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총구

곤 투모로우 ×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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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현실이 아니었으나, 꿈 또는 허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스치되 새가 울지 않고 햇살이 비추되 향기가 없었다. 그러나 생멸이 본디 하나이며, 이승조차 실존하지 아니한다는 일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백날 삼청동과 종로만 오가던 터에 진고개로는 걸음 할 일이 없었다. 토질이 질고 경사가 가팔라 사대문 안이라도 머무는 이가 적고 왕래 없이는 살기 어려운 동네라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지금 선 곳이 진고개임을 알게 된 것도 언덕 넘어 남산골 천우각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서로 가면 명례방이, 동으로 가면 흥인문이 있어야 했지만, 길은 한 곳으로만 나 있었다. 진 땅에 눌어붙은 낙엽은 세찬 북풍에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열 보마다 밝힌 호롱 뒤로 ‘근조謹弔’라 써 붙인 종이가 풀에 젖은 채 방정맞게 나부꼈다. 옥균은 마른 손바닥으로 종이를 문에 눌러 바싹 붙였다.

대문에 담까지 있는 초상집치고는 문객도, 곡비도 없어 궁색할 지경으로 한산했다. 문턱을 넘으니, 마당의 장막 아래에는 하얀 갓을 쓴 남자 둘이 모르는 사이인 듯 거리를 두고 앉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루에서 촉심을 자르던 이팔二八 전후의 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옥균을 맞았다. 한 씨의 위패 앞에 선 옥균은 분향을 마치고 상주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옥균은 상주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소년이라 하기엔 퍽 사내의 태가 나고 청년이라 하기엔 양 뺨에 오른 혈기가 분분芬芬하다. 앳되어 보이나, 훗날의 얼굴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자네가 정훈인가.”

“그렇습니다, 어르신.”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쪽에서는 위문 외에 전할 말이 없음이요, 저쪽에서는 전혀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함이니 당연지사였다. 지금쯤 저 조그만 머리통은 생전 부친이 왕래하던 친우의 친우 이름까지 떠올렸을 것이다. 옥균이 대청 끄트머리로 걸어가자, 정훈은 뒤늦게 고개를 들어 객을 불러세웠다.

“혹, 어르신의 함자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이름 말인가.”

“예, 이리 와주셨으니 기억해야 할 것인데, 부끄럽게도 아버님이 교유한 분들의 존함과 존안을 전부 알지 못하여…….”

옥균은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시선을 가볍게 외로 돌렸다. 구태여 눈치 빠른 자가 아니라, 장막 아래 앉은 치들에게까지 거짓이 훤히 드러날 정도였으나, 고개 숙인 이에게만큼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부친의 친우 되는 사람이지. 그 외에는 몰라도 좋네.”

“하지만…….”

정훈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옥균은 명쾌한 웃음만을 남기고 마당으로 나섰다. 정훈은 맨발로 화급히 따라나서려다 다만 어정쩡히 서서 뒤에 대고 예를 갖출 뿐이었다. 이로써 거짓에 달아둔 빚은 충분히 청산된 듯했다.

대문 바깥 발밑에 사각의 돌을 성글게 짜 맞춘 길이 길게 이어졌다. 얇은 구두 밑창 아래로 저마다 울퉁불퉁한 모양이 그대로 닿았다. 골똘히 생각해 본들 바닥도 조선의 것이 아니요, 골목도 조선의 것이 아님은 자명했다. 옥균은 비탈 아래로 걸었다.

넓은 거리로 나서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광이 쭉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는 전깃줄과 가로등 불이 어지럽게 얽히고 공사관이나 숙박시설로나 쓸 법한 서양식 건물이 큰길을 따라 이어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양이의 말과 낯선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불란서에 와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옥균이 작게 탄식했다.

이방인에게 서로를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눈 돌린 자리에 서 있는 정훈은 비스듬히 우러른 채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도 만국기와, 등불과, 작은 유리알이 반짝였지만, 호화와 찬란에 심취하기는커녕 눈앞 광경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말을 걸 수 있는가?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자, 발 디딘 바닥이 검은 수렁으로 변하여 눈 깜짝할 새 종아리까지 빠지고 말았다. 갯밭을 걷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던 옥균은 간신히 무릎을 굽혀 섰다가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채 가누기도 전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이마가, 뺨이 온통 젖어 들었다. 시야가 흐려져 사위를 구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살을 태우던 연기가 버석거리며 잦아들 무렵, 감색 군복 차림의 정훈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고 돌무더기 위에 내려놓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꽃만은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맑게 반짝거렸다.

굵은 빗줄기에 파리하게 떨던 꽃은 이내 무덤을 양분 삼아 자라기 시작하더니, 곧 석 장(丈) 높이 나무가 되어 하늘을 온통 가려버렸다. 천지는 암흑으로 덮이고 나무 꼭대기에서만 어스름한 빛무리가 겨우 번졌다. 옥균은 가장 밑바닥에 서서 궁리하였다. 저기에 무엇을 숨겨두었는가. 어른어른하던 빛은 곧 수면에 비친 달로 변하여 물결을 따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심해에서 세상을 올려다본다면 과연 이와 같으리라.

물 밖에서 걸음이 다가왔다. 꿇어앉는 소리에 이어 흙먼지와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손이 열 길 물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제 몸 크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 손은 본디 제 것이 아닌 흔적을 떨어내려 애썼다. 몸부림에 질린 모래 알갱이와 살점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형태를 잃을 무렵, 정훈은 스스로 제 머리를 물 아래로 밀어 넣었다. 당장이라도 손 닿을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눈이 마주쳤다.

자네 차례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정훈은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던 흑돌을 판의 가장자리에 올려두었다. 제가 졌습니다. 그 자리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기국이 입은 동그란 화상은 세 치의 총신으로 들어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옥균은 갑판 아래 잔물결을 흘끔거렸다. 육지와 가까워 고분고분한 바다, 발전기도 멈추었고 바람도 고작 봄이다.

“총성이 울리면 사람들이 올 것일세.”

공연한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그는 아둔하지 않다.

옥균은 여태 차가운 총구를 이마로 가져갔다. 그는 죽음마저 예사로운 일인 양 미소를 보였다. 할 수 있겠나. 정훈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답하였다.

옥균은 한 단 위의 뱃머리에 올라 총구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생은, 또 죽음은. 눈동자만큼 작은 구멍에 담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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