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힐데] M.
* 어린 도련님 릭 × 미카엘 힐데베르트. 날조.
골치 아프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힐데베르트는 작게 한탄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이런 범죄 조직과 얽힐 이유는 없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힐데베르트는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채 자신을 향해 무기를 치켜드는 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격파 원로들의 뿌리가 설마 여기까지 닿아 있을 줄은 몰랐지. 뭐, 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면 연이 닿아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기는 했다. 유능한 책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의 2인자 격인 이가, 과격파 원로의 손을 잡고 이 조직을 완전히 삼킨 후, 이곳을 그 원로의 영향권 아래 두겠다 약조했다던가. 원로는 그런 그에게 영생까지 주겠다는, 퍽 성급한 정보를 털어내기까지 했다. 원로 자리에 어떻게 앉아 있게 된건지, 참 멍청한 판단이야. 이 조직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이 역시 그 기묘한 기류를 눈치챈 듯 하였으나, 원로가 또 괜히 원로겠는가. 일이 틀어지는 걸 가만히 볼 수 없다는 거겠지. 그리하여 이곳에서 곧 일어날 전쟁을 막고 원로의 영향력이 더욱 막대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들이 몸집을 불릴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건 자신이였으니. 이젠 제법 익숙해진 짧은 단도를 손 안으로 굴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격한 고함을 내지른 이들이 한 번에 내게 달려들었다.
쿵.
짧게 느껴지는 진동과 옅은 소음에 녹안의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언제 와도 참 싫은 곳이다. 리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소가 후미지다거나, 차갑다거나 어둡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따듯함을 품고 있는 인테리어는 간혹 이곳에 가족이 들리게 될 때를 대비한 것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이 가족을 향한 사랑임을 알면서도, 리카르도는 그것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쥔 권력의 크기만큼 살아사는 삶조차도 호화로웠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 가족 역시도……. 결국 이상한 건 늘 제 쪽이였다. 소파에 누워 골아떨어져 있는 동생들을 응시하던 리카르도가 짧은 다리를 휘적여 소파에서 내려왔다. 어디서 조직원들끼리 패싸움이라도 난 걸지도 몰랐다. 소음이 길어지면 동생들이 깰수도 있었고, 또……. 싫은 장소를 벗어나기 위한 여러가지 핑계들을 머릿 속으로 덧그리며 문을 열어 젖혔다. 아까 소리가 들렸던 곳의 위치를 더듬듯, 리카르도가 걸음으로 옮겨갔다.
"하……."
짧게 숨을 고른 후, 반으로 부러진 단검을 바닥에 툭, 던졌다. 중간에 뚝 부러져버려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물론 그 정도로 이자들에게 밀리지는 않았다. 부러진 단검의 단면도 잘만 노려 박아넣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뺨에 튄 피가 더 말라붙기 전에 장갑을 낀 손으로 박박 닦아냈다. 다가오는 다른 기척을 눈치챈 건 바로 그때였다.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급히 몸을 숨겼다. 뚜벅뚜벅, 확실한 목적지를 지닌 듯,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서서히 커진다. 그런데 잠깐…….
"……."
어른 치고는 걸음소리가 작았다. 기척 역시도. 순식간에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곳에 아이가 있었다고? 당혹감에 짧게 숨을 들이키는 사이 아이의 걸음은 더더욱 가까워졌다. 방황하는 시선이 널린 시체들로 향했다. 미친. 힐데베르트는 답지않게 어쩔 줄 몰라하며 작게 발을 동동 굴렸다. 아이에게 저런 장면은 정서에 좋지않다, 절대로.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밖으로 저자들을 끌어내 치는 거였는데. 피에 물든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힐데가 바로 옆까지 다가온 기척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팔락.
코트의 옷깃이 재빠르게 아이의 앞을 가렸다. 손으로 눈을 가려줄까도 생각했으나 갑작스러운 접촉에 아이가 겁이라도 먹으면 곤란했고, 뭣보다 장갑 역시도 피로 너무 더러웠다. 그래서 긴 코트 자락을 이용했다. 코트를 쥔 채 옷자락으로 아이 앞을 급히 가리니 시야가 확실하게 차단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잠시 움직임을 멈춘 검고 동그란 뒷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작다. 아담보다 훨씬 작았다. 제 허리께에 올까말까한 키. 이 정도면 몇 살쯤이지? 아참, 지금은 이런 걸 추측할 때가 아니지. 아이가 소리라도 지를까 식겁한 자신은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흘렸다.
"이 앞은 안 돼."
다행히 아이는 소리지를 기색은 아니였다. 오히려 차분한 기색이다. 생각보다 의젓한 성격인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만……. 아이는 딱히 자신의 옷깃을 치워낼 생각도 없어보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가 충분히 놀랄만한 상황이었기에 작게 사과를 뱉었다.
"미안해."
"……."
"겁먹게 할 생각은 아니였어."
“괜찮아요.”
처음으로 답이 돌아왔다. 역시나,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는 아니였다. 힐끔, 여전히 죽음이 깔려있는 복도 쪽에 시선을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호자는 어디있어?"
아이가 다시 침묵했다. …… 설마 저 시체들 사이에 껴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섬뜩한 생각이 들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얕은 패닉에 빠지기 전 아이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동생들이랑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다행이군. 그럼 이 일과는 관련 없는 자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동생들도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 새 몸을 자신에게로 돌린 아이가 선명한 녹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한 상냥한 웃음을 비추며 코트를 내린 후, 아이의 양어깨를 조심스레 쥐었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 곤란하니까. 물론 아이가 원치 않는다면 쳐낼 수 있기에 충분한 강도로. 하지만 녹안을 가진 아이는 제 손을 쳐내지도 않았다. 그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좋아, 나에게 완전히 집중한 것 같다. 자신도 아이의 뒤로 시선을 던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돼?"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선 자기소개만한 게 없다. 비록 아이를 위협하지는 않았으나, 갑작스레 낯선 이에게 붙들린 것은 충분히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건 원치 않았다. 녹색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던 아이가 입을 달싹였다.
"리카르도. 리카르도 소르디예요."
“그래, 소르디?”
"리카르도."
"아, 미안. 리카르도."
…… 어쩐지 힘이 꽉 들어간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건네며 호칭을 정정했다. 잠시만. 소르디? 어쩐지 익숙한 발음의 성 씨를 입안으로 굴리며 시선을 굴렸다. 소르디라면, …….
"당신은요?"
"…… 어?"
이어져 오는 질문에 잠시 생각이 끊겼다. 선명한 눈동자는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잠시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 침묵을 유지하자,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이름……."
"아!"
그리곤 다시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제 진짜 이름은 알려줄 수 없다. 일단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 뿐인 것이 제일 컸다. 방금 떠오른 건데, 소르디라면 분명 자신이 한바탕 엎어놓은 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지닌 성 씨다. 즉, 이 아이는 그 자의 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이 이후에 범죄 조직과 얽힐 일이 없을 거라지만, …… 만에 하나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 가벼운 마음으로 알려준 것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크기를 키워 이 아이를 후쳐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알력다툼에 무고한 이가 휘말려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미카엘."
젠장, 낯 뜨겁네. 이런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자기소개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입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며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아이, 리카르도는 딱히 제 표정 변화에 주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카엘…….”
리카르도가 제 별명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낮췄던 몸을 펴냈다. 녹안의 눈동자가 그런 제 움직임을 좇았다.
"동생들이 있다는 곳까지 데려가줄게."
아이는 몇 번 입을 달싹이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끄집어내 떠올리던 리카르도가 느리게 눈을 떠냈다. 강렬한 기억이었다. 약 70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만큼.
자신들과 함께 포탈로 넘어왔던 남자.
기억하던 것보다 머리카락은 짧아졌으나 그 선명하던 금안과 다정함을 품은 목소리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 미카엘?'
'예?'
당혹감에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얼빵하게 되묻는 목소리와 함께 잠깐 자신에게 시선이 쏠렸으나 그마저도 로가 일으킨 소란에 금세 흐트러졌다.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자신을 '힐데베르트 탈레브'라고 소개한 그는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름도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는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였다면 그가 두르고 있는 위압감에 짓눌려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을테니까. 그런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일리 없었다. 그의 모습을 직접 본 순간 그 생각에 더욱 힘이 실렸다. 퍽 아름다운 사내였다. 금안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다정스레 웃어주는 모습에 가슴께가 간질거렸을만큼. 피냄새가 뒤섞여 있었으나 그에게서 나던 희미한 풀숲향이, 그와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미카엘.'
자신의 질문에 잠깐의 고민 끝에 내놓던 이름. 그 찰나의 망설임에,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이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어린 마음에 사실 정말 천사님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만큼.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제 어린 날의 첫사랑이였던 것 같았다.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인 것 역시 알아챘기에 곱게 접어두었던 마음. 그러나 어딘가에 버리지도 못하고 깊게 파묻어 두었던…….
"하."
정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그날처럼 그 금안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을 때 술렁였던 제 가슴께가, 여즉 그 이름 하나를 잊지 못했음을 알려왔으므로.
"골치 아프네~."
중얼거린 것과는 달리 입가에 스물스물 미소가 번졌다. 돌아서던 그 뒷모습에 뻗지 못했던 손을, 이번엔 뻗어볼 수 있을까, 작은 기대감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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