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독성(獨聖)

뮤지컬 곤 투모로우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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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달만이 밝은 밤이었다. 보름도 아니거니와 한밤중은 더더욱 아닌, 그저 모호한 때였다. 별빛도 등불도 늦겨울 바람 앞에 파리하게 떨고 있던 차라, 수면에는 오직 둥그런 빛무리가 삼베 얽힌 모양으로 차분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머잖아 다가올 그믐과 무관해 보였다.

임금이 아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달포가 지났다. 내 나라를 두고 어디를 가냐던 임금이 이국땅과 다름없는 공관으로 피신하자 유생과 학자들이 연일 읍소하였다. 임금은 간언과 상소를 족족 물리치며 사방의 언로를 차단하였고 과격한 자들을 암암리에 벌주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날을 씨름하고 나자, 안팎에서 일어났던 맹렬한 비난과 반기는 장마철 아궁이 불처럼 좀체 힘을 쓰지 못했다. 군주의 일과 필부의 일이 다르다 한들 집 마당에서 아내가 살해당한 마음마저 다르겠는가? 임금은 마침내 그들도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불안과 의심증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그림자만 보여도 사람을 불러 추궁하고 어둠을 꺼려 삼경에도 낮처럼 불을 환하게 켜놓으라 닦달했다. 그러다 아예 국무를 밤에 보고 낮에 쪽잠을 자기에 이르러 대신들과 궁인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건 물론 옥체의 미령함이 날로 심해졌다. 끝내는 상선을 제외한 모든 궁인을 물리고 드나드는 외부인도 극히 제한하였다. 임금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총리를 제외한 8아문의 대신들과 저뿐이었다. 너라도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네가 아니면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 그리 간청하는 임금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리하겠다는 긍정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거사가 없는 밤에는 아관에 머물렀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작전 회의가 아니고서는 종윤 선생이 말을 전달했다.

정훈. 귀에 익은 음성이 문턱을 넘었다. 종윤 선생이었다. 그의 손에는 무엇도 적혀있지 않은 백색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나는 차마 당황한 기색도 숨기지 못하고 서서 밤이슬 맞은 재킷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회의가 있었습니까? 부르셨으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었을 텐데, 아니면 무슨 일이,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알아듣기 어렵게 횡설수설하는 중에도 종윤 선생은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고 나서야 눈을 휘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자네에게 물었던 것 말이네. 옥균의…… 유지遺旨 말이야.”

넉 달 가까이 지난 일이라 떠올리기까지는 겨를이 필요했다. 종윤 선생은 그날 갑판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고 싶어 했다. 지켜보는 자가 여럿 있었다고 해도 옥균 선생의 유언을 들은 건 나뿐이었다. 그 일을 기억할 의무가 내게는 분명하게 있었다. 종윤 선생은 마땅한 절차로 물었고 나는 그대로 전했다.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의중을 알지 못하니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종윤 선생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건네면서 짧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건 자네에게 보내는 말이었던 듯싶어, 주려고 왔네.”

그는 배웅도 받지 않고 아관을 나갔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른한 시야에 울퉁불퉁한 대들보와 가느다란 실뱀 모양의 연기[煙]가 들어오자, 옥균은 그제야 제가 누워있는 곳이 암자임을 알아 외려 갑갑한 마음으로 눈꺼풀을 닫았다. 자욱한 향내에 코끝이 아릴 지경이다. 한밤중에 눈길을 지나가던 승려에게 은혜를 입었음이 자명하나 썩 달갑지 않으니, 만금을 준대도 받는 마음에 달려있음이었다. 승려는 구태여 환자의 곁으로 다가와 상태를 살피더니 이부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촛불 하나를 올렸다. 그러더니 손바닥만 한 불상 세 점을 일일이 닦으며 절을 올렸다. 옥균은 뒤늦게 몸을 일으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날 밝아 해가 왼편 산등성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동자들이 내려가는 길목의 눈을 모두 쓸어두었을 겁니다. 머물다 내려가시지요.”

문이 여닫힌 곳에 연기가 소용돌이치다 모습을 감추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옥균은 머리맡에 고이 개켜진 소의素衣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 눈을 감았다.

북해도의 겨울에 혹한은 예사요, 새하얀 눈밭을 걷다 눈이 멀어버린 이가 허다했다. 얼어 죽는 이가 하도 많아 여름 나절에 죽으면 호상이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토박민도 나기 어려운 계절이거늘, 하필 직전 머물던 곳이 열도에서도 특히 습하고 더운 오가사와라였던 옥균에게는 하루하루가 오죽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오한이 들고 걸을 때마다 뼈마디가 시렸으며 결국 폐렴까지 앓아 고비를 두 번이나 겪었다. 운신이 버거워지자 오히려 뛰쳐나가고자 하는 마음만 커졌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갇힌 인간보다 고독한 건 육신에 갇힌 큰 뜻이었다. 해방할 길을 찾지 않고서는 죽음뿐이었다.

와다가 점고를 위해 도소에 간 사이, 옥균은 홑겹 겉옷 한 장만 걸치고 방향도 없이 걸었다. 쌓일 줄 모르고 내리던 싸라기는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무릎까지 쌓였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산비탈을 오르니 바짓단은 온통 허옇게 얼어붙었다. 두 시진 가까이 앞으로만 걷다 문득 뒤돌아 수평선 아래로 잠기는 태양을 바라보던 옥균은 곧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진정 객사할 의지로 걸었던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옥균은 단차를 두어 나란히 앉은 불상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암자의 구조는 특이했다. 보통 남향으로 문을 내고 드나드는 사람이 부처와 마주 볼 수 있도록 하는데, 문은 동편에 나 있고 부처는 창 하나 내지 않은 벽을 바라보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쪽 벽에는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 실로 그림이라 칭하기엔 두꺼운 붓으로 단숨에 그려낸 동그라미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부처도, 보살도, 중생도, 원심도 없는 공空의 상태. 아, 세상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나’의 특별함을 찾으려는 것일진대, 그 존재는 억겁에 티끌만큼도 되지 못하니 그로부터 괴로움이 발원한다. 나는 이제껏 존재한 만물의 티끌이 모여 움직이는 것이고 또한 흩어지면 만물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찌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오랜 시간동안 마음을 괴롭혔단 말인가?

옥균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 그 암자에서 돌아온 이후 나를 괴롭히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네. 어쩌면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을 오직 무상無常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네. 오랫동안 시간만 죽이며 떠도니 결국 허무주의 따위를 주워섬긴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날 이후 나를 괴롭히는 신병身病이 모두 사라졌으니, 내가 겪은 병증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석 줄을 두어 번 반복해 읽은 뒤에라야 마른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봉투에 밀어 넣었다. 옥균 선생이 어떤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는지, 종윤 선생이 어찌하여 이 서찰을 저에게 전했는지 어슴푸레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어렵고 무거워 헤아릴 길이 요원하니, 여로餘路에 지고 갈 뜻이 하나 더해진 셈이었다. 긴 밤이 지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아니면 어떠하고 또한 우리가 아니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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