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힐데/뱀파이어au] 무제


* 여러가지 날조 주의 어쩌구.

길다면 긴 시간동안, 힐데베르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명명한 '타이탄', 그 중에서도 극소수, 피를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종족들이 있었다. 그는 그런 극소수의 종족 사이에서도 꽤 별종인 축에 속했다. 인간을 해하고 그들의 피를 취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몇몇 동족들은 인간의 피를 꺼려했다. 힐데베르트 역시 후자에 속하는 이였다. 동물의 피를 섭취하거나, 마땅한 사냥감을 찾지 못한다면 동물의 피가 담긴 혈액팩을 찾는 방법도 있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아도 동물의 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구태여 그들의 피를 취할 이유가 없지 않나? 힐데베르트는 인간과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면 그들을 사랑했다는 말이 조금 더 옳을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박해와 혐오 속에서도, 힐데베르트는 인간의 다정한 면을 찾을 수 있는 존재였다. 제 오랜 친구는 그런 그를 무척이나 못마땅해 했지만. 그리고, 그런 힐데베르트의 신념 역시 아주 오래, 긴 시간동안 지켜졌었다.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녹안의 선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꽤 좋은 향을 풍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향수와는 다른, 제 본능을 툭 건드리는 듯한 그런 향. 한 번만 깨물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을 자각했을 즈음, 제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가있었음을 깨달았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에 제 입을 턱, 틀어막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제 이상 행동에 녹안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선임, 리카르도와는 마주칠 일이 잦았다. 자신이 인내심이 꽤 강한 자라 다행이었다. 아니였다면 정말 대형 사고를 치고도 남았겠지. 리카르도와 임무를 나갈 일이 생기는 날엔 평소보다 더 많이, 혈액팩을 섭취하거나, 사냥감을 (물론 야생동물이었다.) 많이 잡았다. 동족들이 기겁할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자신이라고 해도 버티는데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리카르도가 좋은 사람이라 더더욱 그랬다. 제 특이점에 대해 알고 있는 이라고 하여도 풀어질 생각도 없었다. 기민한 감각을 지닌 리카르도는 진즉에 그걸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가 묻지 않았기에 힐데베르트 역시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꼭 그랬다. 자신의 문제는 꼭 원치 않은 방향으로 한꺼번에 터지곤 했으니까.

"릭……!"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제 찰나의 실수였다. 제 비명같은 부름과 함께 얼굴을 한껏 구긴 리카르도가 급히 몸을 틀었으나, 날카로운 발톱이 기어코 그의 어깨를 찢어놓았다.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훑어졌다. 잠깐 균형을 잃은 듯 했던 몸이 빠르게 움직이며 크리처를 처단했다.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진 것에게선 더이상 미동조차 없었다. 크리처의 시체를 한 번 발로 짓이기듯 걷어찬 리카르도가 자신을 휙 돌아보았다. 나는 검을 쥔 채 잠시 굳어 서있었다.

"힐데베르트, 아직 안 끝났어. 정신 안 차려?"

평소의 늘어지는 말투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굳은 목소리인데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제 부주의로 그가 상처를 입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가 그 뒤를 자연스레 따랐다. 피 냄새……. 그것도 아주 자극적인. 피부 위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혈향이 아닌, 바깥으로 퍼져나오며 코끝을 스치는 향은, 제 정신을 아찔하게 뒤흔들 정도로 향기로웠다. 그것에 정신이 팔렸었다. 멍청하게도. 녹안의 눈동자가 크게 띄이고, 팍, 다급하게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힐데!"

탕!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 무언가 꿰뚫리는 소리, 강한 악력과 함께 세상이 휙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자신을 밀어낸 것은 리카르도였던 모양이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선임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쿵, 크리처의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경악은 곧 가늠할 수 없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 정말 미쳤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누가 전장 한복판에서 한 눈을 팔아!"

"…… 죄송, 합……."

사과는 이어지지 못했다. 저를 보호하다 이마까지 찢어진 건지,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의 이마에 맺혀있던 핏방울이 제 얼굴 위로 두어방울 떨어진 탓이였다. 나는 내가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손을 들어 그의 핏방울이 떨어진 부근을 손으로 훑어냈다. 그리곤 피가 묻어난 손끝을 혀로 느리게 핥아냈다. 혀끝에서부터 번지는 피의 맛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기분 좋은 마약이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한 번 맛을 본 이상, 이것을 몰랐던 때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직감. 그럼에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갈구하게 되는……. 몇 방울 묻어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손이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힐데."

그 황홀경에 가까웠던 모든 감각이 그의 부름과 함께 와장창 깨졌다. 손 안에 느껴지는 인간의 따듯한 체온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성을 놓은 채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는 순간 토기가 치밀었다.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어, 힐데베르트 탈레브. 급히 뺨에서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바닥을 짚은 채 몸을 뒤집었다. 선임은 빠르게 제 위에서 비켜났다.

"웩."

역겨움에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먹은 것도 없었는데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말없이 제 등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한참을 헛구역질한 탓에 삼키지 못한 타액만 뚝뚝 흘려댔다. 조금 진정한 듯한 제 모습에 그가 느리게 입을 떼었다.

"내 피가 그렇게 별로였어~?"

"……."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황당하다는 심경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면, 그는 어느 새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분명 지금 사과하면 화낼 거라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리카르도는 그런 제 결정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제 몸을 잡고 일으킨 그의 손길을 따라 순순히 일어났다. …… 부주의했다, 너무나. 앞으론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눈을 질끈 감으며 시린 제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곤 기어코 삼켜야 했던 말을 작게 토해낸다.

"릭, 죄송합니다……."

"죄송해야지. 아직 크리처가 남았는데 누가 한 눈 팔라고 했어~? 돌아가면 구를 준비해~……."

물론 그것도 사과할 일이겠으나, 그것 뿐만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는 아까의 제 행동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사과했다간 당장 이 자리에서 얼차려를 받을 것만 같아 다시금 입을 다무는 길을 택했다.

분명 자신이 더더욱 주의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비웃듯 제 문제는 계속 이어졌다.

"맛없어, 토할 것 같아."

반도 들이키지 못한 혈액팩을 손으로 쥐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한 번도 혈액팩의 맛을 따져본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팩에 담긴 피의 맛이 비리고 역했다. 어째서?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최근 제 입맛이 갑자기 변한데에는 딱 한가지 계기밖에 생각 안 났으니까. 리카르도의 피. 아직도 떠올리면 절로 갈증이 일어날 정도로 황홀했던 향. 잠깐이지만 그런 것을 맛 보았으니 이런 것들이 입에 찰리가.

"미쳐버리겠네……."

그렇다고 대뜸 '릭!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을 좀 물어도 될까요?' 같은 미친 개소리를 지껄였다간 그의 총과 창에 꿰뚫리는 건 제 머리통이 되겠지. 시발! 소리없는 비명을 내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반이 남은 혈액팩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버티자. 예현에게 최대한 리카르도와 붙어있지 않아도 되는 임무를 할 수 있도록 조율해달라고 하자. 내가 훼까닥 돌아서 유능한 선임 하나를 미라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고 설명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겠다. 어쩐지 조금 우울해진 기분을 간신히 눌러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다행히 제 애원은 먹혀들었다.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예현은 최대한 그렇게 조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돕겠다고 답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리카르도와 마주치는 빈도 수가 확 줄었다. 임무에선 마주칠 일이 없으니 문제는 없었고, 멀리서 그가 보이면 바로 몸을 틀어 도망쳤으니 정말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는데……. 불량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꽂은 선임은 한쪽 발로 벽을 누른 채 제 갈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것도 복도 한복판에서. 힐끔힐끔 자신과 릭을 보며 자리를 피해가는 사람들과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보이는 녹안의 선임 사이에서, 나는 식은땀을 삐질거리며 우뚝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막내 얼굴 보기가 참 힘들어~. 그렇지~?"

"죄송합니다……."

"응, 죄송해야지~. 내가 피해다니는 걸 정말 모를거라고 생각했을리도 없고. 고의로 선임을 피해다니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껄여 봐."

어디 뭐라고 변명하는지나 들어보자, 같은 투였다. 잠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솔직히 리카르도의 입장에선 내가 대뜸 '당신의 피 맛을 잊기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같은 말을 꺼낸다면 얼마나 황당해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니, 그냥 황당해하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지. 어느 인간들처럼 자신을 혐오하고 거리를 둘지도 몰랐다. 그건 상상만해도 가슴 한 켠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괜히 제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느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수도 없겠지, 그래…….

"그때, …… 그러니까, 제가 당신의 피를 조금 먹게 된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해."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그의 선명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때 이후로, 자꾸, …… 릭의 피 맛이 잊혀지질 않아서, 그래서, 또 같은 실수를 할까봐. 그래서 당신을 물거나, 해칠까봐, 무서워서……."

말을 다 뱉어냈을 땐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다 말하며 돌아서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예……."

"내 피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예, …… 에?"

"아냐~?"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나지? 내가 그의 피 맛을 잊지 못해서 해칠까봐 무섭다고, 분명 빠트리지 않고 다 말했는데? 물론 그의 피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맞았기에 부정하지도 못하고 붕어마냥 입을 뻐끔뻐끔거렸다. 그는 부정의 말을 뱉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만족스럽게도 웃었다.

"그럼 됐어~. 다신 피해다닐 생각하지마……."

"예? 아니! 잠, 잠시만요, 릭! 대체 뭐가 됐다는 겁니까?!"

자신의 할 얘기만 홀랑 남긴 채 돌아서려는 그를 덥석 붙잡았다. 다행이게도 그는 순순히 잡혀주었다. 조금 짜증이 나있는 것 같았기에 급히 손을 놓아주었지만.

"제 말을 이해 못하신 건 아닐 거 아닙니까."

"당연히 이해했지~."

"근데 왜 아무렇지도 않으신 거냐구요!"

"내가 뭐, 해줬으면 하는 리액션이라도 있나보지~?"

"그……."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모양새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혐오스러워 해야하지 않냐거나, 무서워 해야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도, 어느 쪽이든 이상하다고. 그런 제 반응을 지켜보던 릭이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릭……."

"그리고 필요하다면 못 줄 것도 없고."

"……."

그럼 당장 부탁드리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고개를 털어내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것을 들은 양 태연해보였다. 무슨 말을 한들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피부 밑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피를 가까이 두니 슬슬 더 머무르기가 힘들었다. 그냥 하던대로 피해다니자. 또 잡히면 그때 변명을 생각하자. 좋아! 제 나름의 결론을 재빠르게 내리고는 꾸벅 인사한 채 돌아서려고 했다. 갑자기 제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이 아니였다면. 몸이 손길에 의해 휙 틀어지며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녹안이 빛났다. 헉, 미친. 굳어 선 채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 눈을 가늘게 뜬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너……. 요즘 굶고 다녀~?"

"예?"

아니,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어물쩍대며 답하지 못하는 제 모습에 그가 알만 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억울해졌다. 아예 안 챙겨먹은 건 아닌데. 그냥 전보다는 덜 먹을 뿐이다. 비릿한 냄새를 참아가며 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뿐이라고! 내뱉지 못한 불만을 삼켜내며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임무엔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넌 내가 걸고 넘어지는 게 그런 문제인 것 같아?"

"아뇨……."

아닌 걸 알지만, 그에게 해결책이 있다는 것도 잘 알지만, 냅다 부탁하기에도 퍽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지 않나. 다시금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곧 제 팔을 놓지 않은 그가 자신을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릭? 릭?! 다급한 부름은 모조리 씹혔다.

그가 도달한 곳은 한적한 곳에 쳐박혀 누가 잘 오지도 않는 휴게실이었다. 어찌나 철저한지, 문까지 걸어잠군 그가 손목을 매만지던 자신을 휙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어깨를 움찔, 하다 고개를 숙였다.

“릭, 제가 건방지게 굴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이런 일 만큼은, …….”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금 강하게 느껴지는 악력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더니 등 뒤로 푹신한 것이 와닿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소파에 드러누워있고, 그가 그런 저를 가볍게 누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녹안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릭?"

"입 벌려."

"예?"

갑자기요?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자 제 어깨를 꽉 누른 그가 다른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누르듯 문질렀다. 따듯한 체온이 입가에 닿자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위험하다. 진짜 이대로는 못 참고 물어버릴거야. 손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 하자 그 손목마저 꼼짝없이 붙잡혔다. 붙잡은 양손목을 제 머리 위로 누른 남자의 거리감이 더욱 가까워졌다. 아니, 아, 이거, 자세가 너무 묘하지 않아? 게다가 그는 아직 제 입술에서도 손을 떼지도 않았다. 머리 한 구석에서 사이렌이 울렸으나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강하게 밀쳐내면 벗어나는 것이 가능은 하겠으나, 그가 다칠 수도 있었다. 피라도 보는 날엔 최악의 사태가 터질거다. 낮게 앓는 소리를 흘리며 가볍게 발버둥 쳤다.

"입 벌리라니까~. 대답도 안 하지?"

입을 벌렸다간 지금은 입술만 만지작 거리는 손가락이 제 입안으로 쑥 들어올 게 뻔했다. 계속 잘 참아왔는데, 망치기 싫어. 그의 피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그 어떤 박해와 혐오 속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이런 식욕을 가진 것이 끔찍하게 싫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휙 돌리자 눈을 가늘게 뜨던 선임이 결국 입술로부터 손을 떼었다.

"내 피, 괜찮았다며~. 내 피 때문에 굶다시피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래서 싫은 겁니다!"

갑작스레 높아진 제 목소리에 녹안이 동그랗게 띄였다.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한 차례 숨을 깊게 들이키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이런 기분을 그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끼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살아왔단 말입니다."

"……."

"그런데, 이제와서……. 내가 멀쩡히 살아가기 위해 아끼는 사람에게 상처를 줘야만 한다면, 당연히, 좋을리가 없잖아요."

"힐데."

"……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 당신을 위해서 거리를 두자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리카르도의 녹안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찰나, 그의 숨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던 탓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감. 그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에도, 자신은 그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싫어?"

"…… 싫어요……."

속삭이는 물음에, 간신히 답을 토해냈다. 제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 것인지 모를 맥동이 귓가를 울렸다.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딱 60번에 도달할 즈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상처 회복은 너보다 더 빨라."

"그런 문제가 아닌 걸 아시잖습니까."

닿을 듯 가까운 숨이 달다. 정말로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초조함이 숨길 수도 없이 새어나왔다. 그런 제 일련의 반응을 바라보던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내가 입 맞추는 것도 싫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할 생각이니, 싫다고, 그런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어야 하는데……. 왜 그러지 못한 걸까. 제 머뭇거림을 읽어낸 리카르도가 길게 웃었다. 그럼 됐어. 또 알 수 없는 대답을 흘린 그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다시 생겨난 거리감이 왜 아쉬운 건지 스스로조차 답을 찾지 못한 찰나였다. 으득, 살을 짓이기듯 씹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닿았다.

"……! 읏."

따듯한 체온, 입가로 스며드는, 아찔한 단 향. 그것이 그의 피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에게 턱을 강하게 잡힌 후였다. 겨우 한 두 방울 삼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내내 가시지 않던 갈증이 해결되는 듯 싶다가도, 그를 더욱 갈구하고 싶었다. 자꾸만 아무는 입술의 상처를 깨물어대며 혀로 핥아냈다. 더, 조금만 더…….

"하아, 헉, ……."

"…… 아, 이거, 생각보다 더 위험한데……."

그의 중얼거림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잡힌 손을 꿈지럭대며 그를 조르듯 연신 그 입술을 깨물고, 핥아내고, 빨아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갈증이 해결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의 헤집어진 입술의 상처와, 입 주변의 핏자국을 보자마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리, ……!"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 입이 꾹 틀어막혔다. 그는 그제야 제 손목을 놓아주며 소매로 피가 묻어난 입술을 문질렀다. 어느 새 상처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자기혐오와, 그를 향한 화가 솟아났다. 그의 손을 잡아 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후임이 필요하다는 걸 주는 게 그렇게 이상해~?"

"제가 정신을 못 차렸다면……!"

"그래서, 못 차렸어?"

그 물음에 입에 다물렸다. …… 아니다. 난 분명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또 겹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다음엔 정말로 그를 물어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공포감에 숨통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 공포감을 읽어내기라도 한걸까?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아시는 분이……."

리카르도가 다시금 길게 웃었다. 그의 손이 제 양뺨을 감쌌다. 따듯했다.

"걱정마~. 난 네가 날 죽이도록 두지 않을거야……."

"말은 쉽죠."

"나 못 믿어~? 서운한데~……."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힐데."

"……."

"약속해."

마주해오는 녹안의 눈동자가 퍽 아름다웠다. 저 약속을 믿고 싶게 만들만큼, …… 딱 그만큼.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다 내뱉었다. 결국엔 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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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입하는 코뿔소

    입 틀어막고 읽었습니다..최고의 릭힐이에요 우물쭈물하는 후임을 위해 침대에 밀어붙이는 릭떤남자..입술 짓씹어서 피 넘겨주는 유죄남..걱정 요소들 오목조목 짚어서 해결해주는 다정남..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달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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