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타입 샘플
수위 X, GL, 로판풍, 자캐커플 로그
성마른 겨울에 쫓기듯 가시지 않는 갈증이었다. 그 여자를 보는 것은.
아마벨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벨라는 여전히 우아하게 웃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상석에 쏠려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검은 머리카락, 고요하게 단단한 검은 눈. 이따금 다른 색으로 비치기도 했으나 색소 엷은 것들이 지천에 깔린 이 땅에서 그녀는 온전히 검은 것으로 보였다. 물론 제 것에 비하면 다갈색에 가깝게 느껴지겠으나…….
어찌되었건 저것은 마치 벨라 아마벨과 나란히 놓이기 좋게 깎은 듯한 파편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비죽이 늘어뜨린 절단면의 예기가 퍽 서늘하다. 사절로 왔다던 이국의 왕녀는 이날까지 딱 다섯 번 얼굴을 들이민 것으로 아마벨의 적녀를 홀린 것이다. 그 또한 재주라면 대단한 재주였다. 벨라의 발치에 옷자락 한번 드리워 보려고, 그 값비싼 레이스가 구둣발에 즈려밟힐진저 말 한 번 섞어본다면 다시 없을 영광과 기회로 여겨 어정거리는 머저리가 궁성을 다섯 번 휘감고도 족히 남을 텐데.
저 여자는 매양 뻣뻣한 자세로 불요한 시선 따위는 한 줌도 주지 아니하고 제 앞에서 말 붙이는 것들을 순서대로, 예법대로, 쓸모대로 분별하여 흘리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제가 거느린 것들이 곧잘 받아 올바로 처리한다는 사실에 한 점 의심 없는 듯이.
이 비열한 땅에서 환대받을 만큼의 국력을 지녔다면 응당 유일한 사절이자 왕의 적장녀인 저것에게 합당한 정보를 주지 않았을 리도 없건만, 머리가 있다면 저것들의 면상에 침을 뱉더라도 자신과 함께 떠든다면 아무도 불쾌를 표하지 못할 거란 걸 충분히 알 텐데도 그러질 않았다.
제게 예를 표하고 말 붙이는 것들을 정중히 대하는 것이야말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것은 일국의 왕녀가 가질 자세라기보다는 차라리 청빈한 수사의 자세에 가까웠다.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다. 익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예법과 도리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과정에서 제 사감은 잘라내야 할 어떤 군더더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이.
짙은 감람석 귀걸이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반짝였다. 왕가의 딸로서 아쉽지 않은 치장이었으나 저라면 저 창백한 귓불이 무게로 벌겋게 늘어질 만큼 휘황히 금을 둘러 주었을 것이다. 무거워 버티지 못하게, 감히 뛰거나 걸을 때마다 피라도 나지 않을까 겁내기를 바라면서.
“소후작?”
깊게 가라앉던 이성을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끌어올리는 부름이 있었다. 벨라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날 선 형형한 눈깔을 비끄러매듯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예, 비시르 경.”
그래, 나는 소후작이지. 우리의 폐하께서 나를 언제나 작위적인 친애와 약간의 두려움을 담아 대하고, 그 어떤 나라에서도 홀대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보장된 아마벨의 후계자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음대 후작에 불과한, 아무리 형식상의 그것이라고는 해도 저는 왕녀가 먼저 말을 붙이지 않으면 말을 걸 수도 없었고, 그녀를 가두어 음습한 저택의 구석진 골방에 가두어 시간감각을 망가뜨릴 수도 없었다. 가진 것이 많으므로 동시에 관습과 체제에 가장 강하게 속박되고, 그 까닭에 저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저것을 가지고 싶은지부터가 불분명하다는게 속이 뒤틀렸다.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벨라 아마벨은 강소윤이라는 이국의 왕녀에게 모종의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가져 본 적 없는 형태의 욕구였으므로 그 사실에 대한 상념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올바른 선택, 바른 결정 따위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 손으로 모두 어그러뜨릴 가능성이 있다. 그것만은 안 된다. 언제, 무엇이 제게 자극으로 다가올지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이 같잖은 세계에서 이렇게나 강렬한 자극을 주는 존재를 섣부르게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게 식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산산이 부서져도 성한 가지들을 모아 삽목하면 오히려 늘어나지 않나. 키우는 데에는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든다면 오히려 좋다. 그동안 충분히 원하는 방향, 내키는 색감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꺾어다 빗을 만들건, 활을 만들건, 창틀이나 액자를 만들어도 아무도, 하물며 그것조차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고요하고 아늑하기 한량없는 침묵.
여자는 달포 전 띄웠던 상선에 대한 이야기를 서툴게 에두르며 눈치 주듯 말 붙이는 놈과 타성적인 대화를 나누며 왕녀의 몸뚱이를 훑었다. 뼈대는 얇고, 깡마르지는 않았으나 체력이 좋기는 그른 몸이었다. 침실에 엎어뜨려 놓고 두어시간만 붙잡아 갈궈도 곧 퍼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서러워할 것이 빤했다.
벨라 아마벨이 잠깐 샴페인으로 입을 축였다. 점막을 두들기듯 터지는 탄산의 감촉을 혀 끝으로 뭉개며 고심했다. 동방의 양식보다도 우리네 궁륭이 어울렸다. 높다랗고 둥근, 어찌 사람이 깎아올렸는지 의아스러운 궁에 가두리라. 거대한 새장처럼 근사할 테니.
평생을 붙들어 꺾고 메쳐서 짓밟아 뭉개는 것밖에 하지 않던 손이라 좀 어색하겠지만 그녀는 제가 금세 적응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벨라 아마벨이 못할 일이 무엇인가? 역모 외엔 못 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충분한 필요만 주어진다면 제 부모도 모살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왕녀 또한 죽이고 싶은 대상이었다면, 혹여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죽어버리는 꼴이 보고 싶은 대상이었다면 이처럼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만리타향에서 객사하는 꼴, 어디다 밀어 죽일지, 빠뜨려 죽일지, 찔러 죽일지, 떨어뜨려 죽일지, 혹은 먹여서 죽일지나 고르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외교적인 분쟁이야 생기겠지만 모든 것은 수면 아래의 야합으로 지워질 것이다. 벨라는 왕녀의 모국이 얼마나 여성에게 배타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손아래 형제가 있다고 하니, 적절한 보상만 쥐여준다면 얼씨구나 왕녀를 애도하며 공석이 된 후계자감에 왕자를 밀어 넣으리라.
아.
여자는 찰나 번뜩인 생각을 부드럽게 되새겼다.
저 계집, 그래서 열패감이 얼마나 뼛골에 사무쳤을까? 저리 성실하게 교본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맏딸로서의 책임에도 충실했을 것. 그러나 자신을 쓱 밀어내고 훨씬 못해 보이는 동생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 같은 것들 앞에서, 혹은 자신의 성과를 언제나 까내리듯 다음 왕위 계승자로 거론되는 동생의 이름을 들으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충분한 수준이라면 그 점을 긁어 너를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빌미로 접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세 따위를, 혹은 감히 푸른 피 따위가 지존의 앞날에 발 걸어 넣느냐고 일갈하면 동생 쪽을 긁으면 될 것이다. 왕위 싸움 같은 큰 일을 구태여 벌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끝끝내 저를 두려워하듯, 본인이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한 경계심을 두르고 고갯짓 한 번 주지 않는 여자를 제 침대에 처박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해봄직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피와 전쟁과 모략은 제게 있어 애용하는 향수와도 같은 일회품이니.
어느샌가 생각에 잠긴 벨라를 두고 사람들이 둥글게 등졌다. 저럴 때의 그녀에게 괜히 밉보여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살아있는 장막이 되어 눈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가 어느샌가 잔을 쥐어 부러뜨렸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알콜 특유의 싸한 향기로 어그러진 단내가 났다. 날카롭게 비산한 파편을 발끝으로 즈려밟으며 호흡을 골랐다. 단지 내 옆으로 끌어다 놓고 외면하지 못하게 할 생각을 한것만으로도 벌써 숨이 가쁘다.
왕녀, 그대는 정말이지 불운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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