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하람] 뭐든 괜히 좋은 날이 있다
조각글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에 옷깃이 나부끼고, 키 낮은 풀잎이 부딪쳐 나는 소리가 청아하다. 정오를 조금 넘긴 햇살은 따스하다. 양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섞여오면 하람은 그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다. 작은 양떼가 목동을 따라 걷다가 풀을 뜯는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떠올랐냐 하면, 글쎄. 딱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람의 눈길은 오래도록 그곳에 머문다. 울음소리가 멀어지고 인영이 작은 점이 될 무렵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하람의 눈이 커진다. 걸음 맞추어 걷던 상대는 뒷전으로 한 채 제자리에 갑자기 우뚝 서서 웬 양떼나 구경했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챈 탓이다. 미안. 반사적으로 덧붙인 사과에 마그나이는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기분 좋은 건 네 쪽 같은데. 그 낯에 의아하게 대꾸한 하람은 다시 원래의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이와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라던가.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재회시장에서 하람을 발견한 마그나이는 꽤 마음이 들떠 보였다. 태양의 아버지께서 이곳으로 이끌었다느니 같은, 평소와 다름 없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반응이 슬 익숙해질 참이기도 하고, 원인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하람은 하던 일을 갈무리하며 어머니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통보하고는 그를 이끌고 시장을 나선다. 뒤를 따르는 마그나이의 고개가 기울어진 것은 보지 못한 듯 했으나.
거꾸로 셈해보면 겨우 일주일이니 그리 오랜만에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쌓인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마그나이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면 하람은 가만 듣다가 이따금 고개를 주억거린다. 드물게 얕은 웃음이 새기도 한다. 마그나이가 이야기를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멀리서 목동과 양떼가 지나간다. 시선을 빼앗긴 하람의 표정이 퍽 새롭다.
생각과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마그나이와 달리 하람은 늘 잔잔한 수면과도 같았다. 동시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최근까지 하람은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천성 자체가 가라앉은 인간이니 겉으로 보이지는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고 다음 행동을 계산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습관이요, 생존이란 언제나 가장 무거운 일인 법이다. 마그나이는 그가 제 반려 될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 더욱 살피고 여겨보았다.
그러니 하람의 상태가 이전과 다른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작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에 곧장 긍정하지 못하는 건 하람이다. 몸 상태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최상은 아니다. 내가 웃기라도 했나. 제 입꼬리에 손을 가져다 대보기도 한다. 멀리서 지나간 양은…. 뭐, 워낙 아끼는 짐승이라 시선이 가기는 했다만. 제 기분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면 쓸데없이 생각이 길어지고는 한다. 하람은 다시 마그나이를 올려다 본다. 빙글빙글 웃는 낯을 보면서도 역시 잘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래도….
알맞은 바람이 맨살을 간질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바람을 타고 들여오는 작은 털짐승의 울음소리와 그 목에 달린 방울 소리가 정겨웠다. 걸음을 멈추고 양떼를 지켜보는동안 곁에서 잠자코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고, 오래도록 잠긴 풍경을 깨운 목소리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그러모아서 좋은 기분을 엮어내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결론을 꼭 내려야 한다면. 하람은 그에게 가만히 이야기한다.
괜히 좋은 날이 있어.
그게 무엇이든 말이지. 마주보는 눈이 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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