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차
회귀물 주인공의 죽음
나는 세상을 구했다.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서 세상을 구한 건 아니다. 죽을 때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으로 돌아가게 되어 그 기억으로 조금씩 나아가다 보니 나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륙십 년 전의 이야기다. 재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회귀를 하여 PTSD를 얻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해 영웅대접을 한참 받았다. 그랬더니 어느새 사람들의 환호성마저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여기까지 고작 석 달이었고 치료는 10년 넘게 받아 겨우 회복을 했다. 그런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자식을 만나고, 손주까지 봤다. 온갖 것들이 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시절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방금 노환으로 사망했다. 유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내 생에서 마지막 기억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저 멀리 불덩이가 떨어지고 거기에 맞은 건물이 무너진다. 나는 이 모습을 누구보다 선명히 기억한다. 내가 죽을 때마다 돌아왔던 시점이니까. 늙어 죽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하는 동안 자결도 시도해 봤다.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 죽어도 곤란하다. 여기서 끝나면 내 행복했던 삶도 사라진다. 증명할 사람조차 없다. 지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한 명일 테니. 나는 완전한 죽음에 이르면서도 세상을 구한 이후의 삶을 돌려받아야 한다. 단순히 세상을 구할 때보다 어렵다. 그때는 단지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세상을 구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가야만 한다. 나는 그 시절을 없앨 수 없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이 재난을 지나던 시절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도 오래된 일이니 굵직한 일만 드문드문 기억난다. 아마 나는 죽기 위해 여러 번 죽을 것이다. 망각은 축복이란 말에 동감은 하지만 지금만큼은 원망스럽다. 그것을 모두 기억만 한다면 나는 앞으로의 많은 고생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나는 이 길을 다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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