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막간. 과거의 기억

리엔세라 : 단편

─수 백년 전, 신성제국 비에르온의 수도 카라펠. 카라펠의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사창가의 어느 낡은 여관. 그곳의 남루한 마구간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으아앙, 으앙!”

“으아아앙!”

“헉, 헉… 아…”

태어난 아이는 총 두 명. 쌍둥이 여아였다. 방금 막 아이를 출산한 산모는 홍등가의 푸른 보석이라 불리는 솔렛사라는 여성이었다. 솔렛사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누더기 천으로 감싼 신생아들을 고쳐 안았다. 그런데.

“...아, 아아…! 이럴수가...”

아이의 이마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두 아이 모두에게. 비에르온 제국민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아이가 갖고 태어나는 문장. 그것은─성녀의 ‘성흔’이었다. 솔렛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한 명도 아니라 두 명.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아직 몰랐다.

*

시에레인은 성흔을 가지고 태어난 두 쌍둥이 여아 중 언니 쪽이었다. 여동생의 이름은 엘레스. 두 명은 성흔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들, 즉 미래의 성녀가 될 존재들이었다.

본래 성흔을 지닌 자는 한 명만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이 옛 성현의 예언이었으므로. 그러나 성흔을 가진 자는 두 명. 성녀의 자리는 하나이므로, 둘 중 누가 성녀가 될지는 뭇사람들의 흔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여동생인 엘레스가 일찍이 병사하고 만다. 이후 혼자 남은 시에레인은 유일한 자격으로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녀가 된다. 결국 한 세대에 한 명의 성녀가 나타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옳았다.

10년 후, 시에레인은 검은 머리칼에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다. 이로써 신전에 들어온 지도 벌써 10년. 시에레인은 정식으로 성녀가 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경험해왔었다. 교황을 도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성녀님! 성녀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시에레인님!”

제국민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시에레인은 교황이 탄 황금색 마차 뒤에 딸린 은빛의 화려한 마차에 탑승해 있었다. 창문에 달린 커튼을 걷어 올리자 사람들의 함성이 커졌다. 곧 그녀는 그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에레인은 얼마 전 성인식(聖人式)을 치렀다. 이제 로나르힘의 성녀가 되었음을 세상에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이 행사는 곧 있을 성전을 위한 준비였다. …

성전(聖戰). 그랬다. 신성제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을 거부하고 있는 남부의 이단 국가를 징벌하기 위함이었다. 비에르온은 제국 영토 확장을 늘 꿈꿔왔었고, 명분을 세웠으니 남은 건 실행하는 것뿐. 시에레인 또한 직접 나설 수 없는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전쟁이라니. 전쟁이란 곧 살육이 난무하는 지옥이다. 그런데 신을 모신다는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시에레인은 이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전에 묶인 몸, 교황과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장기 말’이기도 했다. 늘 그랬듯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곧 전쟁이 벌어졌다. 비에르온의 군사는 여신을 부정하는 존재들에게 철퇴를 내렸다. 시에레인은 훗날 마력이라 불리는 ‘신성력’을 이용해 ‘기적─마법─’을 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그녀는 제가 앗아온 무수한 생명들에 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것이 옳은 행위일까. 신을 모시는 자로서 전쟁에 선봉에 서는 것이 맞는 일일까.

시에레인은 전쟁 도중 급작스레 선포한다. 성녀로서 전쟁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다. 비에르온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강력한 장기 말과 다름없는 존재가 전쟁을 거부한다면, 저들에게 승산이 줄어드는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시에레인이 행하는 기적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성녀가 갑자기 제국을 배반하면 어떻게 하지? 이단이나 다름없는 남부의 야만 국가를 품는답시고 교황과 황제를 배신한다면? 그리고 어쨌거나 전쟁을 거부한 이상 그녀는 제국민들에게 미움을 사고 교황의 눈엣가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온 비에르온이 이단 정벌에 불을 켜고 미쳐있던 시기였다.

결국 비에르온인들은 시에레인을 마녀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성녀가 아니라 마녀래. 원래 성녀는 한 세대에 한 명만 태어나는 게 맞잖아? 그런데 시에레인은 쌍둥이로 태어났잖아. 아니, 실은 시에레인이 아니라 엘레스 쪽이 성녀가 되어야 했는데, 시에레인이 엘레스를 시기한 나머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갔고 확장된 거짓은 곧 시에레인을 처형대 위로 올렸다. ─제국민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전쟁 전의 준비를 위해 교황과 함께 순례를 돌던 때가 오버랩되었다. 이제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사람들이 자기 죽음을 바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차피 성흔을 가진 자가 죽으면 다음 대의 성녀가 곧 나타나기 마련.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최초의 성녀는 화형을 당해 이슬로 흩어지게 된다.

시에레인은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성녀가 되지 않았다면. 아니, 성흔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내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이런 결말을 맞지 않았을 텐데. 나는 결국 사람들의 신앙심에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구나.

성녀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 걸까. 애초에, 로나르힘이라는 종교는 대체…

*

시에레인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계기는 산사태에서 저들만 살아남은 여아들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만 재해에서 살아남은 것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녀들이 태생적으로 지닌 마력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신성력(마력)은 성녀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곧 성녀가 아니면서 기적(마법)을 행할 수 있는 여성들을 사술사, 또는 마녀라 부르며 학살하기 시작했고, 문양(성흔)이 없으면서 마력을 지닌 여아들이 무수히 살해당한다. 가짜 성흔을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거나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더한 처벌을 받는 사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셰이번의 라흐벤시아 건국 이후, 마법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마녀사냥은 금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셰이번 또한 마력을 지닌 여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흐벤시아 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마법을 행할 수 있는 여성이 차별받는 세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시에레인은 그런 시대의 흐름 가운데, 자기 후손─리엔시에─로 환생한다. 그러나 귀선유전으로 태어난 탓에 차별받는 삶을 피할 순 없었다. 여기까지가, 리엔시에가 기억하는 자신의 전생이자 과거의 기억. 회귀가 일어나기 전, 고정된 시간이 엮어낸 역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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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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