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me
마모되고 닳아가는 감각, 사그라드는 열기와 차게 식은 피부. 가끔 숨이 모자라기도 하고, 또 시야가 암전하거나 흐려지기도 하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크게 젓는다. 모묘화는 자기가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목을 죄던 완벽주의가 없어진 건 불행인가 행운인가. 완벽함이라는 게 없어졌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피아노에서 오는 전율도 감정도 놓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더 이상 자신은 피아노에 손 하나 올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악보집을 떠올렸다. 그냥 언제까지나 그 상황에 멈춰있고 싶었다. 멀리 달아나고 싶었고,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 수 있다고 했던가? 모묘화에게 그런 담력은 없었다. 이제와서야 모묘화는 본인을 볼 수 있었다. 감정에 앞서 달려나가던 것을 겨우 절벽 앞에서 멈춘 꼴이었다. 자기 객관화라고 하기에는 아직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한 톨도 볼 수 없었지만, 이제 정말 한 끗이었다. 몸을 돌리면, 그 뒤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조금 지났다.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가져다 바친 피아노가 제게 약점이라는 사실이 조금 두려웠다.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여 세상을 삐뚤게 보는 것은 오랜 버릇이었다.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바르게 들 수 없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본인은 피아노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돌이표처럼 매번 같은 생각의 끝은 음악이거나 피아노였다. 피아노가 제 안에 얼마나 큰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인간의 몸 안에 있는 70% 수분처럼, 모묘화 안에는 98%의 피아노와 음악이 담겨 있을 뿐인거다. 적어도 연습실에 가면 어떤 답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연습실이라고 해봤자 모묘화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하로 내려가면 그게 연습실이었다. 오직 사랑하는 모가의 외동아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모묘화는 다시 집에 가야했다. 설령 마주치는 게 좀비가 된 부모님이라고 하더라도.
특수 부대인지 경찰인지의 인도에 따라 영현고에서 떨어진 대피소에 한동안 머물렀지만, 더 이상 그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집 안은 너무 고요했다. 오는 길에는 좀비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마저도 눈에 띄게 근처에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좀비가 된 부모님이나, 시체가 된 부모님을 마주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익숙한 집 안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 두분 다 외부에 계실 때 사태가 발생한건가? 신발을 벗고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이 또한 폭신한 것이 익숙했다. 느슨하게 풀린 표정은 이 사태가 일어나고도 종종 짓던 표정이었다. 집 안에 돌아오니 긴장도 풀려 무의미하게 거실과 부엌, 부모님의 방과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넓기만 하고 온기라고는 한 줌도 남지 않은 집이었는데 왜인지 마음이 편했다.
사실은 연습실을 애써 피했다. 그 전에 집 안에서 좀비라도 만나 피아노를 마지막까지 안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일이라도 생기길 무의식에 바라고 또 기대했다. 그만큼 피아노를 무서워 하면서도 결국 상황이 이어지면 연습실에 발을 옮기는 게, 병이 맞는 것 같았다. 연습실 문 앞에서 차가운 손잡이를 가볍게 당겨 밀었을 때에 어두운 방 안은 마지막에 들어갔을 때보다 조금 퀘퀘한 냄새가 났고,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익숙한 것도 같으면서, 어색한 것도 같으면서. 적당히 어두운 방 안은 자신이 원한 대로 맞춰놓은 것이었다. 바깥의 빛과 온도에 신경이 뒤틀리는 것 조차도 싫었던 순간이 있어서. 익숙한 침묵 속에 피아노 의자를 끄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 까지는 하나의 당연한 순서처럼 흘러갔다. 어때, 넌 다시 피아노가 하고 싶니. 답이 돌아오지 않을,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모묘화는 아주 긴 침묵과 긴 생각 끝에 답을 내놓는다. 아니, 나는… 아마도 이제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묘화는 자신의 장점이 약점이 되는 모습을 겪고 싶지도 않았고, 다시는 이 부담감과 긴장 속에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모묘화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뗀다.
안녕히, 나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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