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기억을 빚어내어(1)
추억이라는 완성을
이 글은 기억을 잃은 스테파니비앙과 그럼에도 그와 함께하고자 하는 아이메리크의 이야기이며, 수정 없이 마음가는대로 쓴 글이기에 다소 어색할 수 있습니다.
글의 배경 자체는 창천의 이슈가르드이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평행세계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의 말투가 본래 세계관에 존재하는 것과는 조금 상이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감상 되시길.
서걱거리는 소리를 따라 나무의 결을 쓰다듬고, 끝의 끝으로 이끌어서는 미련없이 잘라낸다. 다시 처음으로, 그리고 끝으로 향하는 여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진 도구의 끝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종이 위로 손을 내리며 무언가를 그리듯 발자취를 남겨본다. 여백이 가득한 공간 위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은 어떠한 이름이었다.
[아이메리크.]
단순하고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음절이 모여 하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구성품으로 자리잡는다. 누군가는 아무런 의미 없이 되내였을 단어가 형상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품도록 하였다. 정갈하게 쓰여진 이름은 새하얀 종이 위에 살포시 얹어진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쩐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맴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 끝이 이름 위를 지그시 눌렀다. 검은 자욱과 함께 이름의 흔적이 손가락에 새겨지는 것을 퍽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이는 이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홀로 남은 것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이끌려 밖으로 나섰다. 참으로 평화로운 한 때였다.
" 이야, 오늘은 날씨가 좋은걸! "
여름 하늘의 청량함을 담은 목소리가 유쾌하게 울려퍼진다. 키득거리는 웃음은 본래 한 세트였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서로 어긋남이 없이 섞인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세계에 속해있음에도 고작 작은 점 하나를 찍은 것 마냥 미미한 탓에 그저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세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머지않아 생기 넘치는 소리가 파동을 품고 흘러들어온다. 규칙적인 울림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구성부터 결과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더없이 바래왔던 삶의 모습이기에. 이전에도 많은 것들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거부감을 느끼고 어딘지 모를 불쾌함을 느낄 법한 일은 없었건만,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에 그대로 비치는 세상은 아무런 느낌 조차 담지 않은 채 그저 그대로였다. 어떠한 환희도, 기쁨도 담지 않은 채로 그렇게, 계속해서 의미 없는 물음을 이어나갔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들어온 투박한 부품들과 서늘하게 식어있는 기계의 모습은, 어쩐지 그 무엇보다도 뜨겁게 느껴졌었다. 붕 떠오른 몸이 사뿐히 가라앉아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들과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충만감. 속절없이 빠져들만큼 운명이라 자부할 수 있는, 기계와의 만남이었다. 그렇게 그는 공방주, 라는 단어를 제 이름 앞에 붙이고서 뜨거운 불길 속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꺼지지 않을 것과 같은 열정을 불태우며.
" 어서오세요! "
" 이것 좀 봐주세요. 여기, 이 부분이ㅡ "
여전히 요란스러운 낙원이다. 그는 겉으로도 열기가 선명히 느껴질만큼 뜨거운 불길 속으로 상념을 내던지기 위해 기꺼이 발을 들이며 익숙한 이가 건낸 미래를 위한 수단을 손에 쥐었다. 반댓손으로는 차갑게 굳혀진 조각들을 손 끝으로 굴리며, 퍼즐을 끼우듯 제자리에 걸맞게 하나 하나 정성 들여 맞추어간다. 응당 그러하듯 해야할 일을 알고 있을테니 구태여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음악을 연주하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손놀림에 따라 각자 독립된 개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평화를 지켰을 존재들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모습을 거둔 채 모두를 위한 형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자 어쩐지 심장 한켠이 시큰해지는 기분이다. 완성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질 수록 결함은 지워지고 모습은 변화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망각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이 아닌 새로움을 부여받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미련마저 완벽히 닦아내었을 즈음, 마침내 찰각 하고 비교적 가벼운 소리와 함께 끝이 맺어지자 공방주는 저가 들고 있던 것을 상대의 손에 가지런히 놓아주며 찬찬히 미소를 피워내었다.
" 자, 이러면 될거야. "
과정과 그에 상응하여 따라올 결과를 알고 있다면 자연스레 확신을 담은 대답이 도출되듯이, 공방주의 말은 간결하고도 깔끔했다. 뚜렷한 형태가 존재하는 자신감에 애정이 어려있으면 무엇이든 예상한 결과보다 더 좋은 것이 상응되어 나타나기 마련인지라, 시범하러 곧장 달려나간 직원이 기쁜 얼굴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이미 예견되어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법한 하나의 매듭은 또 다른 매듭을 향해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평범하고도 성실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본다. 저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열을 품은 것은 공방주 뿐만이 아닌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남은 것은 그들의 시간을 재료로 아낌없이 녹여내어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리라. 그를 위해 공방주는 누군가의 간절함이 담긴 물건을 손에 들고 어긋나고 비틀린 감정이 녹아들어간 그것을 정성스레 고치기 시작했다.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 다른 조각들이 천천히 맞물려가기 시작한다. 공기 중에는 따스하고도 간질간질한 감각이 둥둥 떠다니며 너무 화려하지도, 어지러울 만큼 진하지도 않은 적당한 봄이 만연한 느낌을 준다. 십자로 나뉜 금속을 기반으로 하나의 목표를 따라, 그저 단 하나의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점차 주변의 풍경이 종이에 물감이 번지듯 자유로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쓰러지더라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열정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냉정이 한데 모여 은은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탈의 형태를 만드니, 그를 축복하듯 둘러싼 금색의 향연이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완성된 것은 늘 빛을 따라가며 담담하게 현재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물체. 공방주는 제 손에 들린 또 하나의 완성을 제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살아있도록 해주는 것은 기억이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감정이라.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채 고이 간직되었던 기억, 그 속에 담겨 원망과 용서의 주체가 모두 산화되어버린 환각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해본다. 눈 앞에 넘실거리는 불꽃에 맞춰 춤을 추듯 천천히 발을 내딛고 부드럽게 턴하며 그 직후 타들어가는 소리에 맞춰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오늘도 어딘가에 존재할 이름 모를 주인공은 삶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고 함께 나아가 끝내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테지.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따스한 손과 차가운 금속의 끝이 닿자 누구도 손에 쥐지 못해 그저 바스러진 시간의 흔적이 모여 흐릿한 기억을 만들어냈다. 당황할 법도 하건만 공방주는 익숙하게 요동치는 박동을 내리누른 채 펼쳐진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때론 망가진 부품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그 자리에 끼워넣다보면 이렇듯 완성된 물체가 스스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기억을 엿볼 수 있었고, 공방 내에서 누구보다 많은 것을 접하는 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일이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일그러진 것을 하늘에 가득 담아보노라면, 익숙한 풍경이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에 뒤따르듯이 과거의 편린과 짓뭉개진 회한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 반발하며 날카로이 벼려진 칼날을 목에 들이밀었지만, 공방주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그저 한없이 붉어진 의미의 주체를 손색이 존재하지 않도록 새하얗게 물들일 뿐이다.
"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
끼익거리는 소리에 이어 귀로 흘러들어온 목소리를 들으며 공방주는 허공을 유영하며 펼쳐지던 것들을 한데 모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는 눈을 한차례 감았다 뜨며 팔랑거리는 환영이 현실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층 선명해진 시야에 담긴 것은 꼭 겨울과도 같은 반짝임이다. 제법 특별한 손님이 온 모양이지. 짧은 상념과 함께 몸을 돌리자 결 좋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기분 좋게 흩날렸다.
" 전에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 수리가 다 되었을까요? "
아, 그 사람이다. 공방주는 짧게 탄식과도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씩 찾아와 방금 전의 완성품과 같이 기억을 담은 물건의 의뢰를 맡기는 이였다. 그리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짧게는 2주, 길게는 한달 정도의 간격을 두고 꾸준히 방문하는 단골이다. 방금 전에 떠올린 반짝임과 원래 하나였던 것 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건내자 일순 떠오른 감정이 옅은 행복을 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자리에 그린듯한 미소가 채워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울림이 물결이 흘러가며 잔잔히 일렁이듯이 서서히 퍼져나간다. 잠시 정적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을 즈음, 무언가를 가득 눌러담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 …이번에도 완벽하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그 다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늘 그랬듯이 오른쪽 신발 끝을 바닥에 두어번 툭툭 정리하고, 소중히 물건을 감싸 쥐었던 손을 심장 부근에 올림과 동시에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미련없이 걸음을 돌리겠지. 공방주는 늘 그랬듯이 짧은 인사와 함께 그를 보내려다 잠시 뜸을 들이고는 약간의 충동과 변덕에 이끌리며 홀리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모처럼 오랜만에 방문해주셨는데... 괜찮으시다면 혹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겠습니까? "
말을 마침과 동시에 깊은 바다와도 같은 넘실거림이 원을 그리며 커진 채로 하늘에 가득 담기기 시작했고, 공방주는 저가 내뱉은 물음에 아차 싶어 입술을 잘근거렸다. 공방 내부에는 이런저런 소음과 작업 위주로 돌아가는 분위기 탓에 앉아서 느긋하게 차를 즐길 법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음은 이미 전해졌고 회답에 담긴 긍정과 부정, 서로 다른 두 감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황급히 주워 담는다 하더라도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슬쩍 눈을 굴려 상대의 반응을 살피니 이렇다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로 웃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 역시 곤란한거려나. 그리 생각하며 입을 떼었으나 그보다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먼저였다.
" 으음, 바쁘지 않으시다면... 기꺼이. "
" 좋아요. 그럼ㅡ "
"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
" 하하, 그럼요. 지금은 나름 한가한 시간이라 괜찮습니다. 2층에 먼저 올라가 계시겠어요? 보다시피 조금 전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차라 먼저 올라가 계시면 사용하던 장비만 정리하고 따라 올라가겠습니다. "
두 눈이 느리게 깜빡이더니 수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이어 간단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장비와 도구들을 본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는 공방주의 얼굴엔 저도 모르게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입 안쪽 여린 살을 짓씹듯이 물어댄 탓일까, 비릿한 맛이 혀 끝을 타고 입안 가득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단골 손님은 나무 난간 너머로 보이는 공방주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은 없다. 그렇다면,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애써 유지하고 있던 태연함이 잠시 본모습을 드러낸다. 느릿하게 굴러가는 푸른 눈동자에는 단 한 사람만이 가득 담겼다. 그가 알고있던 대로 반짝이고, 찬란하며, 더없이 태양과도 같은 사람이다. 전과 변함없이, 그대로.
" 혹시나 했지만... 기억이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군. "
야속한 사람 같으니. 짧은 원망은 하얀 숨과 함께 공중에 흩어졌다.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이내 다시 공기로 변하며 숨을 쉬던 이에게 스며든다. 그리움 너머로 존재하는 어떠한 풍경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다시금 눈을 뜬다. 여전히 현실이다. 하지만 단골 손님은 기꺼이 등을 돌려 그를 외면하고 진실을 꿈이라 치부하며 저 멀리 보기좋게 자리잡은 나무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 그가 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둘러 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함께 공방주의 모습이 보인다. 작업을 진행한 탓에 여기저기가 검게 변해있던 흔적을 말끔하게 씻어내었는지 얼굴 선을 따라 작은 물기가 어려있고, 손에 담긴 쟁반에는 찻주전자와 깔끔한 디자인의 찻잔 두 개.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숨을 몰아쉬며 흐르던 시선이 멈추며 올곧게 다가온다. 이어, 익숙하고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여기 계셨군요. 모처럼 특별한 손님을 맞이 하려니, 좋은 찻잎을 찾느라 조금 시간이 오래걸렸네요.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 아닙니다. 덕분에 이렇게 멋진 공방을 둘러보며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
짧게 대화가 오가고, 자리에 마주 앉는다. 정신없이 분주한 소리가 들리는 아래층과는 다르게 위층은 그와 대비될 만큼 고요했다. 공방주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다소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푸른 빛깔이 찰랑이며 잔에 담기는 것을 보고있자니, 그에 비친 단골 손님의 모습도 작게 일그러진다. 꼭 그래야 한다는 듯 한 폭의 그림처럼 적당한 양이 차오르자 조심히 손길을 거두며 자신의 잔에도 하늘을 채워넣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새하얀 구름 속에 창천이 담긴 것처럼,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광경은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듯했다. 찻잔에서 시작된 블루멜로우 티의 향이 투박하고 열정적인 공방 내부의 공기를 따라 은은하게 퍼져나가며 둘 사이를 유랑하고 있던 탓일까. 공방주는 마음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문득, 어디선가 위화감을 느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 차가 식기 전에 얼른 드셔보세요. 향이 강하지 않아 조금씩 드시기엔 괜찮을겁니다. "
따스함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들어올려 한 모금. 부드러운 목넘김과 은은히 퍼지는 향에 그와 닮은 미소가 피어난다. 어디에서도 본적 없는 풍경임에도, 동시에 어느 때에 마주한 장면처럼 묘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네요. 짧고 간결한 답변과 함께 이어질 말을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 자네가 직접 준비하고 대접해준 차라서 그런가... 이제껏 먹었던 차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군. "
" 직접 준비하고 대접해주신 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껏 먹었던 차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네요. "
"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
음율이 울려퍼지듯이 수면위에 이는 파동이 심장을 감싸안았다. 더할나위없이 좋다 느낄 정도의 평화로움이 낯설다. 눈앞에 마주하고 앉은 단골은 그 자신이 의뢰를 맡길 때 가져온 물건 처럼 따스하고 다정했고, 동시에 깊은 푸름을 담은 눈동자에는 다채로운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예의 인사를 주고 받은 이후, 이어져야 할 서두를 위한 침묵이 짧게 이어진다. 시침이 움직임을 다하여 제 자리에 굳어버린 것은 아니건만,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은 그대로 올곧기만 하다. 두 사람 모두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다면 덧없이 사라질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잔잔함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으리라고, 그리 여겼을 뿐이다.
순간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덧없으며, 또한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다. 검은 렌즈에 한가득 담아 조심스레 찍어낸 순간은 모두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홀로 남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점차 바래져간다. 그 안에 담긴 기억은 여전히 그대로임에도 보는 사람의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인다니, 이미 정의되어 있음에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조차 없지 않나. 공방주는 분명, 훗날 자신이 이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자신이 지금 속한 느낌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것이 좋은 쪽일지, 혹은 그 반대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겪지 않은 일에 불과한 미래일 뿐이니. 다만 그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그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이였다. 비록 충동적인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 하더라도 관계없이. 여전히, 지금도. 그러니, 겪지 않은 미래로 인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현재의 따스함에 몸을 기댄다. 늘 그랬듯이.
"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좋은 차를 대접 해주신건가요. "
" 아... 공방에 주기적으로 자주 오시는 단골이시기도 하고, 오늘은 유독 날이 추우니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하고 보내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
눈을 두어번 끔뻑거리다 곱게 접어 웃는다. 부드러이 휘어진 눈매가 기분이 좋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다. 공방주는 어색하게 찻잔 끝을 문지르며 시선을 굴리다, 제 마음이 향하는 대로 고개를 들어 단골을 마주했다. 여전히 푸르다. 한없이 잔잔하며, 올곧다. 바다를 닮은 눈이다. 공방주가 속으로 짧은 감상을 내뱉고 있자니 다시 한번 찻잔 속에 담기어 잠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며 기분 좋은 음율을 담아 대답이 내뱉어졌다. '그렇군요.' 깔끔하게 맺어진 말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듯하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다 머뭇거리듯 말을 이었다.
" 물론, 그렇게 거창한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도 당신을 알고 싶긴 했습니다. "
" 그건 의외의 답이네요. 별다른 이유라도 있었나요? "
" ...으음, 단순한 호기심이라 해둘까요. "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살풋 찡그리며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인다. 물론, 전하지 못할 뿐 그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을 보여주는 물건의 주인이 궁금했고, 두번째에는 그가 가져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마지막으로 의뢰를 맡긴 물건을 다시 건낼 때마다 드는 묘한 그리움과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치 않은 것이기에, 만남이 오래 이루어지지 않은 인연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에, 공방주는 그러한 마음을 전하는 대신 약간의 망설임을 남긴 채로 덩그러니 일렁이는 찻잔을 채우며 미소를 띄웠다.
" 이런, 그럼 오늘은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초대해주신건가요? "
"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 처럼 다른 날보다 좀 더 추위가 거센 날이라, 걱정되는 마음에... "
" 그럼, 호의에 보답하는 셈 치고.. 추위를 피하는 김에 따분한 이야기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나눠보는 건 어떠신가요. "
" ...!! 정말이십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죠.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
환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적인 이야기도, 그저 사소한 일상이라거나 혹은 일하면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차를 나누고, 긴 시간이 찰나로 느껴질 만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붉어지고, 어느덧 해가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잠을 청할 시간이 될 즈음이 되었을까, 둘의 이야기도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단골 손님은 창문 너머의 광경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방주를 바라보았다.
"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네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만 일어설까요. "
"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그럼 공방 앞에 있는 다리까지라도 괜찮으시다면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
단골 손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공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쟁반에 주전자와 찻잔을 적당히 정리하며 마중을 나가기 위해 따라 일어섰다. 뒤쪽에 문이 또 하나 존재했기에 아래로 내려갈 이유는 없었다. 문을 벌컥 열자 찬 바람이 몰아치듯 스며들었고, 문과 바깥의 경계선을 꾸욱 밟자 안과 밖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 느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공방 내부의 온도는 따뜻했고, 눈 앞으로 마주한 밖은 추위로 인해 얼어붙어있었다. 모두에게 공평한 따스함이 거두어질 시간이니 더욱 그랬다. 공방주는 먼저 밖에 나가, 단골 손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익숙한 추위가 온 몸으로 쏟아질 즈음 온기가 살포시 얹혀진다. 놓치지 않도록 꼬옥 감싸고서, 그렇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 여기까지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
다리까지 배웅해주기로 했던 마중은 두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광장까지 이어졌다. 익숙하고도 커다란 석상이 우두커니 서있는 분수대 옆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들이 정겹다. 그때까지 손을 꼬옥 붙잡고 있던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분수대에 도착한 직후 온기가 서로에게서 떠나간 그 순간이 공방주에게는 꽤나 아쉽게 느껴졌다. 이젠 정말로 이별을 마주할 시간이다. 단골손님은 공방주를 향해 등을 돌려 마주보았다.
" 날이 추우니 얼른 들어가세요. 오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엔 의뢰가 아니라도 종종 찾아뵈어도 될까요? "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끝을 맺는 매듭을 견고하게, 그리고 그 이후의 결속을 다지려 확실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공방주는 기꺼이 그에 응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 단골손님은 진심으로 기쁜 듯 웃었고, 그에 화답하듯 공방주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떤 순간은, 찰나가 아닌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던가.
그 순간을 겪은 사람들은 말했다. 얼마 만큼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날씨가 어떻고, 바람은 어땠으며, 어떤 색과 모양의 낙엽이 휘날려 땅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인지, 상대의 표정과 몸짓은 어땠는지, 마음은 누가 잠식했는지 따위의 아주 사소한 것들 조차도 다시 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지는 풍경, 그 속에 담긴 감정마저 고스란히 남아있는 추억이었다.
단골손님과 공방주는 생각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면 지금일 것이 분명하다, 라고.
눈앞에 있는 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도장을 찍듯이 남겨지며 잉크가 마르지 않은 새것의 여유를 드러낸다. 콕 찍으면 그대로 남을 만큼 아직 낙인되지 못한 채로 주위를 떠돌고 있다. 마음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 입을 열고,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요, 물론이죠. "
허락이 떨어졌다. 그 후로 이어지는 것은 확신이다. 굳게 매여졌던 매듭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려간다. 거리를 두고, 다시금 빙글 돌아 춤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손을 작게 흔들어 작별인사를 권했다. 공방주는 멀어져가는 단골손님의 등을 바라보며 건내지 못한 물음을 입안 너머로 삼켜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나 그를 이루고 있는 단어, 그 하나에 갈증이 일고 있었다. 다음엔 꼭, 기필코. 따위의 결심을 하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등을 돌린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저마다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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