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3화. 만남 (2)

리엔세라 : 3-2화

하늘이 인상을 흐리기 시작했다. 천장이 희게 짙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세상은 온통 칙칙한 흰 빛으로 물들었다.

세라엘은 널찍하다 못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복도 가운데에 서 있었다. 창문 대신 아치형으로 길게 구멍을 내어 기둥들이 쭉 이어지는 복도. 세라엘은 그 기둥을 타고 올라가 등을 놓기 위해 겉으로 모양을 낸 자리에 앉아서 신전 바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선반처럼 모양이 나 있어서 딱 좋은 자리였다.

높아서 오르는 게 고역이긴 하지만, 이 신전에 아이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오르지 못할 곳은 성녀 상 빼고는 없었다.

수녀들을 구경했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수녀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편안한 표정으로 잡무를 보기도 했다. 곧 있을 정오 예배 준비를 하러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신관들을 구경했다.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사제들은 보통 두엇이 다니거나 혼자서만 돌아다녔다. 팔에는 성경을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신관들도 몇 보였고, 그중 한 명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씨를 살피기도 했다. ...이런.

“이크.”

‘──!! 성녀님! 그런 곳에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들켰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낮췄지만 이 좁은 선반 위에 숨을 만한 공간이 있을 리가. 세라엘은 허둥지둥 복도로 훌쩍 뛰어내렸다. 꽤 높아서 착지할 때 발목이 시큰거렸다. 갑자기 위에서 나타난 성녀에 복도를 지나가던 수녀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에구머니나! 성녀님!”

“이게 무슨 일이신가요!”

“위험하니 그런 곳에 올라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거늘...!”

잔소리를 쏟아대며 쫓아오는 수녀들을 피해 세라엘은 달렸다. 뒤뜰로 갈 생각이었다. 내가 얌전히 잡혀줄 줄 알고? 개구멍으로 나가 몰래 시내를 돌아볼 거라구.

사라진 성녀를 눈치채고 기겁할 수녀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쌤통이었다. 아이는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잽싸게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 도망갔다.

“헉, 헉... 다 따돌렸나.”

세라엘은 평범하다 못해 단출해 보이는 하얀 성녀복─이미 흙먼지로 더러워져 거적때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을 툭툭 대충 털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분명 이쯤에 뒀을 텐데.”

시종복. 신전 시동의 옷을 몰래 훔쳐다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하랄 것 없는 평민의 옷으로 눈에 띄지 않아 변장하기에 제격이었다.

아이는 수풀 속에 대충 던져두었던 수많은 옷 자락들─전부 훔친 옷들이었다─을 뒤적이더니 그중에서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갈색 시종복을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성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니 얼굴까지 가릴 필요는 없으리라. 베일은 되었다. 옆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뒤집어쓴 하얀 베일을 못 본 체하며 세라엘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개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윽... 갑자기 구멍이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인데.”

그새 키가 자랐나? 모를 일이다. 아이는 투덜투덜 낑낑대며 구멍을 통과했고 똑바로 일어서 무릎을 털었다. 이제 모험의 시간이었다.

*

라히안과 헤어진 후 공작저에서 훌쩍 나왔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리엔시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좀 흐리긴 하지만 아까보다 해가 좀 더 기운 것 같았다. 늦은 점심쯤 되었으려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정해놓은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내 쪽으로 향했다가 마을 외곽 쪽 길로 빠져나왔다. 그곳에 갈 생각이었다.

자신의 뒤를 쫓는 깜찍한 어린 황녀의 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리엔시에가 향한 곳은 다 쓰러져가는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오래되고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번듯하고 아담한 느낌을 자아냈을 그 집은 이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을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이 바로 리엔시에의 아지트였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무너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집은 고요했다. 방금까지도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구름 사이로 느리게 고개를 내민 햇살이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리엔시에는 깨진 부엌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그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를 멍하니 감상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감각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러면 현실에서 갖지 못한 감정들을 멈춘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신이라도.

신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니 그의 창조물인 나도 사랑하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신에 의해서만 구함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의 손길 아래에서만, 사랑을...

바스락.

“...!”

인기척이었다. 리엔시에의 예민한 귀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소리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뾰족한 귀가 쫑긋거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움찔거렸다.

혼혈 소녀는 부엌 식탁에 앉으려 했던 자세를 일으켜 천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서 난 소리였다. 경첩이 망가진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소녀는 그림자와 같은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조용히 작은 방으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을 통해 방 안을 엿보았다. 낮이라 그런지 온통 밝았다.

리엔시에는 숨을 죽이고 환희의 색채로 흘러넘치는 방문을 조심히,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열었다. 경첩이 망가지긴 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다행이었으나 그리 생각할 틈도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리엔시에는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심장이 멎은 듯한 감각 속에서 눈앞에 태어난 것은 어느 성현(聖賢)의 피조물이었다.

아니... 그녀는 성인(聖人) 그 자체였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잊고 있었던 호흡을 되새겼다. 물이 빠진 듯 희멀건 색채의 소녀가 푹 꺼진 침대 위에서 햇살에 잠겨 누워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유명 화가가 그린 성화(聖畵)의 한 장면 같았다.

저 아이야말로 신화 속의 요정 임에 틀림없었다. 인간이 아닌 아름다움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인간다운 곳에서 쥐 죽은 듯 잠든 모습. 리엔시에는 지상에 내려온 여신의 단편을 엿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우리 창조주는 본래 여신이라 했다. 그래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이도 대대로 여성, 성녀(聖女)였다. 하지만...

“...으응...”

“...!”

아이가 칭얼대며 천천히 눈을 떴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 안쪽에서 에메랄드빛이 넘실거렸다. 맑은 날 창공에 여름의 신록을 섞은 듯한 아름다운 색이었다. 한 쌍의 보석이 멍한 눈을 끔뻑이다 이내 생기를 되찾고는 리엔시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엔시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신의 눈길이 자신에게 내려앉은 것 같아 재차 숨이 막혔다. 침묵 속에서 한참 무표정하던 아이의 입술이 비틀렸고, 곧이어 앳된 목소리가 고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뭘 봐?”

“...”

“성녀 처음 보니?”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성녀라고? 저 애가? 이번 대 로나르힘의, 마흔 아홉 번째 성녀 세라엘?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당혹스러워하던 찰나, 아이가 기지개를 켜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리엔시에에게 다가온다. 리엔시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뒤로 넘어졌다.

쿠당탕─

“아... 아파라.”

“너 바보야? 누가 보면 내가 괴물인 줄 알겠네.”

아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창피해라... 리엔시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아이의 손이 내밀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자신을 성녀라 칭한 소녀가 제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꼴사납게 그러고 있지 말고.”

“...”

타인이 먼저 손을 내민 건 처음이었다. 리엔시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내밀어진 손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세라엘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불퉁하게 말했다.

“손.”

“아, 미안해요.”

두 소녀의 손이 맞닿았다. 성녀의 체온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서늘한 체온에 몸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고, 눈부신 광경 속에서 두 소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곧 금기를 범하게 될 성녀와 환생한 최초의 성녀가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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