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미야기 송씨 집안의 불문율

대만태섭

백업용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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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 송씨 집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이름이 적힌 간식은 먹지 말 것. (당연하겠지만 높은 확률로 지켜지지 않았다. 남매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내 푸딩을 먹었니 마니 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었다.)

둘째, 다 먹은 접시는 싱크대에 넣어둘 것. (태섭이 간혹 까먹고는 했다.)

셋째,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옷을 널어놓을 것. (집에 늦게 들어오는 어머니와 태섭 때문에 보통은 아라가 하는 일이었다.)

넷째, 다치지 말 것. (태섭아!!)

……등등. 두 손으로도 못 꼽을 만큼 많은 규칙이었지만, 그중 지켜지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말뿐인 규칙이 꼭꼭 지켜지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말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유별나게 잘 지켜지는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연락을 잊지 말 것’.

 

*

 

햇살이 아플 정도로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북산 농구부는 산속에 있는 계곡을 찾았다. 인터하이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냈겠다, 백호의 재활도 끝났겠다. 앞선 이유를 축하함과 부원들의 관계 개선 및 협동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기깔나는 취지가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계곡이다!!”

“강백호, 등 조심해!!!”

새로 부임한 주장 송태섭의 지옥 훈련을 째고 놀고 싶은 북산 농구부의 반쯤은 강제적으로 밀어붙인 휴가였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치수가 은퇴를 함으로써 새로운 주장은 태섭이 되었다. 다들 그에 반발 없이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애초에 농구부의 대부분은 -지금은 각자의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1학년 문제아 둘을 제대로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에 주장직을 하라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렇게 농구부는 평화로이 흘러가는 듯했다. 태섭이 직접 짜온 자칭 농구부를 위한 맞춤 훈련법이자 타칭 둘이 해서 둘이 죽는 훈련법을 겪기 전까지.

처음에는 -대만을 빼고- 그럭저럭 견뎠다. 주전이 아니라고 해서 훈련을 허투루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일주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언가 잘못됐음을 단단히 깨달았다. 태섭은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넣었다. 뭐? 죽을 거 같아? 사람은 그리 쉽게 안 죽으니까 걱정 마. 내가 알아. 패스할게. 훈련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대만 선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잠깐 찾아온 휴식 시간에 달재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들 뒤져가기 바빴으므로.

그리고 백호와 태웅이 거의 동시에 복귀했고, 둘의 복귀를 축하하러 치수와 준호가 찾아온 날이었다. 대만은 어김없이 파김치가 되어 체육관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진짜 죽을 거 같았다. 이 일상이 한 번이라도 더 반복되면 대만은 정대만이 아닌 정머만이 될 거 같았다. 일주일, 아니. 딱 하루만 쉬었으면 좋겠는데. 아……. 뭐 좋은 핑계 안 오나.

“얘들아.”

“주장? 준호 선배?”

“고릴라!!!”

그 상황에서 들린 건 꽤 뜻밖의 목소리였다.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대만은 체육관 문 쪽을 바라봤다. 은퇴 이후로도 종종 찾아오던 준호와, 단 한 번을 안 찾아오던 치수가 있었다. 백호와 오일의 슛을 봐주던 태섭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백호는 치수에게 달려간 지 오래였다. 치수는 반쯤 몸통 박치기를 먹인 백호에 화를 내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타올로 대충이나마 땀을 닦아내고 문 쪽으로 달려가는 태섭의 뒤로 오일이 무릎부터 쓰러져 내렸다. 죽을 거 같아…….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예상이 갔다. 음, 나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카리를 마시며 체육관 입구를 힐긋 바라본다. 치수와 준호가 양손에 한가득 든 것을 보며 태섭이 이게 무어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랑 태웅이가 복귀했다길래, 축하할 겸 겸사겸사.”

“간식 사 왔으니 먹어라.”

그러면서 두 손에 들린 봉지를 들어 보인다. 백호와 머리를 맞대고 봉지 안을 들여다본 태섭이 작게 감탄을 내뱉는다. 와, 엄청 많네요. 평범한 양으로는 싸움만 날 거 같아서. 음, 확실히. 봉지 네 개 중 두 개를 백호에게 넘기고, 나머지 두 개를 든 태섭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집합! 간식 먹고 하자!

 

*

 

훈련을 잠시 중단하고 체육관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농구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치수와 준호의 입시라던가, 문제아 둘의 복귀라던가, 태섭의 훈련 일정이 얼마나 악독한가, 같은. 훈련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치수와 준호는 동시에 태섭을 바라봤다.

“태섭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양 동그래진 준호의 눈이 깜박인다. 태섭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쩔 수 없어요. 지금 해결해야 할 게 몇 개인데. 빠진만큼 채워야 하기도 했고.”

그러며 캔을 대신 따 건네준다. 대만은 손에 제대로 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헛손질만 하다가 캔을 받아들었다. 고맙다……. 뭘요. 근데 송태섭이 원인이니까 고맙다고 할 필요까진 없었나? 문득 든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태섭의 말이 맞는 말이긴 했다. 치수가 은퇴함으로써 골 밑이 텅 비었다. 골 밑을 맡을 수 있는 건 그나마 덩치가 큰 백호였는데, 백호는 재활하느라 몸이 굳었을 게 뻔하니 기본부터 다시 다져야 했다. 벤치도 단련시켜서 주전을 뽑아야 하고. 태섭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농구부 또한 아무런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죽을 거 같았다. 주장의 노고를 생각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런 일상이 계속되다간 누구 한 명은 우리의 곁을 떠날 것이다. 천국으로. 자초지종을 듣던 치수와 준호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준호는 어색하게 웃었고 치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치수 녀석, 초반에 훈련이 빡세서 부원 몇 명을 도망치게 했다던가? 흘러가듯이 들은 이야기였다. ……어? 설마? 혹시? 대만은 이상한 곳에서 감이 좋았다.

“그래도 적당히 하는 게 좋다. 적절한 휴식은 오히려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되니.”

“치수 말이 맞아. 당장 치수만 해도, 신입 부원 몇 명을 쫓아냈는걸.”

“권준호…….”

왔다!! 핑계!!!!! 본디 내가 제일 먼저 말 꺼내기는 어렵지만 누군가가 말꼬를 틀어준다면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법이다. 대만은 머리를 굴렸다. 시험을 칠 때도 굴리지 않던 머리를 오질나게 굴렸다. 태섭의 성격상 냅다 내뱉는다고 해서 들어주지 않는다.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했다. 타당한 근거. ……인터하이 성적? 아니면 1학년 두 명의 복귀? 북산고교 농구부의 친목 다짐? ……전부 괜찮지 않나? 계산을 끝낸 대만은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순식간에 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대만은 크게 외쳤다.

“그런 의미로 놀러 가는 거 어떠냐!”

“네? 뭔 소리예요?”

모두가 물음표를 띄울 만큼 엄청난 비약이었다. 태섭의 눈썹이 금세 모닝 차주처럼 삐죽인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굴리고 있는지 몰라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알지. 존나 잘 알지. 내 대학 때문 아니냐. 근데 태섭아…… 이러다간 대학 가기도 전에 천국 가겠다……. 그리고 대만의 필사적인 설득과 후배들의 변호가 이어진다.

채치수 말대로 적절한 휴식은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된다잖냐. 솔직히 학기 시작하면 시험이나 윈터컵 때문에 정신도 시간도 없을거고. 그리고 우리끼리 멋진 추억 하나쯤은 만드는 것도 좋지 않냐? 음, 대만 선배 말이 맞아 태섭아! 다 같이 노는 기억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또, 또……. 백호랑 태웅이 복귀했으니까 그거 축하하는 의미로도 좋고! 3학년 선배들 졸업하면 보기 어려울 테니까, 추억은 쌓을 수 있을 때 쌓아야 하지 않을까?! 그,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채치수! 권준호! 들었지?! 너네도 강제 참여다!!!!! 우리도? 갑자기? 어, 뭐. 그래……?

하지만 삐죽이는 태섭의 눈썹이 내려올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 제발 넘어와 주면 안 될까 주장님아.

“그렇다고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태섭의 말을 끊은 건 치수였다. 순식간에 치수에게 시선이 몰린다. 대만은 치수에게 희망을 걸었다.

“어디 멀리도 아니고 가나가와 현 내면……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별문제 없겠지.”

모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기대가 잔뜩 쌓인 눈빛들이 태섭에게 꽂힌다. 우와,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던 태섭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조금만 더 밀면 넘어간다. 태섭이 단호히 거절 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희망은 있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자, 응? 나쁜 일도 아니고 그냥 놀러만 가는 거잖아. 아니 근데……. 으음……. 그렇게 고민하던 태섭을 넘긴 마지막 타격은,

“뭐야 강백호. 왜 그렇게 쳐다봐? 할 말 있음 해.”

“엉? 아니, 나 친구들끼리 놀러 간 적 한 번도 없걸랑.”

호열이네랑은 시간이 안 돼서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못 갔고. 그래서 엄청나게 기대돼! ……하는 백호의 한 마디였다. 그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해진다. 태섭이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의도치 않은 동정심 유발이었다. 대만이 도르륵 눈을 굴리며 태섭의 눈치를 봤다. 한동안 아무 말 않던 태섭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까짓것 한 번 가죠, 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대만이 세레머니를 할 때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며 무어라 떠들며 계획을 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딜 가서 무얼 하든 훈련을 빼고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려!

“계곡으로, 2박 3일 맞죠?”

3일간!!!

해서, 북산 농구부 일동은 계곡을 향해 떠나왔다. 설렘만을 한가득 안은 채, 미래에 있을 일은 상상조차 못 하고.

 

*

 

첫째 날.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놈이 내동댕이라며 대만은 주먹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동댕이가 뭐야? 하는 백호의 물음에 달재가 희생됐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의 달재는 180이 넘는 장정들에게 팔과 발목을 붙잡혀-태웅아 잡아! 웃쓰.- 가뿐히 나비처럼 날아 계곡에 던져졌다-따라 하지 마세요-. 물론 곧바로 몸이 생명인 운동 선수가 다치면 어쩔 거냐며 치수에게 혼났다. 나란히 혹을 두 개 달고 있는 태웅과 대만의 모습은 제법 웃겼다.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나오는 달재를 비웃던 오일과 병욱 또한 대만과 백호에게 납치되어 물에 담금질 당했다. 후에 회상하길, 자신들이 그리 쉽게 들린다는 걸 처음 알았단다. 치수는 담금질을 당하진 않았지만 백호가 뿌린 물벼락을 맞았고, 준호는 구경하다가 백호에게 납치 당하듯이 끌려갔고, 호식과 재훈, 중식은 태웅과 백호의 싸움에 휘말려 물 폭탄을 맞았다. 계곡에 도착한 지 20분도 안 되어 열다섯 중 열넷이 젖게 되었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아닐까? 준호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태섭은 오는 내내 꾸벅꾸벅 졸더니 도착해서는 아예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 같은 북산이더라도 자는 사람을 억지로 깨워 빠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태섭은 숙소에 눕혀둔 상태였다.

한창 물놀이를 끝내고 나면 어느새 하늘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자. 그 말에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의 재채기로 쏙 들어갔지만. 그러고 보니 슬슬 춥네. 배도 고프고. 윈터컵을 준비하는 시기였기에, 사소한 감기 하나라도 조심해야 했다. 괜히 컨디션을 망쳤다간 안되니까. 그렇게 물놀이를 정리하고, 저녁으로는 고기와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 때쯤에는 태섭도 일어났다. 잠에서 덜 깨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놀렸다. 졸던 이유가 훈련 조정 때문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날 태섭의 접시에는 고기가 한가득 쌓였다. 태섭이 그만 주라며 화내기 전까지. 다 못 먹는다고!!! 짜증이 가득 담긴 사자후가 울렸다.

 

둘째 날.

태섭은 첫째 날에 물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는 죄로 아침부터 담금질 당했다. 참고로 태섭을 담근 것은 대만에게 설득당한 태웅이었다. 태웅이 너……! 물에 젖은 브로콜리가 되어 배신감 어린 표정을 짓는 것이 꽤 웃기더랬다. 이내 태웅과 태섭 둘 사이에서 물싸움이 발발했고, 지나가던 달재가 휘말리고, 백호가 휘말리고, 호식이 휘말리고…… 북산 농구부 전원이 휘말리고 나서야 물싸움이 진정됐다. 배고파.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대부분이 동의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은 채로 물놀이나 실컷 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밥 먹고 마저 놀까? 웃쓰. 점심으로는 김치찌개를 한솥 끓여 먹었다. 중식이 가져온 김치였는데, 다들 맛있다며 극찬했다. 분명 저녁까지 먹으려고 지은 양이었는데…… 텅 빈 밥솥 두 개를 보며 호식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한창 자라날 때의 운동부 위장을 얕보면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식기들을 대강이나마 정리하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비치발리볼을 했다. 사실 비치도 아니었고 가면 갈수록 발리볼도 아닌 그냥 막장 피구가 되었지만, 어찌 됐든 다들 웃고 떠들었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중간에 너무 세게 던진 나머지 나무 위에 걸린 공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은 모두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치수가 백호를 목말 태워 공을 구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197cm와 190cm가 합쳐져 탄생한 도합 387cm의 거인을 보고 모두가 감탄했다. 진짜 저 키였으면 윈터컵 우승은 껌도 아닐 텐데……. 태섭아 너 되게 그 뭐지? 입시? 악귀? 그거 같다…… 대학을 가야 하는 건 대만인데 왜 태섭이 더 윈터컵에 목을 맬까. 북산 농구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그 후 다시 계곡에 가서 놀았다. 단풍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울 나이라던가. 어제 온종일 놀았으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즈음 체력이 약한 몇몇은 죽겠다며 미리 깔아둔 돗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니까 평소에 체력을 길러놨어야지! 그 말에 대만은 수박을 쪼개며 허탈하게 웃었다. 난 왜 그리 헛된 시간을……, 어, 수박 잘 익었네. 그만 놀고 와서 수박 먹어!!! 그렇게 수박 두 통을 기깔나게 클리어했다. 그리고 다시 계곡에 들어가서 놀았다. 열다섯이 사이좋게 한 번씩은 더 담금질 당하고, 대부분이 지쳐 숨이 거칠어질 때 즈음,

툭.

어라.

비가 내렸다. 한 두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하자 북산은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차피 해도 지고 있었고 다들 체력도 떨어지고 있었던 지라 나름 괜찮은 타이밍이었다. 차례대로 씻고 거실에 모여 소소한 보드게임을 했다. 할리갈리라던가, 도둑잡기라던가, 루미큐브라던가. 전부 백호가 가져온 것들이었다. 보드게임이 왜 이리 많냐 물었더니 백호 군단이 챙겨줬다고 대답했다. 걔네는 가끔 보면 백호를 키우는 거 같아. 장난스레 내뱉은 말이었지만 어째 뼈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드게임을 가열차게 즐기고 난 후엔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는 대부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틀 내내 힘차게 놀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조는 애들을 일일이 깨워 방으로 보내고 나면 거실에는 3학년만이 남아있었다. 3학년들 또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몇 번의 대화 이후 방으로 돌아가 자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한 대화는, 아마도.

내일은 비가 그치겠지?

당연하지, 설마 내도록 오겠냐.

……였던 거 같다.

그리고 그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마냥 사나운 비가.

 

*

 

“비가 그칠 때까진 못 내려갈 거 같아.”

마지막 날 아침, 밖에 나가지 못해 거실에서 뒹굴거리는 모두에게 준호가 꺼낸 이야기였다. 밤새 우레같이 내리던 비가 기어코 벽이 되어 북산을 막아섰다. 비 오는 날에 산을 타는 건 위험하잖아. 상황이 상황이라 비가 그칠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일단 기다려보자.

“전파는 터져?”

준호가 은은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모두가 불안에 휩싸인다. 터지겠니……. 아련히 내뱉은 말에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겠지……. 하긴, 비가 이렇게 오는데 전파가 터질 리가 있나. 연락은 어떡하지? 늦을 거 같은데. 그러게……. 운 좋게 전파가 터지길 기도해야 하나? 조용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대만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연락을 안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대만은 과거 화려한 전적으로 인해 연락은 꼬박꼬박하는 편이었다. 늦으면 늦는다, 자고 가면 자고 간다.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테고, 더 이상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짓은 꺼려졌으니까. 우짜냐.

“저…… 비는 언제쯤 그칠 거 같나요?”

“으음, 글쎄.”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백주 대낮인데도 볕이 제대로 들지 않아 날이 흐렸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다. 소나기라면 모르겠지만 일단 늦은 오후까진 올 거 같아. 북산은 오후 2시에 짐을 정리하고 귀가할 예정이었다. 지금 시간이 10시니까, ……4시간 안에 그칠 거 같진 않지? 응……. 점점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 보이자 준호가 손뼉을 두어번 친다. 괜찮으니까 밖에 나가지 말고 있어. 네에~ 하고 터져 나오는 대답을 마냥 밝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둡지도 않았다. 대만은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옆에 앉아있던 태섭의 손을 감싸 쥐었다.

“피난다, 그러다.”

불안한 건지 뭔지. 태섭은 못 내려갈 거 같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거스러미를 뜯어내고 있었다. 잠깐 보았던 손가락 끝부분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니 조금만 더 뜯었다간 피를 볼 게 뻔했다. 언뜻 본 눈 밑이 거뭇하다. 잠을 잘 못 잤나? 맞잡은 손은 차가웠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갑지, 어디 아픈가. 대만의 체온이 남들보다 높은 점을 감안해서라도 너무 차가웠다. 손에 힘을 좀 더 주어 꽉 잡아내며, 다른 손으로는 태섭의 이마의 열을 잰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세팅되지 않은 갈색 곱슬머리가 손등을 간지럽혔다.

“뭐야, 갑자기 왜요?”

“아니…… 너 밤에 잠 못 잤냐? 혹시 어디 아파? 너 손 되게 차갑다. 눈 밑도 까맣고. ……지금 보니까 얼굴도 창백하네. 너 진짜 어디 아프냐? 방에 들어가서 잘래?”

깜박, 깜박. 태섭은 가만히 대만을 바라봤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급기야 이마에 얹어져 있던 손이 내려와 얼굴 이곳저곳을 주무른다. 야, 태섭아. 대답 좀 해봐라. 아 근데 너 볼 되게 말랑하다. 눈을 반짝이며 볼을 주무르는 대만에 태섭의 눈이 공허해졌다. 감동할 시간을 안 주네 이 인간은……. 한숨을 삼켜내고선 제 볼을 주물거리는 손을 떼어내 쭉 밀어낸다. 태섭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대만의 허벅지를 몇 번 두드린다. 음,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그러더니 냅다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여기서 잠깐! 송태섭은 지금 훈련 조정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자 누적된 피로에 실컷 물놀이하고 보드게임 하며 누적된 피로와 비가 와 제대로 된 잠을 못 자 누적된 피로로 제정신이 아니다!)

왐마야. 허벅지 위의 무게감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했다. 흔치 않은 태섭의 어리광 때문이기도 했다. 아, 딱딱해. 근육 자랑해요? 힘 좀 빼봐요. 그러며 허벅지를 칠싹찰싹 때리는데, 그 손길이 제법 매섭다. 태섭아 때리면 아파서 더 딱딱해져……. 맞은 곳을 문지르며 의식적으로 힘을 풀어낸다.

“이제 괜찮아?”

“훨 낫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태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내 들려오는 일정한 숨소리는 태섭이 잠들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진짜 자네……. 몇 번 어물쩍거리던 대만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섭의 머리카락 끝부분을 건드린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본다. 되게 복실거리네, 푸들 같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도 보고. 힘 풀린 미간을 쓰다듬다가, 코끝을 살짝 꼬집으면 금세 인상을 쓰며 작게 뒤척인다. 와, 진짜 귀엽다……. 태섭의 자는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자는 모습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곤히 자는 태섭의 얼굴은 되게 어려 보여서. 얼굴만 보면,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네…….”

헙. 대만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태섭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다행이다.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태섭이 자고 있지 않았다면 대만의 임플란트는 3개에서 4개로 늘어났을 것이다. 대만은 이렇게 된 이상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평소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질색했으니까. 물론 밖에서 그런 대만의 잘못도 있긴 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안 보이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고, 닿고 있으면 그냥 평생 이대로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건. 대만이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동안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선배들…… 우리를 까먹으신 걸까?”

여기가 농구부 대부분이 모여있는 거실이었단 점이다. 소파에서 그사세에 빠진 두 선배-정확히는 대만-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대부분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야!! 가자 가. 빽 해 빽! 우리가 있으면 안 되는 분위기인가 보다. 뭐? 돌아가라구! 방으로 흩어지는 후배와 친구들을 따라 들어가던 달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행복하니…… 됐나?

 

*

 

바다가 소중한 이들을 앗아갈 때면 언제나 비가 왔다.

전부 비가 내리는 날 바다에 삼켜졌다.

밤새 내리던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어머니는 전화기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쪽잠에 들지도 못 했다. 혹시라도 자는 사이에 전화가 올까 봐, 그래서 남편의 소식을 놓칠까 봐. 그런 어머니를 달래고 자신이 대신 깨어있겠다며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오라고 한 것은 준섭이었다. 준섭은 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 가장 노릇을 했다. 어머니를 부축해 방에 눕혀드리고, 대신 전화기 앞에 자리 잡는 준섭은 언제나 태섭의 동경이었고, 우상이었다.

아버지가 주장이었을 때, 부주장은 준섭이다.

준섭이 주장이었을 때, 부주장은 태섭이다.

그렇다면 태섭은, 자신은. 준섭이 행한 일을 그대로 해야 했다. 전화기 앞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달래고, 불안해하는 아라를 달래야 했다. 어머니 대신 전화기 앞을 지키며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부디 바다에 삼켜지지 않았기를 기도해야 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태섭은 주장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은 제 안위만 챙기기 급급해서, 주어진 현실에 도망치느라 바빠서. 준섭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형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주장이 되지 못했다.

형, 나는 형처럼 될 수는 없나 봐…….

그리고 태섭은 그런 겁쟁이인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

 

“대만 선배, 태섭아, 간식……, 헉.”

달재는 숨을 삼켰다. 대만과 태섭은 소파에 아침에 봤던 그 상태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며 소리를 내려던 오일을 손짓까지 동원해 말린 달재가 목소리 크기를 최대한 낮췄다. 덩달아 낮아지는 자세는 왜일까? 오일은 얼떨결에 같이 자세를 낮췄다.

“대만 선배랑 태섭이, 자고 있어…….”

“간식 먹어야 하니까 깨워야하는 거 아냐……?”

“으음, 그러기엔…….”

너무 곤히 자는데……. 달재와 오일은 슬 고개를 내밀어 거실을 봤다. 조용히 깔린 적막 속에서 간간히 몸을 뒤척이거나, 잠꼬대 소리만이 들려왔다. 잠깐 서로를 마주보던 둘은 누구 하나 뭐라 할 거 없이 조용히 방에 쏙 들어갔다. 쌀쌀하니까 조금 두꺼운 이불이 좋겠지? 응. 비오니까 기온이 확 떨어졌어. 아, 이거 괜찮다. 그러며 각자 이불을 한 개씩 들고와, 대만과 태섭에게 덮어준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비록 대만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태섭 때문에 대만은 상체만 이불을 덮은 제법 웃긴 광경이 되었지만, 뭐. 꼼꼼히 덮어줬으니까 된 거 아닐까? 작게 키득거리며 거실의 불을 끈다. 먹구름에 해가 가려져 낮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

 

깜박. 태섭이 느리게 눈을 떴다.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면 이불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불? ……달재인가? 아니면 준호 선배나 치수 선배? 이불을 덮어줄 만한 사람들을 추려보며 부드러운 이불 끝 자락을 매만진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귀를 좀 더 기울이면 아래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다들 1층에 있나보네. 자고 있어서 배려해준 거면 괜스레 미안한데.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문득 대만에게로 닿는다. 여전히 소파에 푹 기대어 자고 있었다. 태섭은 대만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누웠다.

꿈을 꿨다.

언젠가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둔 꿈을 꿨다.

옛날에, 중학생 때 즈음. 카나가와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인 형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부터. 내가 아니라 형이 살아야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바다에 들어가 하염없이 빌었다. 신님, 자비로웁고 모든 것을 굽이 살피는 신님. 저를 드리겠습니다. 형을 돌려주세요. 제발……. 당연하게도 형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동화로만 존재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허황된 희망조차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던가. 죄책감에 잠겨 부서져내리던 태섭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살고자 해서 살지 못 했고, 죽지 못 해서 살았다. 태섭은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기에.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죽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많았다.

살아있는 게 저라서 죄송해요. 그 생각을 처음으로 한 건 언제였지? 상처투성이로 엄마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였나? 밤에 몰래 울던 엄마를 발견했을 때일 수도. 어쩌면, 차마 펼치지 못한 앨범을 끌어안고만 있는 걸 봤을 때일 수도 있지. 아라의 어리광을 본 적이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일 수도 있다. 계기는 수없이 많았고, 결론은 한가지였다. 내가 아니라 형이 살아있다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형이 서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우리 가족은 좀 더 평화로웠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다. 그럼 한 번도, 두 번도 전부 쉬웠다면. 그랬다면 세 번은 얼마나 쉬울까. 얼마나 쉽게 찾아와서 또 절망을 안겨주고 가는걸까.

연락을 해야 하는데. 늦는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전화를, 해야 하는데. 걱정하실 텐데. 더 이상, 걱정시키긴, 싫은데. 아빠도, 형도. 전부.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로 연락이 끊기는 날은 없었다. 항상 꼬박꼬박 보고했다. 싸우더라도, 어색하더라도, 모종의 이유로 서로를 보기 괴로울때라도. 엄마도, 아라도, 나도. 늦어요, 친구 집에서 자고 가요, 야근이란다. 연락의 끝은 언제나, ‘집에서 뵈어요’.

말로 꺼낸 적은 없다. 전부 자연스레 이어진 것들이다. 주변에서 경험한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흔적을 남기는데, 직접 경험한 것은 얼마나 짙은 흔적을 남길까.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있을까. 평생을 남아있을까. 죽어서도, 그리고 다음 생에서도 흔적들은 따라오는 걸까.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괜찮아야만 했다.

 

*

 

비는 오후 7시가 되어서야 그쳤다. 시간도 시간인지라 결국 하룻밤을 더 머무르게 됐다. 방학이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출석 문제로 꽤 고생했을 것이다. 비가 그침에 따라 전파도 터지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 나간 것은 태섭이었다. 대만은 당황해하다가 태섭의 뒤를 쫓았다. 야, 송태섭! 남겨진 북산 농구부는 서로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만 선배가 알아서 하겠죠? 음. 정대만이 한다.

야, 송태……섭……. 태섭을 부르던 대만의 말소리는 점차 작아지다 사라졌다. 태섭은 전화기를 들고 크게 심호흡하더니, 다이얼을 돌리려 했지만.

틱, 틱. 여상한 표정과는 다르게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다이얼을 헛돈다. 아, 제발. 이럴 때면 제 체질이, 긴장만 하면 속절없이 떨리는 손이 밉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틀어막는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시끄러운 빗소리가, 어머니의 다급한 발소리가, 머리 아플 정도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이, 작은오빠, 큰오빠는 언제 와? 작고 어렸던 아라의 칭얼거림이,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던 자신이 떠올라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

상념에서 빠져나온 것은 손이 텅 비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바닥에 시선을 올린다. 전화기를 뺏어 든 사람은 대만이었다.

“선배,”

“전화번호.”

“……네?”

“전화번호 부르라고.”

너는 다이얼도 제대로 못 돌리는 주제에 뭘 그리 미련하게 붙잡고 있냐. 타박하는 목소리에 깔린 것은 걱정이다. 멍하니 시선을 떨군 태섭은 눈을 감고 심호흡한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가만히 기다렸다. 뚜, 뚜,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태섭이 흘려보내는 번호의 나열을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다이얼이 돌아가고, 돌아오고. 몇 번을 반복하다 통화가 연결된다. 그리고, 신호음이 채 한 번도 가기 전에.

-송태섭?!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전화기를 떼어낸다. 귀가 얼얼했다. 당황한 나머지 눈만 깜박이고 있으면 절박한 표정의 태섭이 전화기를 낚아채듯 가져간다. 어, 야. 태섭아. 순식간에 전화기를 뺏겼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태섭의 표정을 보면 없던 말도 전부 목에 매여 나오지 않는다.

“아라, 송아라. 너 맞아?”

-내가 아니면 누군데?! 송태섭 너 지금 제정신이야? 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안 들어와?! 엄마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오빠는 항상, ……됐어, 엄마 바꿔줄게. 끊으면 죽을 줄 알아!

“미안, 해…….”

입을 꾹 다문 대만은 통화를 하는 태섭을 바라봤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진 주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대만은 그 주먹을 가만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잡아내 천천히 주먹을 펼쳐냈다. 태섭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전화에 집중하느라 태섭의 시선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네, 엄마. 연락이 늦어서, 죄송해요. 아뇨. 그냥 비가 와서…… 못 내려가고, 있는 거뿐이에요. 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멀쩡해요.”

손바닥에는 반달 모양 자국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그 자국들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 작게 움찔거린다. 웃으면 안 되겠지. 사실 딱히 웃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만지고 있으면, 어느새 통화가 끝난 건지 전화기를 내려놓더니.

“송태섭 너 왜 그래?!”

“아뇨,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려서…….”

큰 한숨과 함께 주저앉는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태섭에 대만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애가 또 어디가 안 좋은가 해서. 태섭은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렸다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 표정을 본 대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만은 가끔 이 작은 머리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이 작은 머리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길래, 그리고 또 얼마나 단단히 잠겨있길래. 그 어떤 편린도 안 비치고 사는 건지. 이리 선명한 선을 그어놓은 것도 모자라 그 위에 튼튼한 벽을 지어놨는지, 도통 모를 일이라.

“……괜찮냐?”

“네, 멀쩡해요.”

그 벽을 기어코 넘었을 때,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까 봐. 아무런 말 없이 훌쩍 떠나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될까봐, 무서웠다.

어딜 가든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지만.

태섭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이 쥐고있는 태섭의 손 또한 여전히 떨리고 있어서, 한숨을 삼킨 대만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선배? 의아함이 가득 담긴 물음이 오기도 전에 태섭을 껴안는다.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은 몸이 딱딱하다. 태섭아. 송태섭아. 너는 뭘 그리 숨기며 사냐……. 소리들이 흩어졌다. 대만은 천천히 태섭의 등을 쓸어줬다. 태섭은 대만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만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일정한 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가 선명했다. 태섭은 눈을 감고, 몸에 들어간 긴장을 풀어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결국엔 전부 괜찮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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