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사토)

Thanks for playing

인종, 성별, 힘, 재력, 부모, 재능. 이 세상에는 공평하지 않은 기회로부터 많은 차이와 차별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목숨에서 공평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 생물은 죽지 않는다. 그 생물은 아인이라 불린다.

*

광활한 사막. 어쩌면 들판에서부터,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이곳은 미국 어딘가. 장소 불명. 하얀 석관처럼 보이는 원통에 붙어있는 이름표.  Samuel T. Owen. “SATO” 온도 유지 장치가 울리는 소리. 약 두 달간 일본에서 있었던 국가 테러 사건의 주동자이자 최악의 아인 범죄자 “사토”는 아인을 완벽하게 죽일 방법을 찾을 때까지 미군 정부의 실험체로서 잠들어 있다.

차가운 바닥. 어쩌면 실험실에서,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이곳은 미국 어딘가. 장소 불명. 남자는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려있다. 입고 있는 것은 군복. 오른쪽에서 뚫린 구멍은 깨끗하게 왼쪽까지 이어져 있다. 순간적인 총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뜨인 눈. 질질 새는 피와 함께 나오는 것은 검은 입자. 깜빡. 초점을 잃었던 눈에 빛이 들어온다. 쿨럭, 다시 세상과 조우한 남자의 첫 마디는 기침. 불사의 아인임을 마지막으로 검증 받은 남자가 구멍이 메꿔진 관자놀이 부근을 짚은 채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 그의 앞으로 다가서는 남자. 형광등의 역광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마취총을 맞자마자 팔을 잘라내 약효가 퍼지는 것을 방지하는 아인. 기름에 튀겨진 손을 핵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인.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IBM을 이용하여 수적 열세의 게릴라 전투에 대응하는 아인. 몸을 일부러 절단하여 재생되는 부위에 방해되는 모든 물질을 분해한다는 점을 이용해 길을 막는 장애물을 무효화하는 아인.

항공기 납치 후 제약회사 테러. 블랙리스트 암살 예고 및 실행. 군사 기지 습격. 전투기 탈취 및 국가 주요 기관 테러. 이 과정에서 사토를 체포 혹은 사살하기 위해 투입된 군인 약 550명 전원 사망. 민간인 포함 총 사상자 1896명. 그중 국가 지도자를 비롯한 핵심 주요 인사 23명.

남자는 다시 태어난 아인에게 M1911를 건넨다. 땅에 주저앉은 군인은 익숙한 총기를 받아 든다. 남자는 다시 태어난 아인에게 헌팅캡을 씌워준다. 여전히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사토가 아인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 국가에 저지른 테러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한 미국은 군인 중에서도 아인으로만 구성된 초정예부대를 조직. 국가 기관으로 테러리스트를 만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어떠한 가능성을 판별하기 위해 “사토”를 연구하기로 한다.

아인 사토에 관하여

사토.

새뮤얼 T. 오웬.

포커페이스.

첫 친구는 게임. 부스스한 금발 머리의 동양인 아이는 밝은 얼굴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플레이하고 있다. 작은 TV화면으로부터 나오는 불빛은 점점 길어진다. 복도 너머까지 길어지는 불빛. 복도에는 문 하나가 열려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여자가 얼굴을 감싸 쥐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끌어안고 있다. 아이와 똑같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 침울하고 원통한 표정. 살짝 멀어지면 그들이 서 있는 탁상에 올려진 액자가 보인다.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와 옆에 서 있는 동양인 여자. 가운데서 남자의 모자를 들고 웃고 있는 새뮤얼의 사진.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빛. 끝에는 아이의 고쳐지지 않는 취미가 늘어져 있다. 밟혀 죽은 쥐, 찔려죽은 토끼, 목 졸려죽은 도롱뇽, 밟혀 죽은 족제비, 찔려죽은 다람쥐, 목 졸려죽은 비둘기.

다시 게임을 하면서 신나게 웃는 아이의 얼굴. 보이지 않던 왼쪽 뺨은 크게 다쳐 있다. 최근에 세게 얻어 맞은 듯한 상처. 그러나 사토는 그저 신난 얼굴로 텔레비전 속 형형색색의 몬스터를 처치해나간다. 점점 커지는 효과음 글자들. 부모가 있는 복도까지 덮어버린다.

그렇다면 사토는 타고난 폭력성을 게임으로 해소했을까?

누군가에게는 다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재앙이었던 한 가지. 부모는 새뮤얼을 사랑했고 사토는 똑똑했다. 높은 지능으로 항상 또래보다 우월했던 사토. 아는 만큼 괴롭다고 했던가. 생명을 해치는 재미를 안 아이는 그래픽이 파괴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부모가 바라던 사회성과 함께 게임의 단발적인 재미를 일찍 깨우친 그는 일찍 질려버린다. 인간인 이상 느끼는 허기와 갈증의 연장선.

사토가 느낀 첫 번째 지식욕.

부모를 설득한 건 열다섯, 어쩌면 열일곱. 사토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영국인 아버지와 닮았던 어린아이는 크고 보니 어머니를 닮았다.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어머니. 팔짱 끼고 근엄하게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사토가 아이였을 적보다는 주름이 깊다. 지긋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한 군인의 골격. 학교 내 우수한 성적을 언급하며 이런저런 회유를 시도하는 어머니. 아버지는 끝내 자신을 넘지 못한 아들의 키를 언급한다. 기다렸다는 듯 웃는 사토.

단호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는 남자. 그는 피투성이가 된 창고와 그곳에 서 있던 어린 아들을 회상한다. 그러나 지금 앞에 있는 건 사랑하는 아내를 닮은 얼굴로 자신과 같은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 어느새 백발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눈을 감는다. 침묵은 곧 긍정. 사토는 그날 바로 짐을 싼다. 나이를 속여서 입대하는 게 위법이어도 암암리에 넘어가던 시절. 한때 군인이었던 남자는 긍지를 지키기보다 언제 다시 깨어날지 모르는 아들의 폭력성이 조금이라도 옳은 방향으로 향하기를 우선한다.

그들에게 다행이자 재앙이었던 한 가지. 공감 능력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성의 기능을 후천적으로 학습한 인격 장애는 그것을 활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턱 밑으로 총구를 가져다 대는 남자. 탕. 턱이 꿰뚫리면서 뒤로 고꾸라진다. 검은 입자. 형체를 갖진 못한다. 첫 번째 실험은 실패. 뒤로 꺾였던 목을 다시 앞으로. 손은 여전히 파이프에 고정되어 있다. 죽음을 초월하고 단발적인 것은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고통의 연속성. 생존 본능이 옅어져도 통각 세포는 무뎌지지 않는다. 남자는 속박을 풀기 위해 손목의 뼈가 완전히 절단될 때까지 기관단총으로 난사해야하는 이 상황이 공포스럽다. 두 번째 실험은 중단.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는 아인에게 있어 최적의 재능인가?

그렇다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아인은 사토 하나였을까?

애초에 특수부대 출신 아인은 사토 하나였을까?

세상에 불만을 가진 아인은?

불멸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직접적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려던 아인은?

미국으로 망명한 일본의 유명한 생물학자는 아인에 관한 논문 중에 우주가 계획하지 않은 미지의 감정, 마음이 가진 장대한 가능성이 아인의 씨앗이라 말한 적 있다. 시냅스간의 전기적·화학적 프로세스에 불과한 감정의 과대평가. 논문 같지도 않은 신화.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라는 체에 걸러 남는 건 태어나서 죽어갈 뿐인 인간의 운명을 향한 반발심.

그렇다면 사토는?

나라를 지키는 무기, 군대.

군인 한 명 한 명이 곧 나라를 지키는 칼날이고 탄약이다. 적을 향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 무기들. 그러나 남용되어서는 안 되는 폭력들. 신체 훈련만큼이나 중요한 정신 교육. 똑똑한 사토는 복무 신조를 비롯한 군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빠르게 외우고 몸소 실천한다. 나는 전사요 단체의 일원이다. 나는 미국 국민을 위해 복무하여 군사의 덕목을 지킨다. 나는 쓰러진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자유의 미국인의 삶의 양식을 수호한다. 신 앞에서 나는 이 신념을 맹세한다. 내 소총과 나는 내 조국의 수호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적을 굴복시키는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수호자이다. 항상 진지한 사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경박하게 웃거나 울지 않는다. 사소한 특징으로 별명이 정해지는 곳에서 얻은 새 이름, 포커페이스. 173cm의 작은 체구를 가지고 훈련소에 들어와 특수부대원으로 선발되기까지는 약 2주. 그야말로 주머니 속 송곳. 가려질래야 가려질 수가 없구나!

잦은 파병. 저절로 멀어지는 게임기. 세상에 들고 다니는 게임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은 3초. 탕! 울리는 소리는 사토가 가진 마지막 총알이다. 재장전을 위해 엄폐하는 와중에 옆으로 파고드는 상대의 총검. 반사 신경으로 피했으나 깊게 긁힌 뺨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마찬가지로 단검을 뽑고 시작되는 근접전. 거침없는 인파이팅. 상대 역시 특수한 훈련을 받고 생사의 갈림길을 넘겨온 군인. 총격전이 오가는 지금 근접전이 길어지는 건 좋지 않다. 마침 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총알. 발포된 위치는 상대쪽. 먼저 도착한 지원군이다. 총알은 이미 피가 흐르는 뺨을 다른 방향으로 긁었다. 광대뼈 아래로 흐르는 피는 그림자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잔뜩 벌어진 입으로 흘러들어오는 피비린내.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웃음이 떠나지 않는 사토. 침착함을 잃어가는 상대의 미간을 뚫고 단검을 꽂아 넣는다.

전쟁. 플레이어로 직접 뛸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임.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즐거워. 롤프 메르클레도 그렇게 말했지.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때로는 총으로 쏴 죽이고. 때로는 폭발에 휘말리고. 때로는 단검으로 급소를 찌르며. 전장에서 커가는 사토. 키가 조금 자라고, 몸에는 경험이 단단하게 쌓인다. 왼쪽 얼굴에 남은 십자가 흉터. 그럼에도 콜네임은 여전히 포커페이스. 임무를 달성해서 기쁘다는 말이나 동료를 잃어 슬프다는 말 대신에 항상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간다.

다만 게임이라는 건 같은 스테이지를 반복할수록 지겨운 거라서.

가끔은 변주가 필요하지. 정석 루트를 알고도 일부러 어렵게 클리어하는 것처럼.

1976년. 날짜 불명. 작전 2일째. 지친 군인들이 가장 방심하기 쉬운 새벽 4시.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서 「팀」은 한 번의 교전도 없이 미군 포로 구출에 성공한다. 남은 건 픽업 포인트로 귀환. 하하, 너무 쉬운데? 동료의 그 말이 도화선이 됐나. 사토는 총을 꺼내 든다. 플레이볼. 어두운 곳에서 번쩍이는 총구 끝 동그란 화약 빛.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 급격하게 난이도가 올라간 보너스 스테이지. 화색이 도는 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백 명의 적이 밀려드는 전투 속에서 사토가 마지막으로 받은 공은 핀이 뽑힌 수류탄.

작전 인원 네 명 중 한 명은 사망. 한 명은 중상. 포로는 무사 귀환. 팀을 이끈 리더이자 적진에서 고의 사격을 고발당한 사토는 곧바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는다.

아마 다리가 날아가지 않았더라면 포커 페이스의 오발 사고로 넘어갔겠지. 성과주의 제일인 나라, 미국.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게임이라도 몇번이고 하다 보면 잘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인생은 결국 게임이 아니라서. 주어진 코인은 하나뿐이다. 

아인의 특성을 그때마다 상황에 적용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사고가 필수적이다.

사토 포획 당시 같이 잡힌 아인 무리가 증언하기를, 사토는 사고가 유연해지기 위해서라도 머리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가장 부위가 큰 살점을 핵으로 재생하는 아인. 만약 몸통이 가장 큰 살점이라면? 새롭게 재생한 머리가 가진 자아와 기억은 나일까? 테세우스의 배. 혹은 스웜프맨. 재생되는 머리는 곧 자아의 죽음. 물리 규칙과는 멀어진 아인의 죽음이다.

아, 사토의 제의는 다른 아인들에게 말고. 오직 나가사 케이에게만.

사토의 제압 및 포획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아인 나가사 케이. 일반인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그는 사토의 사고방식에 가장 근접하면서도 전혀 다른 결과로 행동한 아인이다. 공식적인 남은 기록은 사망. 노골적인 신분 말소. 오랜 기간 뒤를 쫓은 끝에 나가사 케이와 닿아있는 의대생 히라사와 료타와 접촉 성공. 극도의 경계. 혹은 경멸. 혹은 혐오. 나가사 케이는 물론 사토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답변을 거부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떤 훈련을 해도 아인을 사토처럼 길러낼 순 없어. 유연한 사고? 개소리. 그의 사고에는 기준도, 의미도, 목표도 없어. 정신 나간 전쟁광이란 비난조차도 그 인간에겐 과분하지. 그는 전쟁과 싸움조차 반복되면 질려버리니까. 사토가 재미를 쫓는 속도. 그건 아무도 따라가지 못 해.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지.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으니까.

샌프란시스코의 오락실. 사람들은 휠체어를 기다린다. 일명 휠체어 샘. 이 오락실에서 가장 많은 하이스코어를 보유하고 있는 남자. 얼마 가지 않아 입장하는 휠체어 샘. 오늘의 게임은 1인용 스페이스 블래스터. 그가 유일하게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순간. 사토의 두 번째 친구. 역시 게임. 드디어 대체재 취급을 지나 온전한 취미로 남는다. 간만에 달성한 하이스코어. 남는 것은 관심 없지만 기록은 잊지 않는다. 과시해야 도전자가 찾아오는 법. 그러나 오락실 조이스틱으로는 SA 다음 M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SA 다음은 T, 그리고 O. 사람들은 샘의 동양적인 외모로 그게 그의 본명일 거라 짐작한다.

포커페이스는 7년간 나라에 바친 공로와 신체적 장애로 도주 위험이나 범죄 재발 우려가 낮다는 점을 참작해 사회로 나가는 것이 허락됐다. 단, 불명예 제대인만큼 군인 혜택은 완전 몰수. 미련은 없음. 인생에 남은 재미는 신작 게임 기다리기. 하이스코어 갱신하기. 전쟁과 멀어지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삶.

그곳에 초대 없이 찾아온 손님. 다양한 사업을 하는 외삼촌. 그가 원하는 건 최근에 새롭게 진출한 나라에서 벌어질 살인 청부나 조직간 항쟁에 대비하기 위한 베테랑 군인의 경험. 교관으로서의 스카우트 제의. 좀 더 날것의 싸움과 의무도 명예도 없는 야만적인 전쟁의 부름.

이에 대한 사토의 대답은?

“미안하지만, 곧 팩맨 신작이 나올 거라서…….”

실력으로 부리는 꼼수야 그렇다 치지만, 컨트롤러 하나가 고장 난 상태에서 하는 게임은 재미없다. 일부러 난이도를 올려 어렵게 깨는 게임과 기행으로 클리어해야 하는 게임은 다르지. 그건 지치기만 하고 피곤하잖아. 그런 건 게임이 아니야. 누가 게임을 지치고 힘들려고 해? 그런 사토를 붙잡는 말. 그럼 마침 잘 됐네요. 그 나라가 바로 팩맨을 만든 나라니까요. 팩맨만이 아니죠. 프로거나 디그 더그, 동키콩도 있고.

멈추는 휠체어. 샘솟는 관심.

사토는 미국에 오래 있었다. 오래 있으면서 여러 가지로 충분히 할 만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여전히 퀘퀘한 게임 센터를 차지하는 아케이드 게임에만 매달려 있어서.

사토는 일본으로 떠난다.

또다시 흐르는 세월. 휠체어 앞에 4열 종대로 선 조직원들. 사토는 그들에게 올바른 총기 파지법과 사격에 관해 가르친다. 구역 확장을 위해 매일 같이 싸우는 조직들. 전장이라 부르기엔 좁고, 저열하지만 분명히 싸움과 갈등이 있는 그곳에서 사토는 조용히 살아간다. 인생에 남은 재미는 여전히 신작 기다리기. 하이스코어 갱신하기. 사업을 도우니 확실히 돈 받을 구석은 늘었다. 손에 들린 건 닌텐도 게임보이. 카트리지만 바꾸면 어디서든 게임이 가능하다니. 너무 빨리 좋아진 세상. 덩달아 매일매일 격해지는 조직간 항쟁. 그러나 사토의 관심은 테트리스 하이스코어 갱신에 꽂혀있다. 그날도 마찬가지.

상대 조직의 습격. 마찬가지로 항쟁에 지친 그들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낸 타개책. 우두머리 쓸어버리기. 습격을 눈치챈 사토는 재빨리 휠체어를 넘어트려 회피. 무차별 난사에 휩쓸린 것처럼 적의 방심을 유도. 확인 사살을 위해 다가오는 적을 제압 후 한순간이나마 경계 태세를 무너트린 조직원들을 차례차례 죽여나간다. 탁자에 기대서, 혹은 의자를 짚어서. 없는 오른쪽 다리를 보충해 그때그때 대응하기. 일방적인 교전에 걸린 시간 2분. 급습에 당한 조직원들은 외삼촌 포함 전원 즉사. 생존자는 사토 본인 하나.

그러나 게임기가 박살 나서 하이스코어는 갱신 실패.

곤란한 상황에 남은 건 어두운 세계의 공용룰.

조직을 건드린 자는 끝까지 쫓아가서 죽인다.

다섯 번의 계절을 지나는 사토. 화기로 밀어붙이는 게 전부인 전략에 죽기도 쉽지 않다. 다리 하나가 없는 그를 얕보던 갱단은 이제 들이 되었고. 점점 초조해진다. 넘어가기엔 용납하지 않는 자존심. 그럼에도 모른 척, 손을 떼기에는 손해가 막심하다. 조직원 몇백 명을 넘어가는 피해. 그만큼 쌓이는 세계 각국의 원한들. 갱단의 골칫덩어리 사토.

그의 종착지는 눈 오는 겨울. 신이 태어난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리스가 장식된 컨테이너 항구. 특수부대 출신 엘리트 군인의 실전 경험에 몇 번이고 당했던 갱단들은 아예 그의 손에 대못을 박았다. 완전히 무력화된 사토 앞에 모인 갱단들. 5년간 사토에게 앓았던 복수를 위해 모인 그들은 통일성이 없다.

미간에 들이밀어진 총구. 죽음 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은 샌프란시스코의 오락실. 남기는 유언은?

하이스코어는 올렸으려나.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게임이라도 몇번이고 하다 보면 잘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인생은 결국 게임이 아니라서…….

“어?!”

“뭐야?!”

“뭐지?! 어?”

자기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건 눈앞에 적의 머리를 쓴 다음. 사토 또한 느낀다. 몸이 움직이길래 움직여서 일단 죽였는데, 뭔가 이상하다. 메워지는 이마 구멍. 마찬가지로 못이 박히며 뚫렸던 손바닥의 구멍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상한 건 복근과 무릎위로 남은 오른쪽 허벅지에 힘을 주지 않아도 온전히 버티고 설 수 있는 몸.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발바닥의 감각. 재생된 다리. 과거가 새겨진 흉터마저도 사라지고. 경악하는 갱단원들. 황급히 총구를 들이민다. 넌 대체 뭐야! 겁먹은 목소리. 지옥에서 돌아온 사자? 괴물의 탄생? 혹은 신의 또 다른 뜻? 인류 진화의 첫걸음인가? 아니면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의 첫 반항? 똑똑한 사토는 금방 상황을 이해한다.

짤그락.

“누가 동전을 넣어준 모양이네.”

인생도 그렇게 될 수 있었구나. 항구에 모인 갱단들은 다시 한번 사토를 죽이기 위해 검과 총을 뽑아든다. 이어 하시겠습니까?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 플레이어의 결정을 기다리는 화살표 커서. 컨트롤러를, 직전까지 보스가 쓰고 있던 헌팅캡을 집어든다. 그것에 관해 사토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확실히, 나가사는 그를 이해했을지도 모르지. 같은 아인이니까. 삶과 죽음에 대한 리스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없다는 것. 마음에 안 틀면 몇 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을 할 수도 있지. 거기엔 분명 아인만이 알 수 있는 쾌감이 있어. 하지만 그래서 뭐? 아인도 결국 인간이야. 아인이라고 해서 삶을 장난으로 치부한적없다고. 사토 같은 아인? 웃기지 마.

당신들의 연구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어. 사토는 아인이기 때문에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야. 그는 아인이기 이전에 사토였기 때문에 그랬던 거다.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뒤.

이 세상에 사토 같은 아인은 없어

다신 존재해서도 안 돼.

*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아인인 게 밝혀진 군인 세 명 중 두 명은 프로젝트 중 정신적 고통을 호소. 한 명은 탈영을 시도했다. 아인을 영구적으로 죽일 방법이 없는 현재, 실험 중 생기는 불안 요소는 반영구적으로 안고갈 위험이 된다. 아인의 IBM은 심리적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논의한 끝에 사토를 베이스로 한 아인 부대 프로젝트는 폐기하기로 결정. 국가는 그들에게 맞는 훈련 메뉴얼을 아예 다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해당 프로젝트 최종 단계에서 진행하려던 사토와 협상, IBM 활용 방법을 포함하여 그가 아인으로서 터득한 실전 지식을 빼 오는 계획은 나가사 케이의 증언 토대로 불가능하다고 판별. 이에 따라 내려진 사토의 처분은 현상 유지. 게임을 멈출 자신이 없다면 다시는 키지 않는다.

사토는 인류가 그를 완벽하게 죽일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 것이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그 외
작품
#아인
캐릭터
#사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