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워야 했던 날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최연소 국가대표, 에일린 포르테가 25m권총 사격 정상에 올라섭니다!"
아스트라의 국영 방송사, ANN은 환호했다. 주니어의 최강자, 에일린 포르테는 성인 무대 데뷔 시즌부터 올림픽 무대에 발을 들였다.
"아스트라 사격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로! 올림픽 사격 삼관왕이 탄생했습니다! 10m 공기권총, 25m 혼성 사격, 25m 권총 사격까지! 세 종목을 모두 석권하며 명실상부, 현 세대 최고의 자리를 굳힙니다!"
최연소 아스트라 국가대표 타이틀을 차지하고, 방송사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소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올림픽 무대를 완벽히 마무리 한 어린 선수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아... 여기서 발목을 잡히다니."
패배한 선수의 얼굴에 짜증과 아쉬움이 스쳤다. 총을 정리한 여인은, 금메달을 차지한 소녀를 노려보다, 한탄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박수와 환호성이 관중석에서 쏟아졌다. 패자에게는 격려를, 승자에게는 환호를.
오늘의 주인공, 에일린 포르테는 후련하게 웃었다. 오 년 넘게 달려온 선수생활에서 정점에 섰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경기로.
"축하합니다, 포르테 양."
"감사합니다. 이영 씨. 고생하셨습니다."
두 선수가 가볍게 포옹을 나눴다. 은메달리스트, 이영의 얼굴과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불쾌한 기색이 선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유력한 금메달리스트였으며 모두가 그녀가 최고가 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간신히 어른의 품위를 지켜 면전에서 대놓고 날선 말을 내뱉는 결례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일린은 그저, 얼떨떨하고 행복했다. 처음 밟아본 성인 무대에서 이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 없었기 때문에 더 행복했다.
포디움에 설 선수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내내 웃은 소녀는 관중석 가장 낮은 곳까지 뛰어내려온 오빠에게 먼저 달려갔다.
"이번에 미쳤어?"
"어. 크레이지 모드 켜졌어!"
"축하해!"
시상식을 준비하느라 경기장이 어수선해졌다. 총 안 치우냐는 코치의 핀잔에, 에일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사로에 놓아둔 짐을 챙겨, 코치진의 곁으로 돌아갔다.
악수를 주고받으며 시상대에 서고, 메달을 목에 걸고. 축하와 환호 속에서 시상식이 마무리 되었어야 했다.
"꺄아아악!"
"도망쳐!!!!"
방음장치가 되어있는 사격장 문이 벌컥 열렸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시상식이 열리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괴물들이 쏟아지듯 밀려왔다.
어떤 것들은 네 발 달린 짐승, 어떤 것들은 신화에 나올 것 같은 거인.
문헌에만 존재했던 것들이 소리없는 전쟁터이자 평화의 장에 터져나왔다.
사격장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관중들이 비명을 지르고,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경기장 바깥 복도와 홀에는 신음이 퍼졌다.
영광의 시상식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에일린 포르테는 얼어붙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공포스러워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게 뭐야?
"에일린!"
누군가 뛰어나와 몸을 감싸고 바닥을 굴렀다. 방금 전까지 서있던 시상대가 거인의 주먹에 산산히 부서졌다.
"린, 괜찮아?"
"... 오빠?"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재클린의 체격에 막혀 주변이 안 보였지만, 상황은 청각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명소리, 신음소리, 공포에 질려 우는 소리와... 바닥을 굴러 엉망이 된 오빠.
"지금..."
"에일린, 지금은 살아야 해."
그 짧은 사이에 상황 판단을 모두 끝낸 재클린이 손에 권총을 쥐어주었다.
"총 들어!"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경기장에 퍼졌다. 은메달리스트, 미르의 이영이 어느새 제 총을 도로 꺼내 눈앞에 달려드는 것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 우리밖에 없어!"
이영의 총이 두 번 격발했다. 달려들던 네 발 짐승들이 바닥으로 넘어지며 흩어졌다.
"이럴 때도 성격 보인다니까.."
재클린이 중얼거리며, 에일린이 예비용으로 사용하던 총을 제 손에 잡았다.
"영 언니도... 오빠도... 안 무서워?"
"이영씨 속은 모르고, 나는 경찰이지. 이럴 때 쫄면 되겠어?"
손을 뻗는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재클린은 태연하게 에일린을 일으켰다.
"에일린, 정신 차려! 지금 세상에서 제일 총 잘 쏘는 사람, 너야!"
이영이 다그치듯 외쳤다. 목소리에 담긴 의도가 분명했다. 혼자는 벅차다. 도와달라.
"호위할게. 그냥 다 쏴버려."
"응."
에일린은 저도 모르는 새 터트렸던 눈물을 닦았다.
시상대를 부순 거인이 총성이 울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쿵, 쿵, 바닥이 울렸다.
거인의 목표물은 분명했다. 이영.
"괜찮아. 시합장이라고 생각해."
재클린은 덜덜 떠는 동생의 등을 제 몸으로 기대어 받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선수는 겨우 균형을 잡고 이영을 향해 달려드는 거인에게 총을 겨눴다.
에일린은 숨을 들이쉬었다.. 손끝이 덜덜 떨려 제대로 쏠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정신 차리자. 이영의 말대로, 지금 세상에서 제일 총을 잘 쏘는 사람은 나야.
머리에 목표물만 남기고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지웠다. 급소에 연달아 명중시켜야 해. 눈. 그리고, 힘줄.
총성이 연달아 터졌다.
정확하게 명중한 부분에서 핏자국이 터졌다. 거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끔찍한 울음소리가 경기장을 가득채웠다.
에일린의 탄환이 명중한 자리에 이영의 연달아 격발했다. 휘청이던 거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직 남았어!"
이영이 외쳤다. 에일린과 이영은 달려드는 괴물들을 쏘아 맞추고, 재클린은 둘에게 근접하는 것들을 쏘아 맞추며 보좌했다.
두 메달리스트의 분전에 몇몇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비명과 절망 뿐이던 경기장 안에 쉴새없이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들 관중석으로 옮겨!"
"의자랑 책상 다 가져와! 출입문 막아!"
선수들의 탄환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사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상주하는 의료진도 정신을 붙잡고 자세를 낮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관중들과 몇몇 코칭스태프들, 선수들은 합심해서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문을 막았다.
복도에서 쏟아져나오던 것들은 곧 조용해졌다.
"됐나?"
"그거 플래그입니다, 이영 씨."
재클린은 덜덜 떠는 에일린을 안아주며, 평시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이영을 놀렸다.
"에일린 가족이야? 그쪽도 보통 인간 아니네."
"저야 훈련 받았으니까요. 이영 씨야말로 놀랍습니다."
"보상 스테이지가 개판나서 짜증은 좀 나지만."
이영은 오빠에게 안겨 엉엉 우는 어린 금메달리스트를 바라보곤 혀를 쯧 찼다.
"잘했어. 이제 숨 돌려도...."
쾅!
이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창을 막으려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재클린과 이영은 창밖을 내다봤다. 주변을 부수려 작정한 규모로 폭발물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대통령 새끼가! 일대에 사람이 몇인데!"
이영의 입에서 욕이 터져나왔다.
경기장은 무거운 절망에 잠겼다. 이제 정말 끝장이다.
몇은 분노하고, 몇은 침묵하고, 누군가는 울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격을 드러냈다.
재클린은 아직 10대 후반이었던 어린 금메달리스트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짙게 깔린 절망은 어린 메달리스트의 피부로 느껴졌다. 태연하기만 하던 재클린의 심장박동마저 빨라졌다.
왜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일이 터졌을까.
나도, 이영도, 이 자리에 있는 선수들이 모두 오늘 하루만을 위해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달려왔는데...
경기를 마무리한 여운을 즐기기도, 삼키기도 부족한 날이, 왜 절망에 물들었을까.
차마 소리내어 울 수는 없었다. 두려움과 서러움에 눈물만 펑펑 흘렸다.
'도와줄게'
'마음 굳게 먹어'
'너희는 살아야 해.‘
.
.
.
에일린 포르테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억은 어쩜 이렇게 힘이 센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 주제에, 남아있는 동안은 이렇게도 사람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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