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한문단그거
관리자이담관리자 노장 주양 한순 공구이담공구
관리자이담관리자 / 410 Gone(*HTTP 오류 410, (파일이) 존재하였으나 사라졌음.)
아, 이건 텄군.
그의 손이 발할라의 한구석을 툭 짚었다. 지상과 접촉하는 걸 막아둬야 했을까? 하지만 카페 에티카 프로젝트도 있었고, 철학자들 중에 인류애와 연관 없는 이도 없었고…. 철학 폴리스에서 퍼진 그 역병같은 것은 눈 깜박할 새 다른 폴리스를 넘보고 있었다. 격벽을 올린 '노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발할라 전체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발할라의 지면을 두드릴 때마다 판이 흔들렸다. 철학자들은 한 가지만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타 폴리스와 괴리를 줄이려면 전부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수밖엔 없었다. 물론 그는 좀 더 섬세하고 상냥한 -머리를 열어 기억을 조작한다던지- 방법을 알았지만 그건 너무 귀찮았다.
그는 지루한 눈으로 체스판을 치우듯 발할라를 기울였다. 2500여년의 철학사가 설탕 조각처럼 깨져나가다 이내 사멸했다. 새 비바리움에는 얼마 안 되는 사람과 단풍 숲에 홀로 서 있는 오두막이 남았다.
그는 그 공간에 숨을 불어넣었다. 기실 발할라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일부였다. 숨결 중 얼마는 하늘의 구름이 되었고 몇 갈래는 바람이 되어 첫 번째 사람의 뺨을 간질였다. 끝맺는 숨이 파랑새가 되어 오두막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그 오두막 속에서 사람이 나오고,
"…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관리자? 왜 전부 없앴나?"
아, 관리자로 명명된 것이 눈을 빛내며 웃는다.
"나아지고 있었어, 미약하지만 나아지고 있었다고! 시간이 지나면 격벽을 내려도 된다 한 건 자네였네, 관리자."
-이담.
"대답해."
-제가 그럴 이유가 있나요?
관리자가 해사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 파랑새도 그렇게 웃고 있을 것이다.
노장 / 프로그래머 3대 미덕 - 나태함 성급함 자만심(/Larry Wall, Perl 언어의 창시자)
힘들지 않나. 관장은 어느 날 그렇게 불쑥 물었다. 책을 얼굴 위에 덮고 있던 탓에 첫 문장은 그를 혼내는 것처럼 들렸다. 장주는 황급하게 안대 대신 썼던 책을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 힘들지 않냐고요?” 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지 않느냐고? 당연히 힘들지! 이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해커 노릇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일이 안 힘들 리가 있겠는가? 장주는 그렇게 대꾸하는 대신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여기서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너는… 어리니까.”
“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차라도 마시련?” 이담이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지며 몸을 물렸다. 도서관은 이담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렇게 보내면 장주는 또 그를 찾느라 시간을 한참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손목을 붙잡았다.
“됐어요. 이리 와서 수다나 떨어요.”
“차는?”
“뭐 이런 시대에. 물이라도 받아 마시면 감지덕지지? 이야기나 좀 해요. 맨날 내 이야기만 듣고 당신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고.”
“내 이야기는 들려줄 것이 없어.”
“그럼 도서관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책이라도 이야기 해 봐요.”
이담은 마지못해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맹가와 순황은 다른 곳으로 물자를 구하러 나갔고, 공구는 또 외진 곳으로 가 몰래몰래 지식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 넓고 넓은 도서관에 이담과 장주 둘만 남아있었다.
“음……. 책이 너무 많은데.”
“그럼 100번대로 한정하고.”
“도덕경?”
“자기랑 똑같은 책을 읽네….”
“너는?”
“저요? 저 요즘 책 안 읽은 지 좀 됐어요. 글자는 컴퓨터 언어로 충분하지…….”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는 한 마디도 못 한다. 장주는 평소처럼 여우같이 웃었다.
주양 / 이일분수理一分殊
“발할라에도 달이 뜨는군.”
“새삼스럽게요. 매번 같은 달이잖습니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순 없다고.”
“아아, 희랍(*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였나? 양명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와 한창 설전을 벌이던 옛 사상가를 떠올렸다.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주장했던가. 서양 철학은 동양과 맞는 면이 없어 -인간의 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같았지만- 큰 관심을 두진 않았던 것 같다.
“어제의 달과 오늘의 달은 같을까?”
“어제의 저와 오늘의 저가 다르지 않으니 같겠지요.”
“무슨 근거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하늘이 안배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글쎄,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진 않을 것 같은데.”
“어째서요?”
창백한 달빛이 주자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색이 온통 붉은 탓에 서늘하고 차가운 밤공기와는 대조되는 색이 양명의 눈앞에서 반짝였다. ‘주자’는 때때로 알 수 없는 말을 했고 양명이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의뭉스럽게 웃었다. 꼭 주자가 아닌 것처럼…. 음, 발할라는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사후세계다. 그들은 영혼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비록 신진대사가 활발하지만- 그 실재는 지상에 남겨진 저서와 연구에 기반한다. 실재하는 사상이 부정당한다면 발할라의 사상가들 역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고 의학 폴리스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주자가 끝내 입을 열었다. 밤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어제 자네를 죽였을 것 같거든….”
한순 / 상저옥배象箸玉杯
생일이지 않나, 하고 불쑥 내밀어진 상자의 안에는 생전 그가 좋아하던 찻잎이 가득 들어있었다. 한비는 그것을 물끄럼 내려다보다가 감사합니다, 하고 상자를 받아들었다. 죽은 이상 생일과 기일은 유의미한 무언가를 가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특히 유교는- 꼬박꼬박 그런 날을 챙겼다.
한비는 잠시간 순황의 생일과 기일을 헤아렸다. 후대엔 그들의 사상만 남았을 뿐 생일같은 사소한 건 기록되지 않은 탓에 떠올리는 것이 늦었다.
"… 곧 생신이시군요."
"아, 그렇지. 굳이 챙겨줄 필요는 없네. 생몰년도 미상인 이들도 다 그렇게 하고."
"제 탄신일과 기일도 미상입니다."
"그래도 너는 내 제자였잖나."
"제자가 스승의 탄신일을 챙겨주는 게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 과한 건 안 돼."
과한 것? 바람빠지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여전히 제자에 대해 많은 것을 몰랐다. 설마 천하의 한비가 적정선을 모르겠는가? 한비는 그러는 대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고 일축했다. 순황은 떨떠름한 낯으로 긍정하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졌는지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한비는 그 자리에 남아 상자 안을 다시 뒤적였다. 칸마다 분리된 곳에 행인차, 녹차, 백차 따위의 찻잎들이 정갈하게 묶여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 스승의 인애를 잠시 감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순황의 인애는 찻잎 특유의 씁쓰름한 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구이담공구 /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스페인 속담.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
“안 자요?”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제가 지켜야지요.”
“누구를요.”
“… 주무세요, 이담님. 사막의 밤은 가혹합니다.”
남자가 생긋 웃었다.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꼭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 같았다. 이담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그렇다면야, 하고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침대에 완전히 누운 것을 확인한 남자는 걸어잠근 문과 블라인드를 내린 창문 사이의 벽에 기대어 섰다. 저 상태로 하룻밤을 샐 모양이었다. … 불행이라면 최이담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남자가 눈으로 잠들기를 강요하는 걸 애써 무시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말마따나 사막의 밤은 가혹했으므로, 이 조용한 방 안에선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비명소리, 무언가 터지는 소리, 고함 따위를 대화로 묻어야겠다는 강박이 들었다.
“이전엔 뭐 하고 지냈어요?”
“… 주무시는 게 좋을텐데요.”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 이전엔, 글쎄요. 공공연히 말씀드릴만한 것이 아니라.”
그러기엔 제 눈앞에서 타인의 머리를 날려버리지 않았나. 이담은 교복 니트에 튄 피를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당황해하며 -어쩌면 그것도 흉내낸 것 같았지만- 세탁해주겠다 했으나 그럴 수 있었던 건 하얀색 셔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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