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와 진짜의 틈새
시끌벅적한 마을 사람들의 목청이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타고 여기저기서 울린다. 줄줄이 거리를 수놓은 붉은 바탕에 해당화가 금색으로 그리진 등들은 이따 밤에 보면 더욱 장관일 것이다.
“문어에 옥수수에 가재구이~! 온갖 구이들 팔아요!”
“탕후루! 탕후루 있어요~”
각종 먹거리의 자랑에 옆에 선 담려의 고개가 돌아가다 다시 내 쪽을 보았다.
“뭐라도 하나 드시고 가시겠어요?”
“지금은 됐네. 그대의 볼일이 끝나고 하지.”
“소녀의 하찮은 볼일 같은 거~ 담려님의 허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러나 담려는 말없이 걸음만을 재촉했다. 나도 배운 게 있지. 이건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남역의 햇살은 지금 이 시기에 가장 따갑다. 해당화가 활짝 피어나는 여름은 관광객이 제일 몰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10일에 걸쳐 개최되는 해당화 축제가 가장 컸다. 이 시기엔 남역 어디에 가든 인파가 몰렸다. 하물며 가장 큰 항구인 이곳은 어떻겠는가.
“담려님이 소녀의 고향 축제에 와주시니 감복할 따름이랍니다.”
“권한 것은 그대이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요….”
‘정말 같이 와줄 줄은 몰랐는데’
이 시기에 함께 남역에 오는 것은 우리의 ‘계약’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으나, 평소엔 인파를 싫어하는 그를 위해 이때까지는 밤의 본가에서 열리는 연회 정도만 권했다.
‘애초에 나조차도 이리 낮에 직접 거리까지 와본 것은 드물고…’
본래는 그냥 편하게 노예를 시켜 구해오게 했었다. 이 축제를 이렇게까지 크게 만든 건 투자를 넣은 단석해의 가주, 나의 아버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도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탓이다.
“아!”
“이봐 아가씨, 좀 조심해서 걸어다…흐억! 화련 아씨?”
좀 다른 생각을 하며 걸어 다녔더니 앞사람과 가볍게 부딪치고 말았다. 뒤에서 날 살짝 잡아당기는 담려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사람이 많은 탓에 그것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으음…~”
힐끗 고개를 올려 그의 눈치부터 살핀다. 가능하면 조용히 왔다 가고 싶었는데… 단정하게 무표정한 담려의 얼굴은 이럴 때 참 읽기 힘들어 불편했다.
“아이쿠! 단석해의 아씨에게 제가 그만 큰 실례를...!”
“어머나~ 괜찮답니다. 축제로 바쁜 현장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는데 이만 들켜버렸네요?”
언론에도 늘 취재를 오는 축제다. 함부로 행동했다가 <단석해의 실체! 홍화련의 갑질> 이란 제목의 찌라시라도 돌면 성가셔진다. 애써 웃으며 반응하니 주변 시선들까지 이리로 모여들었다.
“이럴 수가! 화련 님이셔! 어? 뒤에 계신건… 설마 짐류의 담려 님?”
“두 분이 해당제에 오신 건가? 세상에나~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리실까!”
“화련 님! 담려 님! 이리에 와서 우리 집 해당화 푸딩 좀 맛보고 가세요~”
“이쪽의 산사사탕도 맛있답니다!”
“아이참~ 여러분, 담려 님은 지금 저랑 오랜만의 마실 중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점점 몰려든다. 무례하게도 대놓고 핸드폰의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들도 있었다. 수행원을 두어명이라도 데리고 나올걸. 후회와 불안으로 가슴이 술렁거렸다. 곁눈질로 그의 안색을 살피니 역시나! 좀 피곤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남들 눈에야 완벽한 무표정이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뭐, 이렇게 눈치챌 수 있게 될 때까지 좀 걸렸지만.’
“자, 여러분 이만 좀 물러나세요~”
… … ! 이것들이? 물러나라는 내 말은 듣지 않고 더 몰려들기 바빴다. 일단 어딘가로 피하지 않으면…
“잠시 실례하지.”
응?
“꺄아아악~!”
갑자기 몸이 두둥실 위로 떠 올랐다. 이 남자가 날 안아 들어 하늘 위로 날아간 탓이다. 펄럭이는 날갯짓에 검은 깃털 몇 개가 공중에서 나부낀다. 아래에서 군중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나서야 나는 가볍게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이리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시면 어찌합니까?”
“빠져나가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건 맞지만…”
푸른 하늘 아래로 붉은 등의 윗부분과 왁자지껄한 축제의 광경이 내려다보였다. 바닷바람이 유독 열이 몰린 뺨을 시원하게 감싸 안았다. 도대체 이 인간은, (아 맞다 그는 따지자면 새였지) 정도라는 걸 모르는 걸까? 함께 있으면 심장이 자꾸만 동나는 기분이다.
“아무튼! 미리 언질을 주시면 좋겠다는 거에요!”
“잠시 실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하긴 나도 이기려고 한적은 없지마는. 자연스레 그의 목덜미에 두 팔을 감싸 안으면 속도를 확 붙이는 것이 느껴졌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일단 이쯤이면 되겠는가.”
“네. 인제 그만 내려 주셔요.”
아까보다는 한산한 거리, 마침 목적지와도 그리 멀지 않았다. 담려와 붙어 있던 몸이 떨어지면 어쩐지 희미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 맴돈다. 그는 담뱃잎 하나도 까다롭게 고른 것만 피운다. 무덤덤해 보이지만 자신의 선에서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치워버려야 하는 성격. 나는 그의 다른 특성을 알아차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런 점은 그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깨달았다.
‘그야… 손가락 하나로 뭐든 치워버리는걸 보면.’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
“음… 담려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누추한 곳이라…”
“늘 그런 말을 하면서 나를 멋대로 끌고 다니지 않나.”
“역시 피곤하셨나요?”
“그대 이외의 이들과 있는 것만.”
“…! ”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도 어쩌면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 중 하나이려나. 결국 이번에도 내가 그를 이길 구석은 없었다.
‘적당한 연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부둣가를 걷는다. 이 맑고 쨍쨍한 남역의 축젯날이 그의 취향에 한 자락이라도 맞는 구석이 있을까. 그런 확신도 없으면서 나는 왜 그의 손을 맞잡는 건지.
“정말 작고 누추한 곳이군.”
“…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담려의 말은 나를 핀잔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번화가에서도 떨어진 골목의 잡화점은 세간에 알려진 홍화련이라면 절대로 오지 않을 곳이니까. 게다가 매대에 놓인 것도 잡스러운 물건들 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담려의 호기심을 끌었는지, 그는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유심히 놓인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이건 머리 장식인가.”
“예, 그렇습죠 나으리.”
“꽃잎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군.”
“열흘 동안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멈 너는 어쩜 한마디도 안 지려고 그러니? 가격을 낮추려고 천이 아닌 종이를 쓴 것이옵니다. 담려님~ 이런 조잡한 물건은 그만 보시어요~”
“이 가격표는 은전이 기준인 건가?”
“어휴 그래 주시면 이 늙은이야 감사하죠.”
이러다간 동전 몇닢이면 되는 것에 몇십 배를 지불할까 싶어 얼른 담려의 앞을 막아섰다. 원래 사려던 건 저런 뒷골목의 애들이나 차고 다닐 머리 장식이 아니었다. 큼큼 몸을 가다듬으며 팔짱을 끼니 눈앞의 늙은이가 낄낄 웃었다.
“만들어뒀던 거 있지?”
“이번엔 웬일로 직접 오셨구려.”
“…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어. 얼른 주기나 해.”
“낭군님과 함께 오셨는데 왜 더 보시지 않구?”
“볼 게 있어야 보지. 빨리 물건 안 줄 거야?”
“잠깐만 기다리쇼. 아이고~ 허리야…”
이 늙은이는 허리를 일으키는데도 세월이 한참이다. 남역에는 ‘죽은 사람 삼도천도 뱃삯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장사치는 그냥은 안 움직여 줄 거란 의미다.
결국 매대에 돈을 내려놓으니 노인네의 다리가 빨라졌다. 손안에 놓인 건 작은 통에선 진한 꽃 내가 풍긴다.
“향고였나.”
“그렇습죠. 이 시기에는 해변의 해당화가 되려는 아가씨들이 많으니까요.”
“나의 꽃은 진짜라 굳이 덧씌울 필요가 없을 텐데.”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은빛 시선에 얼굴이 절로 붉어져 온다. 이렇게 사람이 적은 곳에선 굳이 그런 말을 꾸며낼 필요가 없대도!
“아, 아이 담려님도 참~ 소녀 부끄럽사옵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화련 님에게는 이쪽이 진짜에 가깝지요.”
얼른 담려의 옷자락을 끌어나가려고 하니 늙은이의 말이 귀에 꽂혔다. 매서운 눈길을 보내면 기분 나쁘게 낄낄거린다.
“또 찾아와 주시지요.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바깥은 어느새 노을이 얇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호 빛으로 물든 하늘을 똑 닮게 비추는 바다의 윤슬이 잘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석 같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 바다도 빨갛게 타오르겠지. 붉은 보석의 바다. 내가 사랑하는 본가의 이름처럼.
“담려님의 귀한 시간을 많이 뺏고 말았네요. 이 풍경으로 값을 매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조금 부족한 듯 싶군.”
“어머, 이제 흥정도 하실 줄 아시나요? 무엇이 부족한지 말씀해 주셔야 소녀가 제값을 치뤄드리죠~”
“… … .”
“…?”
내가 가볍게 웃는 걸 담려는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몇초간 시선을 마주한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화를 내지 않더군.”
“… 저답지 않다고 생각이라도 하셨나요?”
무언은 긍정이겠지. 내 성격에 어떤 뒷소문이 달렸는지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담려를 파악한 시간 동안 그도 나를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 노인의 말이 틀리진 않았으니까요.”
절로 미소가 씁쓸해진다. 시선을 멀리 두다 방금 가게에서 산 향고를 꺼내 본다.
“이게 향고인지 바로 알아차리시더군요.”
“그렇게 진히 풍기는데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지. 해당화 향고라는건 거짓말이겠지만.”
“어머! 거기까지 알아차리시다니… 역시 담려님이세요!”
“여기서 내 안목을 칭찬할 거라면 그만둬주게. 가능하다면 그걸 쓰는 것도.”
역시 이런 조잡한 장미 향은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 이건 내가 평소에 쓰는 진짜 해당화 향수와도 달랐다. 진짜는 은은한 장미 향 끝에 상큼한 시트러스와 바다향이 남으니까. 하지만 해당화는 키우는데도 향수로 만드는데도 품이 많이 든다. 이런 뒷골목에서는 도저히 만들 수도 살 수도 없는 물건이다.
“사람은 늘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소비하진 않는답니다.”
“감정적인 이유였다는 건가.”
“이 시기엔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에 취해 지갑을 잘 열어주니까요. 축제의 노래와 술, 파도 소리에 섞여드는 해당화의 향기…”
멀리 시선을 두다 힐끗 고개를 돌려 담려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덤덤한 낯빛. 아마 내가 이대로 이야기를 멈춘다고 해도 그는 추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뒷조사를 당하겠지…’
“… 이 근방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내 입으로 직접 털어놓는 게 낫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직접 말하고 싶었으니까.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다시 눈동자를 앞으로 굴렸다.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요.”
다시 손에 들린 향고를 바라보았다. 뚜껑에 그려진 해당화는 가짜라는 표식밖에는 안 되겠지. 나와 똑같지 않은가. 인간인 주제에 짐승들 사이에 껴서 짐승인 척 아득바득 우기는 것이… … .
“그 늙은 여인은 나의 어머니에게도 이걸 팔았다고 해요. 내 어머니의 물건은 얼마 남지 못했지만, 이 향고의 통은 저도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뚜껑을 열면 너무 진한 장미 향이 풍겨 나온다. 해당화를 흉내만 낸 싸고 비천한 냄새. 망설이다가도 그 노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진홍색의 향고를 덜어 긴 머리칼을 거둬내 양 귀 뒤쪽에 꼼꼼하게 바른다.
“이제 바닷바람만 불어오면 저도 충분히 해당화 흉내를 낼 수 있는 거지요.”
부러 눈웃음을 지어냈음에도 상대 쪽은 유난히 조용했다. 말하지 않는 게 옳았나?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알아줬으면 했다. 나의 본질은 이리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하지만… 역시 알고 나면 평가가 달라지고 마니까. 보여주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아니. 방금 생각은 모순이 아닌가. 정말로 그랬다면 담려를 이곳까지 데리러 오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심중이었는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다. 이 계약은 내가 천징에 올려놓은 게 많고, 변덕을 부려 언제든 추를 뺄 수 있는 것은 그의 쪽일 텐데도.
‘전부를 보이는 것 따위 위험천만한 짓이야.’
장사치의 기본부터가 망가져 버리고 만다. 도대체 언제부터? 변해가는 자신이 두렵기까지 하다. 이 혼란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되려 당신이 빨리 알아차렸으면 했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다가도 기대를 버리기 위해 자신을 깎아 먹는다.
‘어쩌면 나는 담려 님이 내게 실망하기를 바랐을지도 몰라.’
비참해지는 기분을 숨기는 것쯤이야 숱이 해왔던 것이다. 괜찮아… 이번에도 분명…
‘그렇게 되면 이런 기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이제 돌아가실까요? 많이 피곤하시죠? 가는 길은 그냥 운전사를 불러서… !”
그에게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을 때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이리 다가올 때마다 담려가 나와 같은 종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자, 잠깐 담려 님? 지금은 저한테서 그, 좋지 않은 냄새가…”
“가만히.”
굳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몸은 굳은 듯 움직여지지 않는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가까웠다. 내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새하얀 손길 하나하나가 세심했다.
‘이건… 아마 연기라기보단 습관이겠지.’
사촌 동생들을 무척이나 아끼던 담려를 떠올린다. 헷갈리진 않을 거지만, 이런 마음 상태로는 조금 위험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지금 이리도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 고동을 조절할 재주도 없었으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면을 쓰는 것과 패를 숨긴 채 장사를 하는 것.’
“다 됐네.”
조금 거리가 떨어진 뒤에야 남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 위에 무언가 달랑거리는 게 느껴져 손거울을 꺼내 보면
“이거… 아까 전의 머리 장식인가요?”
“그렇네.”
“이걸 사신 건가요?”
“그렇다만?”
점점 불안해져 온다. 설마…
“담려님… 혹시 이것에 얼마를 지불하셨나요?”
“3닢이라 가격표에 쓰여 있기에.”
“담려 님은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지 않나요?”
“민간 축제에 가자길래 따로 챙겨왔네.”
소매에서 꺼낸 비단 주머니를 거의 낚아채듯 가져간다. 이 와중에 이 작은 주머니에 놓인 수 하나하나도 쉽게 볼 수 없는 장인의 것이라니.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애써 누르고 안을 열어보면…
“… … 담려님, 혹시 아까 그 3닢이라는걸… ”
“은화로 지불했네.”
“미, 미쳤, 아니! 미치셨, 아니지- 돌으셨나이까?”
“제정신이다만.”
“아… 이럴 수가…”
가볍게 현기증이 왔다. 지금쯤 그 노인은 횡재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을 것이다. 통용되는 동전은 주석으로 만든 것들. 은전 같은 건 도박장에서 기록이 남지 않게끔 쓰는 용도이지 않나. 평소엔 블랙카드 한장으로 잘만 쓰는데 어째서!
“축제에선 은전을 주로 쓰지 않았던가…”
그의 중얼거림에 깨달았다. 이 남자… 짐조의 기준으로 민간 축제를 생각했던 것인가.
‘하긴 나를 만나기 전엔 연구실에만 있던 사람이었지.’
“내가 값을 잘못 치렀는가.”
“아닙니다. 담려님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신 소녀의 불찰이지요. 소녀의 죄가 큽니다.”
“누추하지 않았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담려를 바라보았다. 얽히는 시선에 가식은 비치지 않았다. 그것이 또다시 나를 두렵게 했다. 이리도 가벼운 진심에 흔들리고 마는
“귀한 경험이었어.”
내 가면은.
입술이 떨려오는걸 겨우 한번 꾹 다물었다. 눈물을 참는 것은 익숙했다. 단지 그 감정의 기반이 원망이나 슬픔이 아닌 것이 조금 어색했을 뿐이었다.
“… 그리 말씀하시면 소녀의 죄가 커질 뿐이옵니다. 부디 해당제의 전부가 저런 가게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기대치를 더 높여보도록 하지.”
자연스럽게 내밀어지는 큰 손에 또 당연한 듯 내 손을 얹었다. 함부로 착각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후후, 어디부터 가보시겠어요? 이따 밤에 열리는 불꽃축제까진 소녀와 어울려 주실 거죠?”
“일단 허기를 좀 채우고 생각해 보지.”
“그런 거라면 소녀에게 맡겨만 주시와요~ 번화가 쪽의 상점들은 전부 카드 결제도 가능하답니다. 후훗!”
“민간 축제인데 말인가?”
“그럼요~ 담려님의 첫 축제 경험을 소녀가 받아 가다니~ 크나큰 영광이와요~”
바닷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지금 나에게선 아마 누구나 속을만한 해당화의 향이 나겠지. 속이지 못할 이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단 한명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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