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흉몽

생환 당보 X 생환 청명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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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마대전이후 둘은 혼인해서 잘 사는 중


당보는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확인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늘 잠들던 침소임에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굳어있던 손, 발을 접었다 피며 생생한 감각을 느꼈다. 그럼에도 머릿속이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이 현실인걸 알지만 눈을 감으면 깨어버릴 꿈만 같아서, 당보는 멍하니 제 옆의 사람을 내려보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과 적막을 채우는 숨소리에도 당보는 이것마저 환상일까 하는 생각에 움직일 수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머릿속을 채우는 쇠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떠나가질 않고 눈을 뜨면 전장 한복판에 서 있을 것 같았다. 주인 모를 피로 뒤덮인 몸에 수많은 상처가 쌓이고 그걸 지켜만 봐야 했던 그 순간으로.

"왜."

잠기운이 베인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당보의 생각을 잘라냈다. 금방 잠들 줄 알았건만, 일각이 지나도 보고만 있길래 별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그냥요."

"그러냐."

낮고 먹먹한 목소리에 청명은 눈을 떠 어두운 녹빛을 마주했다. 반짝이던 생기는 어디 가고 짙은 후회가 묻어나는 눈빛에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대로 둘 순 없어서 팔을 뻗으면 당보는 순순히 청명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제가 정말 살아있는 건지. 이 순간이 현실은 맞는지 모르겠소."

당보는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새까만 청명의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나누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나는 악착같이 따라붙고

형님은 나아가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버릴까 봐."

"꿈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이 꿈일지도 모르죠. 약에 취해서 제가 바라던 평화로운 어느 날을 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잠 오게 몸이라도 섞어주랴."

"위로도 참 깜찍하게 하시네."

"싫음 말고."

"싫은 건 아닌데요..."

당보는 말을 흐리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머릴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그만두고 얌전하길래 다시 자려나 싶어 청명은 등을 두드려주었고,

"잠이 안 옵니다."

하는 말에 얼굴 위로 손을 덮어주었다.

"눈 감아."

"그냥 말이나 해주시면 안됩니까."

"뭘."

"정말 아무거나요. 형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청명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우는 아이 달랠 말재주는 없고, 한밤중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한 부탁은 아닐 테니.

"몇 달 전에... 시전에서 보기 드문 화려한 비단을 보았다. 붉은 색에 화려한 자수가 있는 것이 꼭 혼례복에 쓰일 것 같더니 그 용도가 맞다고 하더군. 너나 나나 이 나이 먹고 혼례를 치르기엔 거추장스럽고, 낯간지러운 거 잘 안다. 하지만 같이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시점에, 누구 하나 죽으면 우리가 나눴던 운우지정은 사라지곤 남이 된다는 게 싫어서. 그 길로 비녀 하나 쥐고 사천으로 달려갔지.

너한테 하려던 말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세가 놈이 놀라자빠질 만한 청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기별 없이 온 내가 뭐라고 한달음에 달려와 웃는 널 보니까 머릿속이 텅 비어서 남은 건 연모한다는 말 뿐이더라. 그거 몇 마디에 좋아서 안겨드는 너를 내 것이라 잡고자 줄 것이 비녀뿐이라 초라한 건 알지만 그래도 용기 내 준비한 말을 겨우 꺼냈고.."

청명은 당보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들을 넘겨 당보와 눈을 마주 보았다. 나쁘지 않은 주제였는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제 말을 듣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일각도 안되었을 공백에서 내가 이렇게 극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걸 처음 알았다. 붉어진 두 볼에서는 희망을 보았고 마주친 눈을 피하는 모습에서 한없이 떨어지는 절망을 느꼈어. 그리고 그리하겠다 하는 너의 대답에 나는 내가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부부가 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혼례를 준비하는 내내 정신을 못 차렸지. 지금도 봐라. 이 나이 먹고 위로 하나 할 줄 몰라서 부러 부끄러운 얘길 꺼내고 네 웃음에 안심하는 꼴을..

우린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 끝나지 않은 생의 이유를 곱씹어보고 수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그럼에도 네 웃는 얼굴을 보면 지나온 시간들이 꽤 괜찮았다는 생각도 들어. 아직도 우리에게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동시에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과거를 보며 후회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의 미래를 보길 바래."

"그 순간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정말 망설였다면 눈먼 검에 몸을 들이밀지 않았겠죠. 그저 눈을 감기 직전까지 보인 형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서 제가 꼭 형님의 흉몽이 된 것만 같습니다. 떨쳐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온 김에 기력도 쏙 빼먹고?"

청명의 농에 당보의 진지했던 얼굴은 금세 헤실거리는 미소로 바뀌었다.

"제 것도 빼가셨으니 비긴 거로 합시다."

"무슨 흉몽이 이익을 셈하고 그러냐."

"그리도 현실 같으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고,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고."

또다시 입을 다물고 상념에 잠겨버릴 당보의 모습에 청명은 말랑한 뺨을 콕 찔러 시선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무슨 꿈인데."

"말하기 싫습니다."

"그럼 나한테 팔아라. 비싼 값에 사주마."

당보는 얼마에 사주시려고? 하며 장난스레 물으려다 진지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제 기분을 환기하려는 의도였다면 어울려주었겠으나 지금의 청명은 정말 제 꿈을 사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흉몽을 사 간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닌데, 제 기분 좀 풀어준다고 하는 행동이 자신은 던져두고 저를 우선시하는지라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됐습니다. 꿈 팔아서 전낭채울 정도로 빈곤하진 않소."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네."

"형님께 손해인 건 기회로 세지도 않습니다."

"내가 왜 손해야. 간만에 놀릴 거리도 얻고 점수도 따는데."

"얻는 거에 비해 잃는 것이 크니 손해라 하지요. 당장 전낭이 비는 것도 손해고. 쓸데없이 걱정할 시간도 손해고. 정말 불행이 닥친다면 그것 또한 손해가 될 텐데 계산도 빠른 양반이 왜 이러는지 도통 모르겠네."

"네가 꿈 때문에 우울해할 시간도 줄어들고, 혼자 이게 꿈이니 현실이니 하며 궁상떨 시간도 사라지고. 꿈을 산 내 걱정에 종일 귀엽게 굴 텐데 누가 봐도 이득이지."

"그게 어떻게 형님이득이 됩니까. 제 이득이지."

"네가 내 것이고, 내가 네 것이니, 네 이득이 내 이득이고 그런 거지."

제 말에 뭐라도 말할 듯 벙긋대는 당보를 보다, 청명은 벌어진 틈으로 냉큼 손가락을 넣었다. 제 손가락을 오물거리다 손이 혀라도 된 것처럼 움직여주면, 눈은 째려보면서도 입은 외설스럽게 소릴 흘리니 웃음이 나왔다.

"...이러려고 혼인했소?"

"그걸 이제 알았냐?"

"아이고. 내 상공이 순진한 도사가 아니라 약삭빠른 말코였다니."

"나도 약삭빠른 세가 놈인 줄 알고 혼인한 거니까 비긴 거로 해."

"제가 뭐 어때서요!"

"넌... 좀 바보 같다. 가끔보면 80이 아니라 정말 이립의 아해같기도하고."

당보는 코웃음 치며 청명의 위로 올라 청명의 이마에서부터 눈, 입술, 목, 드러난 쇄골에 쪽 쪽 입을 맞췄다.

"형님은 안 그런 줄 아시오?"

장난스런 눈빛과 도발하는 투에 이젠 괜찮은가 싶어 맞받아치면

"너보단 낫겠지. 꿈이랑 현실도 구분 못해서 자는 사람 깨우기나 하고."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무룩해져서는 제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깨운 적 없습니다. 혼자 일어나셔 놓고는."

"그럼 네가 우는데 상공이 되가지고 그걸 보고만 있냐."

"안 울었소."

"그런 걸로 하던가."

청명은 방금의 대화를 곱씹으며 제 말 어디에 다시 축 처져 버린 건지를 생각했다.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이 상황에서, 이번엔 무슨 말이 널 웃게 만들 수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귀에 들린 말은 예상치 못한 단어들의 조합이라 한발짝 늦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제가 죽었습니다."

"....어어.."

"검에 찔려서요. 그날처럼 살아남은 게 아니라 정말 죽었습니다."

"..."

"처음엔 찔린 게 복부라 지혈하고, 버틸 시간을 계산해서 저는 무리더라도 형님만은 살리려고 수를 썼는데 남은 것이 한놈이 아니었소. 제게 검을 박아넣은 놈을 죽이고 꼭 못 볼걸 본 사람처럼 달려오는 형님을 반겼지만. 옆으로 날아오는 검이 다가오는 형님의 팔에 그대로 박힐 것 같더이다. 형님은 검수이니 팔 한짝 날아가면 균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건 앞으로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될게 분명하지 않소?

그래서 그 앞을 막아서는 건 잘했는데 제 몸이 뚫리는 건 막지 못했습니다. 다급해 보이던 표정이 무너져내려 그 눈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게 절망뿐이라 저는 같잖은 위로하나 못하고 그대로 죽었죠. 검이 심장에 박혀 흘러내리는 피에 하얀 도복이 물들어가고 힘없이 늘어지는 시체를 인간으로 대하겠다고 엉성하게 안은 꼴 하며 제대로 된 말도 못하고 숨만 내쉬는 형님을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죽었다는걸 인지하고도 한참 동안이나요...

이 다음은 형님도 아는 얘깁니다. 꿈에 취해 잘 자는 사람 깨워 청승이나 떨고. 한밤중에 고집부려 이야기나 듣고."

"알긴 아는구나."

"....네. 알면서도 이리 굴죠."

당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저 혼자만 겪은 전쟁이 아니며 제가 생각하는 이상의 고통을 겪고 감정을 깎아낸 사람에게 이런 말을 꺼내도 되는 건지. 이제야 행복을 누리는 당신에게 굳이 그때를 떠올리게 만들어 지옥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건 곧 고치겠소. 우리 둘에게 좋은 것도 아니고, 형님 말대로 80살 먹은 노인네가 할 행동도 아니니까."

"그냥 둬. 뭘 또 귀찮게 그래"

청명의 말투로는 방금의 말이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 당보는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려다 곧장 고개를 숙였다. 설령 저 말이 거짓이더라도 우울해하는 저를 대하는 형님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바뀌는 건 저 여야 했다.

"이제 와서 오냐오냐 키울 것 아니면 고쳐야죠. 밤마다 이리 굴면 형님 성격에 다정한 말이 나오겠습니까? 주먹이나 안 들면 다행이지."

"옆에서 잘 자던 놈이 갑자기 우는데 잘도 때리겠다. 하물며 너인데."

"저보단 아해들에게 더 다정하시잖소."

"우는 사람 두고 짜증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똑같다."

"메번 달래주려면 귀찮으실 텐데요."

"매번이래 봤자 앞으로 한 두 번 이러고 말겠지. 그 정도는 괜찮다."

"...제가 잘 때마다 그러면요?"

"오늘처럼 위로해주마. 잠이 안 오면 같이 밤을 새우고, 온기가 필요하면 따뜻하게 안아줄게."

당보는 두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고, 이내 배시시 웃으며 양 팔로 청명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정말 도사형님 맞소? 내가 아는 형님은 이리 다정한 분이 아니신데."

장난스러운 말투와 거슬리는 말에도 청명은 때리지도, 툴툴대지도 않고 당보를 마주 안아주었다. 흉몽도 불안도 전부 사라진 평안한 밤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등을 토닥여주면 당보는 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네가 좋으니까 그러지. 딴 놈이면 벌써 걷어찼다."

제 등을 두드리는 일정한 박자에 밀려오는 잠기운을 맞이하며 당보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잠투정 좀 했다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으니 내일은 일어나면 살뜰히 상공 노릇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러니 아해처럼 구는걸 멈출 수가 있나.."

당보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중얼거림과 함께 곧 잠에 들었다. 뒤이어 뱉어진 청명의 말은 듣지 못한채로 말이다.

"....그것도 그냥 둬. 귀여워서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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