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좋아하세요?
글쎄요
동물을 좋아하냐는 질문. 아기를 좋아하냐는 질문과 함께 곧잘 따라오는 질문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스몰토크 하기에도 무난한 주제고 사람들은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상대방이 어느 정도로 온정적인 사람인지 가늠해 보는 듯하다. 손이 많이 가는 연약한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관용을 베푸는지 알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조금 수월할 순 있으니까. 사람들도 내게 묻는다.
“아기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동물도 좋아하시나요?”
“오… 너무 귀엽죠...”
나는 인간 아이를 꽤 좋아한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시끄럽게 울거나 악을 써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다. 남의 아이인데도 오히려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동물 역시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편이다. 강아지를 마주치면 가만히 손을 내밀고 고양이를 보면 사진을 찍는다. 아스팔트에 달팽이나 지렁이가 나와 있으면 집어서 흙에 보내주고 떨어진 애벌레를 보면 나무에 다시 붙여준다. 그런데 어쩐지 동물을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껄끄러워진다. 귀엽다고 말할 순 있어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멜라니 조이의 저서 중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라는 책이 있다. 아직 읽어본 책은 아니지만 제목만 봐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좋아하냐고 묻는 동물은 반려동물에 한정된다. 한때 소라는 동물이었을 식탁 위의 스테이크를 썰면서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방금 전까지 치킨을 먹던 사람이 보신탕 재료의 개고기로 도축되는 개들을 보며 분노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는 사람도 잘 따르고 가족 같은 동물이잖아요.”
소, 돼지, 닭은 멍청하고 감정이 없어서 식용이 되었을까? 소가 사람이 연주하는 악기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고 어리광 부리듯 커다란 머리를 작은 인간의 품으로 욱여넣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돼지는 개보다 지능이 높고 닭은 닭대가리라는 오명이 무색하게 숫자의 개념, 동족 간의 언어, 복잡한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을 만큼 지능이 높은 조류다. 그들이 가축이 된 이유는 인간을 사랑할 줄 몰라서가 아닌 그저 빠른 시간 내에 성체가 되고 번식력이 좋으며 살이 많고 육질이 좋기 때문이다. 사육이 용이하고 귀여운 외모를 가져서 인간의 삶에 함께 하게 된 반려동물들은 인간의 정서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해 왔다. 식량으로서 도축되는 삶은 면했지만 이들 역시 인간에게 착취 당한다. 나는 아이,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따뜻하다는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사랑의 뜻은 뭘까. 사전에는 이렇게 등재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어쩌면 사랑과 편애는 크게 다른 단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의 이명은 차별인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세상 모든 존재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아이나 동물을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있어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존재에게도 온정적일 수 있는지 증명해 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은 비단 가축뿐만이 아닐 것이다. 너무나 많은 존재들이 사랑받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들에게 자신의 연민을 조금이라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을 따뜻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못하면 연약한 아이와 동물을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결국 호불호의 영역 안에서 애정을 취사선택하는 사람임을 증명할 뿐이다.
사람들은 사실 알고 있다. 자신의 편협함에 문득 섬찟해지는 순간을 한 번씩은 겪었을 것이다. 사회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표면적인 사실로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을 재단하려는 것은 결국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죄책감을 직면하기 두려워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붙이기도 한다. 이 방법은 쉽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내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 울타리 밖의 누군가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안타깝지만 비겁한 행동이고 나 또한 종종 그런 과오를 저지른다. 그래서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들만의 빛을 가졌다.
난 비건이 아니다. 오늘도 저녁에 계란말이를 먹었다. 하지만 두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오늘날의 사회에서 육식은 단백질 보충의 목적보단 미식에 대한 탐닉의 의미를 더 크게 가진 지 오래라는 것, 동물의 종에 대한 선택적인 애정으로 자신의 따뜻함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탐욕을 감추기 위한 변명은, 그것을 감추고 쉽게 얻은 마음은 파도 앞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진다.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설명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조급한 마음으로 쉬운 마음을 탐하기엔 우린 소중하다. 자신의 온화함을 증명하고 싶거든 타인에게 오랜 시간 천천히 스며들어라. 그렇게 스며들어 단단해지자. 식탁 위 살덩이에 위선적인 연민을 가질만큼 오만하고 여유 있게. 연약한 존재를 수단으로서 삼지 않아도 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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