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무서운 시간

뮤지컬 곤 투모로우

골방 by 찰나
14
0
0

온몸이 내리쬐는 일광日光에 절절이 빛바랬다. 썩지 못한 피부가 늦여름 열기 아래에서 펄펄 끓는다. 의식에 오감이 빌붙었다. 뒤범벅된 통증이 눈꺼풀에 추를 얹어 인내의 무게를 어림잡았다.

몸 누인 돗자리에 말라붙은 피가 뒤척임마다 쩍쩍 울부짖으며 갈라졌다. 제깟 것도 몸에서 나온 거라고 여태 생인 줄 아나 보다. 근원에서 유리되어 떠도는 흔적이 꼭 제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친 지 얼마나 되었지. 닷새. 잠든 시간을 합치면 이레쯤. 명이 떨어진 때가 이달 초순이었으니, 이십이 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이완이 임금을 겁박하여 병탄을 비준케 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가능하면 빨리,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일부러 삼청동에 숨었다. 몇 년 사이 이루어진 여러 번의 숙청에 북촌 일대에는 주인 없는 집이 늘어났다. 빈 동을 일제히 쓸어버리자니 죄다 몇십 칸짜리 기와집이라 아깝고 들어가 살자니 죽은 자들의 손자국이 을씨년스러워 조정도, 일본도 잔해를 마냥 방치해두었다. 사람 하나 잡자고 들불 놓듯 집마다 뒤집어엎기엔 몇 대째 터 잡고 살던 양반들의 헛기침이 듬성듬성한 존재에 비해 요란했다. 때를 보아 입궐하기에도 적격인 데다, 사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멀리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엇갈렸다. 인경인가? 북은 벽제의 것이다. 가마가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헛간 문을 열고 나가니 반쯤 허물어진 담장 너머에 큰 길이 보였다. 소리가 곁으로 다가오자, 담벼락 뒤에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비스듬하게 뻗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백마白馬 위에 올라탄 이완이었다.

정훈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재킷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도망치는 내내 한 발도 쏘지 못한 리볼버가 잡혔다. 여기서 이완을 죽인다면, 말에서 떨어트리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계획에 걸림돌 하나는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모로 판단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정훈은 양손으로 총체를 세게 쥐고 공이를 내렸다.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품에서 부서졌다.

총구를 검은 뒤통수에 겨누었을 무렵,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사푼거리며 다가와 허공에 대고 앵앵 울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제 입술 가까이 검지를 가져갔지만, 이 조그만 동물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저 역시 고양이의 뜻을 알지 못하니 곤란한 낯으로 주변을 살필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제 목숨을 허무하게 내어주는 꼴이 된다. 정훈은 별수 없이 총을 집어넣고 마당 뒤쪽 깨진 장독 뒤로 몸을 숨겼다. 고양이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더니 두드러진 발목뼈에 머리통을 두어 번 부딪히고 풀숲으로 사라졌다. 정훈은 그림자를 눈으로 좇다가 터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일이 어그러졌으나 탓할 것은 없었다.

일행은 머잖아 사라졌다. 맥이 탁 풀렸다. 그 자리에 멍멍히 앉아있자니 머리 위에서 이파리가 설렁거리고 사이에 드문드문 푸른 것이 보였다. 눈두덩이 시릴 정도로 넋을 빼고 위를 보던 정훈은 찬찬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빛 때문에 이마가 욱신거렸다.

그나저나 새끼 고양이가 있거든 주변에 어미가 있을진대, 행여 사람 냄새가 묻어 제 어미로부터 버려지는 건 아닐지 문득 염려되었다. 정훈은 고양이가 사라진 풀숲에 다가가 길게 자란 갈풀을 손등으로 슬슬 헤쳤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모양은 보지 못했으니 기껏해야 근방에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빗물 고여 척척하게 진 땅에는 발자국 하나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하얀 도라지꽃 한 송이만 나직하게 피어있었다. 벗도 없이 홀로 하늘거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그 외
캐릭터
#한정훈
추가태그
#뮤지컬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