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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지 않은 이유

@제갈한유

복지사업 by 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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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악보가, 나랑 같이 불타서 사라지면 좋겠어. 같이 화장당하면 좋겠어.

* 트리거 주의) 자살, 우울증

구태여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제가 사실은 죽음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미래를 그리는 망상인가. 이미 자신은 답을 알고 있다. 확실하게 전자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중한 합주자구승하가 죽은 이후로 피아노 건반만 봐도 울렁이는 그 음악소리를 기억하게 된다. 같은 반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장례를 치뤄주지 않는 모습에는 덤덤했고, 자신이 죽더라도 동일할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냥 가능하다면… 어쩌면. 마지막은 자신이 이제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이 것들을 가지고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지독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그 파일 안에 있었다. 밤을 새고도 눈치채지 못하던 날이 있었고, 해가 다 떨어져도 음악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에 선생님이 돌아가라고 한 적이 한두 날이 아니었다. 모묘화는 지독하게 피아노를 사랑했고, 또 음악을 사랑했다. 그만큼 자신 안에 담긴 완벽주의는 빛을 발하고, 또 실수하지 않도록 손톱을 하나하나 관리한다. 그건 사랑이었고 또 증오였다. 무대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한 날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무대에서의 실수를 되짚기 보다는 그냥 컨디션으로 탓을 돌린다. 진단받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척을 위해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음에도 도무지 의욕을 솟아나질 않았다. 그러다 겨우 찾은 완전한 합주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상황에 그마저도 사라지고 말았기에.

자신도 가능하면 똑같이 사라지고 싶었다. 거대한 장송곡을 연주하고, 또 자신과 함께하던 합주자의 아끼던 노래를 연주하고, 마무리로는 자신이 지독하게 연주하던 즉흥곡들을 연달아서, 강하게 건반을 누르고, 지그시 페달을 밟아가며. 손가락이 건반을 짓이기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건반을 누르는 것과 맞물린 페달의 긴 허공음은 제 심장을 터트렸다. 만약 그렇게 하고 나서, 자신의 시체가 온전했다면 그 시체와 함께 자신의 온 세월이 담긴 악보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이전에 날려버린 피아노 조율기가 아쉬웠다. 그것도 함께 불탔더라면 완벽한 연주자의 형태였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피아노를 두드리고 싶었다. 지독하게 이 상황이 안타깝고, 또 우습고, 그런 자신이 싫었고, 죽고 싶었다.

오래오래 살거라고, 3번 복창해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곧 미적미적한 반응을 한다. 곧장 대답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 파일 안에는 자신의 죽음이 함께한다. 오래오래 살 수 있다고 확언을 할 자신이 없다. 미래가 없다, 내게는. 그럼에도… 네가 하는 말에 구태여 싫어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고작 생각해낸 대답은, 네가 오래 살면 그걸 따라서 조금은 더 살아보겠다는 단편적인 희망의 한 문장 정도였다. 내가 어떻게 그 말을 똑바로 말할 수 있을까. 당장에라도 밖에 나가서 건반을 두드리고, 좀비를 끌어 모아 장송곡을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 머리에 가득 찬, 그런 내가. 빈 손이 허전했다. 이 사태가 일어난 이후에 항시 챙겼던 악보가 떨어지는 건 꽤 불안하기도 했고, 시원하기도 하고. 그 안에 있는 집합체가 어쩌면 자신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있지…. 내가 그렇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면…. 네가 그 악보 가지고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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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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