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열대야

열대야, 복숭아, 그리고 운동선수

청우가 부상으로 양궁을 그만둔 어느 세상에서의 청우문대

 

*

 

- OOO 선수! 이번에도 10점! 10점입니다!

- 이러면 상대 선수가 압박이 심해지겠는데요.

- 아, 이탈리아의 **** 선수가 8점에 쐈어요. OOO 선수가 8점 이상만 쏘면 **** 선수가 10점을 쏜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승리입니다.

 

8월의 대한민국은 어딜 가나 올림픽 이야기를 했다. 배드민턴이 4강 진출에 성공했고. 사격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확정 지었고, 양궁 경기가 남았으니 메달을 기대해도 된다는 등. 만나는 사람들마다 ‘올림픽 보셨어요?’라 물었다. 마치 안부 인사처럼.

TV에서는 당연하게 모든 채널에서 올림픽 경기를 송출했다. 어제 중계한 경기를 오늘 또 보여주고, 아직 치르지 않은 경기는 ‘잠시 후’라는 말로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았다. 예능 채널로 바꿔도 메달리스트가 출연했던 어느 회차를 재방송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올림픽 이야기뿐이었다.

 

박문대는 류청우를 떠올렸다. 사실 저절로 떠오른 것에 가까웠다. 청우 형은 지금 저거 안 보겠지. 그럼 뭐하고 있을까. 청우 형도 나갔으면 잘 했을 텐데. 오늘은 좀 기분이 나아졌을까. TV에서 올림픽 중계를 멈추지 않고 이어가듯 박문대도 류청우의 생각을 그만 둘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뒤돌아보면 저 소파에서 ‘문대야.’라고 부르며 웃어줄 것 같았다. 혼자 있기 무섭다고 옷자락을 붙잡으면 못 이긴 척 다시 돌아왔는데. 그리고 침대에 누워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하지?’라며 장난스럽게 웃어주었는데. 그런 류청우는 더 이상 제 옆에 없었다.

 

박문대는 자연스레 이별의 순간을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이 또한 저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그날 류청우는 침착해보였다. 재활이 더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활을 부러뜨렸다던 말에 사실 박문대는 몇 가지 위로의 말을 준비해 갔었다. 그러나 정작 박문대가 마주한 것은 류청우의 평온한 낯이었다. 그 얼굴에 박문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요해 보이는 얼굴 아래 얼마나 가라앉아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아 두려움이 끝을 모르고 밀려왔다.

류청우는 그의 옆에는 개인 락커에서 챙긴 짐이 놓여있었다. 학교 대표, 국가 대표로 활약한 세월만큼 정갈히 쌓인 짐이 상자에 담겨있었다.

- 문대야, 나 이제 양궁 못 한대.

- 형, 우리 다른 걸 좀 찾아보면….

가장 사랑하던 것을 잃어버린 류청우에게 차마 다른 걸 찾아보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류청우에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류청우와 같은 감정을 느끼진 못하리라. 박문대는 뻗었던 손을 류청우의 어깨에 닿기 전에 다시 거둬들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 내가 사랑했던 것들도 떠나가려나 봐.

- …형, 그거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 응, 그래서 무서워.

박문대는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제가 사랑하는 건 전부 떠나갈까봐 무서워요.’ 류청우에게 했던 말이지 않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류청우를 만나고 거침없이 제게 다가오던 류청우를 밀어내며 했던 말이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던가. ‘난 절대 떠나지 않을게. 그래도 무서우면 넌 날 사랑하지 않아도 돼.’ 류청우의 달콤한 사랑 고백에도 불구하고 박문대는 류청우를 사랑했다. 그래서 박문대는 직감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건 전부 나를 떠나가는구나.

- 그래서 절 떠나신다고요.

박문대의 목소리는 그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했다.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우습게도 이별의 순간 박문대는 그 따위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 …네가 날 버릴까봐 무서워.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거든.

류청우와 박문대는 그렇게 이별을 맞이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전부 나를 아프게 만들고 떠나가. 어느 노래 가사처럼 두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고서 이별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류청우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버려짐이 두렵다며 류청우는 버리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박문대는 억지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콩나물을 밥 위에 올리고 입을 벌려 집어넣고 꼭꼭 씹어 삼켰다. 모래알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목구멍에 걸리는 기분에 얼른 물을 따라 마셨다. 한 컵을 다 비우자 답답함이 그나마 가시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다시 수저를 들어올렸다. 누군가 챙겨주지 않는대도 스스로를 챙겨야했다. 이젠 정말 혼자니까. 콩나물, 시금치, 장조림, 제육볶음. 박문대는 기계처럼 손을 움직여 반찬을 밥과 함께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끅끅거리며 그는 울음마저도 모조리 씹어 삼켰다.

 

“돌려줘야 하는데.”

반찬그릇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다 말고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서있다 냉장고에서 경고음을 내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에 잠겼다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문을 닫으라며 재촉하는 경고음에도 그는 눈을 굴리며 냉장고 안을 살폈다. 그리고 구석에서 점점 물러져가는 복숭아를 발견했다. 급식 아니면 과일 먹기가 힘들다는 제 투정에 함께 장을 보러 갔다가 잘 챙겨먹으라며 류청우가 사줬던 거였다. 정작 류청우 본인은 옆에 없는 주제에 곁에 온통 흔적을 남겨두었다. 눈앞머리에 물방울이 맺혔다. 박문대는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냉장고에 있는 복숭아를 전부 꺼냈다. 헤어지자고 할 거면 전부다 가져가든가, 박문대가 속으로 씩씩거렸다.

박문대는 싱크대 앞에 서서 한 손에는 과도를, 다른 손에는 과일을 들고 멍하니 또 서있었다. 이번에는 생각에 잠겨서가 아니라 과일을 어떻게 깎는지 몰라서였다. 그동안 어떻게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유지하려고 아껴 살던 탓에 과일은 사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깎는 방법도 모를 수밖에. 저 혼자 먹을 거라면 대충 껍질만 벗겨서 손에 들고 베어 먹었을 텐데 류청우에게 돌려주려면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냉장고에 오래 놔둔 터라 군데군데 멍이 들고 물러져있었다. 그대로 반찬 그릇과 함께 가져다주면 미워서 일부러 못생긴 과일을 준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그건 아닌데. 아니, 실은 조금 미웠다. 조금 많이.

 

박문대는 엄마가 예전에 했던 대로 일단 껍질을 벗겨보기로 했다. 얇게 칼날을 박아놓고 손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렸다. 그러나 원하는 것보다 훨씬 두껍게 과육이 벗겨져나갔고, 또 잘 안 됐다. 게다가 손에 쥔 복숭아가 미끄러워 자꾸만 놓칠 뻔 했다. 칼을 든 손도 위험하게 움직였다. 손에 과즙을 잔뜩 묻힌 채로 그는 겨우 하나를 다 깎았다. 그리고 작은 플라스틱 도마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놓인 복숭아 조각을 보니 하나같이 엉성하고 엉망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못생겼고, 눌린 건지 자른 건지 구분도 안 갈 정도였다.

이렇게 잘랐다간 영영 반찬 그릇은 돌려주지 못할 터였다. 조각난 복숭아는 계속 과즙을 뱉어냈다. 박문대도 그 위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씨발, 되는 게 없어, 진짜.”

다리에서 힘이 풀렸는지 서서히 무너졌다. 화풀이처럼 욕을 뱉은 박문대는 무너진 채로 무릎을 감싸 고개를 묻었다. 손이 더러워졌으나 무릎을 감싸 안았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손도 얼굴도 끈적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눈물을 계속 닦았다. 신경 쓸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박문대는 남은 복숭아를 깎지 못했다. 류청우로부터 받은 반찬 그릇도 다 비우지 못했다. 그러나 헤어진 마당에 두고두고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 찬장에서 텅 빈 반찬 그릇을 꺼내 콩나물, 시금치, 장조림, 제육볶음을 천천히 옮겨 담았다. 그리고 류청우가 가져다줬을 때처럼 쇼핑백에 잘 담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동네 과일 가게에 들러 단단한 복숭아를 몇 개 사고 쇼핑백에 넣었다. 그리고 류청우의 집으로 향했다. 이전에도 종종 들렀던 터라 익숙했다. 어느 덧 저녁이라 가는 길의 햇볕은 좀 식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무더웠다. 습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고 나무에선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박문대는 눈가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야했다. 그래도 박문대는 이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으면 했다. 류청우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개학하고 그를 마주쳤다가 눈물을 쏟을 지도 모른다. 개학하면 매일 같이 마주할 텐데. 아님 학년이 다르니 매일은 아니더라도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일이 많을 텐데.

류청우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에 그는 거울을 다시 확인했다. 옷은 단정한지, 웃고 있는지, 눈물자국은 잘 지웠는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에도 확인했지만 꽤 오랫동안 거울을 보았다. 왠지 완전해보이고 싶었다. 저를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게 그 이유였다. 류청우, 너 없이도 나 괜찮아. 그러니까 날 버려도 돼. 죄책감 갖지 마. 돌아가신 부모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고.

 

현관문을 두드리자 익숙한 얼굴이 박문대를 반겼다. 처음에는 놀람, 그 뒤에는 잠시 미안함이 머물렀다가 곧 반가움이 얼굴에 떠올랐다.

“문대 왔구나. 얼른 들어와.”

당연하게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는 청우의 어머니에게 박문대는 대뜸 쇼핑백을 건네었다.

“아니에요, 이것만 전해드리러 왔어요. 반찬 그릇이에요. 그리고 과일 조금 샀어요. 반찬 잘 먹었습니다. 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감사했어요.”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박문대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못 가게 막았다. 겁을 먹은 박문대를 쇼핑백을 받아 든 손으로 얼른 붙잡았다.

“문대야, 들어와서 과일만 먹고 가. 급한 일 없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박문대는 그녀의 손에 붙잡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박문대의 손을 잡고 부엌 식탁 앞에 그를 앉혔다. 방금 전까지 박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싱크대 앞에 서서 복숭아를 씻고 깎기 시작했다.

“문대야, 와줘서 고마워. 저녁은 먹었니?”

“네, 덕분에요.”

“청우는 여태 밥도 안 먹고 누워만 있다? 너 왔으니까 내일은 먹겠지 싶은데. 문대야, 정말 와줘서 고마워. 아줌마가 빈말로 하는 말 아니야.”

“네에.”

류청우와 헤어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박문대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정작 그는 TV 소리도 없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박문대는 그녀가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의문이었다. 아들이 고아랑 사귀는 게 싫진 않은가. 물론 가족이 없는 게 제 잘못은 아니지만 다들 불편한 얼굴을 하는 건 맞지 않나.

“이거 깎아줄 테니까 청우랑 같이 먹어. 청우 방에 있어.”

박문대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물기가 묻었던 제 손이 보였다. 찐득한 과즙이 묻었던 손. 그 손으로 눈물을 닦았는데. 그랬는데 또 울 것 같았다. 박문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서걱서걱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오늘은 자고 가. 매번 문대 네가 우리 청우 빌려갔으니까 너도 하루 정도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야지.”
류청우는 엄마를 닮았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박문대에게 예쁘게 담긴 복숭아를 건넨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씨익 웃으며 말했다. 류청우도 꼭 짓궂은 장난을 칠 때면 그렇게 웃었다. 그때마다 박문대는 당해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열자 곧바로 류청우가 보였다. 류청우는 그가 들어온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침대에 벽을 보고 누워 박문대로부터 등을 돌린 상태였다. 박문대는 조용히 책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항상 크게만 여겼던 어깨가 작아보였다. 그래서 류청우의 엄마를 마주할 때는 나오지 않았던 말들이 툭툭 나왔다.

“잘 지냈어요? 밥은 잘 먹었고? 복숭아 먹으래요. 내가 사온 거예요. 형 안 먹으면 내가 다 먹고.”

여전히 그로부터 등은 돌린 상태였다. 류청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속상하고 슬픈 감정만 느껴졌는데 저 뒷모습을 보니 그냥 안쓰럽기만 했다. 게다가 며칠 만나지 않은 걸로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어색함도 없이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형, 저 갈까요?”

한참동안 아무 말 없던 류청우가 드디어 대답했다. 가지마. 볼품없이 흔들렸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박문대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박문대는 류청우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웃었다.

“형이 가라고 해도 어차피 못 가요. 어머니께서 오늘 무조건 자고 가래요.”

바닥엔 당연히 매트도 이불도 없었다. 그렇지만 꺼내달라고 염치없이 굴 자신도 없었다. 박문대는 대충 책상 위에 올려둔 접시를 구석에 밀어두고 엎드렸다. 밤새 핸드폰을 하거나 책상 위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에어컨 바람이 약간 서늘하게 느껴졌지만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차피 여름이지 않나.

 

“왜 불편하게 그러고 있어. 이리 와.”

엎드려 핸드폰으로 유튜브라도 볼까 하고 뒤적이는데 뒤에서 류청우가 말했다. 박문대는 상체를 일으켜 류청우를 보았다.

“거기 누우면 더 불편할 것 같아서 싫어요. 형이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제가 왜요.”

사귀었던 건 별 게 아니라는 듯 침대 한 켠을 비워주는 류청우에 짜증이 났다. 박문대는 자기도 모르게 날선 말을 내뱉었다. 류청우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제게 헤어짐을 고할 때도 저런 감정을 내비치진 않았는데. 박문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만 몇 번 째였다. 이러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어깨 많이 아-”

“너도 이젠 내가 싫어?”

혹시 아파서 그런 걸까, 물으려던 박문대는 류청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류청우는 자신이 싫으냐 물었다. 당연히 싫지 않았다. 여전히 많이 좋아했다. 그렇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좋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 류청우는 박문대를 버린 사람인데.

둘 사이에선 한참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바깥에서는 류청우의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들리지 않았을 목소리일텐데 둘 사이가 너무 고요해서 들린 것이었다.

 

- 이것도 문대가 사온 거라고?

- 응, 둘이 헤어졌다는데 그래도 청우 걱정돼서 사온 거겠지.

- 청우는 좋겠네.

- 그러니까. 인복이 있나 봐. 에휴, 그런데 문대는 아직 청우보다 한참 어린데 너무 빨리 커버렸어.

- 주변에 어른이 없으니까 빨리 컸나보네. 우리 청우는 내년이면 스물인데도 아직 앤데.

 

류청우의 부모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던 박문대는 입술만 씹었다.

“내가 애 같아서 싫어?”

적막을 깬 류청우의 목소리에 박문대는 고개를 들었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아니, 애초에 찬 건 형이면서! 아니….”

박문대는 당황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화가 났다.

내가 찰까봐 무섭다고 먼저 차놓고. 이러는 게 어딨어.

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울면서 헛소리를 하는 류청우에게 화낼 의지가 더는 생기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류청우의 부모님은 제가 여기 온 것을 류청우가 좋아할 거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여기 더 있는 게 류청우에게 더 안 좋을 것 같았다. 박문대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류청우에게 말했다.

“저 형 안 싫어해요. 오늘은 그냥 갈게요. 형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다고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세요. 오늘은 이거라도 먹고 내일은 꼭 밥 먹어요. 잘 자고. 저 가요.”

“네가 왜 날 걱정해? 나 정말 안 싫어? 내가 너한테 못 되게 굴었는데 정말 내가 싫지 않아?”

박문대는 자꾸만 차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류청우를 마주한 순간 화는 사라지고 애처로움만 남았다. 류청우는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오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널따란 어깨가 한껏 웅크려져서는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말 나 안 싫어하면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네가 혼자 있음 무섭다고 한 게 뭔지 알 것 같아. 밖엔 부모님도 계시고 동생도 있는데 네가 없으니까 너무 무서워.”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주제에 혼자 있는 게 무섭다며 류청우는 울었다. 말도 안 되게 애 같은 모습이 어이없었다. 그렇지만 더 어이없는 건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는 거다. 그냥 박문대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그의 얼굴을 흥건히 적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류청우는 구원이라도 된 양 그의 손에 기대 얼굴을 비비었다.

“알겠어요, 안 갈게요. 근데 이래도 우리 안 사귀는 거예요?”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박문대는 체념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류청우에게 지금 필요한 건 위로이지 제가 아니니까. 류청우는 여전히 박문대의 손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류청우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고 박문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시 나 만나 줄 거야? 나 정말 안 싫어?”

계속 자신이 싫지 않냐 묻는 류청우에 박문대는 그가 어린 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류청우의 말에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류청우의 말 한 마디에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제 마음이 더 어처구니없었다.

“안 싫다니까요. 싫어하면 이러고 있겠어요? 여기 오지도 않았지.”

“나랑 만나자. 내가 잘못했어.”

류청우가 박문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박문대도 그대로 류청우를 마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많이도 울었는지 눈동자가 눈물에 적셔서 더 깊게 느껴졌다. 박문대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를 좋아했다. 특히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면 온통 눈동자에 제가 담겨 있어 좋았다.

“좋아요. 형 앞으로 나한테 미안해야 돼.”

“응, 미안해. 잘못했어.”

 

평소 박문대의 집에서 그랬듯이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박문대는 류청우의 어깨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신경 쓰는 걸 알았는지 류청우가 그를 더 가까이 당겼다.

“평소엔 괜찮아. 힘 쓸 때만 잘 안 되는 거지.”

“…그래요. 많이 속상했어요?”

“응, 너한테 헤어지자고 할 만큼 무서웠어.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게 전부 다 없어지니까 정말 못 버티겠더라. 차마 너한테 다시 만나달라고 말은 못하겠고, 너 마주할 자신도 없고….”

“그래서 밥도 안 먹었어요?”

박문대의 말에 부끄럽다는 듯 류청우가 웃었다. 아까까지 어린 애처럼 엉엉 울던 사람은 어디갔는지 이젠 다시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내일은 집에서 아침 먹어요.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박문대가 류청우의 품에서 중얼거렸다. 졸린지 점점 목소리가 흐려졌다. 류청우는 그런 박문대를 더 깊이 안고 작게 대답했다.

창문에서는 가로등의 엷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더운 밤공기도 벽을 타고 밀려들었다. 요 며칠 류청우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열대야 때문인가 싶어 에어컨을 세게도 틀어보았고, 오히려 에어컨 찬바람 때문인가 싶어 일부러 옅게 틀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요 며칠 간의 노력은 박문대 앞에선 허사로 돌아갔다. 그냥 박문대가 없어서 그랬던 거였다. 류청우의 뒤에선 습하고 후덥지근한 여름의 공기가, 앞에선 에어컨의 찬 공기가 밀려와 부딪쳤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무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저와 같은 베개를 베고 잠든 박문대에게만 온 신경이 쓰였다. 시선을 내리자 조금 부은 눈가가 보였다. 제가 울었던 것처럼 박문대도 울었던 것을 그는 금방 알아차렸다. ‘제가 사랑하는 건 전부 떠나갈까봐 무서워요.’ 류청우는 박문대가 저를 거절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요 며칠 그의 두려움을 실감하고 두려움을 못 이겨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류청우는 박문대의 짓무른 눈가가 제 잘못 같았다. 그 위에 입술을 살짝 누르고 눈을 감았다. 류청우는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 그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박문대가 자신을 떠나가게 두지 않을 거라고.

양궁을 사랑했던 만큼 양궁이 준 상실은 그를 괴롭게 했다. 학창 시절을 전부 양궁과 함께 보내지 않았나. 그러나 박문대를 양궁만큼이나 사랑했다. 그러니 박문대가 옆에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감은 열대야 같았다. 열기와 괴로움을 한데 섞어 남기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쉬이 잡히지 않는 갈증을 주어 잊어버릴 수도 없게 만든다. 그리고 새로운 계절을 남기고 가버린다. 새로운 계절은 풀벌레 소리와 풍요를 손에 들고 찾아온다. 풋풋한 녹음을 붉게 달아오르게 만들고 선선한 바람으로 가지를 흔든다. 류청우에게 영원한 가을로 박문대가 남아있길, 그는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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