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6
케일런 닉슨의 친구 만드는 방법.
1단계: 통성명을 한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목표 대상이 알아서 먼저 이름을 얘기했으니까.
2단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한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꽤 효과적인 방법이다. 많은 전문가들, 특히 로널드 닉슨이 아침마다 틀어놓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설득의 전문가 ‘초이 린’이 여러번 강조한 내용이었다. ‘직장 동료든, 펍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이든, 새롭게 들어간 동호회에서든 원활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을 짓는다거나, 가볍게 손을 흔드세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몰톡으로 넘어가는 거죠. 주말은 어땠어요, 조니? 어제 간다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어땠나요, 에이브릴?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날고 긴다는 수많은 대인관계 컨설턴트 전문가들도 친해져야 하는 상대가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도망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고작 17살인 케일런에게 아자드의 행동은 컨트롤 범위 밖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은 점은, 케일런과 아자드의 반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학교 건물이 워낙 넓어서 가장 먼 반끼리의 거리는 학교 건물 사이 거대한 공원을 지나쳐 4층 가량을 올라가야 하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 멀리 떨어진 반 학생들은 등교나 하교 시간에만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케일런과 아자드의 반은 한 층 정도만 차이가 났다.
케일런은 최대한, 정말로 최대한 아자드와 자연스럽게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어제와 달리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들이대면 Wi-Fi를 향한 자신의 흑심이 들킬까봐 할 수 있는 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웬 걸, 아자드는 대놓고 케일런의 인사를 씹었다.
못 들었나 싶어 머쓱하게 들어올린 손을 내린 케일런은 그 다음 쉬는 시간을 노렸다. 화장실에 한 번쯤 갈 때를 노려야겠는 걸. 그러나 아자드는 방광이 큰 건지 단 한번도 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반을 옮기는 시간에 일부러 아자드의 반쪽으로 돌아갔다. 마침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는 아자드가 보여 케일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무시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야! 사람 말 무시하냐? 어디 가냐고!”
그러나 또 케일런은 무시당했다.
이쯤되면 인사를 받아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새끼, 갑자기 날 엿 먹이나?
이만큼 노골적으로 무시당해본 적이 없는 케일런에게 아자드의 행동은 그의 성질을 슬슬 건드리는 꼴이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지?
그 다음부터 케일런은 아자드가 보이면 그 뒤를 성큼 성큼 따라가며 인사를 했다. ‘안녕? 야, 안 들려? 야, 안녕이라고 하잖아. 아자드? 저기요? 왕세자 전하?’ 왕세자 전하라 부르자 아자드는 잠깐 멈춰섰지만, 곧장 다시 제 갈길을 갔다. 그쯤되니 아자드와 케일런의 모습은 얼핏 교내 폭력과 흡사했다. 옆사람이 질릴 정도로 따라가면서 인사를 거는 미국 국무부 차관의 골칫덩어리. 심지어 상대보다 큰 체격에 갈수록 짜증내는 언성까지. 그 날 학교 일정이 끝나갈 무렵에는 모든 학교 학생들이 케일런과 아자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귓등으로 듣지도 않은 케일런은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를 부르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케일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자드의 반으로 간 그는 문짝만한 제 몸으로 교실 문을 막았다. 귀가하려던 학생들은 문을 열고 나가려다, 케일런과 마주치고 화들짝 놀랐다. 문지기를 자처하는 케일런이 슬쩍 몸을 비켜주면 다들 몸을 움츠리고는 복도로 나갔다.
모든 학생들과 선생들이 케일런을 한번씩 흘긋 쳐다보고 나가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앉아있던 아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케일런을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
“안녕?”
“…….”
그러나 아자드는 나가지 못했다. 케일런이 아예 대놓고 그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빈 틈으로 밀고 나가려 아자드가 노력했지만, 한 때 학교에서 럭비부까지 해봤던 건장한 남고생을 뚫고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아자드는 이내 자리에서 멈추고, 입꼬리를 올리며 길을 막는 케일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건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은데. 너는 사람이 인사를 그렇게 하는데 무시하냐?”
“하…….”
다시 한숨을 내뱉은 아자드는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나한테 말 걸지 말라니까.”
“얼씨구. 네가 나한테 먼저 말 걸어 놓고서 나는 그러지 말라? 그럼 나는 뭐, 왕자님이 말 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평민이다 이거냐?”
“그 뜻이 아니고…….”
머리가 아픈 듯 아자드가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지긋이 눌렀다.
“남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한 거야.”
“뭐?”
이해하지 못한 케일런이 되묻자 아자드는 그를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내 위치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나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네 위치가 어때서? 왕자 아냐?”
“…….”
케일런의 말에 아자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불쾌해서라기보다는, 당황해 할말을 잃어서였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뭔… 너 혹시 선미의식? 그런 거 있냐? 지금 왕자라고 거들먹거리는 거 맞네.”
“선미의식이 뭐야? 선민의식을 말하는 거야?”
분명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대화에 진전이 없었다. 이 이상 더 대거리하기 싫었는지 아자드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제 내가 네게 말을 걸어서 미안해.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서 말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도대체 뭐가 문제냐니까?”
“그러니까…….”
아자드가 품에 안고 있던 책을 고쳐들고는, 케일런의 옆구리를 어깨로 밀었다.
“우리가 얘기하면 남들이 오해하기 쉽잖니. 으, 좀 비켜줄래? 밖에서 콜야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해는 또 무슨 헛소리야?”
“너는, 미국인이고, 심지어 그냥 미국인도 아니고 미국 국무부 차관 아들이라며.”
그 말에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케일런의 몸이 순순히 밀렸다. 그 틈을 타 교실 밖으로 빠져나간 아자드는 계속해 말했다.
“케일런 닉슨, 미국 국부무 차관 로널드 닉슨의 유일한 아들이자 칠면조 사건의 장본인. 프롬 연회에서 칠면조 생피가 든 양동이를 던졌다며.”
“하, 젠장. 그건 또 언제 주워 들었냐?”
노골적으로 케일런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하지만 그러면 너도 학교에서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어? …어쨌든 어제 일은 그냥 내 변덕이라고 생각해줘.”
그렇게 말한 아자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혼자 남은 케일런은 그의 뒤를 눈으로 쫓다가, 올라오는 제 성을 못이겨 자기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불량아에 문제아라 말 걸지 말라 이거지?’
이를 꽉 문 케일런은 씩씩거리다 새하얀 벽에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자 깔끔하게 페인트칠 된 벽에 새카만 운동화 자국이 남았다. 지나가던 청소부가 보면 골머리를 앓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Wi-Fi는 꿈도 못 꿀 케일런에게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그가 그러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라, 뭐하고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혼날 거예요.”
“아이씨… 너냐?”
뒤를 돌아본 케일런은 빨간 머리를 보고 대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콜야는 가방을 멘 채 빈 교실 안쪽을 흘긋거렸다.
“도련님 못 봤어? 여기 계실텐데.”
“어, 너네 귀한 왕자님은 아까 저기로 나가셨다.”
“뭐라구요?” [엇갈렸나아…….]
시무룩해진 콜야가 입을 비죽 내민 채 고개를 툭 떨궜다. ‘같이 가지 않으면 또 니냐한테 엄청 혼날텐데! 역시 제가 매일 교실 앞까지 마중 나가는 게 맞다니까요오, 왕자님. 건물 밖에서 있으면 이렇게 엇갈린다구요~’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는 콜야를 케일런이 지켜보다 말을 걸었다.
“야, 빨간머리.”
“응? 나요?”
“그래. 빨간머리가 너말고 더 있냐.”
“맞아요! 그냥 놀랐어. 케일이 말을 걸어줘서요.”
콜야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거예요? 궁금한 거? 역시 학교 질문이야?’
“니네 왕자한테 오늘 인사 했는데 전부 무시당했거든? 어제 자기가 먼저 인사해놓고 앞으로는 말도 걸지 말라는데 왜 저 지랄인지 아냐?”
“어…지랄? 지랄이 무슨 뜻인가요?”
“이상한 단어에 꽂히지 말고.”
“지랄?”
“아오! 왜 저러는 지 아냐고.”
답답함에 케일런이 뒤로 넘어가려 했다. 이 나라에 와서 어떻게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는 사람이 없지? 지금 이 기분이라면 당장 바다라도 헤엄쳐서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강도라도 저지르면 미국 경찰이 와서 잡아가주지 않을까? 이 나라에 있을 바에는 미국 감옥에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케일런이 이마를 짚고 있자 콜야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도련님이 먼저 말을 걸었어요? 정말로? 케일이 먼저 말을 건 게 아니라?”
“이건 또 무슨 트집이야. 그럼 내가 미쳤다고 여기 사람한테 먼저 말을 걸겠냐? 됐다. 하… 말하는 게 뭐라고.”
“으음…?”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에 케일런이 반쯤 체념하고 있자 콜야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도련님은 케일이 좋았나봐요. 마음에 들었나봐!”
“뭐? 영어가 부족하다 하더니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나본데, 오늘 하루종일 나 무시 당했다니까?”
“그렇지만 어제, 도련님이 먼저 얘기 시작했어요. 맞죠? 원래 도련님은 그러시면 안되는데!”
“안된다고?”
케일런이 되물었다. 빨간머리 소녀는 아까 전 아자드처럼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어, 어떻게 얘기해야하지.] “눈, 눈이 많아요. 도련님을 보는 눈.”
“……?”
“도련님이 학교를 가도, 집에 가도 언제나 있어요. 도련님을 보는 눈.”
콜야는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가, 망원경을 보듯 양 손을 둥글게 말아 눈에 가져다 대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케일런이 알듯 모를듯한 반응을 보이자, 아예 이번에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자신과 케일런의 두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감시 당하고 있다고? 무슨 이유로?”
“헤헤.”
소녀는 당연하다는듯 얘기했다.
“도련님이 살아있어서 곤란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
[카나리아의 위치는?]
[현재 둥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시가를 태우던 남성은 건네 받은 종이를 조명 아래에 비춰봤다. 종이 위에 인쇄된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여력했다. 흑백으로 그려진 탓에 눈색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제법 또렷한 인상이었다.
[접점이 얼마나 있었다고?]
[오늘 하루만 카나리아에게 열 번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대화 내용은?]
[단순한 인사였습니다. 카나리아가 답하지 않아 그 이상 진전은 없었습니다.]
피우던 시가를 입에서 떼낸 남자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검은 가죽 장갑이 낀 손으로 이름이 적힌 곳을 툭, 툭 두드렸다. 자신의 상사가 고심하고 있는 듯 하자, 보고하던 병사가 물었다.
[따로 감시를 붙일까요? 보안 감찰국에 요청하면 오늘 저녁까지는 쥐가…….]
말하던 병사는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입을 딱 다물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해서는 명령 불복종이었다. 이 검고 어두운 공간 안은 온전히 남자의 관할이었다.
[듣자하니 로널드 닉슨의 오래된 골칫덩어리라던데……. 제 아비의 말을 듣고 움직일 성격은 아닌 것 같고. 그저 카나리아의 신분이 신기해 말을 붙이는 정도겠지.]
[그럼 미국에서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설령 접근한 것이라 해도 지금 쥐를 붙이기에는 시기상조다. 카나리아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시하면 얼마 안 가 떨어져 나가겠지. 괜한 불씨를 만들어선 우리도 좋을 게 없어.]
[알겠습니다.]
그 때, 방 안으로 한 병사가 걸어왔다. 노크 없이 들어온 병사를 남자가 쳐다보자, 재빨리 병사가 방문 목적을 밝혔다.
[국왕 폐하께서 말리크 국방부 장관님을 금일 저녁 연회에 부르셨습니다. 참석 부탁드린다는 왕실의 전언입니다.]
[알겠다.]
말리크 국방부 장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덩치에 맞게 묵직한 움직임이었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케일런 닉슨의 신상에 대해 더 조사하도록. 미국에 있었을 때 만났던 지인 관계까지 전부 알아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비쪽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영원한 태양을 위해.]
*
“…그러니까 네 얘기를 정리하면 아자드가 유일한 이 나라의 왕자이긴 하지만, 왕은 아자드가 아니라 이복 형인 아르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명분이 없으니 아자드를 대놓고 차별한다. 그리고 아자드와 친해지면 눈 밖에 나서 불이익을 받는다. 그래서 아자드도 웬만하면 남들한테 먼저 말을 안 걸고, 남의 말도 안 받아준다. 이런 얘기인 거지?”
“정확해요. 맞아요. 케일 똑똑해~”
케일런이 설명을 정리하자 콜야가 웃으며 까치발을 들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케일런이 고개를 숙여주지 않아 콜야의 손이 닿지는 않았다.
“그럼 형한테 왕위만 물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아자드가 없어져야 하는데?”
“으음…….” [그건 너무 설명하기 복잡한데… 어디부터 얘기해야하는 거지?]
콜야가 부족한 영어로 설명을 하려 끙끙댔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았는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콜야의 말을 기다리던 케일런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런 복잡한 얘기는 내 방식이 아니야.”
“그건 그래요! 케일은 똑똑한 거 같진 않아!”
“은근슬쩍 욕한다, 너?”
왕자하고 친해지라는 로널드의 말이 단순히 ‘친구를 사귀어라’ 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쫓겨날 수도 있는 왕자와 지내라니.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버리는 패처럼 쓰겠다는 뜻인가? 케일런은 속으로 울컥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집에 아자드를 불러내 대화할 자리만 마련하라 했으니, 그러고나서 아자드와 연을 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직 정치와 거리가 먼 미국 출신 남학생은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산소통과 같은 Wi-Fi가 더 중요했다.
“왕위고 왕자고 내 알 바는 아니고. 나는 아자드하고 친해지고 싶거든.”
“…용기가 굉장해!” [그냥 멍청한 거 같지만!]
“너 지금 또 욕한 거지? 하여튼 좋은 방법 없어?”
케일런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내가 이래봬도 친구가 되도록 점 찍어놓은 사람하고는 인사 한번이라도 해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거기에 무시까지 당했으니 이대로 발 뻗고는 못 자. 아자드가 내 인사를 안 받아주면 앞으로 계속 쫓아다닐 건데, 걔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하지 않겠냐? 그러니 네가 협조 좀 해라.”
“응!”
“그래, 으…응?”
예상과는 달리 너무 순순히 답하는 콜야의 답에 케일런이 당황했다. ‘도련님이 곤란해져서 못 도와요! 안돼요!’ 이런 대답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알지?”
“어어?”
“무료로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거예요!”
콜야가 당당하게 제 손을 내밀었다. 케일런은 어이가 없어져 작은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리저리 굳은 살이 박혀있는 손이었다.
“케일이 제가 말하는 걸 가져다줍니다. 그럼 나도 케일을 돕습니다! 도련님과 친해지기~”
“…너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케일런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콜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쯤되니 케일런도 그저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만 남았다.
“하, 내 인생. 그래서 뭘 가져다주면 되는데?”
“미국산 잡지요. 그으으, 그… 나무하고 꽃에 관련된 잡지입니다!”
창문 밖에 보이는 나무를 가리킨 콜야는 챠칵, 챠칵 소리를 내며 가위질 하는 시늉을 냈다. 두어번 가위질을 하고, 무언가 털어내는 손짓 다음에는 주전자 같은 물건의 손잡이를 잡고 따르는 몸짓을 했다.
“조경 잡지를 구해달라고?”
“네! 식물, 챠칵챠칵, 주르륵, 이렇게 하는 잡지요! 부탁합니다~”
“그걸 왜?”
“원래 거래할 때는 말이 길면 안됩니다. 숙녀에게 질문이 많으면 실례인걸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미국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다 구했어요.”
“암…시장?”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거겠지. 그냥 시장을 말하는데 그저 이름이 ‘black'인 거겠지. 케일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가, 콜야의 모자란 영어 실력 탓으로 넘겼다. 다시 빨간 머리 소녀가 쭈욱 손을 내밀었다.
“그걸 가져다주면 도련님을 꼬실 방법을 알려줄게요. 거래 할 거야?”
“그러지, 뭐.”
케이런은 ‘꼬신다’는 친구를 만들 때 쓰는 단어가 아니고, 그런 곳에 쓰이는 어감도 아니라고 정정하려다 말았다. 대신 그는 콜야의 손을 맞잡았다. 손이 맞잡히자 콜야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도련님의 새 친구! 거래 성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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