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9.
FF4 / 세실카인
1.
카인 하이윈드가 기억하는 그해 여름은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어느 단편은 서늘하며, 어느 단편은 타는 듯이 뜨거웠기에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정식 기록을 그와 같은 무인이 직접 찾아보고 손대는 것도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만 같아 찾아보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그 여름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한 계절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하던가. 그러나 카인 하이윈드는 그러한 계절들이 어떤 형태로 논리를 갖추는지, 말이 필요 없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기억은 그 여름의 가장 서늘한 순간부터 시작한다. 그는 바론의 우아한 성벽을 따라 늘어지는 그늘을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백마법 연구실, 뭘 어떻게 하더라도 맞추어주기 어려운 녀석, 새로 얻게 될 창, 그리고 하늘을 나는 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몽롱한 감각 속에서, 그는 피부에 박히는 것 같은 햇살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성벽 가까이 최대한 붙어섰다. 서늘한 돌이 미지근했었다. 아, 곧 더워지겠군. 나직이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 당시 작은 소년이던 그의 생각의 흐름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부유하는 것 같은 그 마음의 근원마저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아 못내 아쉬워지기에, 그는 끊임없이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기억할 수는 없어도, 피어오르는 생각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길을 잃고, 관성적으로 길을 따라 걸었던 기억은 난다. 세실에게 전해줄 말이 있었다. 어떤 말이었는지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의 조각을 그는 주워 모아 보았다.
여름. 초입이었던 것 같다. 피부에 눅진하게 들러붙는 그 온도를 곱씹어보면 그러하다. 눈이 부시기만 할 뿐으로 무어라 더 형용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소년이던 그는 성의 뒤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친구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아한 돌벽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늘, 부드러운 적색이 감도는 벽돌과 그늘 밖으로 머리 부분이 조금 삐져나가던 그의 그림자까지. 풍경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 그림이라도 되는 양 걸려있었다. 언제고 비슷한 풍경 속에 다시 설 수 있게 된다면 그 숨 막히는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확신마저 가질 수 있도록.
그 여름. 그 순간. 그 기억은 늘 흘러버리는 웃음을 동반한다.
그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온도와 기이할 정도로 적막한 성벽 아래의 그늘. 눈에 가득 들어차는 기술자들의 무리와 그 옆의……. 햇빛이 그 머리 위로 부서지며 떨어지는 것을, 카인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서 오로지 행복이며 다른 이들과의 친분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웃음을 보았다. 다른 이가 따라 웃고서, 그가 돌아서고, 그 웃음이 이윽고 그를 향할 때까지 카인은 세실을 바라보았다.
바론의 기사. 평생 그 직함 아래에서 함께 살아갈 것이 분명하건만, 그는 그때 그들의 세상이 둘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느껴버린 것이다. 하나에 올라타 손을 뻗어보았자 다른 하나는 평생 닿지 않을 공간으로 밀려나는 것만 같았다. 아, 그 감각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바람에 쓸린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파도를 닮은 소리와, 온통 쏟아지는 탓에 너무도 밝아 노란 빛이 감돌 정도의 그 풍경 가운데에 세실이 있었다. 미친 듯이 눈을 깜박거렸던 것 같다. 과할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모든 것들에서 그를 지키기 위해. 풍경이 밀어닥친다는 표현은 그 순간을 위해 있는 것이리라.
그 숨막히는 빛과 풍경 속에서, 카인은 그가 세실 하비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성적인 뭇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싫어한다는 감각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오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로 하여금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세실 하비가 싫다. 그는 그 간단한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그 문장 앞에서 무력하게. 그는 그것을 논리로 공격할 의지마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의 진실 여부는 그가 그 문장을 떠올린 순간에 판명된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더 파악하기 위해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없는 행동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 세실. 그는 서서히 달구어져 절정에 이르기 직전인 지면의 열기 속에서 숨을 헐떡거렸다. 그것이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마주한 그의 생각에서 도망가고 싶어 그런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실. 그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인 기어가는 소리로, 카인은 그 소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동시에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 소년이 함께하던 순간 속에서. 혹은, 다른 이가 있던 순간이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세실을 싫어해도 좋은 이유를 그는 찾아야만 했다. 그가 만에 하나 이 마음을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말로 뱉어 형태를 준다고 했을 때, 어떤 이들에게도 그것이 부당하며 아주 감상적인 판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도록.
그는 오래도록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한 깨달음은 그것을 얻은 사람의 삶에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를 둘러싼 주변의 세상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카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실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름은 여전히 고고하게 꺾일 줄 모르는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매년 그러하듯이 그 옷자락에 휘감겨 허덕이고 있었다. 카인은 놀라울 정도의 관성으로 이어지는 매일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들었으나, 여름의 위세가 극에 달하는 그 시간의 흐름에 결국에는 굴복하고 순순히 인정했다. 변한 것은 카인 하이윈드 뿐이었고, 그마저 이유가 없다는 논리적인 벽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어 시종일관 예민하게 굴거나, 세실에게 마뜩잖다는 눈빛을 보낼 뿐인 아주 소극적인 것이 아니던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치졸하며, 자신을 모욕하는 것 같은 행동에 카인이 누그러졌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싫어한다는 마음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 아니던가. 카인은 그 나름의 항의를 멈출 수 없었다. 그 짧은 몇 주는 카인의 안에 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는 근간을 뒤틀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이한 형태의 마음이 뿜어내는 열기 앞에서 절제하는 법을 배운 어린 기사보다, 배우지 못한 어린 기사가 많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실이었으며, 카인이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인이 그 무렵부터 세실을 피해 다니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단순히 마주치기 싫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의 어린 카인의 사고를 더듬어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카인은 이유가 없이 그저 놓여있기만 한 모든 것들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것은 그의 감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세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은발을 타고 이리저리 반사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햇빛이든, 호의든, 아니면 그저 의미없는 웃음이든, 그는 그 모든 것들이 그와 세실을 갈라놓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들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고 했을 때, 세실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것들은 마찬가지로 빛나줄 것인가. 고개를 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카인에게 그것은 훌륭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로자였다. 그것은, 세실과도 닮아있는 그녀의 특성 때문이었기에, 카인은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기묘한 참담함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이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그에게 표하는 관심이나 호의가 그리 달갑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없으면 초조해지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어쩔 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그런 종류의 관계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지 스스로도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사랑스러움도 있는 법이 아니던가. 그는 로자가 그러한 몸짓으로 목을 길게 빼고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카인은 어렵지 않게 로자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의 앞을 막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들여다보는 것만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그 작은 머리가, 빠르게 좌우를 훑고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모든 과정은 그것과는 다른 재미나, 혹은 사랑스러움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 시선에 멋쩍은 미소가 한 발짝 느리게 떠오르고, 그에 맞추어 입이 열린다.
“카인, 세실과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찾아가 봐. 있지, 그 애, 지금 기운이 없어. 찾아가서 말을 하면 분명 들어줄 거라고 했는데, 하이윈드 경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는 이해할 수 없는 바쁜 일이 있을 거라고 하던가. 바쁘다면 역시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실과 당신은 친구잖아?”
그러고서는 다시 양옆을 번갈아 보고서는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무엇을 경계하는 것인지, 그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모든 짜증스러운 감정들과 더불어 기이할 정도로 세실과 그를 분리하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그는 적어도 한 가지를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해답의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로자에게 차마 그가 바쁘고, 세실에게는 마음이 내킬 때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이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카인 하이윈드는 세실을 싫어할 이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를 바라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고지식하고도 올바른 구석이 있어 답답하면서도 함부로 싫어할 수 없는 세실의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린다. 신뢰며, 베풀어 다시 그에게로 향하는 애정과 같은 것들을. 그가 그것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되 그 가치들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교육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하이윈드라는 성을 가지게 해준 모든 계기가 그에게 강요하는 덕목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혹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으나, 그것이 그에게 있어 하나의 이성적인 벽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는 충분히 감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만을 알되 행하지 못하는 그에 있어서 일종의 역겨움에 가까운 슬픔도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때, 로자는 그의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섞여 분명히 기이했을 터인 그것을 피하지도 않고서. 오로지 대답을 재촉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그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는 편이 좋으나, 한참을 이어지다 못해 영원할 것만 같이 느껴지던 그 균형을 깨버린 것은 로자 쪽이었다. 그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그는 얼마나 놀랐던지 꼴사납게도 그의 뒤에 있던 돌벽에 가볍게 머리를 찧어버리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에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웃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서, 강제적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떨쳐낼 수 없는 종류의 힘으로 그녀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겨 카인을 그늘에서 끌어냈다.
“지금 한가하지?”
바보같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보고서, 그녀는 웃었다.
“세실을 보러 가자.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역시 내가 같이 가는 편이 좋겠지?”
”그건,“
”오는 길에 세실을 만났거든. 싫으면 돌아가도 정말 괜찮으니까.“
거절의 말을 전하지 못했던 것은, 앞선 때의 이유와 같다. 그는 그때까지도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고 있었고, 그가 세실이나 로자라는 사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평생에 걸쳐 싫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거절의 순간을 놓치고 나서, 모든 것은 기이할 정도의 속도감과 함께 했다. 손목이 잡혀 수로를 옆에 끼고 성의 외곽을 돌아가는 내내, 그는 그녀가 제잘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둘이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 그 셋이 함께 있는 순간을 지배하는 온화한 공기와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만들어지는 공허와 공백에 대해서.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 그 모든 말들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로자와 세실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실려 그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는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한껏 달구어진 지면의 열기를 그대로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세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로자의 부름에 그가 뒤를 돌아보고,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카인. 카인. 그것이 저런 울림이었던가. 그것이 자주, 저런 방식으로 불리던가. 그는 그 안에 있는 감정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을 것만 같았으며, 헤아린다 하더라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간질거리며 올라오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들어갈 그늘을 찾은 것은, 그래서이다. 그는 바론의 고운 장밋빛 벽을 따라 드리워지는 그늘을 찾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그를 그 난감한 상황해서 구해주기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머뭇거리는 것 같은 세실의 발걸음에, 그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이를 악물어보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세실이 싫었다. 그가 그때까지의 모든 행동을 그들의 친구들 앞에서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이런 식으로 혼자 남아 가라앉을 생각마저 없을 때에 꺼내어 보기 좋은 기억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가 세실의 세계로 편입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싫어할 것이다. 세실 하비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싫어할 수 없었기에 도리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실, 목을 타고 나온 그 울림이 얼마나 어색하던가. 고작 그 몇 주간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기에 그가 그 발음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말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 소년을 보면서, 그는 많은 것을 떠올렸다. 단어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간지러우며 동시에 찌릿한 감각을 주는 어떤 감정의 덩어리들을 맛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들이었더라. 너무도 흐릿하여 쥐기 어려운 기억 속에서, 참 오랜만에 그 기억들을 꺼내어보던 카인은 아주 당연하여 외려 알아차리지 못했던 문장을 찾아내고서는 문득 웃어버렸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