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4화. 발데마인, 혹은 로나르힘 (4)

리엔세라 : 4-4화

세라엘은 성녀의 침실로 식사를 가져올 수녀를 기다렸다. 아까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시계 분침이 막 6을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배고픈 성녀는 침대 옆쪽에 놓인 단출한 나무 식탁에서 저녁을 기다렸다.  자극적인 음식을 싫어하는 제 입맛에 신전의 음식은 잘 맞았다.

오늘의 메뉴는 뭘까. 왠지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올린 샐러드를 좀 먹고 싶은데. 그런 실없는 생각들을 하며 건너편에 난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물어가는 창공(蒼空)으로 하얀 새 무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새는 자유를 상징한다지. 세라엘은 새만도 못한 제 자유에 대해 생각하며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성녀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충 들어와. 라고 말했다.

끼이익 하고 쇠 경첩이 녹슨 소리를 냈다. 문이 열렸다. 세라엘은 그제야 방으로 들어온 인물을 맞이했다.

“......”

“...”

제 식사를 책임지는 수녀가 아니었다. 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양옆으로 내려 묶고 엷은 분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소녀는 수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수녀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야...

수녀 중에는 이종족이나 혼혈이 없다. 전부 순혈 인간들이다. 그것도 모르고 발칙한 뾰족 귀 소녀는 우물쭈물 제게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식사... 가져 왔어요. 성녀님.”

경건한 신전의 무단 침입범──리엔시에는 세라엘의 속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식사를 식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양젖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와 약간의 과일이 든 바구니. 그리고 올해 처음 나온 곡식과 간이 약하게 된 닭고기가 얇게 찢어져 접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세라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수고했어. 나가봐.”

“...”

리엔시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양 바로 나가지 않고 우왕좌왕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세라엘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모른 체 했다. 뭐하니? 어서 나가지 않고.

그러자 소녀가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하더니 제 얼굴을 잠깐 동안 들여다보았다. 곧이어 희미하게 웃고는 그제서야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간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했다. 세라엘은 그것이 리엔시에가 제 얼굴을 보고 안정을 되찾은 증거임을 눈치챘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니까.

제게 푹 빠진 소녀의 사랑을 확인한 세라엘은 기분 좋게 식사를 시작했다. 밥을 먹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다. 리엔시에가 기특하게도 스스로 제게 찾아올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다는 말인 줄은 몰랐다.

기도가 통한 것일까? 신이 웬일로 제 편을 들어주었다. 그녀를 눈앞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세라엘은 이 짧은 만남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이건 신이 제게 기회를 준 것이다. 리엔시에의 사랑을 확인할 기회. 그녀가 ‘성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세라엘’을 사랑하는 것인지 확인할 기회가 드디어 주어졌다.

세라엘은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종종 걸어갔다. 문에 난 작은 창으로 밖을 살피자 놀랍게도 리엔시에가 아직 바깥에 있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옆에는 못 보던 수녀복 차림의 소녀 한 명이 더 있었다. 베일 너머로 길게 삐져나온 풍성한 금발. 누구지? 자신이 아는 한 수녀 중에 금발인 사람은 이 신전에 없었다.

*

리엔시에는 당황스러웠다. 길을 잃었다. 호기롭게 신전에 잠입한 것까지는 좋았다. 무사히 제 성녀님도 만나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은 달성했다.

그런데 나가는 길을 못 찾겠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코니엘이 우왕좌왕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것이 보였다. 무척이나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만, 자신 또한 미아인 상태라 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보다 신전 침입죄는 중죄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게다가 자신은 평범한 인간도 아닌 귀선유전의 혼혈 인간이었다. 제 뾰족한 귀 끝을 매만지며 리엔시에는 불안하게 떨리는 호흡을 내쉬었다. 세라엘이 문에 난 창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수녀 하나를 마법으로 몰래 잠재우고 신복을 빼돌려 입은 터라 들키면 그냥 끝나지 않을 것이다. 리엔시에는 제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속으로 애를 태웠다. 코니엘은 이미 식은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두 소녀는 걱정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애를 태웠다. 그때, 문에 달린 녹슨 경첩이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기도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리엔시에와 코니엘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성녀가 서 있었다. 성녀의 머리 뒤로 기도실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이 무지개 빛 파편으로 부서지며 내리쬐었다. 그것이 꼭 신의 후광 같다고 리엔시에는 멍하니 생각했다.

뺨이 달아오르는 감각. 소녀는 제가 처한 상황도 잊고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 성스러운 자태를 감상했다.

“뭘 보니? 구경났어?”

“.......아.”

화들짝 놀란 리엔시에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꾸벅 절했다. 수녀라면 응당 성녀께 보여야 할 예의였다. 리엔시에는 오랫동안 이곳을 들락날락거린 탓에─허락은 딱히 받지 않았었다─이곳의 규칙에 익숙했다. 그러자 머리 위로 세라엘의 한숨이 떨어졌다.

“거기 둘. 길을 잃었니?”

“......”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저는 들킨다. 이미 들킨 것도 모르고 리엔시에는 고개를 슬쩍 들어 성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성녀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곧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바로 했다.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눈을 꾹 감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으면 내가 알려줄게. 따라오렴.”

“...”

역시나 제 조잡한 변장이 들켰던 걸까. 변명은 통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녀가 저를 알아봤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리엔시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급히 세라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허겁지겁 따라갔다. 코니엘 또한 무언가 알아챈 듯 묵묵히 리엔시에를 졸졸 쫓아갔다.

곧이어 침묵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셋이나 같이 걷고 있었는데 그 흔한 대화 하나 없었다. 수녀 복장을 한 리엔시에와 코니엘, 그리고 성녀 세라엘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세라엘이 앞서고 두 명의 가짜 성녀가 뒤따르는 행색이라 멀리서 보면 수상할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러웠다.

리엔시에는 흘끗 세라엘의 기색을 몰래 살폈다. 뒤 돌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아 화가 난 것임은 아닌 듯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말을 걸고 싶었으나 단호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리엔시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뿐이었다. 하나 이내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용기로 입을 연다.

“저... 성녀님.”

“......”

“저를... 기억하세요.”

의문문이라기엔 말 끝이 조금 평이했다. 리엔시에는 애매하게 물었다. 그것은 의문에 확신이 섞여있었기에 나온 말투였다. 성녀가 저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

세라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셋은 앞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그래. 기억해.”

“...!”

“─자, 도착이야. 출입구는 저쪽.”

세라엘이 리엔시에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아 이끌었다. 리엔시에는 흠칫 떨다 정신을 차리듯 출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성문에 달린 도르래의 사슬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어느새 자신은 신전의 경계에 와 있었다. 다시 세라엘 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미련 없는 태도로 돌아서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저, 잠깐...!

리엔시에는 급해지는 마음에 세라엘을 붙잡았다. 당황한 코니엘이 말릴 새도 없었다.

“성녀님! 당신께 할 말이 있어요.”

“...알아.”

“...네?”

리엔시에와 코니엘이 동시에 세라엘을 쳐다보았다. 어린 황손녀는 설마 자기 정체 또한 들켰으려나,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리엔시에. 나는 네 이름을 잊지 않았어.”

“아...”

내가 들킨 건 아니었구나. 허나 제일 중요한 사람의 정체가 들켰다. 괜히 리엔시에를 따라 신전에 들어와 버렸어. 아버지께서 아시면 난…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코니엘과는 달리 평이한 어조로 세라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나만 충고할게. 너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거야.”

“......”

그녀는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성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감히 품은 감정을. 그리고 제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향해 생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성녀는 그렇게 저를 사랑하는 소녀에게 담담히 감정의 종언을 고했다. 눈빛은 맑았다. 하얀 얼굴에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 넘실거렸다. 세라엘의 입에서 예언과도 같은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너는 목적을 이루려는 순간마다 처음으로 되돌아갈 거란다.”

세라엘의 눈동자는 리엔시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너에게서 기시감을 느꼈거든. 윤회의 기시감.”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저와 성녀님은 결국 이어질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 네 비원은 이미 이루어졌어.”

세라엘이 리엔시에를 보며 다시 한번 웃었다. 리엔시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런 성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원이 이루어졌다니, 그건 마치 성녀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같은 말이었다.

혼혈 소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랑할 때마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감정인 걸 확인하고 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어.

“─허나 사람을 탐하지 말거라. 삿된 마음은 끝없는 공허만을 불러일으키리니.”

그것은 신탁이었다. 성녀의 말은 신의 말씀과도 같았다.

신께서 제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을 탐하지 마라. 삿된 마음을 품은 자는 공허에 빠질 것이다. 리엔시에는 그 말씀을 들은 순간 직감했다.

아, 그건 신이 제게 하는 경고였다. 이번 대의 성녀에게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신께서 그녀를 통해 자신에게 내리는 말씀이었다.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이 어떤 감정이 차오르는 느낌이 뒤를 잇는다.

이건 감정을 확인받는 순간이 분명했다. 성녀를 탐하지 말라. 네게 허락되지 않았다.

최초의 성녀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곧 죽을 자를 사랑하지 말거라.

...아니요, 나는 사랑할래요. 마흔아홉 번째 성녀가 아닌 세라엘을 사랑할래요.

내가 사랑하는 건 세라엘이지 당신의 자녀가 아니야.

그러므로 이번 대의 성녀는 죽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그리고 쉰 번째 성녀는 영원히 탄생하지 않으리.

이 모든 것을 맹세한 리엔시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기뻤다. 그녀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닌 이미 맺어진 운명을 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라엘을 중심으로 세상이 고정되고 있었다. 희멀건 색채의 소녀를 중심으로 하늘이 돌고 달과 별이 빛났다.

리엔시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끌어안고 두 손을 모아 저만의 성녀에게 기도를 바쳤다. 사랑을 찬양하는 기도. 그 기도는 하늘에 계신 신이 아닌 세라엘의 영혼에게 바치는 기도였다.

신전에 팔려간 성녀들이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따위는 이제 알 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으니까.

너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를 살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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