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업글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방울방울 by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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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뜰TV : 지도의 주인

※ RPS로 소비하지 말아주세요.

※ 라더님의 과거는 100% 날조입니다.

※ 2021년 03월 07일 글 재

 “나 여기 의자 5분만 빌려줘.”

 “어, 그래.”

 “그래. 고맙다. 나가 있어라?”

 “나가 있으라고? 응...”

 응, 고마워. 잘 갔다 와. 잠뜰은 다른 것에 집중한 듯 풀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이곤 자신의 방 밖으로 나온 라더는 문 옆의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5분, 어디를 나갔다 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어, 일단은 수상한 사람! 여기 머트랑 월터! 이 비교적 현대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하니까-,”

 흐릿하게 들리는 잠뜰의 혼잣말에 라더는 벽에 기대 두었던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한 범인을 찾느라 바쁘네. 연구실에서 레이더스 제독의 새로운 지도를 찾은 것 같다며 공고를 낼 때까지만 해도 신나 있더니 다칠 뻔하고, 교수실에는 불이 나고.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라더는 제 건너편에 있는 잠뜰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까지 타버려서 이제는 방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구역이었지만.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잠뜰의 의자에 앉아있던 덕개가 벌떡 일어났다. 교수 의자에 앉아있던 걸 걸렸다는 생각에 민망한 것인지 헤헤 웃으며 인사하는 덕개의 얼굴에 재가 묻어있었다.

 “너, 볼에. 뭐 묻었다? 시꺼먼데.”

 “아, 아이고. 뭔가 남은 게 있나 보려고 치우다가 그랬나 봐요. 감사합니다.” 

라더의 말을 들은 덕개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잠뜰의 불타버린 교수실을 구경하고, 화장실로 뛰어간 덕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그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잠깐. 누구를 부르는 것 같더니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남자 하나가 교수실로 들어갔다. 저건, 우리 학교 학생 아니었나? 이름이 머트..였던가.

 “5분이라더니 얼마나 걸리는 거야?”

얼굴을 찌푸리며 이제 곧 나오실 거예요! 라 외치는 덕개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누구는 해야 할 연구도 미뤄두고 서 있는데. 방 열심히 치워라-, 덕개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을 나선 라더는 뒤에서 들리는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다시 제 방문 옆의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자네가 준 지도를 분석해봤더니 레이더스 제독이 활동하던 1700년대가 아니라 현대에 제작되었더군. 이거 자네가 위조해서 그린 지도 아닌가?”

호오, 지도를 위조했다라. 마침 방 안에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머트의 거짓말이 밝혀지는 이야기. 사본은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고, 가웨인 발굴단에도 참여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학생.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가능성이 무한한. 그리고 그렇기에 불안한 젊은이의 고통.

“내 성과는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홧김에 유물을 훔쳤어요. 이까짓 흔한 흙 도자기 따위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라더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나처럼 흔하디 흔한 거니까. 그랬는데 마침 제게도 기회가 찾아왔어요. 잠뜰 교수님이 레이더스 제독의 보물 지도를 찾는 공고를 봤거든요. 전설 속 레이더스 제독의 지도가 내 손에 있다면…. 저 흔하디흔한 도자기가 레이더스 제독의 유물이라면. 저 도자기도, 나의 가치도 그만큼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흔하디흔한? 흙 도자기 따위?

“하지만.. 결국. 가짜는 가짜에 불과할 뿐이군요.”

 머트가 말을 쏟아내자 잠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친구야... 이... 친구야! 인정을 받고 싶으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가짜가 아니야. 그 유물도, 자네도. 각자의 가치가 있는 진품이라고. 그러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잠뜰은 그가 스스로와 유물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 점을 먼저 꾸짖었다. 유물을 훔친 것도, 지도를 위조한 것도 잠뜰이 가장 먼저 화를 낸 부분이 아니었다. 잠뜰의 말을 들은 라더는 입꼬리를 살짝 당겨 웃었다.

‘저 같은 건 이 큰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젊었을 적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며칠 뒤, 지도의 주인을 찾은 잠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조교가 없는 일상이었지만 워낙 성실한 사람으로 유명한 교수인지라 그새 또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야, 라 교수! 바쁘냐?”

“응, 매우.”

저렇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교수실 치우는 걸 도와달라고 떼쓰는 걸 빼면. 단호하게 문을 닫아버린 라더는 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통통 쳤다. 요 며칠 그는 앉아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너 퇴학이야, 라는 잠뜰의 마지막 말에 충격받은 머트는 자퇴서를 제출했다. 뭐, 머트 본인은 충격이 아니라 가치가 있다는 말에 감동한 것이고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한 자퇴라고 했지만... 그걸... 울면서 말하면 누가 믿냐고.

내 잘못 아니야! 억울하게 외치던 잠뜰의 목소리까지 라더의 귀에 아직도 생생했다. 담당 교수를 찾아가 자퇴서 수리를 막고 밥 사주면서 머트 좀 설득하라고 부탁하고. 겨우 다 됐다 싶었는데 잊고 있던 연구에 문제가 생기고….

“어휴, 죽겠다.”

책상에 어질러진 서류에 머리를 내려놓은 라더는 한숨을 쉬었다. 교수님, 교수가 이렇게 할 일이 많다는 말씀은 없었잖아요. 아니야, 정신 차리자. 일해야지. 일! 이따 저녁으로 빵 한 조각밖에 못 먹을 것 같지만 이건 내일의 내가 고기를 먹기 위한 일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막 펜을 잡은 순간,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어,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은 머트였다. 머트가 라더를 찾은 이유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밤새 고민했지만, 머트는 라더에게 들을 대답은커녕 그에게 할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왜, 무엇을, 누구인데, 무슨 의도로, 목적으로, 나를, 나 같은 사람을,

“교수님께서 제 자퇴를 막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들으니까 어감이 좀 그렇네.”

“왜죠?”

“왜냐니?”

머트의 질문에 라더가 되물었다. 실은 머트의 질문은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라더는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것도 모르는 너를 여기에 남게 했을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린 라더는 제 앞에 서 있는 머트를 올려보았다.

“나, 수영으로 금메달 땄어.”

“축..하드려요?”

“젊었을 때. 어렸을 때부터 수영만 했거든.”

재밌는 얘기 해줄게. 너한테는 재미없을 수도 있어. 라더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의 과거를 털어놓기 위해서.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연습과 연습과 연습. 라더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자면 수영과 연습.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어릴 적의 라더는 유독 물속을 좋아했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물이 온몸을 감싸고 따뜻하게 그를 안아올 때, 그는 세상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

10대 후반. 수영에 재능도 열정도 많았던 그는 물속을 제 무대 삼아 살았다. 바다, 강, 호수, 수영장. 강한 물살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고 물속에서는 그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그가 은퇴할 때까지 금메달은 그의 것이라 확신했다.

“오늘도 연습하게? 너 너무 무리하다가 다쳐. 무릎도 안 좋다며.”

“그건 물 밖에 나와서 아프다니까? 물 안에서는 하나도 안 아파.”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그의 두드리던 친구의 손길을 라더는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무릎을 붙잡고 물속에서 의식을 잃은 그를 구해줬던 그의 소꿉친구.

그로부터 며칠 뒤, 병원에서 눈을 뜬 라더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다시는 수영을 할 수 없다는, 짧게는 가능하지만 선수로서 대회에 나가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말. 기억하기로는 울었던 것 같다. 엉엉, 며칠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울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퇴원 후에도 방에 틀어박혀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몇 달을 그렇게 살다가, 메달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 버린 그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던 이전과 달리 미래가 어두웠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수영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던 미래가 검은 페인트에 덮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은 가혹했다. 십 대를 전부 물속에서 보낸 그가 또래 아이들의 학습량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했고 재활을 위한 운동도 잊지 않았다. 동기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더는 오히려 어두컴컴한 미래를 밝히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더 학생, 잠깐 나 좀 볼까.”

“아, 네.”

교수님 한 분이 그를 부른 것은 졸업까지 몇 달 남지 않았을 때였다.

“뭘 하고 싶은 거지?”

“네?”

뜬금없는 교수의 질문에 라더는 되물었다. 학교 수석 장학생에게 무얼 하고 싶냐고 묻다니. 교수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의도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라더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나? 며칠 전에 제출한 과제가 엉망이었던가, 자신을 질투한 누군가 그를 모함했나?

“아니, 그렇게 진지한 질문 아니야.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아, 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는 교수에 라더는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 그의 목구멍을 막아버린 듯,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괜찮던 무릎이 저리기 시작했다.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라더에게 교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앉혀놓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해가 지면 그를 보내고, 다시 다음날 그를 부르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라더는 교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목표, 도전, 이런 건 무릎을 다친 이후부터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남들이 하길래, 흐르는 물살에 휩쓸려 그도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입 밖으로 나온 첫마디는 자기 비하였다. 뜻밖이라는 듯 교수는 눈썹을 들고 라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말이든 좋으니 그 말들이 라더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땄고. 그렇게 평생을 수영만 하고 살 줄 알았는데, 그냥 당연하게 그럴 줄 알았는데.”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무릎을 다쳤고, 제 인생에서 수영이 사라졌고. 남는 게 없었습니다.”

“평생을 수영만 하고 살았으니-,”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수영 없는 삶이라니.”

“그래서? 어떻게 했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시작했어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그냥 달렸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얼 하려고 하는지 저한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그냥,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니까요. 이제는 특별하지도 않고 뛰어나지도 않은. 저 같은 건 이 큰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조용히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결국 눈에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억지로 꽉 막아두었던 것이 뚫린 것처럼, 막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수영을 멈춘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죽을 듯 쏟아부었던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뭘 한 거지? 지금까지 나는 무얼 위해서 이러고 있었던 거지?

“학교 수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더가 조금 진정했을 때 즈음, 교수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라더에게 손수건을 건넨 교수는 그를 토닥였다.

“자네가 유명한 수영 선수였다는 건 알고 있네. 어떻게 잊을 수 있어, 그 젊고 밝았던 선수를. 금메달을 들고, 당당하게 웃던 사람을. 자네는 나를 이 학교에 와서 처음 봤겠지만 난 자네를 알고 있었어. 그런데 입학할 때 자네를 보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더군. 꿈도 희망도 다 잃고, 불이 꺼져가는 촛불을 보는 느낌이었어.”

“휴식을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제 막 들어온 신입생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잔인할 것 같았네. 라더 자네를 좀 더 믿고 싶기도 했고.”

“저를요?”

“그래, 나는 자네가 다시 길을 찾을 거라는 걸 믿고 있었어.”

“그럼 저를 부르신 이유는, 실망하셨기 때문입니까?”

오, 아니야. 교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나는 단 한 번도 내 학생에게 실망한 적이 없네. 걔네는 젊거든! 아주 어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그래서 더 어려울 거야. 흰 종이에 글을 쓰는 게 두려울 때가 있지. 글씨를 쓰기 위해 잉크가 떨어질까 봐. 잉크가 흰 종이 중앙에 똑, 떨어졌어. 어떻게 해야 할까?

“종이를, 버려야죠?”

“이런 종이 아까운 줄 모르는 학생을 봤나! 잉크를 부어버려. 그래도 돼. 아직 뭘 할지 모르겠을 때는 뭐라도 해보는 거야. 이것도 잘 모르겠다면 그냥 다 던져보게. 조금 쉬어. 전부 녹아버린 초가 다시 굳을 시간을 줘보게. 단단하게 굳은 뒤에는 분명 무언가 또 새로운 걸 해낼 테니까.”

라더는 조용히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진심인가? 그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미친 건가? 그는 유명할 정도로 뛰어난 교수였다. 뭔가 새로운 걸 해보라니, 일단 하고 보라니. 그는 무려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내가 뭘 했게?”

“...그만 두셨어요?”

“아니. 계속 질문했어.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뭘 하고 싶은 걸까. 뭘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남들과 다른 게 뭘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어. 내가 미친 듯이 공부를 한 이유는, 세상에 인정받고 싶어서였다는 걸.”

라더의 말에 머트는 움찔했다.

“그래서 때려치웠어.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할까? 그렇게 생각해? 아니, 누가 날 인정해. 누가 감히, 무슨 기준에 맞춰서 나를 판단해. 그때의 난 그냥 쓸데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있던 거야. 생각해봐, 이 방에서 너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지?”

머트는 대답하지 않고 라더를 바라보았다. 너, 인마 너.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스럽게 말하는 라더에도 머트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흙 도자기.”

라더는 책상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도자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머트는 라더의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또 움찔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라더의 질문에 머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내가 깨버려도 되지?”

퍼뜩 고개를 든 머트가 고개를 저었다. 내내 별 반응이 없다니 도자기를 깨뜨리겠다는 말에 고개를 흔드는 머트의 모습이 꽤 우스웠다. 그러면서 겨우, 흔하디 흔한 이라는 말을 쓰다니.

“이 도자기, 지금까지 땅에 묻혀있던 거잖아. 이걸 꺼낸 사람은 너고, 맞지?”

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욕심에 묻혀있었고, 그 교수님이 날 꺼내 주셨지.”

도자기를 집어 든 라더는 그것을 머트에게 안겨주었다.

“내가 널 꺼내 줄 테니까, 뭐가 됐든 열심히 하라고.”

얼떨결에 도자기를 받아 든 머트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답 안 해?”

“하지만 교수님, 저는 지도를 위조하고-”

“그래, 그 지도! 네가 그린 거야? 어떻게 그렸지?”

“발굴 작업에 참여해서... 그곳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네가 그린 거지?”

“네.”

“근데 그걸 보고 교수 둘이 레이더스 제독의 지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고.”

“...네.”

“그거야. 너 재능 있어, 지도학에. 흙 도자기도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면 그쪽에도. 그동안 여러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것도 많잖아? 잠뜰 교수가 진짜로 널 모를 줄 알아? 이번에 너 때문에 나 도와주면서 너 성실하다고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어. 내가 너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니까 다른 교수들 몇 명도 너를 아는 척하더라.”

“저는-,”

"알아, 네가 관심 있는 쪽은 고고학인 거. 그쪽에는 재능 없고 이쪽에는 재능 있으니까 꿈 접으라는 말도 아니고, 내 얘기도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네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는 거야. 적어도 넌 그때의 나와 달리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잖아?"

라더의 질문에 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흙 속에 갇혀있느라 힘들었지? 버티느라 고생했고, 버텨줘서 고맙다. 진심이야, 너의 존재를 알려줘서 고마워. 라더가 머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는 힘없이 흔들렸다. 머트는 멍하니 라더가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머트를 내려보며 라더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들의 옆에서 책장에 걸어놓은 금메달이 빛나고 있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에서 만난 그의 오랜 친구가 건네주었던, 마지막 금메달. 감사하다고 말하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머트에 라더는 제 젊었을 적 모습을 보았다. 이곳저곳 세계를 여행하며 이 세상을 자신이라는 종이에 담고 싶다는 생각에 잡았던 꿈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세상 모든 일은 경험이고 늦은 공부라는 것은 없다더니 과거에 그가 쌓아 올렸던 것 덕분에 라더는 보다 쉽게 새로운 공부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폭스로드 대학의 지도학 교수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수영 선수 라더를 아는 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줄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금의 삶에 라더 그가 만족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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