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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 AU

왕 베네 x 기린 프림

베프 by no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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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림은 나붓한 낯으로 책상의 결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주상을 뵙지 못한 지 벌써 30년째다. 나라가 기울고 요마가 들끓으니,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어서 주상을 만나 천명을 이어 감이 마땅한데, 그런다 한들 봉산을 뛰쳐나가 운명을 마주할 용기가 도통 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지 않으면 근 시일 내 프림의 짧고 긴 인생도 끝이 나는 것도, 왕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고 오직 그만이 나라를 평안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변명하자면, 왕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국들의 사정을 지켜보던 시일이 있어 오래도록 고민한 탓도 있었다. 저 연국처럼 500여년간 왕이 나라를 번창하게 하고 태평성대가 이어지는 한편, 어느 나라는 채 1년도 가지 못해 왕의 실도로 나라가 망하고 기린이 죽는다. 지금 봉산에 열린 열매도 그때 죽은 기린의 다음일 테다.

그것을 보아하니 운명이란 것을, 하늘의 명이라는 것이 무척 두려워 봉산에 몸을 꼭꼭 숨기고 문이 열리는 때만 슬쩍 사람을 돌아보기도 몇 차례. 항상 말은 내 왕은 어디 계실까, 하지만 실상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프림의 본심이다. 다른 기린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두려움이나 고통이 거세된 것도 아닐 텐데. 봉산에서 태어나 왕을 찾아 가는 기린이나, 왕을 모시면서 종종 들리곤 하는 다른 나라의 기린들에게 물어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도통 없었다. 도리어 천명이고 ‘그렇게 태어나는 생물’인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며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에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나빠 어느 순간부터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태과(*본래 십이국의 사람으로 난과로 태어났어야 했으나 식-蝕, 재해-로 인해 봉래-일본-에서 태어났다가 다시 십이국으로 돌아온 이들) 출신 기린이라는 연국의 기린만이 그를 어렴풋이 이해하는 듯했다.

기린은 왕이 죽으면 죽는다.

왕이 실도(나라와 백성을 위하지 않고 사욕을 채우거나 전쟁을 일으킴 등)하면 병을 얻고 결국 죽는다. 제 목숨줄이 누군지도 모르는 왕의 정치에 달렸다니 그것이 끔찍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자신의 동족이라는 이들은 너무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역시 그가 돌연변이 일까?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생물이라, 자연의 섭리인 건데 이에 의문을 품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가. 그런 고민하기도 수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결론은 나지 않았다. 봉산에 주저앉아 하루하루 하는 것이라고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사색하며 고민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왕과 기린, 나라와 천명, 요마와 백성, 그저 삶을 바라며 왕에게 간청하는 가련한 목숨들 ….

나라와 백성이 도탄과 비애에 빠져 누구라도 좋으니 왕을 내려달라, 바라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안다. 그 기간이 너무 길어져 이제는 절망에 가까운, 죽어가며 내는 비명이라는 것도. 거기에 30여년 왕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기린에 대한 원망이 있다는 것도. 그러니 그 하나만 위태로운 선택에 목을 걸면 모두가 행복해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프림이 선택한 왕이 폭군이든 패왕이든, 그리 좋은 왕이 아니라 더 나빠지거나 결국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이제 그의 나라는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했으므로. 하다못해 왕이 즉위하면 들끓는 요마가 잦아드니 즉위라도 해야 하는데 ….

아아, 나의 왕은 어디 계시나.

프림은 오늘도 진심인지 모를 말을 부드럽게 흘렸다. 수심에 빠진 낯을 하는 자신이 과연 연기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실로 수심에 빠진 것인가 알 수 없는 늪에 잠긴다. 발치에서 프림을 바라보던 여괴는 자기 주인이 가진 긴 고뇌를 안다는 듯 무릎께에 고개를 파묻고 이마를 문댔다. 그를 모시기 위해 태어난 자신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고민에 빠져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가진 고민에 박차를 가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에 여괴가 있음을 알고 있으나 해결해 줄 수 없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끊이질 않았다. 프림이 여괴에게 너는 어떻게 나를 기르기 위해 태어나고, 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도 바칠 수 있느냐 물어도 그것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말 외에는 전할 수 없던 탓이다. 그 대답을 처음 들었던 날의 프림이 한 표정을 여괴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올해가 승산하는 날이지?”

“예, 기린님.” 봉산의 여선이 읍하며 답했다.

이번에는 계실까, 체념에 가까운 마음이 스친다.


봉산의 문이 열리는 날이면 여선들의 경계가 높아진다. 프림이 왕을 찾지 못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혹은 중간중간 태어나는 기린이 있을 때면 그들을 납치해다가 어떻게 하면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머저리가 많은 탓이다. 실제로도 그런 머저리들에게 곤욕을 치른 것도 몇 번 된다. 그 때문에 하기 싫었던 절복을 통해 사령도 여럿 들였다. 다른 기린들은 역시나 ‘당연하게’ 하는 것임에도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가며 해야만 했다. 나만 이해가 안 가나? 이게 어떻게 당연한 일인 거지. 기린이 해야 하는 모든 삶의 이정표와 같은 역사는 프림에게 하나도 맞지 않았다. 꼭 다른 이의 옷을 빼앗아 입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절복만 해도 그랬다. 요마가 절복(계약) 하면 사령으로 부릴 수 있고, 사후 그 시체를 요마에게 내어주어 먹히는 것을 대가로 살아있는 동안 절대적인 충복을 얻는다. 하지만 프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목숨줄이 일면식도 없는 왕에게 달려있는데, 사후 시신마저 온전치 못하고 요마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니.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요마도 절복 시키지 않고 왕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그것은 끝내 불가능했다. 자신을 노리는 탐욕을 피해 도망치다가 죽을 위기를 겪었다. 스스로 몸을 지키지 못하니 봉산의 여선들에게도 피해가 갔다. 프림은 요마를 절복 시킨 첫날 방에서 숨죽여 울었다. 눈물은 없었다.

“오늘 문이 열립니다.”

“알아. 사람들을 둘러보러 가자.”

프림은 밤새 꼬박 새운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긋지긋한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으나 이것은 그의 의무였다 …. 흰 천이 몸을 감싸고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장신구가 꽂힌다. 기린이 왕을 맞이하는 것은 무척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데 이리 팔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발치에 길게 늘어지는 옷자락을 밟지 않고 우아하게 걸으며 사람 사이를 누볐다. 어디의 장군, 어딘가의 국부…. 30여년쯤 왕을 찾지 못하니 이제는 찾는 사람도 퍽 줄긴 했다. 하긴 나라를 다스리는 선적에 오르면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이들에게 30여년은 짧다. 선적에 오르지 못한 백성들만이 긴 시간에 신음하며 괴로워할 뿐이지. 하여튼 백성의 지지를 한 몸으로 받는 장군도, 인자하다 소문난 주후도, 하다못해 돈 불리는 재주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거상도 왕의 재목이 되지는 못했다. 차라리 그들 중 하나를 골라 거짓말이라도 할까 했으나 아무리 별종이라는 프림이라도, 도저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왕에게 목숨줄이 달려있다는 불쾌감 때문이 아니다.

기린이 왕을 맞이하는 것은 신성한 일이고, 기린은 그런 천명을 받은 고고한 생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왕이 아니라면 절대 무릎 꿇지 않고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그러니 왕을 맞이 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이마를 발치에 대어 왕을 맞이한다. 위왕(僞王)을 고르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절대로 왕이 아닌 이에게 무릎 꿇지 않는 이들. 백성이 왕을 바라고 있고 그 숙원을 30여년째 이뤄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러고 있으니, 프림도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스운 것은 그가 만난 모든 동족들은, 프림의 의문에 이해할 수 없는 별종 보듯 했으면서 이 전제만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천명과 기린의 생애에 불쾌감을 표하는 프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들 역시 왕이 아닌 이들에게 무릎을 꿇느니 30여년을 그저 버티다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기자신은 스스로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승산 기간 동안 무운이 함께 하길.”

또 한 사람이 불가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고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중에 오늘도 없었다. 족히 사흘을 사람들 사이를 전전하며 왕을 찾던 프림은 점점 몸이 쇠하는 것을 느끼며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정원으로 발을 이끌었다. 수명이 다할 때가 되긴 했지. 이번이 마지막인데,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래, 기린은 30년 안에 왕을 찾지 못해도 죽는다. 찾아도, 찾지 못해도 기린은 왕에 종속되고 만다. 그게 왕을 찾고 싶으면서도, 찾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모순적인 마음이 들끓어 피로에 젖은 얼굴로 부축하려는 여선을 물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봉산에 갇혀 왕을 기다리기만 하는 삶이라, 애진작 뛰쳐나가 거리에서라도 왕을 찾았어야 했나. 하지만 이만치 왕에게 묶인 생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그를 찾는 게 아니라 그가 자신을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그렇게 과한 것이었던가. 달빛이 내려 흰 털이 반짝였다. 이 세계에서 백색은 흉사에 쓰는 색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수모는 내가 백기린으로 태어나 그런가. 처연한 분노가 눈길에 스치다 사라진다.

“거기, 괜찮으신가요?”

여리고 맑은 미성이다. 밀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하얗게 새고 회안이 또렷이 빛난다. 기이할 정도의 친근감에 프림의 눈이 깜빡이고, 까맣게 죽어가는 눈에 일순 빛이 스쳤다.

“....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돼.”

“그런 줄 몰랐어요. 길을 잃었거든요.”

미쳤나? 기력 없는 몸에도 순간 피로를 잊을 정도로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봉산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승산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봉산에 오는 과정이 험난한 것도 있지만, 봉산을 오르는 과정도 쉽지 않다. 봉산의 기린들이 어려서부터 요마를 어디서 보고, 그들을 사령으로 들일까? 어린 기린들이 사령으로 들이는 요마는 대체로 봉산의 요마들이다. 당돌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 몇 번 입을 뻐금거리던 프림은 겨우 말을 쥐어짜냈다. 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곳에서 용감한 이였다.

“봉산에서 길을 잃어? 보아하니 그리 무력이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러다 죽어.”

“하하, 그러게요. 저는 무력도 머리도 평범한 수준이니까요.”

“실없기는. … 어딜 가던 중이었어?”

“기린을 만나려고 했어요.”

“왜, 너도 왕이 되고 싶어?”

“그럴리 가요. 전 분수를 알아요. 모시는 주인님이라면 모를까, 단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생물을 보고 싶었어요.”

그저 보고 싶었다며 옆에 앉아도 되나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이는 낯에 프림은 순순히 옆자리를 내어줬다. 노동과 긴 전란으로 거칠어진 손이나 삭은 무명옷, 푸석푸석해 빛을 잃은 밀빛 머리카락이 나뭇잎 그림자에 함께 잠겼다. 분수를 안다거나 하는 말이나, 연신 자신의 기분을 살피는 태도 따위를 보면 본래 성정은 퍽 소심한 것 같은데 뭘 믿고 이리 거침없이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태도에 도리어 기꺼운 마음이 드는 자신도.

“그럼 마음껏 구경해. 오늘이 지나면 죽고 봉산에 열매가 열릴 테니 백기린으로서의 나는 이게 마지막이니까.”

“왕을 찾지 못해서요?”

“… 아니야. 왕이 나를 찾아내지 못해서인 거지.”

회광반조인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았다. 별안간 마음속에만 담아두면 진심이 나온다. 세상에 유리된 것만 같아 만나는 이마다 물어보며 상처받기를 반복해, 20여년 전 이후로 한번도 내뱉어보지 않았던 말이다. 그래. 당신만을 위해 태어나 죽는 생물이 여기 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찾지 않나. 당신이 나를 찾아주어야지. 설움과 갈 길 없는 분노가 마지막 남은 심지에 불을 켰다. 척척하게 젖어 들어 아롱거리는 눈물이 백옥같은 피부 위에 수 놓였다.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찾은걸요?”

“하지만 그 중에 왕이 없었으니 의미 없어.”

밋밋하다 못해 유약하기까지 보이는 낯이 슬픔으로 물든다. 프림보다 족히 1자는 작은 체구에 울상까지 지으니 이 이상 연약해 보이기도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듦에도, 기이한 충족감과 안정감이 전신을 감싼다. 조심스레 뻗어 쓰다듬는 손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 그 품에 웅크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객관적으로도 귀하긴 하다.-을 만지는 듯 다정한 손길이 흰 머리카락을 쓸었다.

“울지 마세요. …그래도 제가 마지막에 당신을 찾았으니 눈 감으실 때까지 곁을 지킬게요.”

“날 동정해?”

“아뇨 당신을 존중해요.”

홀로 외로이 버텼을 당신을요. 다정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자장가 같아 결국 기이한 친근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에 머리를 누였다. 어리광을 부리듯 까슬한 옷자락에 눈물을 감추고 그 아래 웅크렸다. 젖어 드는 옷자락을 알면서도 별말 없이 저를 쓰다듬는 손길이 상냥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험한 봉산에서 기린을 찾겠다며 야밤에 길을 잃는 무모함을 가졌는데, 일신의 무력이라고는 쥐뿔도 없고, 신분이 높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태생은 유약하고 소심한 것 같은데 또 신수인 그에게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거침없으니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한참을 달빛 아래, 고요한 밤 내음 속에 마지막 밤에 찾아온 수수께끼를 고민하다 가물가물한 눈 위로 물 위의 잔상 같은 깨달음이 내린다.

너구나. 너인 거야. 왕이 죽으면 기린도 죽는다, 사체는 사령이 먹을 것이니 기린의 마지막을 볼 수 있는 이는 없다. 천명으로 묶여 한 생을 주상을 모시는 데 쓰는 기린은, 날 때부터 고귀하고 고상한 이 생명체는 왕 앞에서만 그 연약함을 보인다. 그의 앞에서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웅크린다. 아아, 이런 게 내 왕이라니. 그는 프림이 상상했던 왕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제 머리를 누이는 것이 고작인 얇은 다리나 머리를 빗겨주는 것이 전부인 작은 손을 봐라. 이제와서 무기를 든다 해도 범재도 되지 못할 둔재이니 무력은 일반인보다 좋아지는 것에 그치겠지. 제법 영민한 것 같긴 한데 그래봐야 글자나 조금 뗐을 것이다. 굉장한 무력이 있어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대장군도 아니었고, 하늘이 내린 천재라 수십수백 가지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자도 아니었으며, 난세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권력이나 신분이 있지도 않았다. 어떤 풍파도 굳건하게 견딜 수 있을 만큼 심지가 굳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그 어떤 사람보다 다정하고 눈이 깨끗했다.

“ …왜 이제야 찾아왔어.”

그는 프림의 말에 기이한 환희와 절망을 느낀 듯 말이 없었다. 프림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오늘 밤만 지나면 끝나는데, 왜 하필이면…, 차라리 조금만 더 늦지 그랬어…. 난, 나는 너에게 고두를 올리지 않을 거야.”

“네, 그렇게 하세요.”

…뭐? 즉시 돌아오는, 지나치게 산뜻한 것 같은 대답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그였다. 아롱거리며 떨어지던 눈물이 멈추고, 고통스럽게 읊조리던 입술이 황망함에 우물거렸다. 기이한 환희와 절망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춘다. 프림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방금 우리 되게 심란하고 감성적이었지 않아? 투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천명을 어기겠다고 입 밖으로 낸 것은 본인인데 도리어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네가 왕이 되지 못하게 천명을 어길 거야.” / “… 네.”

“너는 그러면 여전히 종노릇을 하면서 유한한 삶을 살겠지.” / “…그렇겠죠.”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는 만인지상의 자리를 네게서 빼앗는다니까??” / “그렇게 해요.”

“혹시 너 미쳤어?” / “아니요?”

태연하기까지 한낯에 프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태연한 ‘척’ 하고 싶으면 벌벌 떨리는 손이라도 잘 감추던가. 그가 나열하는 왕의 혜택보다도, 뜻한 척, 태연하게 거절하는 자리가 계속해서 비워질 경우 닥칠 암울하고 끝없이 잠겨 드는 나라의 미래가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그는 천명을 저버리겠다는 프림에게 동조했다. 단단히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나라가 비애에 빠지고 백성들이 요마에 잡혀 죽고, 굶주림에 죽고, 자연재해에 죽어가. 왕이 즉위하는 것만으로도 바람과 땅이 안정될 거고 그들의 삶이 편해질 거야. 나는 그 모든 걸 외면할 거고 너도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럼에도?”

“그럼에도요.”

“어째서?”

“당신이 그것을 희생이라고 느끼니까.”

“…….”

“기린은 천명을 받아 왕을 올린다고, 미천한 저도 알고 있어요. 그건 분명 고귀한 운명이고 의무이며 사명이겠죠. 하지만 그걸 바라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하물며 당신은 다른 기린들처럼 그걸 달갑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것 같은걸요. 천명을 외면하고 다시금 하늘로 돌아간 당신이 괴로울까 걱정되긴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날 오늘 처음 봤잖아 ….”

“그러면 한눈에 반해서 그런 걸로 할까요? 하하, 농담이예요.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왕의 그릇이 아니에요.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백성이 평화로워질 수 있는지도 몰라요. 종노릇을 하며 사느라 잡일은 할 줄 알아도 농사하는 법은 모르고, 장사는 까막눈이예요. 글 몇 글자 읽을 수 있지만, 그리 대단한 배움은 되지 못해 교양도 부족하죠. 치세에서 왕이 되어도 나라를 말아먹을 멍청한 왕이 될 텐데, 이런 흉세와 난세에 저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역사에 다시 없을 최악의 왕이 될 테죠.”

“…….”

“당신은 그걸 막은 거예요. 천명을 어겨서라도 나라를 위한 거죠.”

이름을 모르는 프림의 왕은 시종일관 슬프고 다정한 낯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렇기에 네가 나의 왕이다. 비탄과 슬픔에 빠진 이들이라면, 그것이 설령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신수일지라도 팔자 좋다며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도 놓치지 않을 다정한 사람이라 네가 나의 왕이다. 프림은 그 무릎에 누였던 몸을 애써 일으켰다. 까만 나뭇잎 그림자에 파묻혀 죽어가던 기린은 비틀거리며 달빛 아래에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그림자 사이로 그 얼굴에 당황이 물드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유쾌한 기분에 프림은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것은 속박인데, 해방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주상을 뵙습니다.”

“아뇨, 아뇨, 하지 마세요! 바라지 않았잖아요.”

“아니, 이제는 바라.”

“고작 1각 만에 마음을 바꾼 건가요?”

“원망하려거든 마지막 밤에 내 마음을 돌린 너의 달변을 탓해.”

“저는 좋은 왕이 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너를 택했다. 좋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서. 너는 이 흉세에 절대 좋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최선을 다하는 왕이 되겠지.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 차악을 고르고 자책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나는 너를 선택했다. 하지만 프림은 그 모든 말을 삼켰다. 대신, 괜찮다고 말하기로 했다. 지금껏 무언가에 막힌 듯 괜찮다고 말하려고만 하면 속이 답답했는데, 그저 그의 왕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실로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괜찮아. 같이 감당할게.”

“제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천명이야.”

“어기려고 했으면서.”

“이제 지키잖아.”

두려워요. 나도 그래. 소년은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일어서, 프림의 앞에 섰다. 어떤 거대한 흐름의 인도를 느낀 듯 그 이상의 거절은 없었다. 거대한 짐승이 등을 웅크려 작은 발등 위로 이마를 올렸다. 완연한 복종과 서약 표시다. 거칠게 휘날리는 바람이 점차 잦아들고 풀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곳에서 달빛만이 그들을 비췄다. 프림은 30여년간 입 안을 맴돌 뿐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문장이 떨어져나왔다. 서약의 순간에는 운명을 알리는 종소리도, 상서로운 증조도, 축하의 박수도, 경외와 감탄의 목소리도 없었다. 오로지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는 듯한 기쁨과 달에 구름이 걸린 밤, 단 둘뿐인 고요함만이.

“천명을 받들어 주상을 맞습니다.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소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바친다고 서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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