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코하] 계절이 바뀌기까지, 앞으로 일주일

2024년 1월 20일 디.페스타 발행

여름편 上 

도쿄의 여름 끝자락이 기억 너머를 비추고 있었다.

 

나무에 가려진 햇빛은 아스팔트 길 위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그려낸다.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덧칠해지고 며칠 전 내린 비가 만든 물웅덩이들이 공원 곳곳에 남아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뜨겁고 습했지만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새들의 울음소리와 이파리를 따라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어느새 여름의 마지막이였다.

 

공원의 구석, 한산한 곳에 놓여있던 벤치에는 어느새 누군가가 앉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작은 물체가 쪼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10엔짜리 동전이 이쪽으로 데구루 굴러오고 있었다. 동전은 점점 속도가 느려지다 소녀의 발밑에서 빙글빙글 돌며 멈췄고 이내 잠잠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는 카메라 손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이곳은 역사를 간직한 교류와 휴식의 장, 사람들로 가득 찬 휴일의 우에노 공원이다.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 아즈사와 코하네는 홀로 시부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을 찾았다. 아즈사와 코하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자주 이렇게 먼 곳까지 사진 촬영을 나오곤 했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날도 지금처럼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이던 걸로 기억한다. 오래전의 추억을 떠올리던 코하네는 자판기 앞에 멈춰 서서 지갑을 열어 잔고를 확인했다. 남은 잔돈들을 한데 모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철커덕, 소리를 내며 음료수 한 병이 배출구로 굴러 나왔다. 음료수병을 꺼내 한 입 들이키면 퍼지는 시원한 목 넘김이 잠깐의 갈증을 식혀주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우거진 숲 사이로 저물고 있는 태양이, 조금씩 주황빛이 나타나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마치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금세 어두워질 거라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음료수병을 매고 있던 분홍색의 크로스백에 집어넣고 태양이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점차 느긋해지는 늦여름의 온도와 아직 식지 않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여느 때와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풍경이다.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 속에서 여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면 어느새 지하철이었다. 짙은 상아색의 건물 뒤로 초록색의 "우에노"라는 간판이 보였다. 주말의 지하철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복작거리기 일쑤였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빼곡하게 늘어선 개찰구가 눈에 들어왔다. 출발하기 전에 뽑아둔 지하철 승차권을 꺼내 투입구로 밀어 넣자, 개찰구가 열리고 들어간 승차권은 곧바로 다른 출구로 튀어나온다. 코하네는 그 모습을 보다 이유 모를 마음의 울림을 느꼈지만, 이내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을 알려주는 간판대로 이리저리 걷고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열차 플랫폼이었고 이미 도착해있는 열차 위로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오늘이 곧 끝나간다고 말해주는 듯한 그 색깔을, 코하네는 좋아하지않았다. 그 색을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붙잡고 싶었다. 서둘러 지하철 칸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에 앉고 흰색 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이어진 줄을 타고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와 함께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노랫소리와 겹쳐지는 오래된 긴자선의 덜컹덜컹거리는 출발음을 끝으로 코하네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하네는 잠에서 깨어났다. 듣고 있던 음악 앱은 플레이리스트 끝까지 재생해 버린 건지 어느새 멈춰있었다. 천천히 몸을 움직어보려했는데 스마트폰과 연결된 줄 이어폰에 걸려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이어폰을 빼면 그제서야 아무도 없는 지하철의 적막 속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어..."

 

앞을 바보려고 해도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인지 분간이 어렵다. 또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 열차의 조명은 모두 꺼져있는 것 같다. 그대로 종점까지 잠들어버린 거라면 이곳은 긴자선의 종점, 시부야역일 것이다. 종점이라 내릴 역을 지나쳐버릴 일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빠져 천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코하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확 정신이 들었다. 소동물을 닮은 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면, 그제서야 익숙한 노란색 후드티와 검은색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며 위쪽으로 시선을 보내면 잊을 수 없는 올리브색 눈동자와 모를 수가 없는 얼굴, 그리고 부스스한 호박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 참, 한참 불렀어."

"시...시노노메 군?!"

 

1년 전 우리 모두를 떠나간

 그 시노노메 아키토가 바로 눈앞에 서 있다.

 

"어... 어디서... 아니, 그..."

 

코하네의 횡설수설에 아키토는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다. 머리가 조금 길었을까. 노란색 브릿지 부분이 조금 색이 바랜 것 같기도. 오랜만에 보는 그 미소가 어색하고 코하네에게는 조금 쑥러우면서도 그리웠고, 또 동시에...

 

"여유롭게 담소나 나눌 때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아키토는 코하네의 손을 잡아끌었고, 생각에 빠져있던 코하네는 자기도 모르고 아키토의 손을 잡아버렸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열차 안에 다른 승객들은 아무도 없었다. 꺼진 조명 아래 열차 손잡이가 혼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에 코하네는 한기가 가시는 기분이였고, 찰나 느꼈던 위화감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알았어! 잠시만..."

 

코하네는 아키토의 손을 놓고 서둘러 자리에 놓아뒀던 가방을 챙겼다. 아키토는 닿았던 손을 잠깐 멍하니 쳐다보다가 머리를 몇 번 긁적였다. 코하네가 가방을 들어 올리던 그때 미처 잠그지 못한 크로스백에서 포카리 스웨트 하나가 굴러나온다. 아키토는 도르르 굴러가던 페트병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더니 능숙하게 발로 멈춰 세웠다.

 

"하여간... 자, 여기."

 "고... 고마워..."

 "여전하구나. 너."

 

아키토에게서 페트병을 건네받는 순간 둘의 손끝이 살짝 닿았다. 처음 마셨을 때의 차가움은 사라지고 이미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린 포카리스웨트 병이지만, 그 너머로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은, 이 온기를 소중히 하고 싶다고, 코하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덕분에 다시 예전처럼 미소 지을 수 있으니까.

 

"...후훗, 그럴까나..."

 

나가는 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오래전에 정차한 열차의 문은 한참 전부터 열려있었다. 아키토를 따라 열차 문을 지나 플랫폼으로 나와 에스컬레이터와 계단들을 몇 번이고 내려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하철 역사 한복판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역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코하네."

 

기분 탓일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뭘 멍 때리고 있어."

 "...응?"

 

빨리 나가자. 아키토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코하네의 뒷편을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스크램블 스퀘어로 이어지는 출구가 눈에 들어온다. 짧은 에스컬레이터 위로 끝 무렵의 노을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구 밖으로 나가면 완전히 주황색으로 물들어버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매일 보는 하늘인데, 오늘따라 왠지 그리운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새콤달콤한 기분이라고 코하네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아마 지금으로부터 1년 하고도 반 정도 지났을 과거의 어느 날, 둘은 함께 주황빛 노을 아래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던 길, 코하네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몰래 모두에게 줄 선물을 계획하고 있었다. 살 물건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겠다는 핑계를 대는 코하네에, 아키토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같이 가주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어느 날의 추억이 천천히 재생된다.

 

"시노노메군, 기억나?"

 

오렌지빛 노을 아래에서, 그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때도 이 거리에서...”

 

어라,

 그날의 당신이, 어떻게 지금 여기에...

 

그 순간 마치 플래쉬가 터지는 것처럼 묻어뒀던 기억들이 코하네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녀석... 그런... 불연속적인 기억 속의 한 장면, 그 무엇보다도 다급하고 시끄럽던 그 목소리들을 코하네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었을리, 없어... 분명...

 

귓가를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코하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버렸다. 잠시 뒤 머릿속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서야 옆에 있던 아키토가 떠올라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건 또 무슨 장냔이냐며 황당해하고 있을 아키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 시... 시노노메 군?"

 

그런데 서 있던 자리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아키토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던 코하네는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ー였을까. 하지만..."

 

그 온기만은 진짜였는데.

 

코하네는 닿았던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코하네를 반겨주는 건 거실 창문 너머로 비쳐오는 끝 무렵의 태양이다.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거실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늦은 저녁의 불 꺼진 집, 창문 밖에서부터 번져오는 주황색으로 온 집안이 그저 물들어갈 뿐이다. 엄마? 아빠?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책상 위에 놓여있는 어느 물체에 시선이 닿았다. 가까이 다가가 종이를 들춰보니 코하네에게 익숙한 필체로 무엇인가가 적혀있었다.

 

일주일 정도 여행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있으렴.

 

코하네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종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필체로 보아 자기 부모님이 쓴 것은 아마 확실할 것 같다.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그것도 일주일이나? 코하네는 급하게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연결음은 끝없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 뚝 끊겨버렸다. 지금은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신호는 닿지 않고 사무적인 안내 멘트만이 귓가에 맴돈다.

 

“무슨 일 있는걸까...”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밤 9시를 가리키고 있다. 거실 창 너머로 아직 다 저물지 않은 노을의 붉은색이 코하네를 비췄다. 평소라면 태양은 당연히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도 남았을 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 부모님부터 늦어진 일몰, 그리고 아키토와의 일까지. 이 모든 일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

 

코하네는 오렌지빛 하늘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노곤한 몸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얼굴에 와닿는 푹신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기분 좋아 몇 번 꾹꾹 눌러보다 그대로 엎드려 누워버린다.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면 창문에 달린 커튼이 눈에 돌아온다. 코하네 본인의 취향으로 골랐던 저 커튼은 흰색의 속 커튼과 분홍색의 겉 커튼으로 이루어진 이중커튼이였다. 아직 암막커튼을 펼치지 않아 반투명한 속 커튼이 드러나 있었고 그 너머로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이 드리워져 있다. 팔을 뻗어 커튼을 살짝 젖혀보면 새까만 풍경에 코하네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쳐 보였다.

 

기이한 상황에 처한 스스로를 바라보는 표정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암막 커튼을 풀어 내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맞은편의 벽을 바라보면 코하네가 직접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는데, 그들 중 눈에 뛸 정도로 크게 걸려있는 사진은 비비드 배드 스쿼드의 첫 번째 이벤트를 위해 찍었던 사진이였다. 새삼스럽지만 저 사진을 찍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더란다. 어디를 배경으로 찍어야 할지도 한참을 고민했고, 사진을 찍고 나서도 편집과 보정에 많은 공을 들였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나서 보여줬을 땐...

 

"..."

 

코하네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곧 침대 위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무언가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스마트폰 자판을 한참이나 두드렸고, 잠시 뒤 스마트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흘러나오는 통화 연결음에 귀를 기울이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 통화 종료 버튼에 손을 갖다 대려는 찰나.

 

"...여보세요?"

 

잘못 들었을 리 없는 목소리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코하네?"

 

이곳은 꿈속도, 현실도 아니였다.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어?"

 

통화는 한동안 이어졌고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코하네는 급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적당히 외투만 걸치고 신발도 구겨 신은 채로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집에는 적막만이 가득했고 작은 창문에 달려있던 동물 캐릭터 모양의 가랜드만이 천천히 흔들렸다, 불도 켜져 있는 채로.

 

 

한 여름밤의 공원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온통 불투명한 여름 공기, 눅눅한 밤바람이 코하네의 얼굴이 닿았다. 그저 정신없이 달렸다. 가빠오는 숨과 빠르게 뒤는 심장 사이에서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열대야가 만들어낸 환상은 아닐까? 아니, 그렇다 해도, 아직은 이 꿈속을 떠나고 싶지 않아. 코하네는 그렇게 믿었다.

 

이제는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똑같은 모양의 가로수들을 지나서, 모퉁이를 지나 꺾으면 저 멀리 가로등 아래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기다렸다고, 코하네.”

 

이쪽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오는 인영에, 가로등 불빛이 천천히 그 얼굴을 드러냈다.

 

“...응.”

 

언젠가의 달빛 아래에서 당신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시노노메군.”

 

그러니까, 들어줬으면 좋겠어

당신에게 바치는 나의 7일을.

여름편 中 

매미 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히던 여름을 기억한다.

그 여름의 온도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당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밤을 향해 걷던 시간들, 몇 번이고 떠올리고 되뇌어봐도 이제는 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여름날에, 도쿄의 여름은 여느 때와같이 푸른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높게 솟은 건물들 사이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곳은 시부야의 어느 한 공원. 여유로운 주말 오후,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공원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던 찰나, 갑자기 지지직하는 노이즈 소리와 함께 음악이 뚝 끊겨 버리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이 버튼을 다시 눌러보면...”

그리고 이 소음의 범인인 코하네는 공원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 작은 스피커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오늘 코하네는 연습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 혼자서 스피커와 카메라 등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잔잔한 음악을 틀어뒀던 스피커가 갑자기 혼자서 전원이 꺼지더니 이후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 골치가 아프던 참이였다.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보기도 하고 CD를 바꿔보거나 해도 음악이 뚝 끊기는 현상은 여전했다.

"으... 어쩌지..."

“어, 코하네."

그렇게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던 코하네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아키토가 보인다. 시계를 보면 어느새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았다. 코하네는 자기도 모르게 고장난 스피커를 어떻게든 가려보고자 허우적댔고, 아키토는 그런 코하네를 의아해하며 쳐다보다가 옅게 웃었다.

"뭐야, 준비는 아직이야?”

“시노노메 군! 그게...”

흐음, 아키토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몇 초면 충분했다.

‘뻔하지, 남들 오기 전에 나름대로 혼자서 해보려던 것 같은데...’

코하네의 성격상, 게다가 모처럼 자신이 먼저 제안한 기획이기도 하니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을 것이 분명했다. 코하네 머리 위로 보이는 익숙한 스피커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도 아키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피커가 잘 안돼?”

”...!“

하여튼 정말로 읽기 쉬운 반응이다. 주변을 휙 둘러보니 예상대로 스피커부터 마이크, 카메라 등 라이브 공연을 위한 장비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혼자서 세팅하기엔 벅찼을 텐데. 코하네 혼자 일하게 만든 것 같아 아키토는 괜히 불편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담 갖지 않아도 괜찮은데.

“뭐어, 기회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고개를 푹 숙이는 코하네를 보며 아키토는 순간 흠칫했다. 이크, 열심히 준비한 사람한테. 말이 심했나. 말없이 바닥만 보는 코하네에 아키토까지 어쩔 줄 몰라 계속해서 코하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 보려던 참에, 코하네에게서 작게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역시...”

"응?“

".....해보고 싶어!”

제대로 듣기 위해 코하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던 찰나, 순간적으로 나온 큰 목소리에 아키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라지 않은 티를 내며 잠시 숨을 고르고 보니, 코하네는 어느새 아키토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쭈구려 앉아 스피커 이리저리 건드려보고 있었다.

“너...”

“금방 끝날거야! 이것만 어떻게 잘 조정하면...”

그런 코하네를 아키토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피식 웃어 보이더니 코하네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였다.

“잠시만.”

“엇... 시, 시노노메 군?”

“...여기, 전원 제대로 안 꽂혀있잖아.

아키토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스피커의 아래쪽, 전원선이 연결되는 부분이었는데, 정말로 선이 세게 꽂혀 있지 않고 조금 헐겁게 연결되어 있었다. 알아챌 수 있었다. 즉, 조금 전의 음악이 끊기던 현상은 모두 전원선이 헐겁게 연결되어 있던 때문이였다.

"...자, 이제 됐다.”

“...”

코하네는 정말 별거 아닌 실수였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키토는 그런 코하네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 잽싸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크흠, 아키토가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코하네를 바라보았을 때 코하네는 여전히 벙쪄있는 표정으로 스피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키토는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은채로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뭐해? 연습 시작하자.”

“...으응.”

아키토에 말에 코하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브 공연을 할 공터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낸 아키토가 따라 오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였다. 그런 아키토에 코하네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리고.”

아키토는 코하네가 보지 못하도록 붉어진 목덜미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혼자 준비하지 말고... 나도 불러.”

“저기, 코하네?”

“....응, 어, 어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코하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 카페 안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 곳은 상점가에 위치한 한 디저트 카페로 예전에 다른 친구들과도 온 기억이 있는 곳이였다. 맛있는 케이크와 달콤했던 카페 모카가 기억에 남아서 또 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면 자신의 앞 자리에는 시노노메 아키토가 앉아 있다.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 위는 이미 팬케이크를 포함해 각자의 취향이 담긴 디저트와 음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던 탓인지, 코하네가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분명 어젯밤에 공원에서 만나고, 다음 날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그리고...

"코하네. 팬케이크도 먹어볼래?"

"아, 응!"

아키토가 건네는 접시를 받아 팬케이크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한 입에 먹어버리는 코하네. 그런 코하네를 바라보며 아키토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느긋한 시부야의 정오, 둘은 간만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만끽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오면 옷 가게와 작은 악세사리 가게들이 잔뜩 늘어져 있는 번화가가 나온다. 한 손에는 각자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들고 길거리를 구경하다 어느 한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둘이 멈춰 선 곳은 가게 외부에 작은 열쇠고리들을 걸어둔 진열대 앞이였다. 여러 종류의 동물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들은 특이하게도 안에 자석이 들어있어 두 개를 가까이 붙여 놓으면 찰싹 붙는 종류였다.

"이 인형 시노노메군이랑 닮았네.“

"...그보다는 이쪽이 더 너랑 닮은 거 같은데.“

코하네가 가리킨 것은 주황색을 띄는 고양이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아키토는 자신의 얼굴과 열쇠고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코하네를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햄스터 모양의 열쇠고리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시노노메 군이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그 옷 가게에서는 아키토가 코하네에게 비싼 옷이라고 장난을 치거나, 코하네의 코디를 골라주곤 했던 추억이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 아키토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고, 그 이후로는 코하네도 이 가게에 와본 적이 없었다. 신난 표정으로 즐거웠던 추억들을 이야기하는 코하네와 상반되게, 아키토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작게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안 계실텐데...”

“응? 뭐라고?”

아키토는 코하네의 말도 듣지 못한 채 생각에 잠긴 듯 굳은 표정으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시노노메 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변한 태도에 코하네가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이내 원래대로 다시 표정을 풀고는 평소보다 더 다정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곧 해가 질 거야.”

“아, 응...”

아키토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면 저녁노을이 지기 전의 어스름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오렌지빛으로 물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시간은 꽤나 지난 것 같은데. 요즘 따라 해가 늦게 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코하네가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막 확인하려던 참에, 아키토가 손을 내밀었고 코하네는 아키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빠져나오면 횡단보도 너머로 지하철역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건너편의 사람들 뒤로 흰색과 초록색의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코하네는 신호가 바뀌고 나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열차가 달리고, 정차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열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고, 또 아무도 탑승하지 않았다.

코하네는 새삼 이곳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1년 전에 죽은 아키토는 다시 제 앞에 나타났고, 분명 끝났어야 할 여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만난 시노노메 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여름이지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지하철을 다시 탄다면...

"코하네. 아까도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코하네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키토가 말을 걸어왔다.

"응? 내, 내가? ...아무것도 아니야."

집중이 깨진 탓에 생각하던 내용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렸고, 다시 열차가 있던 쪽을 쳐다봤을 때 열차는 이미 지나간 후였다. 코하네는 다시 걸어가고 있던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아키토는 조금 전까지 코하네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빤히 쳐다보다 코하네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이상한 여름 속에 남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

여름편 下

낡은 라이브 하우스의 계단을 내려가면 우리가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소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어느 오래된 건물 앞이였다. 흰색 모자 사이로 삐져나오는 베이지색 머리카락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더 잘 눈에 띄곤 했다. 길을 찾으려는 듯 코하네는 주소가 적힌 스마트폰을 기웃거리며 건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분명 여기가 맞는... 아, 찾았다!"

코하네가 발견한 것은 바로 건물의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였다.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좁고, 또 깊었으며, 코하네가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코하네는 그 소리가 어딘가 오싹하면서도, 공연장을 만날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작고 긴 복도가 나왔고, 문을 열면 드디어 공연장이 나왔다.

"아, 시노노메군!“

무대 위로 이미 일찍 도착해 미리 준비를 시작한 아키토의 모습이 보였다.

"코하네, 늦었잖아.“

”미안, 입구 찾기가 어려워서...“

"뭐, 그럼 바로 시작할까.“

아키토는 그렇게 말하면서 코하네에게 다른 마이크 하나를 던졌다.

"으, 응!“

오늘은 원래 정기적인 연습날은 아니였으나, 다음 이벤트에서 있을 둘의 듀엣 무대를 준비하기로 한 날이였다. 아키토가 신호를 주자 음향실의 관계자는 재생 버튼을 눌렀고, 바로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 곡은 원래부터 혼성 듀엣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곡으로, 스트리트의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노래였다. 반주가 끝나면 아키토의 솔로로 노래가 시작됐다.

‘...역시 시노노메 군.’

평소 아키토의 노래 스타일과는 다른 느리고 높은 멜로디의 곡이였지만 아키토는 문제없이 소화했다. 코하네는 새삼 그런 아키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자랑스러웠으며 또 고마웠다. 부르기 꽤나 어려운 곡이라고 평가받는 이 곡을 코하네가 제안했을 때, 아키토가 바로 승낙해 줬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진행될수록 멜로디는 점점 빨라지고 그에 맞춰 분위기 또한 고조되어 간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 점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아키토와 코하네 또한 몇 주 전부터 라이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앗.’

아키토의 파트가 끝나고 코하네가 막 노래에 들어가려던 참에,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조급했는지 들어가는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평소에는 실수가 없던 부분이였는데, 어떡하지. 아키토 역시 코하네가 실수한 것을 눈치챈 듯 코하네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코하네의 태도에 아키토는 장난스럽게 씨익 미소를 짓더니, 다시 노래를 이어갔다.

“♪———!”

아키토가 능숙하게 다시 멜로디를 이끌어준 덕분에, 음정이 흔들렸던 것도 잠시 코하네는 침착하게 다시 노래를 이어갈 수 있었다. 멜로디는 어느새 무르익어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 여성 보컬과 남성 보컬이 각자의 음역대에서 최대한의 힘을 쏟아부어 지르는 파트였다. 전에 연습했을 때도 이 부분에서 몇 번 실수한 적이 있었기에 코하네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아키토의 솔로 파트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였다.

‘어라, 시노노메군.’

아키토의 파트가 끝나기 직전, 노래하고 있던 아키토가 갑자기 코하네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였다. 계속 앞을 바라보고 있던 코하네는 아키토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고, 덕분에 노래에 집중하는 아키토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방금, 그 표정은...’

노래가 끝나고 난 후, 아키토는 언제나와 같이 수고했어, 한마디만을 건네고 다시 무대에서 내려갔다. 아키토가 사라지는 모습을 코하네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착각... 이였을까.’

”그러니까, 이 열차에 타고 가면 돼?“

아키토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코하네에게는 처음 보는 한 오래돤 역 앞이였다. 짙은 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 건물은 이 곳이 만들어진 지 꽤나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고, 역 이름이 적힌 간판은 낡아 읽기 힘들었다. 코하네는 이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이 기차역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아키토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도쿄 주변에 자신이 잘 아는 곳이 있는데 내일 함께 가보지 않겠냐는 것. 재미를 위해서 장소가 어디인지는 비밀이라 했다. 코하네는 그 제안을 승낙했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규모가 그리 큰 기차역은 아니였기에 입구를 통과해 조금만 걸으면 바로 플랫폼이 나왔다. 열차는 이미 도착해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평소보다 유난히 더 푸르렀다.

“응. 오래 걸릴테니까 한숨 자고 있어.”

둘이 열차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닫혀있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열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둘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걱정하지 말라며 토닥여주는 아키토의 말에도 코하네는 조금 피곤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응.”

아키토의 말이 끝나자 코하네는 눈을 감았고, 아키토는 그런 코하네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열차는 여전히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코하네.”

아키토는 곤히 잠든 듯 불러도 반응이 없는 코하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작게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코하네가 자신의 어깨가 아닌 등받이 쪽에 기댈 수 있도록 한 다음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있어.”

복잡한 표정으로 코하네를 바라보던 아키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열차 바깥을 향해 걸어갔고, 아키토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혀 버렸다.

“하하... 살벌하네.”

아키토는 닫혀버린 지하철 문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죽은 사람은 보내줄 수 없다는 건가.”

그러고는 플랫폼 내에 위치한 한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였다. 주머니에서 적당한 동전을 꺼내 자판기 안에 넣고 버튼을 누르자 사이다 한 캔이 굴러 나왔다. 아키토는 플랫폼 안에 있는 적당한 벤치를 찾아 앉아 방금 뽑은 사이다 캔을 마셨다. 시원한 목 넘김이 상쾌했다.

“좋은 날씨네.”

눈앞에 보이는 열차는 문이 닫혔음에도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열차의 창문 너머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코하네가 보였다. 곤히 잠들어 자신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대로 열차만 출발한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키토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도, 역시.”

그러고는 갑자기 웃음을 뚝 하고 멈추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거부한 저 열차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바라왔던 적이 있었다. 그날의 풍경은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날의 마음은 아직도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 괴롭고, 힘들고, 그 어느 문제보다 어려운 것이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조금만 더 간직하고 싶다고. 그때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시노노메 군! ...아까는 실수해서 미안.”

“뭐, 팔로우 정도는 해준다고 했으니까.”

라이브 하우스에서 계단을 올라 건물을 빠져나오면 비비드 스트리트에는 어느새 완전히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키토는 이 시간대가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겠지만, 비비드 스트리트의 하루는 이제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이런 시간들이 계속되었으면, 무심코 그렇게 바라게 되는 저 하늘이, 좋았다.

“응. 역시... 고마워.”

이제는 져 버리려고 하는 저 태양 앞에서 그날의 내가 빌었던 것은.

“...코하네.”

이제는 바랄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너에 대한 것.

“할 말이, 있는데.”

경적 소리와 함께 열차는 출발했다.

아키토는 앞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고, 출발하는 열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온 플랫폼을 시끄럽게 채웠다. 그 소리가 모두 잠잠해질 때까지 아키토는 플랫폼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잠시 뒤, 열차가 완전히 떠난 뒤의 공백을 채우는 저 멀리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아키토는 고개를 들었다.

아키토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약속했던 일주일은 지났고 코하네는 이 세계를 떠났다. 코하네는 가을을 살아갈 것이고, 이 끝나지 않는 영원한 여름을 살아가는 것은 자신 혼자뿐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밤은 찾아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해가 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코하네가 떠났기 때문에. 새들의 울음소리는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듯 계속해서 메아리치며 아키토의 귓가를 울렸다.

“잘 된거지. 여기 남기라도 했으면...”

1년 전 아키토는 이상한 이 여름 속에 던져졌다. 원래 죽음이란 게 다 이런 건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과정을 거친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 세계에 도착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코하네를 이 세계로 불러온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였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살아있을 때의 기억들은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강렬한 몇몇 기억들은 오히려 더 강해지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남아 아키토의 미련이 되어 주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코하네였다. 그렇지만 맹세하건데 이 세계로 와주기를 바란 건 아니였다. 여름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형태로 소원을 이루어주곤 했기에.

열차 속에서 잠든 코하네를 다시 만났을 때의 기분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다행히 일주일은 길진 않았지만 마음을 정리하기엔 충분했던 시간이였고, 지금쯤이면 코하네 또한 현실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것이 최선의 결말이고 아키토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만, 하는데.”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그때 아키토의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면 아키토의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어... 어떻게... ”

아즈사와 코하네였다.

“아니. 이럴 때가 아냐. 지금이라도 빨리..”

당황할 틈도 없이 아키토는 그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차는 이미 출발하였다고 해도 또 다른 열차가 있을지도 몰라. 정말로 늦어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시노노메 군.”

코하네는 그런 아키토를 말없이 바라만 보다, 가까이 다가가 뒤에서 껴안았다. 코하네가 그 다음 말을 하려던 그 순간 건너편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했고, 빠르게 들어오는 열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에 묻혀 코하네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키토만은 그 대답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키토는 그 상태로 멈춰 서서 말 없이 눈물을 흘렸고, 코하네는 그런 아키토를 토닥주었다.

열차의 정적 소리 너머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고,

우리는 그 하늘색을 사랑했다.

계절이 바뀌기까지, 앞으로 일주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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