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上
배우 당보 X 검도 선수 청명 | 현대 AU
*장거리 비밀 연애 중 일어난 일
*청명은 36, 당보는 30
*시차는 뉴욕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기사 보셨어요?
[여배우 ○○, 전 국가대표 청명과 단둘이 카페에... ]
기사 찐임? 그래서 미국 간거야?
[베일에 싸인 세리머니의 주인, 드디어 밝혀져.. ]
이거 삼촌 얘기 아니에요?
[계속되는 럽스타그램 의혹.. 커플룩과 커플링 까지..]
띠링, 띠링, 띠링.
"이게... 뭐야?"
당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전원 버튼만 괴롭혔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화면이 켜져 새로운 연락이 오고, 디엠이 오고, 카톡이 오고, 문자가 오고... 분명 아침에 100%로 충전한 배터리는 12시도 안돼서 방전 직전에 멍하니 있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저와 형님의 사이를 아는 사람들부터 건너건너 얼굴만 익힌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는 듯했다. 연락이라곤 새해 안부밖에 없는 사람들부터 고등학교 지인들, 남자랑 사귄다는 걸 안 뒤로 연락을 끊어버린 가족들, 아까부터 제 눈치를 보는 현 직장동료들까지. 어쩐지, 평소보다 따라붙는 시선이 많더라.
지금이 11시 40분이니까 한국은 새벽 1시 쯤. 전화를 하면 받긴 하겠지만 듣는 귀가 많은 여기서 섣불리 연락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일어나면 다른 쪽에서라도 연락을 줄 테니, 저는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보 씨, 준비할게요."
"네."
... 너 괜찮냐. 진짜 헤어졌어?
[데이트 목격담 속출... 첫 만남은 3년전 모 프로그램...]
문자라도 보내둘까 청명과의 대화창을 들락날락하는 사이, 신경 쓰이는 기사에 당보는 재빨리 알림을 클릭했다. 단순히 사진을 갖고 노는 다른 기사랑은 차원이 다른 제목을 차마 모른 척 넘길 수 없었다. 형님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 떨어져 지낸 지 벌써 반년째였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기사에서 주장하는 목격담은 둘이 같이 음료수를 사더라, 청명 선수의 경기를 응원하러 왔더라 같은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의 나열이었다. 증거 사진이라며 올린 것도 전부 3년 전 사진이고, 의심 가는 몇 가지 내용도 전부 청명의 입으로 해명을 들어 종결된 것들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형님이 날 두고 무슨 바람이람? 당보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어떻게든 짜 맞춰둔 사진들을 훑어보았고 끝없이 내려가던 손가락은 하나의 사진에서 멈췄다.
나란히 케이크 진열장 앞에 마주 앉아, 청명은 늘 고르던 생크림 케이크를 가리키고 여자는 다정히 웃어주는 사진. 외부인이 찍었음을 증명하듯 흐릿한 초점에 여자 쪽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자신이 아니었고 케이크를 보는 저 얼굴은 전국민이 아는 얼굴이라 목격담에 오른 것이다.
사복차림인걸 보니 휴일이거나 은퇴한 뒤의 사진일 텐데... 하필 흐릿하고 검정만 고집하는 청명이라 사진만 보고는 정확히 어느 때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하필 자세히 살펴볼까 하는 순간 폰은 꺼져버렸고, 문 너머로 저를 찾는 목소리가 커지니 수사는 잠시 중단. 하는 수 없이 당보는 폰을 충전기에 꼽아두고 대기실을 나갔다.
저런 사진에 휘둘리지 말고 약 6시간 뒤 올 애인의 연락을 믿자고 되뇌면서.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당보는 인사들에 대충 웃어주며 서둘러 대기실로 향했다. 예상보다 지체된 촬영으로 체력적, 정신적인 피로가 평소의 배는 달했기 때문이다.
무슨 기사가 터졌는지 촬영이 길어질수록 노골적인 시선은 자꾸만 늘어갔다. 과장 없이 제가 당가사람이라고 밝혀진 날보다 더한 시선을 받는 것 같았다.
시작할땐 비어 보이던 세트장은 끝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는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제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붙는 눈은 귀여웠고, 쉬는 시간만 되면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하며 말을 붙이려는 건 애교로 보였으니 말 다했지.
"당보 씨,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피곤해서요."
말을 자르고 나온 거절에도 상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초면에 실례인 것도 알고 거절하면 물러나니 다행이지, 정말 문제는 저런 것들이다.
"청명 선수의 연애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어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다짜고짜 녹음기에 카메라라... 어디서 유출된 건지 대기실 앞엔 스텝이라 쓰인 옷을 입고 마스크를 눌러쓴 사람이 대여섯명 서 있었다. 무시하고 문을 열면 제 뒤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대기실을 촬영하는데 이것들은 사생활이라는 개념도 없는지. 가만 두면 제 짐까지 손댈 기세라 당보는 널브러진 짐들을 죄다 가방에 쑤셔 넣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찰칵!
차량의 문이 닫히자마자 셔터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게 낫다. 형님과 엮인 기사에 제 이름이 거론되느니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바로 호텔로 가실 거죠?"
당보는 가방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타자마자 출발해 곧장 호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따라붙은 기자들을 보고 우선 차부터 출발시킨 모양이었다.
아무렇게 집어넣어 엉망인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고, 재부팅을 기다리는 동안 당보는 멍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한산한 거리는 아까까지 혼란스럽던 생각을 가라앉혀주었다. 들려오는 음악은 잔잔하고 마침 금메달을 걸고 환하게 웃는 청명이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우니, 당보는 혹시 하는 생각에.
"한국에서 온 연락 있습니까?"
잠금을 풀기도 전 매니저에게 물었다.
"없었습니다."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럼 내 쪽으로 연락했나? 당보는 우르르 밀려드는 알림을 무시하고 청명과의 통화기록만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도 예상외라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기록은 12시 13분. 그것도 어제 점심, 제가 건 게 마지막이었다. 지금 한국은 오전 1시 정도니 기사도 확인하고 대응을 끝내기까지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연락을 안 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당보는 곧장 인스타로 들어가 청명이 올린 스토리들을 확인했다. 첫 스토리는 아침 식사, 두 번째는 하천 위의 오리 한 마리, 2시간 전 올라온 세 번째 스토리는 운동복을 입은 채 가방을 매고 벚꽃길을 걷는 청명의 뒷모습이었다.
당보가 아는 청명의 하루는 아침 먹고 조깅, 점심 먹고 헬스장, 저녁 먹고 실내 운동이 반복되는 하루였다. 하지만 마지막 스토리는 운동을 끝내는 모습도 아니고, 데이트의 정석 그 자체인 벚꽃을 구경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나 보여주겠다고 각 잡고 스토리를 올릴 사람이 아닌걸 아는데. 형님 주변에 이렇게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는걸 아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 오해, 일 겁니다."
얼굴을 찌푸린 채 핸드폰만을 응시하는 당보의 모습에 매니저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렇게 얼굴을 구겨도 영화 같으니 배우는 배우구나 하는 생각은 속으로 삼키며.
"뭐, 그렇겠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곧 정정 기사도 뜰 거고, 두 분이 서로 좋아하는걸 알고 계시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기사로 정정하지 않았으니 무소식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스토리로나마 소식이 있으니 바람의 확정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매니저님은 바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네?"
"애인이 바람피운다는 기사가 떴는데, 해명은 없고 스토리로 데이트 인증에. 1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
순식간에 조용해진 분위기에 당보는 의자에 머릴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도 아니었다. 엄한 사람 괴롭힌다는 자각도 있었고, 화풀이에 불과 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냥... 다 괜찮을 거라고,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위로가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당보는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제외한 모든 알림을 끄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시침이 새벽 2시를 향해가는지라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내일 촬영에 쓸 대본을 읽고, 야경도 잠깐 봤다가 와인도 서너 잔 마셨다.
"진짜 조용하네..."
하루종일 번쩍 거렸던건 착각이었다는 듯 조용해진 폰을 당보는 가만히 내려보았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기사 하나에 애인을 못 믿고 추궁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관뒀다. 정말 거짓말을 한다 해도 한국으로 가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 수 없는 건 똑같으니, 결국 어느 쪽이든 자기만족에 불과하지 않은가.
"형님은 스토리만 올리면 다야? 먼저 전화 한번 해주지도 않고, 카톡도 없고... 내가 궁금하긴 해요? 우리가 사귀는 건 맞나?"
멈춰있는 사진에 당보는 들을 이 없는 투정을 부렸다. 화면 속 청명은 아무 고민 없이 기뻐하는데, 내가 없는 당신은 항상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 싶어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 형님 오늘 올라온 기사 봤어요? 형님이 누구랑 사귄다던데 ㅋㅋㅋ
- 여긴 럽스타그램이라고 난리 났어요. 저 몰래 커플룩도 맞춰 입고, 같이 케이크도 고르시더만. 누구 생일이라도 되나 봅니다?
- 그냥 좀 유명한 팬인데 오늘은 기자가 오더라니까요. 이제 형님도 꽁꽁 싸매고 다니셔야겠수.
- 스토리 봤습니다. 그렇게 잘 찍는 분이 있으면 진작 소개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 형님 애인은 종일 시선에 죽는 줄 알았는데, 벚꽃 구경도 가고. 아주 즐거우십니다.
- 형님,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우리 정말 헤어집니까? 요즘 한국은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해요?
당보는 채팅창 가득 채운 메시지를 죄다 지워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별 영향은 없지만 알코올도 들어갔으니 괜히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자자. 이것이 당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이잉.
"형 전화 옵니다!"
"이 시간에?"
멀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청명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애들이랑 놀아준다고 소지품은 전부 두고 왔건만, 고작 전화 하나 때문에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에 짜증부터 났다. 청명이 생각하기론 전화를 걸 용기가 있는 녀석들 중 제가 오늘, 이 시간에, 진이가 하는 검도장에서 일하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한창 훈련에 집중해야 할 4시 반에는 더더욱.
"누군데! 애들이면 그냥 끊기게 둬."
청명은 청진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 중요한 일이면 다시 연락하던가 문자를 보내던가 할거고, 그때 봐도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청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팔만 휘적휘적 흔들어 댔다. 한 팔을 머리 위로 올리기도 하고 양손으로 뭘 만들려다가 혼자 머릴 짚고. 그러다 주변을 살피더니 입을 뻐끔대는 것이다.
'당보 씨요.'
"야! 나랑 자리 바꿔!"
헉 사범님 전화 받으러 간다. 여자친구가 전화했나 봐. 전에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 그럼 남자친군가 보지. 나 전에 잠금화면 봤는데 머리 긴 남자 사진이었어. 잘생겼어? 뒷모습이라 얼굴은 못 봄. 근데 사범님 눈 높잖아. 그럼 무조건 잘생겼겠지.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청명은 성큼성큼 청진이 있던 언덕 위로 올라갔다. 황당한 얼굴의 청진을 내려보내고, '허당보' 세글자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설렘 사이 불쑥 왜?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당보가 전화하고 싶다는데 안 받을 이유도 없고, 나도 목소리 들어서 좋고... 뭐 애인 사이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여보세요."
"....네, 여보에요."
약 하루 만에 듣는 당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이 낮았다. 장난스러운 애교는 여전하지만 이것마저 기분을 가리기 위한 수작 같아서, 제가 모르는 큰일이라도 생겼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장난치지 말고. 무슨 일인데."
"갑자기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전화는 뭐야. 거기 지금 새벽 3시잖아. 내일도 촬영 있는 거 아니야?"
"형님도 제 목소리 듣고 좋잖아요."
"말 돌리지 말고."
청명은 조용해진 당보를 그저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너스레를 떨 녀석이 조용하니 뭔가 일이 있구나 싶어서. 축 처진 널 안을 수도, 마주 앉아 이야길 들어 줄 수도 없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님, 얼굴 보여주면 안 돼요?"
"그럼 대답할 거냐."
"네에."
작지만 확실한 대답에 청명은 버튼을 눌러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짧은 연결음 동안 머릴 정리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나 싶었지만, 정작 반기는 건 어두운 화면이라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금방 표정을 바꿨지만 말이다.
"당보야. 보여?"
"손도 보여주세요."
청명은 별 생각 없이 양손을 번갈아 화면에 비춰주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당보는 입고 있는 옷부터 시작해 귀를 보여달라, 목 주위를 비춰라, 머리는 뭐로 묶었냐 하고 자기 말만 해대니 얼마 없는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치고 말았다.
"네 얼굴이나 비추고 말하지?"
"아, 맞다. 잠시만요."
어둡던 화면이 완전한 암흑으로 덮이고 부스럭 소리와 흔들리길 몇 번, 곧 환한 빛과 함께 청명의 화면엔 잔뜩 흐트러져 침대에 누운 당보가 화면을 채웠다. 늘 입던 짙은 녹색의 로브는 쇄골을 훤히 드러내고, 눈은 풀려서는 바보같이 헤실거린다.
미친 새끼. 청명은 황급히 화면을 손으로 가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공원엔 저와 청진, 그리고 검도장에 다니는 애들뿐이고, 그마저도 청명과는 거리가 있는 언덕 아래에 모여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너, 아니, 누가 전화할 때 옷을, 그따위로 입어."
"형님도 아는 옷인데?"
"그러니까..."
청명은 저보다 저 옷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저 옷의 어딜 당기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당보가 허구한 날 천 자락을 들추며 제 반응을 즐기는 것도 안다. 지 혼자 짜증 내고 미안하다며 붙어올 때 입는 옷이었고, 한 번에 벗기 편하다고 좋아하는 옷이었다. 한마디로 날 유혹하겠다고 입어대는... 옷인데...? 그걸 왜 입고 있어?
"너 바람났냐?"
"네? 제가요?"
"그래. 나도 없는데 그걸 누구 보여주려고 입고 있어?"
"그렇다고 보통 바람피운단 말이 나옵니까?"
"그럼 그건 왜 가져갔는데. 나도 없는 미국에서 그거 입고 지랄하는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상식적으로 바람을 피면 이런 식으로 전화를 걸겠습니까. 저 못 믿어요?"
제대로 된 해명은 없고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태도에 청명은 당장이라도 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못 믿냐고? 정말 못 믿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닌가? 일하는 거 알면서도 전화를 걸고, 검사라도 하듯 몸을 뜯어보고,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아서 대답도 안 하고.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말장난 할 기분 아니다."
"아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옷 하나 때문에 싸워야 하냐고요. 그냥 잘 때 입는 옷이잖아요. 자려고 입은 거고, 그러다 보니 형님이 생각났고,"
"누가 싸우재?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데 니가 먼저 개같이 굴었잖아."
"가뜩이나 피곤한데 형님까지 이러셔야 해요? 그냥 넘어가면 안되나? 앞으로 형님 없을 땐 안 입으면 되잖아요."
"두 번 말 안 해. 카메라 돌려."
어이없다는듯 혀를 차면서도 당보는 카메라를 돌려 머무는 방을 보여줬다. 침대 옆은 비어있고, 소파엔 겉옷들이, 그 앞의 탁자엔 대본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빈 와인잔과 와인병이 3병...? 도저히 자신을 믿을 수 없던 청명은 연신 눈을 감았다 떴지만 와인병의 수는 변함이 없으니 저건 환상은 아닌 현실일 것이다.
제정신인가? 청명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촬영에 방해된다며 전날엔 절대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녀석이, 그것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금주를 시키던 놈이. 지금 혼자 와인을 3병이나 처먹은 거야?
"너, 저 와인, 혼자 다 마신 거냐?"
"그럼 누구랑 마십니까? 지금도 옷 때문에 애인을 쥐 잡듯이 잡아대는데."
"아니, 너 내일 촬영은? 이번 주 내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제가 촬영이 있든 없든 형님이랑은 상관 없잖아요."
"보야, 너 지금 취했다. 내일도 일할 텐데 기운 빼지 말고 자자. 응?"
청명은 씩씩대는 당보를 달래고자 다정히 말을 건넸다. 얼굴과 목이 붉게 물들어 제대로 취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것도 그렇고 기분 좋으면 바보같이 웃어대는 것도 딱 취했을 때 반응이라 우선 재우고, 멀쩡한 상태로 대화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세웠다. 하지만 당보는 청명에게 있어 가장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왜요. 이젠 관심 없어요? 아아. 어차피 잡은 물고기니까 먹이는 안 준다 이건가?"
자기가 더 상처받은 얼굴로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다.
"당보야 지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선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
"무슨 오해요? 여기 무슨 말이 도는진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니까 술 깨고, 아침에 길게 이야기하자고. 너 지금 제정신 아니잖아."
"왜, 자꾸 끊으려고 그러는데요. 이제 저랑 말도 섞지 말래요? 저 술 깨고 일어나면 입장문 내고, 삼자대면 해서 우리 헤어집니까? 형님보고 그러래요?"
"아니, 뭔..."
"난 지금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형님이 나한테 화내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이런 개 같은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지금 이게 다 제 잘못입니까?"
청명은 말문이 막힌다는 말의 뜻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턱 끝까지 말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데 가까스로 이성이 틀어막고 있는 느낌. 머릿속에선 감정에 충실한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한 구석에 있는 이성이 막아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어떻게든 단어를 골라 문장을 만들어봐도 당보의 얼굴을 본 순간 전부 흩어져버리니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요, 사과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데이트 중에 술 처먹고 구질구질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귀찮게 시간 끌지 말고 여기서 끝내시죠. 헤어집시다."
"뭐? 아니, 잠깐 당보!"
뚝.
아까까지 보던 처연한 울먹이는 얼굴은 어디 가고 분노에 찬 험상궂은 얼굴이 까만 화면을 채웠다. 곧바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죄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고, 카톡, 문자는 전부 보질 않았다. 혼자 잡은 물고기니 뭐니 주절주절 거리더니 이제는 헤어지자고? 내가 씨발 뭐 때문에 너랑 헤어지는데? 내가 널 사랑하고, 네가 날 사랑하는데 우리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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