의 천문학부는 이곳을 두고 떠났다. 그러니 그 시절을 기억하고 여길 떠나지 않은, 천문학부와 관계가 일절 없는 그들만이 명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심심할까 봐 챙겨온 라디오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 사람은 방송을 흘려들으며 주전부리를 야금거렸다. 이따금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어!’라고 외치면 두 명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식이었다. 유성우라고 하더니. 장대비보다는 가랑비에 가까웠다. 용팔은 머리를 치켜드는 게 불편해져 벌렁 드러누웠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를 따라 차례차례 돗자리에 몸을 뉘었다.

“별로 막 쏟아지지는 않네. 너희 소원 빌었냐?”

“빌려고 하니까 사라지던데.”

“나도.”

“무슨 소원 빌고 싶어?”

호열이 물었다. 용팔은 반사적으로 말했다. 복권 당첨. 앗, 나도. 대남이 손을 들었다. 복권은 샀니? 아니. 대남의 손이 도로 내려갔다.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동안 밤하늘에는 별빛만 반짝였다. 조금 지루해진 대남이 하품했다.

“이럴 거면 그냥 토요일에만 만날 걸 그랬다.”

노구식이 주말에 본가로 온다고 하기에 세 사람 다 토요일 저녁 시간을 비웠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금요일까지 만날 필요는 없었다.

“우리 셋이서는 그나마 자주 봤잖아.”

“난 너희 소원 빌 거 있는 줄 알았지.”

“나도.”

“그럼 얼른 소원이나 생각해. 바보들아.”

엇비슷한 대화에 대남이 눈을 굴렸다. 끙. 용팔은 몸을 일으켜 아까 딴 캔맥주를 홀짝였다. 캔에 입술을 떼고 나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호열을 돌아봤다. 걔는 요새 잘 지낸 대냐? 호열이 머리를 바닥에서 떼 용팔을 쳐다봤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곧장 알아들었다.

“백호? 뭐 괜찮던데. 며칠 전 통화했을 때 중요한 경기 앞두고 있다더라. 이번이 주전으로서 첫 경기래.”

“오, 드디어 승진했구먼. 이제 좀 더 높으신 분 눈에도 들어오겠어.”

“고생 많았지―”

“벤치는 못 견디겠다고 심통 낸 게 엊그제 같은데.”

대남이 키득거렸다. 미국의 일을 말하는지 그보다 더 먼 과거를 말하는지는 불분명했다. 굳이 구분 짓지 않아도 될 얘기라, 용팔과 호열도 구태여 묻지 않고 킬킬 웃기만 했다. 대남이 벌떡 일어나 맥주를 들었다.

“야, 소원 빌 거 정해졌다. 백호 녀석 첫 주전 경기 잘 뛰게 해달라고 빌어보자!”

맥주를 쥔 손 세 개가 일제히 가운데로 몰렸다. 건배사로 소원을 외친 후 시원스레 맥주를 들이켰다. 알딸딸해진 그들은 전보다 더 흥겨운 말투로 떠들어댔고, 살짝 졸려오기 시작하자 다시 돗자리에 누워 마저 얘기를 나눴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혈기 넘치는 청춘에게 노숙은 큰 거부감이 드는 요소가 아니었다. 별은 예쁘고 바람은 서늘하고 아끼는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들 대단한 낭만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순간을 즐길 만큼의 낭만은 품고 있었다. 청춘들은 별빛을 눈에 담아 고이 눈꺼풀 너머로 간직했다. 조용해진 그들 위로 꾸준히 별똥별이 떨어졌다.

곤히 자던 호열이 몸을 뒤척였다. 바깥 공기를 오래 마셔서 그런지 목이 말랐다. 생수도 가져왔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찾아야 했다. 호열은 조심성 없이 용팔의 몸을 타 넘고 대남의 등을 찼다. 웅얼거리는 불평을 무시하며 생수병의 뚜껑을 돌렸다. 턱을 들어 미지근한 물을 마시니 연속으로 네 개의 별똥별이 떨어졌다. 제법 희귀한 광경에 잠시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어?”

생수병을 쥔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호열은 닫지 않은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을 움직이면서 병을 차 대남의 바지로 물이 쏟아졌다. 악, 차가. 얀마 양호열! 대남이 경기에 가깝게 몸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호열은 그를 부르는 성난 목소리에도 여전히 하늘을 노려봤다. 엉거주춤 선 자세에 눈매는 시력이 나쁜 사람처럼 가늘어졌다. 저 먼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던 호열이 입을 서서히 벌렸다. 얘들아. 혼잣말에 가까운 속삭임이 두 사람을 불렀다. 대남이 너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똑같은 말이 되돌아왔다. 얘들아…

“백호 떨어진다!”

산 전체가 울릴 정도로 악을 지른 호열이 돌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두 손은 위로 치켜들었고 신발은 벗어둔 상태다. 위만 보느라 공터를 벗어나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호열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꺼졌다. 양호열! 호열아!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 대남과 용팔이 급히 친구를 쫓았다. 산비탈로 접어들기 직전, 일순간 밤하늘에 붉은 빛이 퍼졌다. 커다란 횃불 같은 그것은 긴 꼬리를 그리며 호열이 달려간 방향으로 떨어졌다. 빛이 지면에 닿을 즈음 어디선가 호열이 나타나 그것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아 뜨거! 빛이 손을 탈출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짐승처럼 껑충거리며 흙바닥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호열은 외투를 벗어 그것을 덮쳤다. 내려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 담을 만한 통 하나 찾아줘라! 옷 금방 탈 거 같다!”

제일 뒤에 있던 용팔이 호열의 말에 허둥지둥 공터로 돌아갔다. 대남은 넘어지다시피 호열의 앞으로 무릎 꿇었다. 산을 거의 굴러내려 갔는지 머리는 산발에 여기저기가 낙엽과 흙투성이다. 대남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호열의 손 아래서 탄내가 났다. 정말로 옷이 타고 있어서, 대남은 자기도 모르게 똑같이 외투를 벗어 그 위를 재차 덮었다.

“뭐야, 이거.”

대남이 숨을 헐떡였다.

“대체 뭘 잡은 거야?”

호열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백호.”

“뭐?”

“통 가져왔다!”

용팔이 거칠게 내려오며 통을 들이밀었다. 금속 재질의 도시락 용기다. 나이스, 이용팔. 호열이 용기를 받아 그대로 옷의 불룩한 지점을 콱 찍었다. 밖으로 삐져나온 옷을 당겨 도시락 통을 감쌌다. 겨우 그것을 잡는데 성공하자 호열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땀투성이였지만 계속 손이 떨렸다. 이제 질문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 용팔이 조금 전 대남이 한 질문을 반복했다.

“그래서 이게 뭐냐?”

“…강백호래.”

“뭐라고?”

“어. 대남이 말이 맞아.”

바닥만 보고 있던 호열이 확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에 반짝 총기가 돌았다. 황금빛 햇살이 호열의 상기된 얼굴을 선명히 덮었다. 호열이 가쁘게 숨을 골랐다.

“이거 강백호야.”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양은 꾸준히 올라가 세 사람에게 공평히 따스한 빛을 내려주었다. 산새가 짹짹였다. 도시락 용기가 드문드문 들썩였다.

 


 

“…그렇게 해서 백호를 포획하는데 성공했답니다.”

이야기 끝. 호열이 경건한 합장으로 말을 끝맺었다. 의자에 앉은 호열은 허리를 숙여 바닥의 구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식은 바닥에 앉았다기 보다는 누워있었고, 자기 의지로 누워있다고 보기엔 장성한 남성 둘이 그를 포박 중이었다. 구식은 얼빠지게 양옆의 친구와 앞의 친구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모든 이가 근엄한 낯을 띠고 있다. 그렇구나. 구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된 거구먼….

“이 새끼들 산에서 뭘 뜯어 먹은 거야….”

안주 떨어졌다고 지천으로 널린 풀떼기를 처먹었구나. 뭘 먹었을까. 예쁜 색깔의 독버섯이라도 먹었나. 아니면 어디 가스관이라도 터졌을까? 미치려면 나 없을 때 미치지, 왜 하필 하고많은 날 중에 나 오는 날을 골라 미치니. 구식은 악독한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침통한 구식을 사냥감 평가하듯 훑어본 호열이 주변의 의견을 구했다. 얘들아, 얘 아무래도 안 믿는 것 같지. 어. 전혀. 그럼 뭐, 직접 봐야지. 호열이 식탁으로 가 두툼한 오븐 장갑을 꼈다. 조명인 줄 알았던, 자칭 강백호가 들어있다는 유리병을 들어 구식의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당연한 반응으로, 구식이 눈을 감았다. 저 수상쩍은 빛을 보면 자기도 이것들처럼 헤까닥 돌아버릴지 몰랐다. 저번에 본 미국 영화처럼 팟 기억을 앗아가 최면을 걸 수도 있다. 눈꺼풀에 최대한 힘을 줬지만 무식하게 힘만 센 광신도들이 기어이 그의 눈을 꽉 잡아 벌렸다. 눈부신 빛이 구식의 홍채에 직격으로 꽂혔다. 구식은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으나 가까이서 본 불꽃의 형상에 울림이 목구멍에서 뚝 끊어졌다.

…어라?

이거…?

세 사람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눈을 뜨셨군요, 형제여.”

용팔이 구식의 등을 두드리고 대남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비로소 바라던 자유를 찾았지만 구식은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턱을 바닥에 닿을 기세로 떨어뜨려 놓고는 머뭇머뭇 유리병으로 손을 올렸다.

불꽃은 전혀 강백호와 닮지 않았다. 애초에 종족(?)이 다른데 닮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불꽃이 빨간색인 점, 이따금 튀어 오르는 불씨가 주황이 아닌 옅은 분홍인 점이 강백호를 연상하게는 했다. 그러나 그것까지 감안해도 이것은 백호가 아니다. 정말, 당연히, 객관적으로 절대 백호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노구식은 이것을 보자마자 백호임을 깨달았을까.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강백호다.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는 것처럼 구식은 이 동그란 별똥별에게서 백호를 보았다. 머리에서 무슨 논리를 설파해도 가슴이 무조건 받아들였다. 마침내 구식은 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 금세 그들과 같은 편에 섰다. 경악에 빠진 노구식이 중얼거렸다.

“강백호네….”

“강백호지.”

“백호야.”

“백호고 말고.”

호열이 장갑 째로 유리병을 구식에게 넘겼다. 대남이 그의 팔을 잡아 기립 자세로 만들고 용팔이 의자를 끌어와 그를 앉혔다. 그들이 이미 겪은 풍랑을 받아들일 시간을 줬다. 유리병을 노려보던 구식이 대뜸 머리를 들었다. 그의 뇌가 마지막 발악으로 혀를 놀리려 했다.

“근데 어떻게 사람이―”

“백호는 사람이 아니지.”

호열이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언제부터 걔한테 상식이 통했냐?”

대남이 쏘아붙였다.

구식의 어깨에 두툼한 손이 턱 올라왔다. 그들 중 유일하게 안경을 쓴 용팔이 지식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조언했다. 구식아.

“네가 한 생각 우리도 이미 다 했다. 할 말 남았으면 후딱 꺼내고 얼른 다음 단계에나 들어가자.”

머릿속 이성적 사고가 강제 종료 되었다. 구식은 손에 쥔 강백호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차분히 식탁에 내려놓았다. 지난 몇 개월 간 쌓인 피로가 한 번에 터지려다 그냥 줄줄 녹아버린 것 같았다. 구식은 과부하가 온 머리를 잠시간 짚다가, 결국 크게 한숨 쉬었다. 모든 걸 수용한다는 선언이다. 퀭한 눈으로 호열을 보면서 말했다.

“당장 커피 마셔야겠으니까 한 사발 끓여와라.”

 


 

양손바닥이 홀랑 타버린 사람이 요리를 하기는 만무하므로, 대남이 커피를 내리고 용팔이 달걀을 구웠다. 호열은 토스터가 뱉어낸 식빵을 집어 쟁반에 올리기만 했다. 체감 상으로는 늦은 아침이었으나, 처음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 꼭두새벽이었으므로 오히려 아침 먹기 딱 좋은 시간대였다. 너나 할 거 없이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채 시커먼 커피를 홀짝였다. 구식이 두 잔째인 커피를 마시다가 물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뭔데.”

“쟤 다시 돌려보내야지.”

용팔이 다 구운 달걀을 가져왔다. 각자의 식빵에 달걀을 얹어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다들 똑같이 느꼈겠지만 저 병에 있는 게 온전한 강백호는 아닌 거 같지? 강백호 영혼쯤 되는 거 같거든. 그럼 몸뚱아리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이겠지. 우리는 이 백호를 미국에 돌려보낸다. 그래서 온전한 강백호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을 이제부터 고민해보자고.”

“택배로 부치면 되잖아?”

호열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얘를 봐라. 환하게 타오르잖냐. 국제우편 규정에 어긋나. 같은 이유로 우리가 얘 데리고 비행기 타는 것도 안 돼.”

“몸뚱아리가 오는 건 어려우려나.”

“것도 시도했는데 안 되더라.”

대남이 식빵 귀퉁이를 뜯어 유리병에 떨어뜨렸다. 파스타 소스 병과 잼 병 그 중간 어드메에 있는 이 유리병은 용팔의 집에서 가져온 물건이다. 산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 용팔이네였던지라, 그들은 호열의 응급처치 겸 그곳으로 가 백호의 새 휴식처를 찾아냈다. 이 내열 소재의 유리병이라면 백호도 바깥을 볼 수 있고 그들도 백호의 상태를 살필 수 있다. 뚜껑에 숨구멍도 뚫어주려다가 못질 소리에 용팔의 가족이 깰 뻔해서, 혼자 사는 호열의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오븐 장갑도 용팔이네 부엌에서 빌려온 것이다.

숨구멍으로 빵조각이 떨어지자 백호가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잿가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식빵에 대남이 감탄했다. 금붕어 밥 주는 거 같다. 이번에는 달걀을 먹일 생각으로 포크를 들어 흰자를 조각냈다.

“너 오기 전까지 계속 미국 백호네에 전화 걸었거든. 근데 안 받아. 여기랑 시차가 열세 시간이니까, 거긴 끽해야 저녁인데 말이지. 아마 여기에 백호가 있어서 그런 거 같아.”

“뭐 계속 자고 있다거나 그런 건가?”

“그런 거겠지.”

흠. 구식이 턱을 문질렀다.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 것 같다만, 결국 강백호가 알아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소리다. 왔을 때처럼 슝 날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만사 해결인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강백호의 상태가 이상하다.

“이 상태로는 우리 동네도 못 벗어나겠는데.”

짐짓 심각하게 백호를 관찰했다. 양호열이 생생하게 풀어낸 새벽의 소동과 대조되게, 지금 이 강백호는 굉장히 비실거렸다. 불씨가 타닥거리긴 해도 가만히 갇혀있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떨어지면서 모든 기력을 소모했는지 백호는 붙잡힌 이후부터 몸부림을 멈추고 세 사람의 손길을 따랐다고 한다. 날뛰는 강백호는 재앙이지만, 실은 반대의 경우가 더 큰일이다. 구식은 끙 소리를 뱉으며 등을 젖혔다. 애초에 여긴 왜 온 걸까. 어제 세 명이서 소원을 빌었다고 했지. 멋대로 살아온 인간뿐이라 소원에 부정 탔나? 구식의 혼잣말에 호열이 가만히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익숙한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야. 아까 내가 말한 경기 기억나? 백호가 처음 주전으로 뛴다는 거. 그거 생각해보니까 오늘 밤에 열려. 나한테는 자신 있다고 했는데, 실은 엄청 떨리나 봐.”

에그, 이놈아. 용팔이 손톱으로 유리병을 톡 쳤다.

“긴장할 게 뭐가 있다고. 주전 경험도 많은 놈이.”

“날이 갈수록 농구가 더 소중해져서 그런가.”

대남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눈앞의 백호를 잠시간 응시했다. 이제 가닥이 잡혔다. 알게 모르게 풀이 죽었던 그들의 친구를 힘차게 돌봐 다시 천재 농구 선수로 되돌리면 된다. 언제까지?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 미국의 아침이 시작되기 전에.

아침을 다 먹은 대남이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제 몫의 그릇을 설거지한 후 현관으로 갔다.

“일단 강백호 기 살리는 건 너희한테 맡긴다. 나 지금부터 출근하니까, 낮에 퇴근하고 보자.”

잘 다녀와라. 이따 보자. 근무 힘내라. 대남을 배웅한 세 명은 부엌을 정리하고 외출할 채비를 했다. 집에만 있어봤자 백호의 기가 살아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집구석에서 찾은 노끈으로 병 전체를 그물처럼 감싼 뒤, 손잡이를 달아 들고 다니기 편하게 했다. 장비는 많을수록 좋으니 오븐 장갑도 잊지 않고 챙겼다.

밖으로 나온 셋은 무작정 번화가로 향했다. 파친코는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고 게임 센터는 아직 문을 안 열었다. 무엇보다 새벽을 말 그대로 불태운 그들은 반 각성 상태에 빠져서, 적어도 몸은 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영화관에 들어갔다. 백호에게 적당히 귀여운 만화 영화나 보여주면서 눈 붙일 요량이었다.

그러나 실내에 발을 들이자마자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별똥별이 들어간 유리병은 안 좋은 의미로 눈에 띄었다. 주말 오전의 영화관에는 오늘 막 개봉한 만화 영화를 보러 나온 가족으로 바글거렸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화려한 조명이 출입구를 감싸자 시선이 집중됐다. 용팔은 침착하게 가방에 백호를 넣었다. 호열이 그의 등을 지키고 구식이 선두에 서서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아무도 없는 관 있습니까?

때는 이십삼 세기, 로봇 혁명으로 지상이 파괴되자 인류는 지하로 들어가 문명을 일구었다. 황금 풍뎅이를 잡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지상이 남긴 유적을 발견하고 이것을 팔아 자신의 유일한 가족, 복제견과 함께 달로 이사 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유적은 사실 과거 인류가 세계를 위해 봉인한 어느 주술사의 혼백이었고, 유적을 건드린 주인공은 주술사의 제자가 되어 지금은 잊혀진, 저글링 댄서라는 직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밑도 끝도 없는 전개에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일렬로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세 명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구식은 일 분에 한 번씩 ‘이게 영화냐’를 중얼거렸고 호열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어져 손바닥을 찔러봤다. 용팔은 시야와 귀를 차단하며 팝콘이나 으적댔으나(구식과 호열은 주인공이 미래적인 음식, 곤충식 식당에 들어간 순간부터 입맛이 달아났다), 팝콘을 싹 비워내고 나서는 종이컵을 씹는 이상행동을 보였다. 구식의 품에 안긴 강백호는 영화가 재밌는지 충격을 받은 건지 얌전히 빛나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강백호가 미국 영화관에 갔다가 자막이 없어서 눈치코치로 봤다는 얘기를 기억하던 그들이기에 여기까지는 참아냈으나, 기어이 영화의 자막이 ‘우리얘들이랑 집적 예기해야겠어요. 퀘속질주 자숵 한 표 끈ㅎ어주세요.’ 라는 기괴한 문장을 만들어 냈을 때 폭발하고 말았다.

“이딴 게 영화냐!”

“강백호도 이 지경으로 문법 안 틀려!”

“이딴 쓰레기가 왜 물 건너 여기까지 온 거냐!”

세 사람은 사이좋게 벌떡 일어나 스크린에 삿대질을 했다. 구식은 강백호를 던질 기세였고 용팔은 종이컵을 반으로 찢었다. 호열은 아픈 것도 잊은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동도 이런 난동이 없지만 다행히 상영관에는 그들만 있다. 불행히 그들만이 이 영화를 선택했기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 말리러 오는 직원도 없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내면의 혼란을 분출했다. 등장인물이 조금이라도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하면 일제히 딴지를 걸었다. 중구난방 전개에 배우마저 괴로워하면 따뜻하게 두둔했다. 조악한 분장과 걸핏하면 깨지는 컴퓨터 그래픽은 그들을 분노케 하기에는 최약체에 불과했다. 이제 그들은 거리낌 없이 화장실을 다녀오고 새 팝콘을 사 오고 노래를 부르고 마구 뛰놀았다. 영화는 호응에 힘입어 절정으로 치달았고, 복제견 미키가 다중우주를 건너온 앰프를 통해 새로운 은하를 일구어 갈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보냈다. 기존 주인공이었던 인물은 영화 시작 이십 분 만에 머리를 깎고 이복동생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뒤 지하 정부의 스파이로 잠입하겠다며 자취를 감춘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장엄한 끝을 목격한 세 사람이 털썩 좌석에 주저앉아 여운에 젖었다. 미키의 행복을 빌며 가만히 눈 밑을 훔쳤다. 중간 중간 팝콘을 얻어먹어서인지 진심으로 영화를 즐긴 건지 강백호도 영화 시작 전보다 더 환하게 타올랐다. 나가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그들은 느리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크게 웃어젖혔다. 배우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제작진이 같은 이름이었다. 스크린을 도배한 이름은 감독의 것과 똑같았다.

쿠키 영상으로 감독이 나왔다. 감독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관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귀갓길 되십시오.’라고 인사했다. 귀에 감기는 언어가 너무나 정겨웠다.

이 영화는 국내 영화다.

 


 

영화관을 나오고 나니 정확히 점심시간이었다. 셋은 이대로 식당으로 가려다 변덕을 부려 인근의 옷 가게를 찾았다. 솔직히 여기서 취급하는 옷은 그들의 취향을 빗겨나갔지만, 목표는 옷이 아니다. 매장에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직원이 사근거리며 반겼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직원의 자본주의 탈이 벗겨졌다. 이제 사근사근한 미소는 직원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다. 용팔이 유리병을 얼굴까지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백호야, 넌 처음 보지. 패셔니스타 김대남 군이다.”

김대남은 이 가게의 옷을 완벽히 소화했다. 마네킹이 살아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알록달록한 대남이 장사 망치지 말고 썩 꺼지라 했으나, 학생 때보다 지갑이 여유로워진 세 사람은 그럼 매출을 올려주겠다며 옷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얼룩말 셔츠와 형광 분홍 바지가 서로의 손에 들렸다. 무지개색 털 방울이 주렁주렁 달린 외투는 그야말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대남이 용팔에게 맞는 사이즈를 찾아주겠다며 창고로 간 사이, 용팔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백호에게 매장 내부를 구경시켰다. 계산대 벽에 붙여진 패션 잡지 기사에서 대남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다.

“대남이 진짜 근사하지 않냐. 여기 매장에서 제일 인기 많은 직원이래.”

유리병의 불꽃이 팔랑팔랑 물결쳤다. 팔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 백호가 사진을 자세히 보게 했다. 어떤 사진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다른 사진에서는 점점 자세와 표정에 여유가 생기는 게 확연했다. 둘은 계산대에 놓인, 아직 오리지 않은 잡지 앞에 멈췄다. 펼쳐진 페이지에서 김대남이 가장 자신 있는 웃음을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용팔이 백호에게 소곤거렸다. …야. 백호야. 사실 대남이가 우리한테 숨기는 게 있는데―

“이 옷 가게가 여러 군데에 지점을 둔 나름 큰 업체거든. 여기도 그중 하나고. 근데 조만간 대남이는 본점으로 갈 거야. 워낙 일을 잘 해서 거기까지 소문이 났대. 저번에 놀러 왔다가 다른 직원이 귀띔해줬어. 지금은 거의 옷만 파는데 위 동네로 가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겠지. 처음 일 시작했을 때도 언젠가는 본점에 가고 싶다 했으니까, 거절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런데 아직 티를 안 내서 우리도 모른 척 중이다. 오늘 구식이랑 너까지 왔으니까 이따 말하겠지.”

좋은 일은 빨리 축하해야 하는데, 뭐 이리 미적댄다냐. 툴툴거리는 용팔의 옆으로 대남이 돌아왔다. 야, 옷 가져왔다. 이 색깔 너한테 잘 받을 거야. 얼른 입어봐. 용팔이 대남에게 백호를 맡기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대남은 계산대에 팔을 걸친 채 친구의 환복을 기다렸다. 사진에서나 실물에서나 대남은 평온해 보였다. 불꽃이 대남을 가만히 비추었다.

 


 

무지개 방울 외투는 구식에게 돌아갔고 호피 무늬 셔츠는 호열의 간택을 받았다. 금박이 빽빽한 검정 바지는 용팔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계산대 옆에 진열된 새빨간 스카프는 백호의 유리병과 찰떡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이 변신한 그들은 만족스레 계산을 마쳤다. 친절한 직원 김대남은 서비스라며 은색 팔찌를 백호에게 달아주었고, 계산을 돕던 동료 직원도 자신의 보석 스티커를 백호에게 선물했다. 정말 평소라면, 맨정신이라면 도저히 시도하지 않을 차림이었으나 오늘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당당히 거리를 박차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행인도 그들과 그들의 옷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점심은 학창 시절 자주 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챙겨 먹었다. 구석진 자리를 잡아 병뚜껑을 열어놓고는 백호에게 다양한 음식을 먹였다. 예전에는 비싸서 못 시켜본 스페셜 메뉴, 백호가 없는 동안 생긴 신제품, 익숙한 정식과 달콤한 후식이 조금씩 조금씩 병 안으로 사라졌다. 엄청 배고팠냐? 끝도 없이 들어가네! 그들은 놀려대는 듯 하면서도 자기 몫의 음식도 선뜻 덜어주었다. 사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카페인 밖에 없었다.

소화를 위해 걸으면서 백호에게 거리의 변화를 설명했다. 어디의 가게는 다른 구역으로 이전했고, 어떤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인기가 많으며, 무뚝뚝한 도시락 가게 사장과 그 이웃인 약국 직원 사이에서 일어난 오각 관계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다 대남의 퇴근 시간이 다가와 옷 가게로 돌아갔다.

대남과 합류한 후에는 영업 중인 게임 센터를 찾아 격투기 게임과 펌프 게임으로 내기를 했다. 내기에서 진 사람이 게임 센터 옆 노래방 비용을 댔고, 노래방 앞에는 또 스티커 사진관이 있길래 백호 군단 완전체 결성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다. 윙 소리를 내며 인쇄기가 사진 다섯 장을 뱉어냈다. 하얀 섬광을 쬔 다섯은 누구보다 환하고 다채로웠다.

“얘네 어디 갔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용팔과 구식이 어리둥절 멈춰 섰다. 앞에서 기다리겠다던 대남과 호열, 백호가 없다. 머리만 긁적이며 두리번거리고 있자 셋이 금세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냐? 구식이 물었다. 대남과 호열이 각각 작은 향과 작은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가장 중요한 거 하러 가야지. 호열이 말했다.


네모난 비석에 원통형 향과 세모꼴 꽃다발이 올라갔다. 네 사람이 손을 맞대 비석 앞에 묵념했다. 유리병 속 백호도 어느 때보다 고요히 타올랐다.

“백호 지금 미국에서 잘하고 있어요.”

호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세 사람도 강백호가 미국에서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멋지게 세상을 헤쳐 나가는지를 알렸다. 강백호가 주는 파편적인 정보만 받는 입장이긴 해도 그들도 나름대로 백호의 소식을 찾아다녔다. 농구부를 근간으로 둔 지인에게 건너 듣거나, 해외 농구 소식을 싣는 잡지를 산다거나, 정말 우연히 미국인을 만나면 대뜸 강백호를 아느냐고 물어보는 식으로. 티끌만 한 소식을 쥐어 네 명이서 털어 모으면 얼추 한 줌의 이야깃거리는 되었다. 그들이 서로 보고 싶어 죽겠는 연인도 아니므로, 그 정도의 양도 괜찮았다. 생사만 확인했으면 됐지. 여상히 말하며 그러모은 기별로 향을 피우곤 했다.

“완전 유망주라니까요.”

“오늘 주전으로 경기 뛴대요!”

“뭐, 그게 긴장돼서 지금 우리한테 응석 부리려 왔지만요.”

불꽃이 병 안에서 통 튀어 올랐다. 괜한 말 말라는 움직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속에 든 것이 강백호여도 외관상으로 작은 아기 별님이 떼쓰는 것에 불과하다. 위협은커녕 깜찍하기만 했다.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하는 행동이나 말이나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숨구멍으로 생선구이를 만들고도 남을 불기둥이 솟구치고 나서야 네 개의 조동아리가 텁 닫혔다. 아무튼, 백호 걱정은 마세요. 우리 중에서 제일 앞길 잘 찾아가는 녀석이니까. 백호 군단이 의젓하게 성묘를 끝냈다.

묘지를 벗어나는 길에 탄력 있는 마찰음이 들렸다. 야외 농구 코트에서 초등학생 네 명이 대결을 벌이고 있다. 흠. 구식이 눈썹을 치켜떴다.

“백호 농구 구경 시켜줄까?”

“얘 농구는 어제도 실컷 하지 않았겠냐.”

“아니 뭐, 우리의 허접 농구를 보면 자신감 붙을 거 같아서.”

“우린 허접 아닌데?”

“널 우리랑 같이 묶지 말아주렴.”

“딱 기다려라. 공 빌려온다.”

팔색조만큼 화려한 차림의 성인 남자 무리는 자칫하면 경찰을 부를 만큼 수상하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겁보다는 호기심이 큰 아이들이 대범하게 구식과 회동했다. 약간의 흥정 후 아이들은 자판기 옆에서 음료수를 홀짝였고, 그 사이 세 사람이 공을 던지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손을 다친 호열은 선뜻 벤치로 밀려났다.

사나이 노구식의 요구 아래 대결은 일 대 이로 진행됐다. 구식이 혈혈단신으로 십 분 안에 사 점을 따면 승리하는 형식이었으나. 급작스러운 내부 분열로 이 도전은 흐지부지되었다. 용팔의 수비를 뚫고 풋내기 슛을 성공하니 대남이 용팔에게 굼뜨다고 욕하고, 대남 앞에서 이 점 슛을 쏘아 올리자 이번엔 용팔이 그 키 뒀다 뭐에 쓰냐고 대남을 욕했다. 같은 진영에게 구사한 트래시 토크는 훌륭히 먹혀들어 이제 두 사람은 경기고 뭐고 서로를 향해 왁왁거리기 바빴다. 졸지에 소외된 구식이 공을 쥐고 둘을 머쓱하게 쳐다봤다. 얌전히 림 앞으로 가서 일 점 슛을 던지고는 물 흐르듯 벤치로 갔다.

“얼마나 저럴 것 같냐?”

구식이 호열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십 분 보다는 오래 걸리겠네.”

호열이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난 가끔 쟤네가 저러는 거 보면 아직 어른은 덜 됐구나 싶다.”

“네가 제일 어른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호열이 키득거렸다. 구식은 별 반응 없이 팔짱을 꼈다. 양복 입고 다닌다고 어른인 건 아니지. 둘 사이에 놓인 유리병에 시선을 옮겼다.

“요즘 들어 내가 뭐 하고 있나 싶다. 무작정 살길 찾다가 아무 생각 없이 상경하고. 적어도 끈기는 있어야 하는데 좋지도 않은 일 실컷 시달리니 점점 싫어지기까지 하고. 그런데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서, 이거 아니면 뭘 해야 할 지 모르니까 계속 싫은 일에 매달리고 있네. 얼마나 한심하냐.”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 위까지 몸을 뻗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맞춰 무겁게 흔들렸다. 먹색 그늘이 구식의 얼굴에 밀려왔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호열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릎에 팔꿈치를 짚고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다. 난 그게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호열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나도 너랑 비슷해. 아직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어. 그저 지금 일이 할 만하니까 계속하는 게 다야. 하지만 넌 싫으면서 계속 버티고 있잖아. 거기서부터 나와 다르지.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든, 오직 버티는 것만이 목적이든, 싫은 감정, 무서운 감정을 억누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농구공이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대남이 공을 잡으러 훌쩍 뛰었다. 대남이 뛰어오르는 모습은 꼭 자유분방한 화보 같다. 호열은 대남의 집에 수북이 쌓인 패션 잡지를 알고 있다. 좁은 옷장에 가득 찬 옷을 뒤적이며, 새로 산 셔츠를 어떤 분위기로 입어야 할지 고뇌하던 반나절에 그도 존재했었다. 거리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행인을 만나면 부끄럼 없이 다가가 정보를 묻던 넉살에 놀랐었다.

공을 잡은 대남이 착지하자 용팔이 무서운 속도로 공을 쳐냈다. 그 묵직한 손으로 요리를 배워보겠다고 선언했을 때를 기억한다. 넷이서 돈을 모아 용팔만을 위한 식칼을 선물하자 들떠 하던 낯이 지금도 선연하다. 최근에는 요리 과정보다는 그 결과물에 더 관심 있다는 것을 깨달아 조금 방황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잊지 않았다. 마음에 뚜렷이 새겨진 그것을 용팔은 제대로 살필 것이다.

바닥에 튕겨진 공이 벤치로 날아왔다. 호열과 구식 사이, 백호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향해 돌진하자 구식이 반사적으로 공을 막았다. 정신 안 차리냐, 짜식들아! 백호 박살 날 뻔했잖아! 구식이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성냈다. 왠지 동네에 꼭 한 명씩 있는 욕쟁이 영감님 같아서, 호열이 소리죽여 웃었다. 구식도 여전히 자신을 잃지 않았다. 구식이 지금의 일, 적당히 들어간 영업직 자리를 떠난다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탈출이다. 잘못된 장소에 있다고 잘못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맞는 자리를 찾아가면 된다. 부디 그날의 구식이 패배감보다 후련함을 느끼길. 호열은 내심 빌었다.

백호 멀쩡하냐? 어, 다행히 안 다쳤네. 호열이 유리병 표면을 살폈다. 병을 칭칭 동여맨 노끈을 손톱으로 툭 건드렸다. 불꽃이 타닥이며 다가왔다. 손끝에 열기가 옮았다. 농구공이 코트를 때리는 소리가 아득히 울렸다. 빨강이 시야를 채웠다.

겁도 없이, 강백호답게 시작한 채치수와의 일 대 일 대결, 우스꽝스럽지만 효과는 확실했던 디펜스, 같은 코트에 서서 도운 이 만 번의 슛, 그리고 그날. 얼핏 비치던 두려움과 생경했을 고통, 그러나 그것을 뒤로 할 만큼 간절하고, 또 좋아했던 농구. 좋아하는 농구를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강백호. 폭발 이후에도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따금 밀려오는 먹구름에도 잉걸불은 살아있었다. 그것만으로 다 이긴 싸움이었다. 강백호는 불씨에서 불길을 키워내는 이니까. 폭풍을 증발시키는 법을 아니까. 강백호의 불꽃은 지켜보던 이에게도 열기를 품게 했다. 자신만의 불을 원하게 했다.

그러니 밤하늘에 느닷없이 그어진 붉은 선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손끝마저 화상 입기 전에 뒤로 물러났다. 호열은 탈지면이 붙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타오른 적 없이 타버리기만 한 손이다.

“너희를 볼 때마다 생각해. 나는 어떨까. 나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갑자기 지금 일이 싫어지면, 나는 너희처럼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 겪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어.”

“…넌 웬만한 궂은일도 할 만하다고 하는 놈이잖아. 네 문제를 굳이 꼽으라면 고난이 익숙하다는 점이겠지. 참, 너도 편히 살기는 텄다.”

난생 처음 듣는 소리다. 뜻을 이해 못한 호열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많이 아프냐?”

구식이 손바닥을 가리켰다. 호열은 양손을 살짝 쥐어봤다. 은은한 쓰라림이 계속 손에 머물렀지만 제때 치료한 덕인지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이 정도야 뭐. 자신의 생각을 과장 없이 알리자, 구식이 쯧쯧 소리 나게 혀를 찼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얼굴을 구긴 호열을 뒤로 하고 구식이 백호를 들어 올렸다. 쟤도 은근히 돌아서 간다. 그치, 백호. 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코트에 들어갔다. 다음에 오면 박치기나 먹여줘라. 그래야 정신 차리겠다. 구식은 백호에게 무언으로 다짐을 받아내고는 빈손으로 농구공을 힘겹게 끌어안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두 바보가 눈에 들어왔다. 좀 싸웠다고 벌써 뻗었냐? 너희도 다 늙었구먼! 대남과 용팔 사이 빈 곳에 공을 튀기자 놀란 두 사람이 펄쩍 일어났다. 쌈닭처럼 그에게 달려들려 하기에 유리병을 휘둘러 위협을 가했다. 과연 불을 마주한 짐승처럼 뒷걸음질 쳤다. 구식이 호열을 돌아봤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너도 빨리 와라. 호열은 떨떠름히 일어나 나무 그늘을 벗어났다. 그들만의 그림자가 코트에 드리워졌다.

 


 

유리병 안으로 도화선이 들어갔다. 심지에 불이 붙자 백호 군단이 얼른 폭죽을 병에서 꺼냈다. 이른 저녁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이 정도는 일탈 수준에도 안 들지. 백호 군단은 폭죽에 새로 불을 붙일 때마다 백호에게 ‘대단하다, 강백호!’ ‘역시 천재!’라며 추켜세웠다. 칭찬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백호도 폭죽만큼이나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마지막 장소를 바다로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또 다시 등산을 하기에는 그들은 낡고 지친 사회인이다. 굳이 산을 올라봤자 글쎄, 하늘에 더 가깝다는 게 장점이겠지만 어차피 백호는 그들 중에서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놈이었다. 더군다나 바다는 탁 트여 있어 백호가 헤매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늘의 색이 꾸준히 바뀌고 있다. 폭죽을 세 개째 태우던 대남이 떨어지는 불씨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할 말 있어. 애들도 다 모였으니 말하는데―”

잡지, 본점, 승진, 이사. 두서없는 문장이 대남의 혀끝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조만간 여길 떠날 거야. 어쩌면 구식이 너랑 이웃사촌이 될 수도?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들자, 무뚝뚝한 얼굴 셋이 그를 마주했다. 서늘한 시선에 대남이 움찔했다. 하지만 티내선 안 된다. 그가 누구인가. 적어도 앞의 어중이떠중이에게 기죽는 건 스스로가 용납 못한다. 대남이 부러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뭐야, 다들 왜 이래? 불만 있냐? 대남의 노성에 구식이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김대남. 너 말이야―

“참 굼뜨게도 알린다! 기다리느라 속 터질 뻔했잖아!”

손바닥이 거칠게 대남의 등에 꽂혔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갑작스러운 타작에 대남이 소리도 못 내고 중심을 잃었다. 쓰러진 대남의 위로 꽃가루와 폭죽, ‘김대남 본점 진출 축하’ 문구가 적힌 작은 현수막이 펼쳐졌다. 사태 파악을 못한 대남이 눈을 끔뻑였다.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벌리고 그들을 휙 돌아봤다.

“눈치 챘어?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용팔이 눈을 찡긋했다.

“이건 어디에 숨겼다가 꺼낸 거야?”

호열의 꽃가루 바구니를 집으며 물었다.

“어디긴. 우리 하던 대로 숨겼지. 너도 지금 나팔 없어?”

“있긴 한데….”

대남이 금세 나팔을 꺼내 들었다. 백호 군단은 언제나 무언갈 축하할 준비가 되어있다. 바로 그 자세다! 구식이 나팔을 잡아채 뿌뿌 불어 재꼈다. 꾸밈없는 축하에 대남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씨, 좀 예고라도 하지 그랬냐. 나 진짜 놀랐다고 자식들아…. 대남이 급히 마른세수를 했다. 세 사람이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야, 우냐? 안 울 거든! 가벼운 심술은 눈물을 쏙 들어가게 한다. 빠르게 진정한 대남이 머리를 털며 투덜거렸다.

“진작 말할 걸. 난 또 너희가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우리가 왜 섭섭해. 좋은 일인데.”

“너 멀리 간다고 서운해 할 거 같냐.”

“그러게 말이다. 나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네.”

대남이 시원스레 인정했다. 킥킥거리며 볼을 긁고는 백호 군단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우리는 너무 오래 봤지. 이제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멀어진다고 진짜 멀어지는 게 아니지. 너희가 뭐 쉽게 변하겠냐? 오냐,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다! 백호 군단이 다시 한 번 대남을 철썩 때렸다. 대남아. 너도 멀리 떠나니까 말한다. 웬만해서는 사람을 패지 말아라. 지금도 안패거든? 그래. 그 마음가짐 잊지 마라. 정 참기 힘들면 맨손으로만 때리고. 네가 먼저 한 대 맞아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 대사 내가 구식이 보낼 때 한 말인데. 그럼 더 기억하기 쉽겠네. 너 백호 보내면서는 무슨 말 해줬냐? 강백호 갈 때?

대남이 강백호를 바라봤다. 유리병 속 별똥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대남은 눈에 잔상이 남을 만큼 오래 백호와 시선을 부딪혔다.

“넌 어디서든 살아남을 녀석이니까, 겁먹지 마라. 만일 힘들어지면 우리한테 바로 연락 때리고. 백호 군단은 여전히 여기 있다.”

지금도 여전하지. 대남이 씩 웃어 보였다. 불길이 서서히 유리병을 채워갔다. 그 모습에 구식이 서둘러 오븐 장갑을 껴 달구어진 뚜껑을 돌렸다. 어떤 폭죽보다 화려한 꽃비가 수직으로 뿜어져 나왔다. 옅은 어둠이 스민 주변을 강하게 밝혔다.

강백호가 작은 태양처럼 빛나며 몸을 굴렸다. 헐겁게 풀어헤쳤던 불길이 꽁꽁 감싸져 시각만으로 딱딱하고 무거운 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옹골찬 별똥별이 주위를 팽팽 돌았다. 강백호 저거 우릴 태우려나 본데? 피부로 전해지는 열기에 그들이 질겁하며 가운데로 모였다. 백호가 통통 튀어 올랐다. 폭이 좁은 포물선이 공중에 나타났다. 백호는 일부러 겁주는 건지 한참을 군단 둘레를 공전했다. 빛나는 고리가 서서히 크기를 줄여갔다. 뜨끈해지는 피부에 일제히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박치기를 해줘. 아니, 지금 상태로 말고, 인간 모습으로! 간절한 소원을 이 제멋대로인 별똥별이 과연 들어줄까. 어느덧 별똥별이 정말 위험한 수준으로 다가와서는―

“으악!”

백호 군단이 서둘러 본인 이마를 만졌다. 강백호 뭐 했어? 박치긴가?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피부의 감촉이 매끈하다. 이마가 뜨겁지도 않다. 하지만 방금 이쯤에서 뭐가 지나갔는데? 백호가 한 짓은 위 이마를 더듬고 나서야 파악됐다. …강백호가 우리 머리를 태웠다! 네 사람 전부 앞머리가 짧아지고 구불구불해졌다. 머리카락에서 진동하는 노릇한 내음에 일동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 내일도 출근이라고!”

“월요일이면 우리도 그래!”

“나는 손도 구워졌는데 머리는 봐주지!”

“이런 머리로… 어떻게 나돌아 다녀….”

진짜 이마를 태운들 이보다 전의를 상실하지는 않았을 거다. 치장에 언제나 진심이었던 백호 군단이 급격한 상심에 빠졌다. 네 사람의 활기를 모조리 빨아먹은 강백호가 기세등등이 통통 튀어 올랐다. 백호 저러는 거 보니 이제 완전히 기운 차렸나 보다…. 호열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멍멍이 기운 차렸으면 됐지… 아냐, 역시 너 나중에 돌아오면 보자. 라이터 들고 대기한다. 백호 군단의 심장에 뜨거운 불꽃이 피어났다.

강백호가 마지막으로 몸을 굴렸다. 작별 인사임을 알아차린 군단이 얼른 자세를 고쳤다. 서로의 흙먼지를 털어주고 나란히 백호 앞에 섰다. 태양이 아래로 떨어질수록 강백호는 점점 위로 솟았다. 별똥별이 살짝 속도를 늦췄다. 마치 그들을 향해 시선을 내리 깐 것처럼 느껴져, 백호 군단이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경기 잘 해라!”

“긴장하지 말고!”

“우리가 이만큼 해줬는데도 실수하면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다!”

“끝나면 전화해!”

별똥별이 상공에 거대한 원을 그렸다. 맞는 방향을 찾은 별은 그대로 화살을 쏘듯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모래알보다 거칠고 보석보다 현란한 빛을 흩뿌리며, 강백호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네 사람은 그때까지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가 남긴 별의 파편마저 사라질 때까지, 바닷가가 온전한 어둠에 잠길 때까지.

 


 

컴컴한 도로 위로 호박색 빛이 깔렸다. 정말로, 완전히, 진짜로 모든 체력을 방전한 백호 군단이 무거운 발을 끌며 호열의 집으로 향했다. 그슬린 머리도 정리해야 하지, 아침에 두고 간 짐도 챙겨야 하지, 생각해보니 본인 집에 가는 것도 귀찮아져서 세 명 모두 하룻밤 호열의 하숙생이 되기로 했다. 고요한 거리에 발소리만 들렸다. 한참을 묵묵히 걸어가다가 대남이 불쑥 혼잣말처럼 물었다.

“우리 오늘 백호 만난 거 맞지?”

얼빠진 소리라고 타박이 날아올 법도 하나, 세 명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 만났지. 엄청 오랜만에 만나서, 엄청 재밌게 놀았지. 역시 그랬지? 대남이 히죽 웃었다. 벌써 꿈 같이 느껴진다야. 그에 공감하듯 나머지 군단의 입꼬리도 설핏 올라갔다. 구식이 크게 하품했다. 반쯤 뜬 눈에 물기가 어렸다. 킁 코를 훌쩍이며 가로등을 쳐다봤다.

“참 이상도 하다. 낮 동안에는 한 치의 의심 없는 현실이었는데, 걔 가고 나니 바로 아리송해지네. 너희 없었음 계속 의심했을 거다.”

“이러다 자고 일어나면 공터일지도.”

“너희 진짜로 이상한 풀떼기 안 먹었지?”

끝나지 않은 추궁에 세 명이 눈을 치켜떴다. 안 먹었다니까. 아니면 뭐, 우리 뀨식이가 먹고 싶은 거니? 말만 해라.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 풀 뜯어다 입에 넣어줄 테니. 드리워진 도발에 구식이 재빨리 몸을 사렸다.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눈총을 외면했다. 어우, 됐다.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고생시키면 안 되지.

모퉁이 하나만 돌면 양호열의 집이 코앞이다. 네 사람은 도착하면 뭐라도 시켜 먹을지, 아니면 있는 대로 호열의 찬장을 털어버릴지를 의논했다. 그러는 동안 수마는 풀 내음처럼 공기 중에 섞여들었다. 낮 동안의 일이 빠르게 그들을 떠나갔다. 햇살이 한껏 모래사장을 달군들 밤이 되면 서늘하게 식기 마련이다. 밤이 주는 몽상에 흠뻑 젖어갈 즈음, 열쇠를 찾던 호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바로 뒤에 있던 용팔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호열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러자 대남이 돌연 그를 따라 귀를 기울였다.

높다란 전자음이 들린다. 무엇인가를 알리는 소리다. 그것은 꼭 전화벨 소리 같기도 하고, 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 같기도 하다. 소리의 근원은 지척에 있다. 급히 열쇠를 꺼낸 호열이 현관문으로 달려간다. 마찬가지로 거친 발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를 좇는다. 힘을 실어 여느라 열쇠와 문고리 둘 다 요란하게 돌아간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 자그만 빛이 반짝인다. 별똥별보다, 손톱보다 작은 빛이 전화벨 소리에 맞춰 쉬지 않고 깜빡인다.

신발이 아무렇게나 현관에 굴러 떨어졌다. 선두인 호열이 확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아챘다. 너무 급하게 달려들어 몸뚱이가 협탁과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으나 호열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귀에 바로 갖다 대려는 걸 구식이 팔을 잡아 막았고, 용팔이 음량 버튼을 찾아 전화기를 더듬거렸다. 가장 뒤에 있던 대남이 벽에 손을 짚었다. 탁. 어두운 집에 하얀 빛이 들어찼다. 소리를 최대치로 올리는 것에 성공한 용팔이 호열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호열이 후, 심호흡했다. 수화기에 대고 침착히 인사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어, 호열아. 나다.’

기다렸다는 듯 굵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목소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자신을 충분히 밝혔다. 숨죽인 실내에 아득하고도 선명한 목소리가 채워졌다.

‘너 어제저녁에 전화했더라고? …그건 그렇고 호열아. …아니, 아니지―’

너희 다 거기 있지?

그것은 질문이면서 답이 되기도 했다. 수화기 위에 겹겹이 그림자가 쌓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지금 그들의 시야를 채운 건 열기를 품은 목소리, 서로의 얼굴에 떠오른 환한 빛이다. 그들은 다시 꿈결에서 빠져나왔다. 두 번 다시 의심 않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어허, 강백호. 누군가 짐짓 꾸짖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있지 또 어딜 가!”

좁은 집 안에 호쾌한 외침이 들어찼다. 어린 날의 그들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깨끗하고 확신 가득한 웃음이다. 너나 할 것 없이 터뜨리는 목소리가 빛살을 따라 현관 밖으로 떨어졌다. 저 높은 하늘은 어둠에 잠겼으나 한참 아래인 이곳, 가장 근본적인 터전인 이 땅은 따뜻이 빛나기만 했다. 이 빛은 별만큼이나 오래도록 자리를 지킬 것이다. 언제나 함께 할 다섯의 꼭짓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남은 떠났다. 상경하면서 계약한 집은 구식과 이웃사촌이 될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가끔 퇴근 이후나 주말에 만나 노닥거릴 만큼은 되었다. 막 술잔을 비운 구식이 슬슬 예정된 날이 다가오는 것 같다며 중얼거렸다. 대리 새끼 턱은 돌렸어? 대남이 천연덕스럽게 묻자, 구식이 서글프게 고개를 저었다. 때리려면 먼저 맞기. 대남이 선창했다. 때릴 때에는 맨손으로. 구식이 빈 잔을 흔들며 후창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번갈아 가며 읊었다. 화재 예방 표어를 말하는 것처럼 명료한 발음이었다. 대남이 구식의 잔을 채워줬다. 티 없이 맑은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멋진데? 공책을 한 장씩 넘겨보며 호열이 말했다. 큼직한 종이에 얼마 전 새로 문을 연 식당의 덮밥이 그려져 있다. 덮밥을 그린 독특한 선은 그 다음 장에도 존재했다. 온갖 음식 그림이 공책의 반절을 채웠다. 호열의 칭찬에 용팔이 코를 긁었다. 난 역시 먹을 때가 제일 좋더라고. 요리로 벌어먹는 것보다는 다른 걸로 돈 벌어서 실컷 사 먹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리고 이건… 아직은 취미. 쌓아두면 언젠간 쓸 때가 오겠지. 확실히 쓸 때가 올 거야.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책을 돌려받은 용팔이 호열에게 물었다. 너는 안 찾아도 되냐? 좋아하는 거. 흠. 호열이 턱을 괴었다. 턱 밑의 손바닥은 일그러짐 없이 매끈했다. 뭐,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 호열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긴 해도 흐리진 않았다. 그래도 너처럼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겠다. 추천해줄 거 있어?

 


 

밤이 깊어지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제각기의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삶이 오늘도 굴러간다. 백호 군단이 걷는 길은 방향도, 시간도 서로만큼 제멋대로라 아직 같은 길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없다. 얼마나 달린들 잠시 고개만 돌리면 서로가 있다. 자신의 길에서 허둥거리며 서툴게 발을 떼는 모습이 보인다. 소리 높여 부르면 그들은 반드시 그것을 듣고, 당연히 얼굴을 마주하며 인사한다. 손을 흔들 때의 마음은 모두가 똑같다.

호열이 빨간 스카프와 보석 스티커가 붙여진 유리병을 닦는다. 용팔은 길을 걷다 언젠가 만난 아이들을 보고는 알은체를 한다. 대남의 집에는 자그만 현수막이 거울 옆에 걸렸고, 구식은 오랜만에 입은 외투 주머니에서 구겨진 영화표를 발견한다. 그리고 여기보다 살짝 더 먼 곳. 태양이 한 걸음 뒤처진 그곳에서 별처럼 붉은 그가 부엌을 서성인다. 냉장고 앞에 서서 한 손에는 자석을, 다른 손에는 방금 도착한 사진 한 장을 쥐고 있다. 사진을 고정한 그가 뒤로 물러나 감상에 빠진다. 네 개의 얼굴이 그를 보며 웃는다. 사진 속 그들과 유리병 속 불꽃, 사진 밖 그의 표정은 조금의 다름도 없으리라. 흡족해진 그가 몸을 돌려 새 하루의 시작에 발을 디딘다.

이따금 뉴스에서 유성우 소식이 들려오면 백호 군단은 밤하늘 아래 선다. 잠깐이라도 밖으로 나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본다. 팔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치켜든 채. 시야를 물든 검정에서 티끌만 한 빛이 떨어지지 않을까 주의깊게 살피며. 새빨간, 혹은 그 밖의 새로운 색을 품은 별이 떨어지면 그들은 곧바로 달려 나갈 것이다. 언제라도 방황하는 친구를 붙잡을 수 있도록, 단번에 끌어안아 기꺼이 열기에 휩쓸릴 준비가 되어있다.

오늘밤 하늘은 잔잔하다. 점점이 수놓인 별이 가만히 그들을 살핀다. 어쩐지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반짝,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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