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아직 안 사귀는 집밥 아스타브

가내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등)


이따 밤이 되면 저쪽 숲에서 봐, 아스타리온.

하루의 마지막에 모닥불에 불이 붙고 물자를 꺼내 놓는 사이에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수상하게 가까워지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이리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하루는 어땠냐느니 이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종종 다가와 말을 거는 일은 있어도 먼저 "제안"을 한 적이 없던 이의 속삭임이라, 아스타리온은 웃으며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달이 뜨지 않은 것을 아쉬워해야 할 만큼 하얗게 빛나는 피부에 가볍게 옷이 걸쳐졌다. 야영지를 둘러보며 얼핏 다른 곳을 확인하면 이리엘의 자리는 이미 빈 지 오래였다. 풀이 밟힌 자국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가면 나무 밑에 서서 등을 지고 있는 이리엘이 있었다. 그 모습이 제가 하던 것과 비슷해서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린 아스타리온이 익숙하게 발소리를 죽였다. 조용히 다가가 이리엘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부름에 대답이 돌아왔다.

"아스타리온."

"내일 해가 어느 쪽에서 뜨는지 확인해봐야겠어. 네가 먼저 불러내는 날이 다 있다니."

"뭐? 아냐, 그러려고 부른 건 아니라서. 적어도 오늘은 말이야."

아스타리온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동안 빨간 눈동자는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일부러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린 시간에, 크게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할 곳까지 오게 만들었으면서 허리에 감은 손을 잡아 풀어내는 것이 말이나 되나. 깨진 기대에 말이 썩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럼 이 적막하고 사람 없는 숲에서 뱀파이어 스폰과 단 둘이 뭘 할 생각인지 들어나 보자고."

"너랑 걷고 싶어서 불렀어. 그럼 안 돼?"

돌아온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이리엘이 앞장서더니 더 깊은 숲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이야기보다는 직접 따라와서 겪어보라는 듯 걷는 걸음에 아스타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따랐다.

숲이 깊어진다고는 하나 거리에 따른 짐작이었을 뿐 나무가 빼곡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걷기에는 편했지만,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이리엘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숲의 외곽을 따라 걷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질문을 던지려 가까이 다가가면 이리엘이 입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왜 걷는 거냐고 묻자 오히려 다른 말로 반문할 뿐이었다.

"저 꽃이 물약 만들 때 사용된다고 했는데, 뜯어갈까?"

"연금술에는 관심도 없더니 그런 건 언제 들은 거야?"

"섀도하트가 지나가다 말해줬어. 물론 꽃 이름은 까먹었지만."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으니까 두고 가지. 뭐. 초록색으로 빛나는 꽃을 잡아당기려다 내려놓은 이리엘이 손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저건 또 뭐지, 하며 다가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거리는 진흙이었다. 말리기도 전에 내딛은 걸음에 순간 이리엘이 어, 소리와 함께 미끄러졌다. 다행스럽게도 몸이 완전히 바닥에 닿는 것보다 아스타리온이 한 발짝 빨랐으니,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던 이리엘을 받쳐 일으켰다. 순간 가까워진 거리에 헛기침을 하며 이리엘이 아스타리온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조심해야지, 자기야. 우리가 흙투성이가 되어서 돌아가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이없다는 듯 돌아온 눈빛에 뭐가 문제냐며 아스타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앞서가는 걸음이 아직 이슬이 내려앉지 않은 나뭇잎을 밟아 바스락거렸고, 아스타리온은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아가며 한층 조용해진 두 번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이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쓴 적은 여러 번이었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소리를 내며 걷는 이리엘을 따라가는 것은 새로운 일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가지에 붙은 잎사귀가 종이 스치는 소리를 냈다. 풀벌레가 울다가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에 입을 막으며 튀어나갔다. 아스타리온은 주변을 살피고 있는 그대로를 눈에 담았다. 걷는 동안 이리엘은 종종 뒤를 돌아보며 아스타리온을 확인했다. 대화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고,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딱 그 정도의 시선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대화 없이 걷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잠시 멈춰 선 이리엘에게 다가가면 두 사람이 앉기에는 널찍한 바위를 가리키며 잠깐이라는 말을 꺼냈다. 바위는 딱딱하고, 차갑고, 앉아있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물론 아스타리온의 개인적인 기준이었지만, 이리엘은 그런 생각을 모르는지 볼을 긁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어땠어?"

이리엘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자기야, 무슨 질문을 그렇게 뒹굴고 난 다음 날 아침처럼 말하니. 고개를 내저으며 아스타리온이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를 세어나갔다.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 뭐, 불러 놓고 한참 걷기만 한 일? 이름 모를 꽃에 대한 별거 아닌 이야기? 그것도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는 달을 한번 보라며 애를 쓰던 자기?"

"마지막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다, 그렇지?"

즐겁다고? 아스타리온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제 입꼬리가 평소보다 높이 올라가 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물론 주기적으로 혈액을 공급받을 수 있기 이전에는 혼자 밤에 돌아다니는 일이 잦았으나, 목적 없이 밤 공기를 즐기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야영지 근처에 종종 놓여있던 피 빨린 동물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밤길을 돌아다니는 걸 알려주겠다 부른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스타리온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땅 언저리를 보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습관처럼 공상에 빠져 있으면 눈이 닿는 것에서 모든 생각이 연상되기 마련이었다. 이리엘은 오늘 아침 덜 깬 잠기운에 멍하니 아스타리온을 보던 것과 같이 붉은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밤에 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이리엘은 참으로 간만에 누군가를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나뭇잎을 스치며 나뭇가지를 흔들고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설명하는 것은 통나무 하나를 베어내는 일보다 어려웠다. 여전히 아스타리온이 신경 쓰였고, 그 덕에 미끄러질 뻔한 몇 분 전을 떠올리며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의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냈다.

"그래서, 아침까지 걷다가 들어갈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아니지! 이제 돌아가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자기야, 걷고 싶으면 말을 해, 차라리. 숲에서 보자고 하면 표현이 조금 그렇잖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그제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났던 향을 떠올려 이리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가는 길을 막아서고 눈을 감은 채 턱을 들어올리면 짧게 혀를 찬 아스타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고 벌어진 틈 사이로 섞인 숨이 빠져나왔다. 아스타리온의 손이 허리를 감싸며 더욱 깊게 들어와 말랑한 입안을 훑었다. 이리엘은 서늘한 혀에 닿을 때면 아스타리온이 뱀파이어 스폰이라는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점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 손을 뻗어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뒷목을 쓸어내리며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빈틈 없이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아스타리온의 엄지가 상대의 입술을 쓸어닦았다.

"다음에는 그냥 부를게, 됐지?"

아스타리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하게도 눈에 담은 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짧은 미래를 기약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장 내일 미친 올챙이가 모두를 마인드 플레이어로 만들 수도 있고, 평소처럼 싸우다가 운이 없을 수도 있는 순간에도 다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계획의 일부, 배신할 수 없게 묶어둘 족쇄는 이미 제게로 머리를 돌린 지 오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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