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슬램덩크 정대만 드림
지독하게 이어지던 장마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맑게 갠 하늘이 화창하다. 그런데도 서문현주는 습기 가득 찬 어두운 뒷골목에 가만히 서서 마지막 남은 돗대만 쪽쪽 빨아 연기를 마셔댄다. 이제야 하는 소리지만 비가 오든 말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은 그녀의 다리는 항상 말썽이었다. 걔가 있었을 때야 그냥, 나도 이쯤 되면 아프기 시작한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었지. 앞머리로 인해 불규칙적으로 가려진 시야 사이로 담배 연기가 스멀대며 올라온다. 멍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자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서문현주를 끌어낸다. 가자. 그럼 그녀는 언제나처럼 주관 없이 끌려다니기나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때 곁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던,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결국 얼굴 반반한 놈한테 넘어가 깔이 됐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으면 분명 그랬을 터다. 드물게도 서문현주의 얼굴에 표정이 감돈다.
“……정대만?” 힘없는 목소리가 남자의 이름을 읊는다.
“너, 현주 아니냐.”
기억 속으로 휘발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정대만이 다시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엔 빛이 들어오는 일이 없어서, 그의 얼굴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었다. 서문현주는 정대만이 그녀를 보겠답시고 더러운 골목으로 걸음을 옮길 때에야 그를 만류한 채 걸어간다. 절뚝이는 걸음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는 걸음걸이에 정대만이 신경이 쓰이는 듯 아닌 척 치마 아래 가려진 그녀의 다리를 흘긋거린다. 원체 숨기질 못하는 성정이라 다 티가 났을 텐데도 서문현주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상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대만아, 오랜만이구나.”
“그래. 너는 어째 몇 년이 지났는데도 영 변한 게 없냐?” 정대만은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왜긴…… 그대로 살고 있으니 그렇겠지.”
그간 만나지 못한 회포를 푼다기엔 몇 년 만난 사람 같고, 친한 친구와 만났다기엔 무미건조하여 거리감을 알 수가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정대만은 여전하여 서문현주의 어깨에 제 팔을 걸친 채 골목 밖으로 나가려 한다.
“이 봐. 늦었어.”
서문현주의 발목을 잡은 문장이 무겁게 늘어진다. 그제야 일행의 존재를 깨닫는 서문현주다. 그녀는 조금의 아쉬움도 남겨두지 않고 정대만의 팔을 제 어깨에서 내린다. 일이 있어 가봐야겠다, 대만아. 등을 돌린다. 절뚝대는 걸음이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리저리 비틀대며 걷는 모습이 위태롭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대만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문득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현주야! 들은 것이 분명하나 그녀가 돌아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뜸 익숙한 상호를 외는 정대만이다. 1층에 카페도 있더라. 내일 기다릴게! 오후 여섯 시다!
서문현주는 곧 어둠 속에 녹아 사라진다. 들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가 없다. 내일부터는 일과가 하나 더 늘어날 테다. 오후 여섯 시부터 언제 올지 모르는 그녀를 기다리는 것. 휘파람을 불며 가던 길을 마저 재촉한다. 정대만은 여전히 빛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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