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각글 모음
드림주의
클라모르의 연구실은 간만에 고요했다. 재잘대는 말소리나 펜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 바스락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안나는 3일 째 자리를 비운 데다 클라모르는 책상에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던 탓이다. 엎드리기만 한 게 아니라 눈까지 감고 있었다. 잠깐 엎드려 쉰다는 게 그대로 깜빡 잠들어 버린 것이다.
드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동시에 클라모르의 짧은 선잠도 막을 내렸다. 그는 눈꺼풀을 꿈틀대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클라모⋯⋯ 앗.”
갑자기 기척이 희미해졌다. 안나는 그가 아직 자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곧 그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클라모르, 자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나 보네, 중얼거린 안나가 맞은편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이제 와 사실 깨어 있었다며 일어나기도 민망스러워진 클라모르는 계속 자는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이러고 있다 안나가 다른 곳으로 가면 그때 일어날 심산이었다. 자는 사람 구경하는 게 뭐가 재밌다고 계속 여기 앉아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 클라모르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안나는 클라모르의 체감 상 10분이 넘도록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의 시선이 클라모르의 뺨을 콕콕 찔렀다. 그냥 자냐고 물어볼 때 안 잔다고 할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원래 인생은 타이밍이고 클라모르는 타이밍을 놓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때 한참 조용하던 안나가 혼잣말을 흘렸다.
“진짜 잘생겼다⋯⋯.”
클라모르는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다. 저게 무슨 소리야? 그는 살면서 재수 없다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잘생겼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다. 클라모르는 지금껏 제 외모에 별 관심도 생각도 없었으나 저런 말을 들으니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게 됐다. 딱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다 화들짝 놀라 생각을 흩어 버렸다. 이게 무슨 꼴이야, 십 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클라모르는 귀 끝이 약간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안나가 그 몸짓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깨어 있다는 걸 들키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손끝으로 클라모르의 미간을 꾹 누르는 건 그가 깨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니까.
어찌 됐든 지금이 일어날 좋은 기회였다. 클라모르는 두 번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눈을 떴다. 미간에 손가락을 얹은 채 눈이 마주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후다닥 뒤로 몸을 물린 안나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어색하게 말했다.
“어⋯ 좋은 아침?”
지금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일상적인 말투가 클라모르를 정신 차리게 했다. 클라모르는 똑바로 앉아 비뚤어진 모노클을 고쳐 쓰고 목을 가다듬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 되고 나서야 안나를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너 머리색이,”
“짠! 염색했어요. 어때요?”
안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양팔을 펼치며 클라모르의 말을 잘랐다. 기다렸더라도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클라모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비슷한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색뿐만 아니라 머릿결 또한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로 변했다. 파격적인 변신이라 눈에 익지 않을 법하지만 빨간 곱슬머리는 안나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클라모르는 조금 전 제가 받은 찬사를 그대로 돌려주려던 입을 간신히 제지한 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담백한 평을 남겼다.
“잘 어울려.”
클라모르는 자신의 연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 널찍한 연구실은 주거 환경으로도, 공부 환경으로도 꽤 괜찮았다. 특히 그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조용하다는 점에 후한 점수를 줬는데⋯⋯.
“우와, 너무 추워!”
지금은 두 가지 모두 그 빛이 바랬다. 그렇다고 클라모르가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좋았다. 아무렴 백만 가지 장점이 있다 한들 안나 한 명보다 좋을까. 제 양팔을 감싸고 뛰어 들어온 안나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주 들락거리다 못해 아예 출입구 근처에 옮겨 놓은 그의 지정석이었다. 자리에 앉아 몸을 채 녹이기도 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안나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더니 부산스레 연구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발보다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고, 결국 스스로 찾기를 포기한 안나가 물었다.
“클라모르, 내 로브 못 봤어요?”
클라모르 역시 조금 전부터 안나가 대체 뭘 찾아 다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찾는 물건이 제가 준 로브였다니. 클라모르는 책상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거 어제 빨아서 옷장에 걸어 놨어. 잠깐만 기다려, 가져다줄게.”
안나는 기다리랬더니 클라모르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하기야 연구실 안에 안나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은 없으니 클라모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게 식은 손을 잡아 덥혀 주었다.
침실 옷장에서 꺼낸 로브는 뽀송뽀송하니 마치 새 옷 같았다. 바닥에 끌려 약간 해진 밑단을 보지 못했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손뼉을 치며 기뻐한 안나가 즉시 로브를 뒤집어썼다. 클라모르는 안나가 입기 쉽도록 옷자락을 잡아 주었다. 이렇게 새것 같은 옷을 꺼내 주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의 안나는 그에게 옷을 ‘빌려 입는’ 것조차 송구스러워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곱게 개어 품에 안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클라모르는 퍽 감격스러웠다.
팔과 머리를 다 꿰어 입고 옷자락 안으로 들어간 머리카락을 정리하자 평소 안나의 모습이 되었다. 안나는 최근 들어 로브를 안 입는 날보다 입는 날이 더 많아지더니 이제는 연구실에 올 때마다 겉옷을 갈아입었다. 차라리 집에 가져가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클라모르가 준 특별한 옷이니 집에서 아무렇게나 굴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런 것치고는 세븐 타워에서도 항상 소파나 클라모르의 품에 웅크려 있기만 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매일같이 환복을 반복하다 오늘, 기어이 겉옷도 없이 뛰어 들어온 것이다. 클라모르는 추위를 많이 타는 눈앞의 꼬마를 위해 입구 바로 옆에 로브를 걸어 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그러면 옷이 차가워질 테니 차라리 담요를 데워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다, 아예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해서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열을 내는 마도구를 만들면⋯⋯.
“클라모르!”
“으, 응?
생각에 빠져 있던 클라모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대답이 돌아오고 눈이 마주치자 안나가 대뜸 클라모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유도 뭣도 없는 포옹이었지만 클라모르는 이런 맥락 없는 스킨십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자연스럽게 안나를 받아 안은 클라모르가 뒤로 걸었다. 걸음은 곧 기울어짐이 되고,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침대 위로 풀썩 넘어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흔들리는 것에 맞춰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엘리오스의 겨울은 안나의 세계보다 훨씬 따뜻했다.
“머리 말리는 마법은 없어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안나가 돌연 물었다. 그는 막 씻고 나와 축축한 머리를 꾹꾹 눌러 물기를 닦는 중이었다. 클라모르는 안나의 엉뚱한 질문이 익숙해진 참이라 태연하게 대답했다.
“바람 마법을 얘기하는 건 아니지?”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있는 물기만 싹 증발시키는 마법은 없어요? 소설 보면 절대고수들이 그렇게 하던데.”
안나가 읽은 건 무협지였지만, 동양 판타지나 서양 판타지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클라모르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는 있겠지만 많이 힘들 거야. 우선 그런 형태의 마법은 없으니 기존 마법을 응용하거나 아예 마력을 직접 운용해야 할 텐데, 사용 범위를 머리카락으로만 한정 짓는 데만 해도 품이 많이 드는 데다 까딱 잘못 조절하면 체내 수분까지 날려 버릴 수도 있거든. 원소 마법에 통달한 현자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고서야 시도조차 못 해 볼걸. 게다가 바람 마법과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금방 말릴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런 수고를 들이겠어?”
안나는 약간 실망했다. 판타지 세계라고 다 되는 건 아니구나. 소파에 앉은 클라모르의 품으로 꾸물꾸물 들어가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을 적신 물기가 옷까지 축축하게 적셨으나 안나는 클라모르가 개의치 않아 하는 걸 알았다.
“머리가 기니까 잘 안 말라서 마법으로 한 방에 해결하면 좋겠다 싶었죠. 에이, 아쉽다.”
클라모르가 손으로 젖은 머리칼을 살살 빗어 내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 안나는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가 많이 자라 있었다. 허리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기니 머리 말리는 마법을 찾을 만도 했다.
“내가 말려 주면 되지.”
“정말요?”
클라모르의 말에 안나가 반색하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게 분명했지만 클라모르는 마냥 좋기만 했다. 머리 말려 주는 게 그렇게 수고로운 일도 아니고. 설령 안나가 정말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시키더라도 기꺼이 해냈을 테다. 클라모르는 안나를 안은 자세 그대로 따뜻한 바람을 일으켰다. 축축했던 머리는 부드러운 손길 몇 번이 더해지자 금세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잘 넘겨 준 클라모르가 말했다.
“머리가 이렇게 길면 안 불편해?”
“불편하죠. 이거 엄청 무거워요. 하나로 묶으면 가끔 휘청이는 거 알아요? 자르기 싫어서 계속 길렀더니 이렇게 됐네요.”
“자르기 싫다고? 왜?”
안나의 입이 꾹 다물렸다. 늘 올라가 있던 입꼬리도 살짝 내려가 있었다. 클라모르는 가벼운 질문에 심각한 반응이 돌아오자 적잖이 당황했다. 사과하고 화제를 돌려야 하나 고민하던 때 안나의 입이 열렸다.
“⋯⋯클라모르가 물들여 준 머리잖아요.”
클라모르는 무언가에 맞은 듯 멍해졌다. 안나는 이 말을 하곤 클라모르의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보니 조금 전의 침묵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클라모르는 정신을 차리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지었다.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를 기르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니. 물론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안나가 그로 인해 힘들다면 클라모르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클라모르는 안나를 설득하기 위해 나지막이 꼬마야, 하고 부르며 그를 떼어내 얼굴을 마주보려 했다. 그러나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부드럽게 밀어내는 정도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떼어낸다면야 그럴 수 있겠지만, 클라모르는 안나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포기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안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았어요, 내일 머리 자르고 올게요.”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안 그래도 된다고, 머리 자르고 오라고 설득하려고 했잖아요. 나 이제 예전처럼 그런 생각 안 하거든요? 진짜 아까워서 그런 거니까 걱정 금지. 알았어요?”
클라모르는 정곡을 찔려 할 말을 잃었다. 불꽃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자 더욱 부끄러워졌다. 아무래도 그는 눈앞의 꼬마를 여전히 어리게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과 달라진 건 머리 모양뿐만이 아님에도. 클라모르는 안나를 깊이 끌어안았다.
“알았어, 고마워.”
“클라모르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 않나⋯⋯.”
안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클라모르를 마주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의 품 속이니 살살 졸음이 쏟아졌다. 안나는 뺨을 어깨에 기댄 채 알아듣지 못할 말 몇 마디를 웅얼거리다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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