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4화. 발데마인, 혹은 로나르힘 (3)

리엔세라 : 4-3화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이름 모를 보랏빛 들꽃이 짓밟혀 있었다.

‘리엔시에 영애는 다르지 않아요.’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구요.’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너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특별하지 않다고 말해준 사람은. 부모님은 자신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딸자식으로서 대했지만 그건 ‘남들과 다른 특별한 내 딸’에 대한 애정이었다. 적어도 리엔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엔시에가 세라엘에게 기대한 것도 비슷한 결이었다. 이런 괴물인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는 성녀님에 대한 기대. 남들과 다른 나를 사랑해주는 고귀한 존재에 대한 갈망. 그런데 당신은 나보고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다.

베레니체 비앙카 코톤 콜린. 이제 이 이름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그녀는 세라엘 이외에 처음으로 제 삶에 끼어든 무법자였다. 아니, 처음은 아닌가. 왜냐하면, 그녀 이전에도...

“─리엔시에!”

“아... 황녀님.”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 코니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코를 찡긋거리며 부러 칭얼대듯 말하는 금발 머리의 소녀. 바로 얼마 전 자신과 같이 발데마인에 입학한 라흐벤시아의 황손녀 코니엘이었다. 덕분에 코니엘은 좋은 의미로, 자신은 나쁜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코니엘이 붉은빛 도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리엔시에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아까 콜린 자작 영애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그건...”

괜히 얘기해봤자 코니엘의 자책감만 돋울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 또한 제게 실수를 했던 것은 사실이니. 그래서 리엔시에는 화제를 돌렸다.

“코니엘님, 오늘은 입학식만 하고 학기는 내일부터가 시작인데. 일정이 더 없으시다면, 저랑 같이 나들이라도 가실래요?”

“어머, 좋아요! 우리 어디를 가는 건가요?”

코니엘이 환하게 웃으며 리엔시에의 팔에 매달렸다. 조금 귀찮았지만, 리엔시에는 내색하지 않고 습관적인 미소를 지으며 들뜬 코니엘에게 대답해 주었다.

“──로나지에 신전이요.”

*

오전의 흐렸던 날씨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늘이 새파랗게 열렸다. 온 세상이 푸르렀다. 일정을 마치고 신전으로 돌아온 성녀가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천으로 몸을 휘감은 하늘에 오전의 햇살이 주렁주렁 열렸다. 밝아진 세상이 제게 말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좋은 일은 개뿔.

세라엘은 속으로 투덜대며 기나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넓은 공간에 제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드넓은 복도에는 지나가는 수녀 하나 없었다. 고요한 공간에 펼쳐진 대리석 바닥을 짓밟으며 걷던 성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어린 날의 장난은 치지 않는다. 수녀의 옷자락을 태워 먹는다거나, 곡식 창고에 불을 지른다거나, 신관의 신발에 흙탕물을 들이부어 놓는다거나. 이제 나도 다 컸어. 좀 있으면 성인식도 치르는걸. 치기 어린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 자유를 억압하는 이 성녀라는 지위에는 여전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내의 시간을 견디다가 갑작스레 택한 잠깐의 일탈은 엄청난 쾌감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재미있었다. 제 이름 아래 수호받는 세상은 활기차고 선명했다. 학생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났다. 활발한 분위기 또한 좋았다.

세라엘은 만족했다. 이 정도면 제 자유를 팔아 얻는 풍경치고는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학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시내의 옷 가게에도 들러보고 허름한 식당에서 자극적인 음식도 먹어보고─좋아하는 류의 음식은 아니지만 가끔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잣거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일상의 한 자락이었지만, 세라엘은 이제 그것이 낯설고 기꺼웠다.

하지만 그렇게 멋진 세상을 감상하고 신전에 돌아오니 잔뜩 화난 표정의 수녀들과 엄한 얼굴의 신관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이어진 것은 따끔한 질책과 역시 천한 핏줄이 섞인 성녀는 안된다며 흉을 보는 신전 전속 시종들의 모습이었다.

억울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내가 지키는 세상을 확인하는 것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성녀는 아예 자유가 없어?

그렇게 따졌다가 더 혼났다. 성녀는 함부로 신전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성녀에게 허락된 유희는 순례의 길이 열리는 날들뿐이랍니다. 즉, 일요일에만 엄중한 허락하에 수녀 혹은 신관 동반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성녀는 짜증이 났다. 어차피 학교에 다니게 될 터인데, 유희란 뭐고 순례의 길이 열리는 날이란 또 뭐란 말인가.

하나 유일 성녀란 그런 자리였다. 원한 적 없는 모든 책임을 져 들고 꿋꿋이 서서 세상을 밝힐 등대가 되는 것. 등대가 세상이란 바다를 비추는 한 항해자들은 안심하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등대의 빛에 의지하며.

세라엘은 신전에 팔려 온 제 처지를 한 번도 슬퍼한 적이 없었다. 저는 자유를 억압하는 자리가 싫은 한 편 이 성녀라는 위치가 좋았다. 천한 사생아를 고귀한 자리로 끌어 올려준 셈이니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소녀는 제가 가진 성녀의 지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긴 복도가 끝이 나고 맨 끝에 위치한 기도실이 나왔다. 기도실의 문지방을 넘자 벌써부터 토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들어찬 햇살의 향이 역했다. 기도실은 햇볕으로 가득 들어차 밝다 못해 눈부셨다. 세라엘은 그 밝음이 저를 자꾸 밀어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최초의 성녀-시에레인의 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여 자연스레 기도 아닌 기도를 올린다. 눈을 감은 상태, 어둠 속에 부유하듯 떠오르는 것은 자신만의 발칙한 스토커 소녀의 모습이었다.

──리엔시에. 너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또 나를 개처럼 졸졸 따라다녔으려나? 아니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니?

세라엘은 기도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리엔시에와 단 둘이서 만나보고 싶다고. 처음으로 신께 제 요구를 들이밀었다. 간절히 요청했다. 아니,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늦은 낮의 따사로운 은총이 일정한 모양의 벽을 뚫은 복도를 아치형으로 채웠다. 위가 둥근 모양의 길쭉한 형태로 빛이 잘라져 복도에 일렬로 줄을 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세라엘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이유 모를 죄악감이 가슴 끝에서부터 차올랐다. 저는 이렇게나 죄인인데, 세상은 참 환하다.

죄인이라. 그래, 제가 오전에 저질렀던 행동들이 저의 죄업이렸다. 자신만의 소녀를 위해 기도를 올린 성녀는 다시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곧 이른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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