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라디오로 고백 공격

대만태섭

백업용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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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미야기.”

“예?”

“손 내밀어 봐.”

……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삼키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손등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내밀어진 미야기의 손을 덥썩 잡아내 반 바퀴 빙 돌린 미츠이는 손바닥 위에 작은 쪽지 하나를 올려뒀다. 쪽지? 손바닥 위의 쪽지는 정갈하게 접혀있었다. 미야기는 잠시 자그마한 종이에 글씨를 쓰는 미츠이를 생각해봤다. 진짜 안 어울린다.

“근데 이게 뭐예요?”

“비밀.”

“하?”

눈썹이 금세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미츠이는 여상한 표정으로 미야기를 가만 바라보다 꼭 들으라는 알 수 없는 소리만 남기고 성큼 제 갈 길을 간다. 아니, 잠시만요, 미츠이 씨! 다급히 불러봐도 저만치 걸어간 미츠이에게는 닿지 않았다. 쓸데없이 빠른 사람이네……. 쫓아가려고 하면 쫓아갈 순 있었지만 고작 쪽지 하나 때문에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미츠이가 괴상한, 이를테면 요새 반에서 유행한다던 코쿠리 상을 하고 남은 종이 같은 걸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미츠이가 사라진 골목길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야기가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펼쳐냈다. 쪽지에는 단순한 숫자만이 적혀있었다. 숫자? 위에 적힌 이건 시간 같고. 밑에 적힌 이건…… 전화번호는 아닐 텐데. 주장이 되면서 부원들의 비상 연락망은 전부 받은 상태였다. 개인 휴대폰 번호도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고. 가지런히 나열된 숫자들을 바라보던 미야기는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거.

“라디오 주파수잖아.”

 

*

 

미야기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편이 아니었다. 기계를 다루는 것이 서툴뿐더러 방음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야기 가는 꽤 이른 시간부터 아침이 시작되었으므로 라디오 소리가 잠을 방해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간혹 합숙 같은 것이 있을 때 일기예보를 들으려고 라디오를 켜긴 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고. 미야기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검은색 기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미츠이가 준 쪽지에는 시간과 함께 라디오 주파수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미야기는 그 주파수를 알았다. 반 아이들이 간혹 듣는 라디오의 주파수였다. 뭐라고 했지, 사연을 받아 읽어준다고 했던가. 자신이 보낸 사연이 당첨됐다고 기뻐하는 것을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라디오를 노려보던 미야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디오를 노려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없기도 했거니와 미츠이가 직접 써서 건넨 종이니 일단 들어는 봐야 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지. 평소의 미츠이를 떠올려본다. 사연은 커녕, 라디오를 듣기라도 하면 다행일 거 같았다.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드륵, 달칵, 드르륵. 버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맞춘다. 노이즈만 들리던 소리에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한다. 이내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목소리가 잡혔을 때. 미야기는 소리를 최소한으로 낮춘 후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엎드렸다. 심야의 라디오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요새 날이 부쩍 추워졌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집에서 가족과 다 함께 나베를 해 먹었습니다. 중간에 냄비를 엎을 뻔해서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여러분도 뜨거운 음식을 해 드실 땐 엎지 않게 조심하세요. 정말 엎었다간 화상을 입을 게 분명하니까요. (웃음 소리) 그렇다면 오늘의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야기는 눈을 감았다. 간혹 섞이는 노이즈 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

 

……아. 미야기는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따뜻한 방 안과 잔잔한 라디오 덕에 깜박 잠이 든 듯싶었다. 지금 몇 시지, 라디오는…….

-아…… 벌써 마지막 사연이네요. 산 님께서 보낸 사연입니다.

아직 안 끝났네. 그나저나 산三? 숫자 삼인가. 오늘 자신에게 직접 쪽지를 건넨 누군가가 떠올렸다가,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인간이 이런 걸 할 리가.

-안녕하세요. 현재 짝사랑 중인 졸업을 앞둔 학생입니다. 조만간 고백할 생각인데, 고백하기 전까지 제 생각만 해줬으면 해서 이렇게 사연을 보냅니다. 그 녀석 겉보기와는 다르게 섬세한 녀석이니까 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 어쩔 수 없이 제 생각만 할 겁니다.

우와, 성격 나쁜 사람이네. 누군가가 생각나는 거 같기도 하고.

-아마 이 라디오를 안 듣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분명 듣고 있을 겁니다. 헤어지기 전에 이 라디오 주파수가 적힌 쪽지를 줬거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말이라면 곧잘 잘 듣고는 하는 녀석이라서.

자신감 넘치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걸 보면 평소에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본론으로 돌아와서, 솔직히 고백한다고 해서 걔가 받아줄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맞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죠. 뭐라고 해야 하지. 제가 그 녀석에게 한 잘못이 조금 많은 편이라서요. 사이좋게 이빨을 주고받기도 했고.

뭐? 잠시만. 이빨을 주고받아? 미야기는 여기서 작은 불안함을 느꼈다. 세상에 이빨을 주고받는 선후배가 나랑 선배 말고 또 있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라디오를 계속 들어보기로 한다. -이때 라디오 같은 건 꺼버리고 그냥 곱게 누워서 자야 했었는데.-

-다만 과거의 일 때문에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녀석에게 했던 모든 일을 부정하고 외면하려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단순하게, 더 이상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저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서요.

아. 미친. 잠시만. 꿈인가 이거? 꿈이었으면 좋겠다. 제발.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러기야?

-이걸 듣고 그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전화라도 걸어주면 좋겠네요.

겠냐? 겠어? 당신이라면 걸 거 같아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았어~!

-신청 곡은 요네즈 켄시의 Orion으로 하겠습니다……. 네, 다 읽어 봤습니다. 졸업을 앞뒀다고 하니, 아직 학생인 걸까요? 그 나이대에 맞는 풋풋한 사랑을 하고 계신 거 같아 보기 좋습니다. 그럼 신청 곡인 ‘요네즈 켄시’의 ‘Orion’ 들어보겠습니다.

아~! 미친, 미친, 미친! 진짜 미친 거 아냐?! 정신 나갔나 봐.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미야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의 미야기는 새빨간 얼굴을 감추며 비명 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야, 라디오의 사연은 미츠이와 자신의 이야기가 분명했으니. 솔직히 처음에는 긴가민가하긴 했다만. 어떤 미친 선후배 사이가 서로에게 주먹질하고 사이좋게 이빨을 날려 먹겠는가. 심지어 그 ‘포기를 모르는 남자’까지.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면서 들어도 사연을 보낸 것은 미츠이였고 미츠이가 좋아한다는 상대는 자신이었다.

그리고 대체 어디가 풋풋한 건데. 풋풋보다는 살벌 아니야? 풋풋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이 없었는데? DJ도 미친 거 같은데? 이게 맞나? 아닌 거 같은데??? 고소해야 하는 거 아냐~?!?!

베개에 머리를 박고 한참 동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미야기는 노래가 끝나갈 때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좋아. 침착하자. 일단 자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는 거야, 미야기 료타. ……근데 내일 연습 있잖아. 미츠이 씨 얼굴 어떻게 봐. 아니. ……이인간은내일연습이있다는거뻔히알면서도라디오에이딴사연을보내고나한테라디오를듣게한거야설마이거완전미친놈아냐~!!!!

침착하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 커피를 마신 것처럼 말짱해진 정신과 진정하지 못하는 신체만이 남은 밤이었다…….

 

*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진짜 단 한숨도. 잠이 올 거 같으면 라디오의 사연이 생각나고. 애써 사연을 잊어버리면 미츠이 씨 얼굴이 생각나고. 미츠이 씨 얼굴도 애써 지워내고 양이라도 세어 애써 잠이 오게 만들면 이하생략. 위와 같은 과정을 100번쯤은 더 거친 새벽 5시 38분. 미야기는 잠자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연습은 9시였고, 지금이라도 자면 3시간 정도는 잘 수 있었으나. 3시간 자고 연습에 갈 바엔 러닝을 좀 더 뛰다 가는 게 나았다. 애매한 수면은 이도 저도 안 되었으니. 하……. 눈가를 꾹꾹 문지르던 미야기는 한가지 다짐을 했다. 일단 미츠이를 존나게 굴려보겠다고. 대학 합격 기념 체력 증진 훈련-윈터컵이 끝났지만 미츠이의 체력은 여전히 부족했다-을 시작함과 동시에 미야기가 주장이기에 할 수 있는 발칙한 생각이었다. 느릿하게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미야기가 하품을 한 번 했다. 일단 러닝 갈 준비부터 하자…….

 

*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을 열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연습하는 무리가 있었다. 아, 내가 제일 늦었나. 연습에 집중 못 할까 싶어 잠깐 뛴다는 러닝을 온몸이 땀으로 다 젖을 정도로 뛰었다. 샤워하고 머리를 세팅하고 나서도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었는데. 미야기는 잠깐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3분. 미야기가 늦은 건 아니었으니, 이 인원 모두가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나온 것이 된다. 기특한 놈들. 일전에 있던 윈터컵의 성적이 4강에서 그친 게 좋은 기폭제가 된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서로 드잡이질을 하는 사쿠라기와 루카와를 모른 체한 미야기가 웃었다. 음~ 평화로운 농구부. 성실한 농구부. 멋지다.

“료─타. 주장이 되어서 제일 늦으면 어떡해?”

어느새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툭 친 아야코가 장난스레 웃는다. 그 손길에 미야기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9시 전이잖아. 다른 애들이 너무 빨리 온 거라고. 불퉁한 말투 속에는 기특함이 담겨있었다. 그런 미야기에 웃음을 터트린 아야코는 들고 있던 파일철을 건넸다. 대강의 훈련 루틴들이 짜인 종이들이었다.

“그럼 지금 다 온 거야?”

“응, 못 오는 사람들 빼고.”

음, 좋아. 파일철의 자료와 아직까지 자유분방한 부원들을 번갈아 보며 비교하던 미야기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미츠이가 보이지 않았다. 훈련 루틴 자료는 있는데.

“미츠이 씨는?”

“미츠이 씨라면 가족 여행 갔잖아. 주말 이틀간.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

……아, 그랬었지……. 미야기의 머릿속에 미츠이와 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간다. 어이 미야기. 나 다음 주 가족 여행 때문에 훈련 참여 못 한다. 우와, 대학 붙었다고 바로 해이해지는 거에요? 까분다 임마. 거기에서 생각을 끊어낸 미야기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료를 보다 말고 그러는 미야기에 어느새 다가온 야스다와 아야코의 얼굴에 의문이 한가득 차오른다. 료타, 왜 그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미야기는 겨우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짜 고소할 거야…….”

대체 누구를……? 대화 맥락을 보면 미츠이를 말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딱히 고소할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아야코와 야스다가 어색하게 떨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료타 무슨 일 있었어? 몰라……?

 

*

 

주말을 뭔 정신으로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리니 주말이 끝나있었다. 와…… 고백 (예고) 공격의 순기능 장난 아니네……. 지난 주말 동안 미야기가 어떻게 지냈느냐. 불행인지 행운인지 미츠이 생각만 하면서 지냈다. 정말로! 훈련에서는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훈련을 제외하면 미야기의 머릿속에는 미츠이밖에 없었다. 러닝할 때도 미츠이. 멍때릴 때도 미츠이. 훈련 루틴을 짜면서도 미츠이. 밥을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자기 위해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도. 미츠이, 미츠이, 미츠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료짱, 료짱은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을 좀 그만할 필요가 있어. 언젠가 안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나,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난 생각이 너무 많아……. 베개를 꼭 껴안은 미야기가 반바퀴를 뒹굴 굴러 누웠다. 제 머릿속을 침범해 아주 자리를 잡고 누웠으면서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미츠이가 야속했다. 아니, 당연하지만. 가족 여행을 갔으니까 얼굴을 비치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그치만. 그치만……!!!

팡. 베개를 세게 내려친 미야기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이 상태로는 또 못 잘 게 분명했다. 일단 달리자. 달리고 오면 미츠이 생각도 안 나고, 잠도 올 것이다. 완벽한 일석이조. 의자에 걸린 겉옷과 핸드폰을 챙긴 미야기가 방문을 힘차게 열고 나왔다. 두 시간. 딱 두 시간만 뛰고 오는 거야. 그리고 이부자리에 다이빙하면 적어도 잠은 오겠지. 현관에 걸터앉아 운동화 끈을 묶고 있으면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료짱, 이 밤에 어딜 가니?”

“아, 잠깐 이 앞에……"

띠링.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말을 뚝 끊어낸 미야기가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미츠이 씨]. 음, 그냥 들어가서 잘까! 휴대폰을 들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띠링. 벨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여전히 미츠이였다. 미야기는 심란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판도라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용은 궁금한데 확인했다간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거 같았다. 어쩌지. 이걸 확인해, 말아. 고민하고 있으면 걱정 어린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린다.

“료짱.”

“네?”

“혹시 무슨 일 있니?”

아.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뒷목을 매만진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잠깐 밖에서 달리고 올게요.”

“아무 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너무 늦게 들어오지는 말고.”

“네, 10시 전에는 들어올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인터하이 이후 관계는 나아졌으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런 류의 걱정을 직접적으로 받을 때는 더욱더 어색했고. 운동화를 대충 정리하고 일어난 미야기는 문고리를 잡고 머뭇거렸다.

“……다녀올게요.”

“다녀오렴.”

후다닥, 반쯤 도망치듯이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문에 기대어 몇 번 숨을 내쉬던 미야기는 세팅되지 않아 복실한 머리를 매만졌다. 음, 좋아. 일단 달리자. 머릿속을 비우는 데에는 무작정 달리는 것이 최고였다. 산왕전에서도 꽤 도움이 됐으니까. 겉옷을 제대로 입고, 핸드폰도 주머니에 넣은 미야기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까지 내려오고 나면 서늘한 바람이 미야기를 맞이했다. 으, 추워. 겉옷을 좀 더 단단히 여미고선 잠깐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낸 순간,

“어이.”

“으아악!!”

“으악씨 뭐야?!”

제자리에서 한 50cm 떠오른 미야기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뒤를 돌아봤다. 놀란 표정의 미츠이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아니, 뭐, 뭐예요?! 당신 왜 여기 있어요?! 아니, 뭐지? 진짜 뭐지?! 여행 갔다면서요?!”

“오늘 점심에 돌아왔다 임마. 그리고 문자 보냈잖아. 못 봤어?”

미츠이의 말에 그제서야 문자를 확인한다.

 

[집앞이야나와] PM 8:23

[나올때까지집에안간다] PM 8:24

 

그리고 경악했다.

“아니, 이 문자 뭐예요?! 내가 문자 확인 못 했으면 어쩌려고 이딴 문자를 보내요?! 뭐? 집에 안 들어가? 진짜 미쳤나 봐 이 인간! 몸이 재산이면서 몸 소중히 안 하죠?! 감기 걸리고 싶어요?! 애들 굴려 가며 대학 겨우 보내놨더니 몸을 함부로 쓰네?!”

“일단 네가 나왔으니 된 거 아니냐. 그리고 뭐? 이 인간 미쳤나 봐? 야, 너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그리고 감기는 내가 아니라 네가 더 걱정해야겠지! 넌 이 날씨에 뭔 반바지를 입고 나오냐? 너야말로 감기 걸리고 싶은 거 아냐? 그리고 구르기는 내가 제일 많이 굴렀어!”

“이틀 만에 만난 주제에 오랜만은 뭔 놈의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맞잖아요! 그리고 전 러닝하다가 들어갈 예정이었고, 무엇보다 젊어서 괜찮거든요?! 미츠이 씨는 스스로나 걱정하세요! 애초에 당신 대학 보내려고 굴린 거니까 당신이 제일 많이 굴러야 하는 게 당연하죠!”

“너 진짜,”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던 찰나, 시끄러워!!!!!!!!!!!!! 어디선가 울린 노호에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창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에 큰 소리로 떠들어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완벽한 소음공해이자 민폐였다. ……일단 자리부터 옮길까요. ……엉.

 

*

 

으 추워. 내뱉은 숨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엣치, 그네에 앉아 작게 재채기를 한 미야기는 코를 작게 훌쩍였다.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미츠이의 말에 따라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끼익, 끼익. 작은 발돋움을 하면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가 꽤 재밌었지만 닿아오는 바람이 차가워 금세 그만뒀다. 러닝을 하다 보면 몸에 열이 올라서 일부러 반바지를 입고 나온 건데-사실 무작정 나오느라 복장 신경을 못 썼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됐다. 진짜 감기 걸리는 게 아닌지 몰라. 두 손을 모아 비비고 있으면 툭, 하고 따끈한 것이 볼에 닿아왔다.

“아 뜨거. 핫초코에요?”

“엉. 밤에 커피 마시면 잠 안 온다.”

“알고 있거든요.”

두 손으로 핫초코를 감싸면 전해져오는 온기 덕에 조금은 덜 추웠다. 정말 아주 조금. 미야기는 본디 추위에 약했으므로, 어디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미츠이와 함께인 것을 생각하면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빨리 용건이나 끝내고 헤어지고 싶었다.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폭탄 같았기 때문이다……. 추위에 덜덜 떨며 핫초코를 마시는 미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본 미츠이가 흠, 하고 작게 코를 울렸다.

“우왓,”

“덮고 있어. 너 진짜 감기 걸린다.”

“됐어요, 제가 애도 아니고. 미츠이 씨도 추울 거 아니에요.”

“난 몸에 열이 많아서 괜찮아.”

“그래도……"

“어허.”

제 어깨 위에 덮인 겉옷에 움찔하기도 잠시, 다시 돌려주려 했으나 미츠이가 인상을 찌푸리자 미야기는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추웠는데 잘 됐지 뭐. 제 손에 들어온 겉옷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미야기는 제 무릎을 덮었다. 솔직히 말해서 슬슬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겉옷에 남아있던 온기가 따뜻했다. 훨 났네. 그 상태로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신 미야기가 미츠이를 힐긋 바라봤다.

“그래서, 왜 온 거예요?”

“어엉?”

“저희 집 앞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 그 말에 미츠이는 시선을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미야기를 다시 바라보더니.

“좋아한다.”

“네?”

“좋아한다고.”

“누가요?”

“내가.”

“누굴?”

“너를.”

“……왜?”

“너 지금 그게 고백한 사람 앞에서 할 말이냐?”

미츠이의 얼굴이 황당으로 물든다. 아니, 당황 같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솔직히 고백했는데 상대방이 왜냐고 반문하면 탐탁지 않을 만도 했다. 하지만 미야기 또한 당황스러웠다. 네? 여기서요? 고백을요? 대체 왜?

“아니, 미츠이 씨가 제 입장에서 생각해 봐요.”

“그래, 말이나 해봐라.”

“자. 평범하게 저녁 러닝이나 뛰려고 나왔는데 갑자기 집 앞에서 학교 선배가 기다리고 있던 것도 모자라 갑자기 놀이터에 끌고 와 그네에 앉히더니 핫초코를 쥐여주고 냅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백……을…….”

잠깐. 예고? 미야기는 말을 하다 말았다. 무언가 아주아주 중요한 걸 까먹은 거 같았기 때문이다. 뭐지? 엄청 중요한 거 같았는데. 제 앞의 미츠이가 왜 말을 하다 마냐는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분명, 주말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게 있었는데. 뭐였지. 주말 동안 미츠이 씨만 생각하게 만든…… 아, 라디오. 라디오에서, 미츠이 씨가. 나한테……. 거기까지 생각한 미야기는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당황한 미츠이가 미야기를 바라보고 미츠이의 겉옷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착지했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이걸 까먹고 있었지? 진짜 미쳤나 보다. 지금 미야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

속된 말로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아니, 그. 미츠이 씨. 제가 지금? 급한 일이방금막생각나서가봐야할거같아요.”

미야기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어어, 못 간다.”

“대체 왜요?!?!?!”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미야기가 도망칠 것을 예상한 것처럼 앞을 가로막은 미츠이에 도망도 못 치게 된다. 아, 이 인간 쓸데없이 커~! 원온원을 할 때 마냥 틈을 찾아내 돌파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혔다. 공 없는 원온원, 이거 귀하네요.

“아니, 그거 착각 아니에요?! 착각 같은데?!”

“아─?! 웃기지 마! 네 멋대로 착각이라 단정 짓지 말라고! 이쪽은 한참을 고민해서 낸 결론이거든!”

“아니, 아니. 아니아니잠시만요. 아니, 한참이라면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냐니.”

“그러니까, 대체 언제부터 그런 고민을 한 건데요?”

“어…… 인터하이 이후던가.”

“그게 뭐가 한참인데요!!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난 또 나처럼 몇 년이나 된 줄 알았네!!! 감정 자각한 지 몇 달 만에 고백이라니 어떻게 되어 먹은 사고 흐름인데요~! 원래 좀 더 막 간질간질하게 썸도 타고 얼굴도 붉히고 우후훗꺄악두근콩닥 후에 고백 뭐 이런 거 아니냐고요~~! 아니남자둘이그러고있다고생각하면좀그렇긴한데 아니 그래도 그건 너무 빠르지 않아요?!?!?”

“아니, 미야기 너…… 그…… 일단. 우후훗꺄악두근콩닥 뭐 그런 거 좋아하냐?”

“겠냐고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미야기는 살짝 환장할 거 같았다. 누가 그런 걸 하고 싶겠냐고요. ……아니조금생각해보니까끌리긴한데 이게 문제가 아니고. 미야기는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왜냐하면! 미야기는! 미츠이와 사귈 생각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기서 잠깐 솔직해져 보자. 미야기 또한 미츠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미츠이와 같은 의미로. 심지어 좋아하게 된 것도 감정을 자각한 것도 엄청 오래전이다. 미츠이 같이 몇 달이 아닌 몇 년을 걸쳐서 소중히 간직해온 감정이다. 아니, 소중히는 아닌가? 어쨌든 미야기는 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조금 더 솔직해져서. 이 감정을 끌어안는 건 조금은 버거울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커져 버려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누르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버티는 것은 미야기가 잘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미츠이도 미야기를 좋아하고, 미야기도 미츠이를 좋아하는데. 그냥 곱게 사귀면 되지 않나요? 왜 이렇게 기를 쓰고 거절하려 드는 건가요?

그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건 당연했으니까.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은 한순간의 낭만에 불과하다. 미야기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람도, 감정도, 전부. 얼마나 쉽게 스러지던가. 얼마나 쉽게 바스라지고 망가지던가. 그 찬란함에 비해 얼마나 덧없던가…….

끝을 맞이하는 건 싫었다. 상처받고 무너지고 끝내 망가질 바엔. 시작도 하지 않으리라. 시작과 끝, 그 사이가 얼마나 찬란한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야기는 겁쟁이였고, 마주하기보단 도망치기를 선택했으므로. 끝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시작에서부터 도망쳐야 했으므로.

미츠이와의 관계는 이걸로 충분했다. 유독 친했던,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더 나아가서는 술자리도 가지는. 이 관계에 끝이라는 단어를 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건 시작조차 안 하려 했다. 그저 친할 뿐인 선후배 사이라면 쭉 이어가는 게 가능할 거 같았다. 물론 이 관계 또한 영원하진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연인보다는 길게 이어지지 않겠는가.

미야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 뜻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 굳건히 서 있는 지대짱나는 미츠이는 아무리 밀어내도 비키지 않았다. 심지어 밀어내는 제 손목도 잡아서 반항하려면 발을 사용해야 했다. 억울해서 돌아가시겠네! 싫다는 사람을 왜 자꾸 붙잡는 거지? 이 사람은, 왜 항상, 이렇게, 막무가내인 거야!

“그래, 진정은 좀 했냐.”

“전 언제나 진정한 상태거든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거친 숨이 잦아들 때 즘 미츠이는 미야기를 놓아주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미야기는 눈에 힘을 줘 미츠이를 올려다봤다. 그래봤자 미츠이의 눈에는 -콩깍지가 단단히 껴- 그냥 초코 푸들의 앙탈처럼 보였다. 음, 역시 머리를 내리면 귀엽다니까. 미츠이는 미야기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밖에서 한참 동안 그 지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츠이의 손은 뜨거웠다.

“뭐해요?”

“개수작.”

“제 말 듣기는 했어요?”

“어어, 아주 잘 들었지.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거.”

“내 말 하나도 안 들었네 이 인간!!!!”

미야기가 기어코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이젠 지쳤다. 소귀에 경을 읊는 기분이었다. 아니, 소귀에도 이 정도로 경을 읊었으면 그 소는 이미 장원급제해서 꽃가마를 타고 있었을 거다. 미야기는 힘이 쭉 빠져 터덜터덜 벤치에 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은 다리가 얼음장 같았다. 이대로 잠들면 미츠이 씨가 픽업해가려나…….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제 위로 무언가가 덮인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확인하면 제 위에 덮인 것은 아니나 다를까, 미츠이의 겉옷이었고, 제 앞에선 미츠이가 꼭 프러포즈를 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무릎도 안 좋은 인간이 왜 무릎을 꿇어요.”

“그게 문제냐.”

“미츠이 씨 농구 해야죠…….”

“하이고. 이 정도로 망가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푹 떨어지는 고개, 그리고 다시 정적.

“……미야기.”

“왜요…….”

“너 네가 감정 못 숨기는 편이라는 거 모르지.”

“……갑자기요?”

“아니. 갑자기가 아니야.”

깜박. 다시 미야기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다. 그 모습에 미츠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모르니까 알려줄 수 밖에 없겠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야기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손길에도 움찔거린 미야기는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미츠이를 바라봤다. 미츠이는 미야기의 손이 그 어떤 것 보다 소중하다는 듯이 매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날 볼 때 되게 예쁘게 웃어. 특히 3점 슛 넣었을 때. 가끔 꽃이 흩날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항상 힘이 들어가 있는 눈매가 날 바라볼 때면 유순하게 축 처지는 것도 예쁜데, 그 얼굴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 그만큼 사랑스러운 것이 없어. 훈련 끝나고 나면 미리 뚜껑을 따 둔 포카리 건네주는 것도 좋아. 사실 포카리 정도는 혼자서 딸 줄 아는데 네가 따주는 게 좋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닌 척 굴며 나보다 내 무릎에 더 신경 쓰는 것도 좋고. 가끔 나보다 내 무릎을 더 아끼는 거 같아. 뭐, 솔직히 말해서 내조받는 기분이라서 더 좋은 거 같기도 하다. 틈만 나면 날 바라보는데, 그 눈빛에 의미가 다른 애정도 잔뜩 섞여 있는 걸 눈치챘을 때는. 기분 째지더라. 어디 낯부끄러워서 살겠나 싶기도 하고. 싫다는 게 아니야, 더 해줬으면 할 정도로 좋아. 그리고 너, 모두에게 그렇지만 나한테만 아주 살짝 더 다정한 것도 모르겠지. 근데 이거는 우리 농구부 다 알 거다. 명백한 이유야 나만 알겠지만서도. 날 좋아해서잖냐, 안 그래? 그리고, 그 뭐냐. 이건 네가 죽고싶어 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저번에 라커룸에서 잠깐 자고 있었을 때. 너 나한테 뽀뽀하고 도망갔잖냐. 사실 그때 안 자고 있었거든. 그냥 눈만 감고 있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이 발칙한 놈 뒤통수 붙잡고 키스할지 말지 고민했다. 고민 끝나기도 전에 네가 가버렸지만.

솔직히 나도 내가 착각하는 줄 알았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이 감정이 죄책감에서 파생된 책임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어. 하지만 미야기. 내 심장이 널 향해 뛰어. 네가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 좀 더 닿고 싶고, 좀 더 닿고 있으면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 어떤 고된 일도 너와 함께라는 상상을 하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어. 맛있어 보이는 식당을 발견했을 때도, 노래를 들을 때도, 길가의 꽃을 봤을 때도, 하늘을 봤을 때도. 내 일상 순간순간에서 네가 생각나. 너와 내 일상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고 싶어. 함께 기뻐하고, 울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지내고 싶어. 내 일생을 너에게 주고 싶다고.

 

“그래서 난 끝끝내 이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내렸다.”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미츠이는 한 쪽 손을 조심스레 뻗어내 볼을 감쌌다. 미야기는 추위에 꽁꽁 얼어붙었는데도 미츠이는 불처럼 뜨겁다. 그 뜨거운 열기로 미야기를 녹여준다.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는 바람 우는 소리만이 간혹 울렸다. 한참을 그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다. 깜박, 깜박, 깜박.

“난 확신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냐.”

미츠이가 웃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문득 미야기는 제 볼에 닿아오는 미츠이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어붙은 게 녹는 것도 모자라 화상을 입을 것만도 같았다.

“네가 이때껏 해온 모든 것들이 내 확신이 되었다는 소리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너무 꽉꽉 눌러 담은 감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넘쳐흘러 줄줄 새고 있었다. 아아. 진짜 전부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 전부 알아차릴 때 까지 나만 몰랐다는 사실이 너무 분해. 감정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 한 내가 너무 한심해.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하나도 말해주지 않은 이 사람이 너무 싫어. 하지만, 그렇지만.

“너 말이야.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츠이 히사시가 누구냐. 포기를 모르는 남자잖냐. 미야기. 뭐가 그리 불안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널 놓칠 일은 없어. 절대로.”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이 당신이라는 점에서 안심하게 된다. 흘러내린 감정이 그 무엇도 아닌 당신을 향한 애정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말 안 한 것도 배려에서 파생된 다정임을 알기에 당신이 좋다. 전부 모순적인 것들 뿐이다. 얼굴에 힘을 풀면 눈물이 흘러내릴 거 같았다. 그건 볼품없으니까, 어떻게든 얼굴에 힘을 줘 참아낸다. 아마 엄청 못생긴 표정일 거다. 아아, 싫은데. 이 사람에게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고개를 숙이려고 해도 제 얼굴을 잡고 있어 그러지 못 한다. 시선을 피하면 날 두고 어딜 보냐며 자신을 보게 만든다. 진퇴양난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다. 이 사람이 나를 너무 꽉 잡고 있어서. 미야기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다. 여전히 미츠이는 눈앞에서 당당히 웃고 있었다.

“미츠이 씨 진짜 싫어요.”

“응.”

“유급이나 해버려.”

“야, 어떻게 붙은 대학인데.”

“평생 혼자였으면 좋겠어.”

“네가 있어서 그건 영원히 안 되겠다.”

이거봐. 또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하는 영원을 입에 담는다. 어떻게 그러는 걸까. 나는, 미야기는. 찰나를 입에 담는 것 조차 무서운데. 영원이 무섭지도 않은가. 끝이 두렵지도 않은가. 그 모든 의문들을 제하고서 기어코 내뱉은 말은.

“……미츠이 씨도, 저한테 확신을 줄 수 있어요?”

“당연히. 네가 원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을. 필요 없다고 해도 주마. 날 믿어.”

내가 이때껏 해온 모든 것들이 미츠이 씨에게 확신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까. 미야기 또한 미츠이의 모든 것들에서 확신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젠가의 미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영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끝은 무섭다. 그렇기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시작선 뒤에 가만히 서서 달려가는 모두를 바라보기만 했다. 뒤처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남아있는 것이라 위로하며. 하지만 이 사람은, 미츠이는. 시작선 뒤에 선 자신을 강제로 끌어냈다. 기어코 시작을 하게 만든 것이다. 시작도 안 하면 뭘 할 수 있겠냐, 그렇게 외치며.

여전히 영원할거란 확신은 없다. 여전히 끝나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서 같이 달려주는 것이 이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괜찮을 거 같다. 왜인지 모르게 용기가 샘솟는다. 이상하죠. 난 언제나 영원을 무서워하며 살았는데. 당신의 말 한마디로 용기가 샘솟아 전부 괜찮을 거 같단 생각이 들다니. 정말 이상해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미츠이를 바라본다. 이 사람은 자신이 확신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츠이 씨.

“내가,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확신을 주세요.”

“널 가지는 조건치곤 너무 쉬운 일인데.”

“우와, 미츠이 씨가 절 가지는 거예요?”

“하하. 당연하지. 네가 이 미츠이 히사시를 가지니까, 나도 미야기 료타를 가져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냐.”

와……. 잠깐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미야기는 미츠이를 쭉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끌려온 미츠이와 이마가 작게 부딪힌다. 아야.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맞닿은 것에 가까운데도 아프다며 엄살을 부린다. 네에, 네. 제가 잘못했어요. 팔을 등에 둘러 끌어안으면 마주 끌어안아 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몸에 열이 많다더니, 이 추운 날씨에도 미츠이의 몸을 따끈했다. 핫팩을 껴안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러냐. 따뜻한 미츠이의 몸도, 일정한 박자로 들려오는 심장 박동도. 모든 것이 좋았다. 품속에 좀 더 파고드는 미야기를 꽉 껴안은 미츠이가 느긋하게 숨을 내뱉었다.

“아─ 아. 미야기. 난 역시 네가 좋다.”

“알고 있어요.”

“너는? 너는 날 좋아해?”

“꼭 말로 해야 알아요?”

“이왕이면 말로 듣는 게 더 좋으니까.”

“……네에, 네. 좋아해요. 그 누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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