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IF. 리엔세라 현대물 AU

리엔세라 : IF 단편

봄이 빠르게 물러갔다. 여름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절기. 어느 중학교의 방과 후, 노을 진 교실 안. 덜컥. 책상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역광으로 인한 검은 그림자 둘이 책상 위에 뒤엉켜 있었다.

새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숨을 죽이고 서로를 탐하는 두 개의 인영에서 나오는 열기만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회갈색 머리카락이 덜컹, 하는 책상의 움직임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하아.”

“...”

책상 위에 깔리듯 눕혀진 소녀의 안경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인상을 쓴 채 소녀가 자신을 위에서 내리 누르고 있는 여학생을 올려다봤다.

“만족하니? 이제 비켜.”

“...”

세라엘이 조금은 화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나 밀 빛 머리칼이 조금 흔들리나 싶더니 자신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것이 보였다.

뭐야, 먼저 시작한 건 저쪽이면서 자기가 화낸다고? 안경이 없어 시야가 흐렸지만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밀착해 있었기에 리엔시에의 시선만은 올곧이 느낄 수 있었다.

“무거워. 비켜.”

“...왜 자꾸 날 무시해?”

“뭐?”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바로 되물어 버렸다. 무시한 적 없었다. 세라엘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리엔시에의 일그러진 얼굴을 살폈다. 비가 내릴 것 같이 눈가가 붉었다. 당황스러웠다.

“무시한 적 없─”

“내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날 봐주지도 않아.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내가 그냥 미운 거지? 내 집안 때문에 나를 질투하는 거니?”

“...”

부유함을 의식해 본 적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맞았다. 그건...

“내 이름.”

“그래.”

“내 이름이 뭐지?”

“뭐?”

이제는 숫제 리엔시에 쪽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자기 이름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리엔시에는 눈앞의 소녀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성녀님.”

“...”

“...”

“내 이름은 세라엘이야. 성녀님이 아니라.”

두 쌍의 시선이 조용히 맞물렸다. 해가 좀 더 기울었는지, 교실 안은 이제 서로의 그림자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고고하신 성녀님. 학교에서 불리는 세라엘의 별명이었다. 마치 성녀인 마냥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고 냉랭히 책만 읽고 공부만 하는 모습에 신학교인 로나르힘 중학교의 학생들이 붙여준 호칭이었다. 세라엘은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불릴 때마다 자신이 위대한 존재인 것 같이 느껴져서. 그 성스러움이 자리를 빛내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아이들이 조롱하는 투로 자신을 성녀라고 부른다는 것을. 성녀라는 별명이, 이젠 기껍지만은 않았다.

학교에 소문이 돌았다. 리엔시에 솔린 유레이토. 유명한 집안의 자제가 로나르힘으로 전학을 온댔다. 전학생이라면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을까?

세라엘은 더럽혀진 위대함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밀 빛 머리칼에 아름다운 분홍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학교에 왔다.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몰래 복도에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참 아름다운 아이였다.

리엔시에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유별난 것으로 취급했다. 거기엔 약간의 질투와 자신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뒤섞여있었다.

아름다움을 시기한 것이다. 세라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학생은 따돌림을 당했다. 은근한 무시와 작은 짓궂음이 함께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몰래 리엔시에를 관찰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마치 스토커 같은 행색이었지만 세라엘은 의식하지 못했다. 리엔시에는 꼭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다가 땅거미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혹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거나 핸드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세라엘은 그 모든 일상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어느새 리엔시에가 있는 일상이 자연스러워졌다.

봄볕이 더운 어느 날, 리엔시에가 말을 걸었다. 세라엘은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도도하게 상대를 마주했다. 이윽고 불린 호칭에 멈칫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성녀님.”

“...”

그럼 그렇지. 너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그렇게 그게 끝이었다.

*

리엔시에는 화가 났다. 늘 자신을 따라오던 시선의 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는데 무시당했다. 왜? 기대감이 한순간에 허망함으로 변해 가슴을 채웠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좋았는데. 너도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내 용기를 짓밟았어. 우리 좋았잖아. 왜 갑자기 돌변한 건데?

울컥, 하고 심장에서 뜨거운 것 대신 어떤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뱉어내고 남은 것은 오기였다. 우리 감정이 쌍방이었다는 걸 확인해야겠어. 리엔시에는 빈 교실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

“...”

“......”

고요함이 밤이 된 교실을 꽉 채웠다. 적막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분의 호흡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리엔시에는 책상 옆에 우뚝 서서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창가에는 길고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에 안경을 쓴 여학생이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날 좋아하잖아.”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거지? 소리의 주인은 주먹을 꽉 쥐고 밤하늘을 등진 검고 흰 소녀를 향해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다.

“너, 맨날 나 따라다녔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뭐래. 공주병이야?”

“...뭐?”

“너 따라다닌 적 없어. 전학생이 누군지 궁금해서 확인해봤을 뿐이야.”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 정도는 가뿐했다. 자신을 속일 줄 아는 자는 남마저도 유려하게 속이고는 한다. 그 태도가 자연스럽기 그지없어서. 세라엘은 코웃음을 치며 창문틀에서 내려왔다. 리엔시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명화 속 주인공 같은 소녀가 흠칫하더니 어깨를 떨었다.

“너야말로 날 좋아하잖아.”

“......”

“내 이름. 알고 있어?”

“...세라엘.”

좋아하는 이의 이름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세라엘, 세라엘, 세라엘, 세라엘... 이름을 되새기다 아차 싶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진짜 이름을 모를 거라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세라엘, 성녀님이라고 부른 건...”

“나는 성녀가 아니야.”

“...알아.”

“근데, 너만의 성녀는 되어줄 수 있어.”

이건 약속할 수 있어. 나는 자비롭거든. 우리 내년이면 고등학생이잖아. 더 이상 어리지 않아. 다 컸으니까. 그러니까 난 이해해줄 수 있어. 네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하나만 약속해준다면.

“약속...?”

“죽을 때까지 날 잊지 말아줘.”

“그게 무슨 말이야?”

“영원을 약속하라는 뜻이야. 우리 사이를 잇는 붉은 실을 끊지 말자는 언약.”

“약속할게. 세라엘, 너도 나 좋아하는 거 맞지?”

“...그럼.”

죽음을 입에 담은 것은 어떤 예감이 들어서였다. 기시감 같기도 했고,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언젠가 너와 내가 수없이 사랑했고 이별을 겪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생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아마도. 그렇지 않다면 이 감정은 다 무어란 말인가. 이유 없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운명이다.

“세라엘.”

“응.”

“키스해도 돼?”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리엔시에한테서는 라일락 꽃내음이 났다. 희미한 기억 속, 세월을 뛰어넘어 찾아온 향기였다. 이번엔 기꺼이 물음에 대답해줬다. 세라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호선을 그렸다.

“당연하지.”

어둠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파편이 된 어둠은 뒤엉킨 그림자를 가려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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