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봄은 오지도 않았는데

대만태섭

백업용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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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얼어붙은 숨이 흩어진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만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트를 좀 더 단단히 여몄다. 머리에, 어깨에, 간혹 콧잔등에. 눈이 하얗게 쌓여간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눈사람이 될 수 있을까? 허황된 상상을 해본다. 하얗게 변한 세상에 서 있는 1.8m의 눈사람 하나. 톡 건드리면 눈이 우수수 무너지며 대만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눈사람을 건드린 사람은 깜짝 놀라겠지. 어쩌면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져서 엉덩방아를 찧지 않을까? 그리고 화사하게 웃어줄지도 몰라. 왜 그렇게 있냐면서 타박할지도 모르겠어. 언젠가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눈사람을 건드린 누군가는 네가 되어 있었다. 잠깐 멈춰선 대만이 머리의 눈을 털어낸다. 살짝 녹은 눈이 머리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춥다. 작게 코를 훌쩍이고선 발걸음을 재촉한다. 늦으면 또 뭐라고 할 것이 분명하니까.

오늘은 북산 농구부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

 

가게의 문을 열었을 때 대만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후덥지근한 히터의 공기였다. 대만아, 여기야. 대만을 발견한 준호가 손을 높게 들어 대만을 불렀다. 구태여 부르지 않더라도 한 덩치 하는 놈들이 모여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준호는 항상 손을 들어 일행을 부르고는 했다. 어야, 오랜만이다 준호야. 목에 둘러맨 목도리를 풀어내며 대만은 대충 엉덩이를 들이밀어 앉았다. 옆에 있던 백호에게서 투정이 튀어나온다.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야? 궁시렁궁시렁, 궁시렁. 삐죽 튀어나온 백호의 입술을 쭉 잡아 늘였다. 시끄러워 임마. 그리고 툭 놓는다. 제 입가를 가린 백호가 불만 어린 눈빛을 보낸다. 반갑다고? 나도 반갑다 강백호. 그 눈빛을 무시하고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쉬운 놈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나야 뭐 언제나 똑같지. 치수 넌? 소연이도 잘 지내?”

“나도 별일은 없다. 소연이도 그렇고.”

그럼 다행이네. 웃으며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금세 나온 맥주잔 표면에는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짠해야지? 히죽이며 들어 올린 맥주잔에 준호와 치수가 어쩔 수 없다는 마냥 웃었다. 짠. 가볍게 부딪힌 유리잔들에 맥주가 흘러넘쳐 손을 적신다.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를 쭉 들이켜면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진다. 크으…… 죽인다. 아저씨 같네. 맞는 말인데, 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눈다. 예전에 있었던 일, 각자의 흑역사, 근황 혹은 미처 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딸랑, 청명한 종소리가 울린다.

“아, 선배. 깜박했는데 태섭이는 비행, 기, 시간…… 때문에……”

핸드폰을 보며 들어오던 달재와 대만의 눈이 마주쳤다. 오, 타이밍 레전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북산 농구부의 테이블에 싸한 정적이 깔렸다. 달재는 핸드폰을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다 문워크를 하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딸랑, 청명한 종소리가 다시 울린다. 테이블에 있던 대부분이 대만의 눈치를 본다. 그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전 3학년과,

“눗, 만만이 뭐야? 섭,”

백호뿐이었다. 어디선가 퍽, 하는 소리가 들렸던 거 같기도 하고. 치수에게 맞은 옆구리를 감싸 쥔 백호가 앓는 소리를 낸다. 치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맥주를 마셨다. 금세 부활한 백호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낸다. 고릴라, 갑자기 때리긴 왜 때려! 시끄러워. 가게다. 앉아 강백호. 눗! 그러고는 기어코 한 대를 더 맞았다. 머리 위에 커다란 혹을 단 백호가 입을 삐죽이고, 준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백호 덕분인지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다시 시끌벅적해진 테이블 속에서 대만은 차가운 맥주잔 표면을 쓸어내리다, 쭉 들이켰다. 옆에서 적당히 마시라는 타박이 들어왔으나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야, 오늘은 즐겨야만 하는 날이었으니까.

 

*

 

“조심해서 들어가.”

“너네도.”

모임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취한 사람은 택시를 태워 보내고, 멀쩡한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눈다. 대만은 나름 멀쩡한 편에 속했다. 알딸딸하긴 했지만 저기 저 찬 공기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치수처럼 취하지는 않았으니까. 치수는 유독 알코올을 받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인지 금방 취하고, 숙취도 심한 편이었다. 평소에는 적당히 조절해서 마실 터인데 오랜만의 모임에 신났었나 보다. 치수는 준호에게 맡기기로 한다. 치수를 부축하는 준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대만은 자신도 천천히 귀갓길에 올랐다.

여전히 눈이 내렸다.

흰 눈이, 펑펑, 온 세상을 흰색으로 뒤덮겠다는 것 마냥.

대만은 눈 속을 걷다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흐릿한 하늘에서 달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마저도 흘러가는 구름에 가려져 사라지기 일쑤였다. 가로등이 없었다면 주위는 온통 새까맣게 물들었겠지. 눈이 오는 것조차 몰랐을지도 몰라. 후, 옅게 숨을 뱉어낸다. 하얗게 얼어버린 숨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어쩌면 눈 속에 섞여 내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긴다. 집에 가서 보일러부터 켜야겠다. 그리고 샤워하고, 이불에 들어가…… 이어지던 생각은 집 앞에 서 있는 한 인영에 의해 뚝 끊겼다. 누구지?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있나.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어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면, 때마침 걷힌 구름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그 순간 고개를 돌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아, 선배.”

미친. 눈을 동그랗게 뜬 대만이 발걸음을 빨리해 태섭에게 다가가, 두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양 볼이 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차가웠다. 평소와 다르게 왁스를 바르지 않은 곱슬거리는 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남들보다 어두운 듯한 피부는 추위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꿈인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뇌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거부한다. 너…… 어물거리다 입을 꾹 다문다. 온갖 감정이 섞여 엉망인 표정을 본 태섭이 옅게 웃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러며 주먹으로 가볍게 가슴께를 툭 친다. 그 행동 한 번에도 대만은 화들짝 놀랐다. 이 인간 못 본 사이에 숙맥이 다 됐네. 아니, 그.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봐라. 못 들어온다던 놈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안 놀라……. 그러며 얼굴을 다정히 쓰다듬는다. 피부가 완전히 얼음장이잖아. 얼마나 나와 있었던 거야? 전화, 아니. 하다못해 문자라도 하지. 집 열쇠 있는 곳 알려줬을 텐데. 한 번 터진 말꼬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섭은 여전히 제 볼을 감싸 쥔 대만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 대만의 말이 뚝 끊긴다. 장난스레 웃은 태섭이 대만의 한쪽 손을 끌고 와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할 말은 그거뿐이에요?”

아. 그 물음에 대만은 작게 탄식을 내뱉는다.

자연스레 떠오른 기억이 오버랩된다. 때는 몇 년 전 겨울. 시간은 그렇게 늦지만은 않은 달이 뜬 밤. 장소는 대만의 집 앞에 있는 가로등 아래. 그때도 눈이 왔었던가? 그랬던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신발과 옷이 축축하게 젖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졸업식 날이던가. 아니, 졸업식보다는 조금 앞. 윈터컵이 끝났을 때. 태섭의 고교 마지막 경기였던 윈터컵은 4강에서 막을 내렸다. 아쉬운 결과라고는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코트에서 퇴장하는 선수들의 얼굴에 슬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태섭을 포함한 3학년들의 은퇴식. 대만은 준호와 치수에게 이끌려 참여했다. 안 가면 서운해할 거야. 그리고…… 준호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 준호를 붙잡고 캐물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인지 감이 좋지 않아서.

화려한 꽃다발을 잔뜩 껴안은 태섭은 환히 웃고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넘기던 머리가 그때만큼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별일이네. 평소에는 손만 대도 질색하더니. 대만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저 틈새에 낄 자신이 들지 않았다. 졸업생이라서 그런가. 꼭 경계선이 그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로 가만히 바라만 봤다. 준호와 치수 또한 그러고 있었다. 그래, 뭐. 졸업생보단 재학생들이 더 애틋할 테니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되고 나서야 그 무리에 끼어들 수 있었다. 아, 선배들! 그러며 활짝 웃는 모습은, 그때서야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 분명해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윈터컵 4강 축하해.”

화사하게 웃은 준호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태섭에게 건넸다. 우왓. 안 그래도 꽃에 파묻힐 지경이었던 태섭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라 너무 파묻힌 나머지 누가 꽃이고 누가 태섭인지 모를 상황이었다. 품 안 한가득한 꽃다발에 절절매는 태섭을 보며 대부분이 웃었다. 달재가 몇 개의 꽃다발을 대신 가져가 주고 나서야 태섭은 한숨을 돌리고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감사해요, 준호 선배.”

“하하. 뭘. 그리고 내가 아니라 우리 다 같이 준비한 거야.”

그 말에 후배들의 시선이 대만에게로 몰린다. 뭐, 왜, 뭐. 지레 찔려 움찔한 대만은 부러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일련의 행동을 보던 부원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대만 선배가…… 꽃다발? 진짜? 저 사람이? 치수 선배랑 준호 선배 때문에 강제로 참여한 거 아냐? 말이 수군거리는 거지, 사실상 다 들렸다. 대만은 그 소리에 참다못해 시끄러워 임마!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뭣 하러 꽃다발까지 사가냐며 툴툴거리는 자신을 꽃집으로 끌고 간 것은 준호와 치수였다. 그래도 내가 제일 열심히 골랐는데. 이런저런 추천까지 했는데. 꽃집 사장님한테 살갑게 굴며 할인도 받아냈는데! 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대만에 치수가 조용히 한마디를 얹었다.

“자업자득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은 없었다. 대만은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자연스레 입술이 삐죽거리며 튀어나왔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하냐……. 툴툴거리는 대만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태섭은 그리 말하더니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아무 말 없이 뒷목을 매만진다.

은퇴식이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졸업식 때 안 찍고 지금? 의문이 들었으나 딱히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뭐, 꼭 졸업식 때 찍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원래는 재학생끼리 찍을 예정이었지만 한나의 의견으로 인해 얼떨결에 졸업생까지 사진에 끼게 되었다. 지나가던 학생 한 명에게 부탁해서 카메라를 건네고 각자 자리를 잡는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두 번 정도 더 울리고 나서야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어디 보자, 잘 찍혔을지 모르겠네. 버튼을 조작해가며 사진을 확인했다. 조막만 한 카메라에 덩치 큰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꼬락서니는 꽤 웃기더랬다. 오, 백호야 너 눈 감았다. 눗?! 그럴 순 없어, 다시 찍어! 태웅아 사진을 찍는데 졸면 어떡해……. ……웃쓰. 대체 뭐가 웃쓰야 웃쓰는. 왁자지껄, 시끌벅적. 사진 하나로 이렇게까지 들뜨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면 재능이렷다. 좋아, 이제 사진 현상만 하면 되네. 현상에 보통 얼마나 걸리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태섭이 네가 가기 전까진 충분히 나올걸? 정 안 되면 편지하지 뭐. 달재와 태섭은 조용히 말을 나눈다. 그 대화를 들은 백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를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 중 한 명인 백호가 입을 다물자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백호는 태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태섭의 옷깃을 조심스레 잡았다.

“……안 가면 안 돼?”

“백호야.”

달재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태섭에 의해 제지당했다. 태섭은 제 옷깃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더니 어설피 웃었다. 지금 와서 무를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하지만……. 백호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기세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은 태섭이 백호를 끌어안았다.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백호는 태섭을 많이 좋아했다. 치수가 졸업한 이후 많이 의지했다. 백호와 태섭은, 닮은 부분이 있었고, 태섭은 친형이라고 된 것 마냥 백호를 잘 챙겨줬으니까. 자신에게 주는 패스가 좋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애정 어린 눈빛이, 그리고,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그 다정한 말들이 좋았다. 그래서 헤어지기 싫었다. 붙잡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태섭이 한 고민을 알기 때문이다. 유학 팜플렛을 보며 짓던 표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아가고자 하는 이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니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아니까. 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라고 등을 떠밀고, 이 천재님도 금방 따라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며 나름의 격려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결정이 났다. 미루고 싶어도 못 미루고, 무르고 싶어도 못 무른다. 그래서 작은 진심 한 조각을 꺼내 보였다. 이 정도는 용서해달라는 어리광이기도 했고, 계속 같이 농구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외면하고 있던 이별을 겨우 마주하고 나면, 남는 것은 붙잡고 싶다는 미련이었다. 가지 마. 나랑 같이 농구 해. 북산에 남아서, 그리고, 이 천재님께 패스도 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칭찬도 해주고, 그렇게 나랑 같이 농구 하자.

뚝, 뚝.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고. 작게 탄식을 내뱉은 태섭이 소매를 꾹 잡아내려 눈물을 닦아준다. 울긴 왜 우냐. 아이고, 아이고. 불어 터진 만두 되겠다. 그 언행조차 너무 다정해서 백호는 그냥 울었다. 펑펑 울었다. 가지 마, 이 천재님을 두고 어딜 간다는 거야, 나랑 같이 농구 하겠다며, 그러겠다며어……. 훌쩍, 킁. 금세 농구부원들이 모여들어 백호를 어르고 달랜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이고, 괜찮다며 달래고. 백호는 농구부의 최장신인 주제에 그 누구보다 어린애 같았다. 태섭과는 다르게. 치수와 준호, 대만 또한 얼떨결에 그 무리 속에 섞여 백호를 달래고 있었다. 야, 야. 울기는 왜 우냐. 적지 않게 당황한 대만은 엉엉 우는 백호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애가 멀리 가면 얼마나 멀리 간다고.”

뭐 물론. 다른 지역으로 가면 많이는 못 보겠다만…….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던 대만은 꽂히는 시선에 말을 멈췄다. 뭐야, 다들 왜 그렇게……, 어. 그쳤다. 어느새 눈물은 뚝 그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백호가 자신과 태섭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왜. 뭐. 나 뭐 못 할 말 했니? 당황한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대만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저들끼리 시선을 몇 번 교환하다가, 정적을 깨어낸 것은 백호였다.

“만, 크흠, 만만 군. 섭섭이가 말 안 했어?”

“엉? 뭐를?”

“섭섭이,”

“백호야.”

태섭이 백호를 부르며 제지한다. 킁, 코를 훌쩍인 백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진짜 뭔데. 너네 나 따돌리냐? 어이없다는 듯한 대만의 말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대만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어, 그래……. 그 손길에 대만은 멍하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들어가십쇼. 웃쓰. 어어, 너네도 잘 가고. 눈길 조심해라. 백호 너는 눈 안 붓게 조심하고. 눗…….

농구부는 새하얀 달이 뜨는 밤이 되고 나서야 해산했다. 거의 매일같이 보는 사이면서도 할 말이 뭐 그리 많은지. 조잘거리는 말소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사실 그중 절반 정도는 백호를 놀리는 데 사용한 시간 같기도 했고. 대만과 태섭은 돌아가는 길이 같아서, 학교에 다닐 적엔 항상 같이 하교했었다. 노닥거리면서 걷던 길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둘 다 조용했다. 하지만 이 적막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후, 내뱉어낸 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대만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눈이 내렸다. 새하얀 달은 동그랬고,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반짝거렸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졌다. 대만은 멈추어 섰는데 태섭은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대만이 뒤처진 것을 눈치챘는지 태섭이 고개를 돌린다. 선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의문이 가득하다. 태섭은 자신을 부른 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온 세상이 고요하다. 상념에 빠질 정도로.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바쁠 거다. 대만이 그랬으니까. 어쩌면 이 상태로 연락이 끊길 수도 있겠다. 태섭과의 연락이, 북산 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뚝 끊긴다면. 그래서 그때 말할 걸 후회라도 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건 싫어서. 정대만은 다시는 후회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 지 오래였다.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금속 물체를 꽉 쥐어냈다. 치수의 연락을 받았을 때 혹시 몰라 챙겨온 것이었다. 이렇게 멋 없게 고백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될 지 몰랐다. 그래서 태섭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

“태섭아.”

“저 미국 가요.”

“뭐?”

누가 도내 스피드 넘버원 아니랄까봐, 선수를 먼저 친 것은 태섭이었다. 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대만은 태섭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눈이 내리던 밤, 하얗게 빛을 반사하던 달. 태섭아. 흩어지던 숨이, 말들이.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백호의 말.

만만 군, 섭섭이가 말 안 했어?

아, 혹시 나만 몰랐었나? 모두가 알았는데, 나만 몰랐었던 거야? 태섭아. 뭐라도 말을 좀 해봐라.

“그러니까, 선배.”

숨이 얼어붙는다. 아니, 나도 얼어붙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이었으니까. 그 날따라 눈이 내릴 만큼 유독 추웠으니까. 그래서 얼어붙었을 거다.

“말하지 마요.”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네 말에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 너는 무슨 대답을 원하고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때 내 말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일까. 혹시 정답 혹은 오답만이 있는 문제였다면, 둘 중 어느 것인가. 아무리 자문해도 답은 너만 알고 있을 거다. 점수도, 정답도, 오답도 전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한 말에 후회하냐고 생각하면, 그럴 리가 있겠냐. 그 말은,

“기다릴 거야.”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이었다.

“…….”

“몇 년이든, 몇십년이든.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기다릴 거라고.”

“선배.”

“그러니까, 태섭아. 잊지 마.”

“…….”

“나를, 이 정대만을. 그리고 내 다짐을. 잊지 마.”

빈말로도 가지 말라고는 못 했다. 미국에 가는 것은 축하해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애써 결심한 다짐을 무너트리고 싶진 않으니까.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넌 잡혀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싶은 건 아니었다. 네 앞을 가로막는 건 그때 한 번으로 족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데도. 잊혀지고 싶지 않아서. 내가 너의 미련이 되었으면 해서. 이기적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내가 너의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아주 조금 붙잡았다. 네가 이 정도는 용서해주기를 바라며.

“기다릴 테니까…….”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대만과 태섭이 몇 년 만에 재회를 한 지금으로.

대만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태섭은 눈썹을 삐딱하게 세우며, 선배. 하고 다시 불렀다. 그 부름에 화들짝 놀란 대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싶었다.

“기억났어요?”

“어, 어어……. 기억났지,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어딘가 넋이 빠진 듯한 모양이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 나 오늘 제대로 된 고백 들을 수 있는 거 맞아? 삐죽 올라간 눈썹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대만이 이 모양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정신이 빠진 듯한 대만을 보던 태섭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뭐, 좋아요. 그래서. 할 말은?”

“할 말……. 그러니까, 아, 잠깐만. 야, 야. 너. 너 잠시만 기다려. 5분, 아니 1분이면 되니까! 어디 가면 안 된다!”

“네? 잠시만요 선배, 어딜 가는!”

제대로 된 대답도 듣지 않고 통보식으로 외친 대만이 우당탕 달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임? 덩그러니 남겨진 태섭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고백 타이밍 아니었어 지금?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잖아. 진짜 뭔데?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하고 들어가던가.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들어가면 다야? 다냐고. 아오. 사라진 내 설렘 책임져.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화를 다스리려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다 보면 들어갔을 때와 같이 우당탕 큰소리를 내며 대만이 나왔다. 허이고, 민원신고 들어오겠네.

“야, 헉, 흐억, 이, 거, 하, 미이, 친, 손, 하으, 줘 봐…….”

뛰어갔다 온 건지 숨이 제법 거칠었다. 얼굴에서는 땀도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대만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섭은 짝짝이 눈썹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분위기 이 상황에서 자신을 버리고 뛰어갔다 온 거니 일단 뭐라도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내밀어진 손을 덥썩 붙잡은 대만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체온으로 달궈져 따뜻했다. 시선을 내려 손바닥 위를 내려다보면,

엥.

단추?

“이게 뭐예요?”

“두, 번째, 단, 추.”

“……누구의?”

“누구, 겠냐? 내 거지…….”

태섭은 멍한 표정으로 제 손 위의 단추를 바라봤다. 익숙한 디자인의 익숙한 단추. 지금은 바뀌어 옛 상징이 된 북산 고교 교복에 붙어있던 단추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졸업식 때…….

페이드 아웃, 그리고 페이드 인. 때는 대만의 졸업식 날. 시간은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느즈막한 오후. 장소는, 어디였더라. 아, 그래. 아무도 없던 체육관의 코트 위.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농구부원의 머릿수를 세고 있으면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대만 선배는? 어어, 졸업식이 끝난 이후로 딱히 못 본 거 같은데……. 그래? 하여간. 손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발걸음을 옮긴다. 반에는, 없고. 운동장에는, 없었고. 옥상에도, 뒤뜰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대만을 찾아낸 건 체육관이었다. 통통, 농구공이 튀는 소리. 설마. 에이. 아무리 그 사람이 농구에 미쳤다고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어내고 나서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철썩. 공이 그물을 스치는 소리. 몇 번을 봐도 깨끗한 자세다. 가볍게 문을 두어번 두드려 소리를 내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졸업식 날까지 농구 연습이라니, 누가 보면 농구랑 연애하는 줄 알겠어요.”

“아서라, 아직 짝사랑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대만에 태섭은 혀를 내둘렀다. 저러네 진짜. 그러며 주머니 속에 두 손을 푹 찔러넣고 대만의 곁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대만의 모습은 꽤 웃겼다. 어디에서 쥐어뜯긴 것 마냥 너덜너덜했기 때문이다.

“우와, 예상은 했지만 굉장하네요.”

앞쪽에 달린 단추는 물론 소매의 단추까지 죄다 뜯겨있었다. 별 생각 없이 제 가쿠란을 힐끗 본 대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쿠란까지 뺏길 뻔한 거 겨우 지켜냈어. 베에, 대만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공을 하나 가져와 튀긴다. 통, 통, 통. 그 소리를 가만히 듣던 태섭이 림을 바라봤다. 단추가 다 뜯겼다는 건 이미 예상했으니 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신경 쓰였던 건.

“두 번째 단추는요? 누구 줬어요?”

“따로 주인이 있어.”

주인이 있다는 말만 하는 대만은 한 번 더 슛, 깔끔하게 림을 통과하는 공.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며 태섭은 가만히 생각했다. 주인이 있다고만 했지, 줬다고는 안 하네.

다시 되돌아와서.

멍하니 단추를 내려다본다. 허 참. 허 참 내. 주인이 있다더니. 줬다고는 안 하더니. 허 참 내!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애를 써야 했다. 자기 졸업식 때부터 고이 간직해온 단추의 주인이, 허 참. 나라고. 그 누구도 아닌 송태섭이라고. 허 참 내!!!! 누가 이러면 좋아할 줄 알고!!!!!!

존나 좋았다! 미국에 가서도 몇백 번 생각하던 단추의 주인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 미국 NBA 경기에서 첫 우승을 따냈을 때보다도 더 좋았다. 아니, 역시 이건 너무 과장이다. 어쨌든 그만큼 좋았다는 소리다. 눈치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러낸다. 그리고 대만을 바라봤다. 뚝뚝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 대만은 겨우 호흡을 진정한 듯싶었다. 그리고는 태섭과 눈이 마주쳐서, 움찔. 뭐 잘못 한 거라도 있나.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으면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어물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태섭아, 그러니까. ……나는 솔직히 내가 미친 줄 알았다. 인간적으로 너랑 내 사이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냐. 근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을 깨닫고 나면 내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긴 해도 역시 네가 좋아서…… 아니, 이게 다 뭔 소용이람.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데.”

구구절절 늘여놓아지던 말이 뚝 끊겼다. 태섭은 제 손안의 단추를 매만지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대만은 말을 고르는 듯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건지, 아니면 할 말을 전부 까먹은 건지.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물기를 반복하고, 태섭의 손끝이 추위로 발갛게 물들었을 때 즈음. 대만은 그제서야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태섭아. 너 말이다. ……여전히 날 사랑하냐?”

깜박, 깜박. 태섭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대만과 눈을 마주쳤다. 올리브 섞인 갈색 눈이 자신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끝내 완전히 숨기지 못 한 불안 한 조각이 있었다.

평소에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살다가도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다. 도망치는 이유는, 그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버림 받을까 봐 두려워 먼저 버려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아닌 자신이 먼저 버렸다는 헛된 사실을 위안 삼으며. 대만에게는 농구가 그랬고 태섭이 그랬다. 무릎 부상으로 인해 농구를 더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방황을 택했고, 태섭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워 제 감정 한 조각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세뇌를 건다.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싫어해. 너무 싫어서 죽을 거 같아! 그렇게 해야만 살 거 같았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그 사실도 감정도 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섭은 그런 대만의 성정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지금도 봐라.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상대방의 애정을 먼저 확인하고자 하지 않는가. 이렇게보면 저보다 더 한 겁쟁이인 듯 싶었다. 태섭은 눈을 깜박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손안에서 도르륵 굴리던 단추를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대만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린다. 맥아리 없이 끌려오는 큰 덩치가 제법 웃겼다. 잔뜩 커진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쪽.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진다.

“단 한 순간도 형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서 사랑한다고 말해요, 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는다.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인다. 대만은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인다. 깜박, 깜박, 깜박……. 그러더니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댄다. 어이쿠. 갑작스레 실린 무게에 휘청이다가도 금세 중심을 잡았다. 선배? 그 부름에 대만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태섭의 허리에 팔을 둘러 꽉 껴안았다. 우왁, 잠, 선배?? 어정쩡한 자세로 대만에게 안긴 태섭은 잔뜩 당황스러운 말투였다. 아랑곳않은 대만은 태섭의 어깨에 푹 기댄 채로 웅얼거렸다.

“사랑해…….”

태섭은 웃음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고백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고백받는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는데!

“네, 저도요.”

“정말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너를 가장 사랑해…….”

“우와, 무겁네요.”

“이 정도는 견뎌…….”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울어요???”

“안 울어…….”

“아니, 안 울긴 뭘 울어요? 두 볼이 축축한데?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냐??”

웃음을 꾹 참았다. 여기서 웃음을 터트리면 대만이 잔뜩 삐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배가 백호도 아니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매를 끌어 내려 눈물을 꾹꾹 닦아줬다. 시끄러워.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은 눈치도 없이 그칠 줄을 몰랐다. 아, 진짜 미치겠네. 태섭은 결국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생각도 못 했다. 킁. 코를 훌쩍인 대만이 다시 태섭을 꽉 끌어안으며 어깨에 기댄다. 태섭은 웃으며 그런 대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미국에 간 사이에 왜 울보가 된 거예요? 울보 아니거든, 시끄러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맑은 웃음소리가 울린다. 킁, 한 번 더 코를 훌쩍인 대만이 고개를 들어 태섭과 이마를 맞대었다.

“어서 와라, 송태섭”

“다녀왔어요, 형.”

하얗게 얼어붙은 숨이 흩어지고,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정대만과 송태섭은 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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