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판타지 14

효월의 종언 스피넬 코발트블루 캐릭터 이입 일기

오늘은 모두가 날짜를 세어가던 여행일이다. 바로 샬레이안으로 떠나는 날.


나는 샬레이안에 대해 연고도 없고 사실 관심도 별로 없었지만, 나의 알피노가 자란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는 기쁜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서 보인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입국이 거절될지.


그렇지만 뭐, 입국을 거절하면 농성이라도 하면 그만일 거다. 별의 종말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을 지킬 거냐고.
알피노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기겁해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지금의 나는 동료들과 함께다.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샬레이안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쯤이야 뭐, 얼굴에 철판 깔고 해낼 수 있는걸.


무엇보다 나는 알피노를 지켜야 하니까 말이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당신이 살아갈 세계 하나 쯤은 구해내겠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나의 곁에 계속 있어줘요.


올드 샬레이안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오늘은 그라하, 쿠루루와 함께 샬레이안 내를 둘러보았다. 역시 학술의 도시라 그런지, 사람들이 다들 학문에 열중할... 것 같았지만, 꽃도 보고 바닷바람도 쐬고, 그러면서 그게 연구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라고 말하고, 인간적인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뭐, 적절한 휴식은 확실히 연구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입국 심사 때는 조금 긴장했다. 혹시 나를 알아보면 어쩌지? 에오르제아 4개국에서야 얼굴만 보면 모를 사람이 없을 '영웅'이지만, 샬레이안 사람들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진 않다. 스피넬 코발트블루, 영웅입니다. 했더니 돌아오는 건... '자칭 영웅'이라는 소리라니! 내가 아무리 샬레이안에는 한 발짝도 안 들여놨지만, 샬레이안에는 에오르제아의 '영웅'에 대한 지식 같은 건 없나?! 

위에서도 썼지만 나는 그라하, 쿠루루와 함께 동행했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사람을 보내 집안 분위기를 살펴본다고 했다. 사실 예비 장인어... 아니, 푸르슈노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오지만 않았다면 샬레이안에 오면서 르베유르 가도 들러서 겸사겸사 나와 알피노의 약혼 소식을 알리는 건... 아니, 아이 참, 이건 나라도 조금 부끄럽네. 그렇지만 이 중요한 소식을 르베유르 가가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이거? 뭐, 먼저 자식들을 내친 건 푸르슈노니까, 나중에 가서 뒷목을 잡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밤이 늦어 '휴게실'에 들어왔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쯤 되면 다들 '대회의실'로 오지 않을까. 늦은 밤은 조금 쓸쓸하다. 알피노가 보고 싶다.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집안 사정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약혼자라도 좀 그러니까, 나는 응원의 마음만을 보낼 뿐이다.


아멜리앙스라는 사람, 그러니까 알피노와 알리제의 모친분이 갑자기 우리를 집에 초대했다. 알피노하고 알리제 입장에서는 본가를 방문하는 거겠지만. 아무튼간에. 나는 늘 짓고 있던 무표정 그대로였지만 패닉이 왔다. 어쩜 좋지? 이거 무슨 의미지? 나랑 알피노의 시선이 그렇게 티가 났나? 사실 언약을 약속했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이 시국에? 이 상황에? 아무리 푸르슈노 아니라지만? 그래도? 되나? 푸르슈노가 돌아오기 전에 나갈 수 있을까?

아무튼간에 그 뭐냐, 언약을 하게 될 상대의 모친분을 뵙는 일이니, 한껏 차려입고 (그러나 중년 여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조신하게) 가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명가의 드레스 새파란색. 투영을 바꾸러 림사 로민사에 다녀와야겠다고 동행하려던 두 사람을 떼어놓고 텔레포를 하려던 찰나,
알피노가 어깨를 붙잡아 말렸다. 올드 샬레이안에도 '휴게실'이 있지 않냐고.
...잊고 있었다. 내가 잔뜩 당황한 게 티가 나지 않았어야 할 텐데.

아니, 알피노도 속으로는 꽤 당황스럽지 않을까? 어머니가 내쳐진 자신들을 갑작스럽게 초대한 데다가, 약혼자가 자신의 본가를 방문하게 되는 거니까. 아마도? 알피노답게 침착해 보이는? 모습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간에 나는 두 사람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해놓고 휴게실의 방에서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쳐 누운 참이다.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알피노, 나 무서워 죽겠어요. 내가 당신 어머님한테 잘 보일 수 있을까요...!!


아............ 나는 지금........... 대회의실에 동료들이 모여서 정보를 나누는 동안........ '휴게실' 침대에 쓰러져 있다....... 아파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별 거 아니다...... 상견례? 가 막 끝났기 때문이다........ 오늘 주어진 사회성을 다 소모했기 때문이다...

명문가라는 르베유르 가의 이름에 걸맞은 화려한 연회 같은 걸 기대 안 했다고 말은 못 하지만, 내가 아멜리앙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알피노와 알리제가 새 옷을 받아오는 게 끝이라니, 조금 김이 새기도 했다.

하지만 아멜리앙스는 정말 다정하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알피노한테 이런 어머니 밑에서 클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중에 놀라는 일이 없도록 아멜리앙스에게 살며시 말해주었다. 알피노가 성년이 되는 대로, 그와 언약할 예정이라고.

아멜리앙스는 정말로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다행이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내게 아주 드물다. 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멜리앙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분에게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속으로 꽤 놀랐다. 내가 미소라니.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오늘부로 현자가 된 알피노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주어야겠다. 일단 약혼 사실도, 그걸 어머님에게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도, '새벽' 동료들에게는 아직 비밀이라, 단 둘이 있을 때를 틈타서 말해야겠다. 분명 그도 꽤 놀랄 것이다.

...이제 푸르슈노가 남았는데,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싶다. 청문회의 그 압박감에서 벗어난 지도 얼마 안 됐고, 푸르슈노는 자기 자식들을 내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인간이니,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으, 그 재수 없는 인간 (미안, 알피노, 그리고 알리제!) 얼굴을 또 볼 일이 있을까? 어차피 우리의 목적이 충돌하는 이상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겠지. 정말 싫다. 알피노를 쏙 빼닮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알피노가 푸르슈노를 닮은 거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런 점이 더 싫다...

아무튼간에 사베네어 팀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서 합류해야겠다. 대회의실로 가서 동료들 얼굴만 잠깐 보고 전송 마법 연구소로 가야겠다. 오늘의 일기 끝.


한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당연하다. 혐오시설인지 조트 탑인지 뭔지를 공략하러 갔었다. 아니, 그 이전에 탑에 동행했던 연금술사가 빨려갔었다. 시체 같은 표정으로 박제된, 텅 빈 눈동자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사실 동료라고 하기도 뭣할 정도로 짧게 안 사이지만, 그래도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탑을 공략할 때마다 보게 되겠지. 벌써부터 정말 싫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노스와 파다니엘을 나란히 림사 로민사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만들 테다. (림사 로민사에 살면서 해적들에게 배운 욕이다.)

일단 전에도 썼다시피 알피노와 약혼 사이인 것을 어머님께 말씀드린 상태고, 우리는 라자한에서 올드 샬레이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동료들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뱅글뱅글 돈 건 아니고, 그러니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기웃거렸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 기회가 생겼다. 내가 쉬고 있는 방으로 '새벽'의 동료들이 쳐들어 온... 아니, 찾아온 것이다. 야슈톨라와 쿠루루와 그라하, 알리제와 알피노와 함께 다과를 즐기게 되었다. 물론 나는 롤란베리 차를 마시는 중에도 이걸 대체 언제 말해야 하지 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내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알아챈 쿠루루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나는 알피노 쪽을 몰래 흘끔 쳐다보고는, 모두에게 사실을 말했다. 사실 올드 샬레이안으로 오기 전, 휴가 기간 동안 알피노와 이슈가르드 근방으로 둘이서 여행을 갔다가 그와 약혼을 맹세했다고.

알리제는 그라하의 쿠키를 뺏어먹다가 그만 떨구고 말았다. 알피노는 자기랑 약혼한 건데도 놀라서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지금도 어이가 없다. 그라하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야슈톨라는 쿡쿡 웃었다. 멀쩡하게 축하를 해주는 건 쿠루루밖에 없었다. 물론 직후 '둘이 최근 들어 분위기가 묘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고, 알피노는 자기를 잘 아는 쿠루루 선배에게는 당해내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알리제의 미묘한 표정을 보니, 어머님께 약혼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알리제에게도 알려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리제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미루고 미뤄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알리제는 이전처럼 '새벽이 왜 제국군 출신인 당신을 영웅으로 받아들였냐'라고 따질 수 없었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필사의 노력으로 알리제와 친해지려 애를 썼으니까. 물론 내 망한 사회성으로 인해 사실 성공하진 못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알리제와 어색하다. 그리고 이제 시누이와 올케? 시동생?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지간에 그런 사이가 되었으니 앞으로도 어색할 예정이다.

지금은 그저 휴식의 달콤함과, 모두에게?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인정받은 기쁨에 취해있자. (알리제가 이후로 유달리 나를 좀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데, 무시하자.) 앞으로는 험난한 일이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어째 휴식이 길고 달콤하더라니, 그다음에 내게 떨어진 임무는 에오르제아 연합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새벽과 함께 갈레말드에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구호 목적이 포함된.

나는 지금 알라미고에 도착해 알라미고 측에서 제공한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정말 숨 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죽을 것 같다. 하필이면 내가 갈레말드라뇨? 하필이면? 내가? 꼭? 가야 할까?

하지만 산크레드 말마따나 나는 자타공인 '새벽'의 제일가는 실력가인 데다가, 갈레말의 혹독하고 한랭한 기후에 현지인이었던 내 조언이 실시간으로 필요하다는 이유로 갈레말드 팀으로 끌려갔다. 나는 텔레지 아델레지를 원망하며 그가 별바다에서도 끊임없이 고통받기를 기원했지만, 오늘만큼 그가 원망스러운 적은 없다. 빌어먹을 자식, 네 녀석만 아니었다면 내 과거가 털릴 일도 없어서 갈레말드에 안 갈 수도 있었는데...!! (확신은 못한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

중요한 임무 전날이지만 숙소 식당의 직원에게 각종 설득과 협박을 하여 몰래 술을 얻어왔다. 레드 와인이다. 안주는 없다. 그런 건 사치다. 깡으로 와인을 마시며 이 눈물 젖은 (안 젖었다.) 일기를 쓰고 있다. 다행히 주방장이 와인잔을 챙겨줘서 병으로 피리는 불고 있지 않다. 그나마 존엄이 지켜졌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병째 마시는 게 조금 더 분위기가 살 것 같지만.


일기를 쓰던 도중, 알피노가 찾아왔었다. 갈레말드로 가기로 결정 난 때부터 안색이 안 좋아서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아무리 약혼 관계라도 이 야심한 시각에 외간 남자가 아녀자의 방에 찾아오면 안 된다고 쫓아내려 했다. (내가 자신을 '여성'으로 지칭한다는 점에서 알피노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고, 실제로 그 단어 선택은 농담이었지만, 그를 쫓아낸 의도는 진심이었다.) 알피노는 내 진짜 과거를 (텔레지 아델레지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최초로 들은 사람이고, 정말로 사려 깊은 사람이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내가 갈레말드에 간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피노가 정말로 배려를 하고자 했다면 나를 신경 쓰지 말고 혼자 둬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분명 내가 그에게 말할 때 와인 냄새가 훅 끼쳐왔겠지. 이거 꽤 부끄러운걸. 내 상태에 대한 그의 걱정에 확신을 주어버린 셈이니.

정말이지...

모르겠다. 이성은 내게 말한다. 갈레말드에 있는 자들도 지성과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의지를 빼앗기고 조종당하는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을 구해야 갈레말에 있는 종말의 탑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감성은 내게 말한다. 그곳에서 '눈 하나 없는 애'이자 '이등시민'으로 불렸던 내가 그들을 내 손으로 구해야 하냐고.

속이 뒤틀린다. 벌써 숙취가 찾아오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술을 꽤 많이 마셨는데 딱히 기분이 좋진 않고 바닥으로 축 가라앉기만 한다. 엄마가 술은 기쁠 때 마시랬는데. 엄마가 아무리 밉더라도 그 조언은 유효한 것이었나 보다. 기분이 정말 정말 안 좋다. 그래도 일기장에 글씨를 끼적거릴 수는 있는 걸 보니 내 몸이 잘 분해하고 있나 보다. 힘내라, 이 녀석아. 내일은 멀쩡한 컨디션이어야 하니까.

알피노. 나 너무 두려워. 손 잡아줘.
눈 속에 파묻고 온 과거를 파헤치는 게 무서워.

하지만 알피노를 쫓아낸 것은 나다. 이 감정은, 잠이 오지 않는 이 밤은 혼자 견뎌야 한다.
빌어먹을 아침이 어서 찾아오기를, 아니면, 영영 오지 말기를.


정말로...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요즘 일기를 쓸 때 맨날 이렇게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정말로. (물론 나중에 이 문구를 또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두에게 누누이 말했다. 갈레안들은 콧대 높고 오만해서, 우리가 구호하려는 것도 수치스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에오르제아 연합과 '새벽'은 그렇다고 해서 구호의 손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하는 구호의 활동이 텔로포로이라는 이 원흉이 시작된 곳에서 정보를 얻기 위함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호구같은 행동이 아닌가? 미성년자에다가, '새벽'의 정예 구성원인 알피노와 알리제에게 수틀리면 고통을 줄 수도 있는 목줄을 채워서까지 이들을 안심시키고 도와야 하나? 게다가 아직도 제국의 긍지니 뭐니 하는 것들을 갖고 있는 인간들한테? 정말 코웃음 나오는 일이다. 그 긍지 높은 제국, 망했다. 텔로포로이 때문도 있지만 공석이 된 황위를 둘러싼 내전 때문에.

재앙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텔로포로이는 그렇다 치고, 그 황제의 통치를 굳건하게 한 건 갈레안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제국의 긍지'는, 본인들이 몇백 년 전부터 받아온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도 다른 나라를 계속해서 침략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하는 나라에 대한 긍지다. 이미 자기 방어나 옛 고향에 대한 탈환의 수준을 넘었단 말이다. 구호를 받는 건 좋은데, 제발 그 콧대 좀 낮추고, 입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저 인간들의 입에서 '야만인'이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스위치 같은 게 눌려서 들고 있는 마도서로 흠씬 패주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았다. 참자. 나는 '새벽'의 영웅이다. 내가 감정에 휩쓸려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에오르제아와 외국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꼴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그 망할 놈의 '구호' 목적에도 반한다. 참자. 참는 것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을 도마에서 배웠었다. 참자. 알피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라도. 후...

오고자 하는 갈레안들은 겨우겨우 테르티움 역에서 깨진 유리 전초지까지 모셔서 구호하고, 남아있고자 하는 갈레안들에게는 우리가 가져온 구호 물품을 넘겨주었다. 그것도 한 차례 검을 맞대고 피를 흘릴 뻔한 걸, 아 룬 센나가 막아서 그나마 잘 해결된 거다. 진짜 꼴값이다. 갈레안들은 예로부터 정말 꼴값이었다. 솔직히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일들도 다 쌤통이고 고소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사태가 일단락된 후 나는 겨우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전초지를 산책하다가 적당한 불가에서 일기를 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갈레말드에 돌아왔을 때부터 본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불태워지고, 부서진 폐허.

나는 이 도시를 기억한다. 일사바드 최북단의 고향 마을에서 마도원에 입학이 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자마자, 테르티움 역까지 가는 마도 열차를 타고 갈레말드에 왔었다. 우리 마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내리며, 제각기 다른 목적지로 바삐 이동했다. 그 사람들의 생동감, 활기, 소리와 냄새. 그 모든 것이 가득한 도시였는데, 갈레말드는. 지금은 잔해에서 그 흔적을 망연히 떠올릴 수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나 또한 있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살아있었다. 그때에는.

...과거에 머물러 있어 봤자일 것이다. 이제 일어서서 미래를 향해 걸어가자. 저쪽에 야슈톨라가 보인다. 쉬러 가는 길에 인사라도 나누고 와야겠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 알피노에게.

알피노, 잘 지내고 있나요?

여기는 달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정말 급작스럽게 끌려왔죠.
그 인간들이 봉인을 풀고 파다니엘이 자기 자신과 동화시킨 조디아크를 쓰러뜨렸는데, 내게 쓰러진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조디아크가 소멸했고, 별의 이치가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했어요. 원초세계는 곧 멸망할 거고, 달의 항해사인 레포릿 족들이 달에 지상의 사람들을 태워 살 만한 다른 행성을 찾으러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사실 나도 보고 겪은 것들을 어떻게든 설명하려 하는데, 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설명이 이상해지네요. 그 점은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결론은 원초세계의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레포릿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당신과 알리제를 어떻게든 빼와서 달에서 안전하게 (하지만 그들의 의복이나 생산하는 식량이 굉장히 현인빵적이라는 건 참고해두도록 해요) 보호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신도와 양측 부상자의 치유에 여념이 없을 당신은 거부할 것 같아요. 올라가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치유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그래야 당신이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답죠.

...알피노. 이곳은 굉장히 삭막해요. 그리고 황폐하고, 드넓죠. 이름은 '비탄의 바다'라고 하나 물 한 방울도 없어요. 나는... 나는 당신과 함께 돌아다녔던 올드 샬레이안을, 내가 처음으로 모험가가 되기를 선택했던 림사 로민사를 사랑해요. 우리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해도, 과연 나는 원초세계를 버리고 영원히 떠나보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요?

아,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가야만 하는데. 시급한 임무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네요. 떨어져 있으니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당신만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알피노, 살리아크에게 지혜를 구하는 자, 나의 현명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 당신이 정말로 보고 싶어요. 미칠 듯이 그리워요.

당신을 다시 만나볼 날을 그리며
가장 새파란 스피넬 코발트블루가.


달에서 종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모두와 재회했다. 즉, 알피노와도 다시 만났다는 뜻이다. 달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라, 신의 문에서 홀로 달을 향해 떠났을 때는 솔직히 다시는 못 돌아올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사히 지상으로 귀환한 것이다. 알피노는 눈물을 흘릴 듯이 기뻐했다. 우리는 대회의실에서 다른 '새벽' 멤버들이 보거나 말거나 서로 포옹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대로 모든 일이 끝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알피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다가올 종말에 맞서 무기를 들어 사람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누르려 애썼다. 나는 내게 갈레말의 '영광'을 위해 군인이 되어 싸우라 강요하는 양친에게 거역하지 못한 채, 정비병이 되어 카르테노 평원에 배치되었었다. 하지만 나의 사람,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나의 알피노는 제 뿌리에게, 제 존재 원인에게, 제 아버지에게 자신의 각오를 펼쳐 보인 것이다. 두려움 한 점 없이, 물러서지 않고, 그 맑은 올드 샬레이안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굳건히 그리고 당당하게 서서.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그는 해냈다. 그는 나와 다르다. 그래서 사랑한다.

나는 알피노와 같은 마음을 내보이며 푸르슈노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나, 에오르제아의 영웅은 이제 세계의 종말에 맞서 싸울 것이다. 왜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 푸른 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으니까. 그가 지키려는 세계를 내가 지킬 것이다. 손을 맞잡고.



밤에 알피노가 내 방에 왔었다. 이번에는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고대의 종말의 재림이 머지않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것을 아니까. 알피노는 갈레말드에서 함께해준 것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내가 과거에 겪은 일 때문에 그들을 인간애적인 이유로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결한 결정이었다고. 나는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빚을 한층 더 진 셈이고, 언젠가 갈레안들이 일상으로 되돌아갈 무렵 나는 그 빚을 받아낼 것이라고. 내가 가진 인맥, 무력, 권력,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알피노는 내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하고는, 내게 블루베리맛 사탕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이 사탕을 까먹으며 일기를 한 장 더 쓰는 중이다. 근데 이 사탕, 꽤 맛있다. 샬레이안 식문화의 '최후의 보루'는 사탕마저도 맛있나 보다.

북해의 밤이 차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투지로 오히려 더운 기분이다.
우리의 앞에 닥쳐오는 것이 무엇이든, 마법으로 거침없이 불태워주겠어. 내 사람을 위해서.

사실 어느 쪽이 꿈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기존 상식과 이론을 뛰어넘는 종말의 재앙이 꿈인지, 아니면 마냥 평화롭고 사람들은 모든 것이 충족되어있으며 별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별의 바다로 돌아가는 이곳이 바로 꿈속 세계인지.

그탓에 나는 너무 긴장이 풀려있었다. 냉담한 내 마음도 녹여버린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역마 메테이온과, 내가 증오하는 솔 조스 갈부스의 가면을 쓰기 전의 모습인, 선량하고 남을 기꺼이 돕는 것...처럼 보이는 투덜투덜 아저씨 에메트셀크 덕분에.

하마터면 이곳에 온 목적이 고대 세계에서 종말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모처럼 주어진 휴식시간이었다. 나는 나를 옥죄어오는 죄책감과 힘겹게 싸우고는 일기를 펼쳐 들었다. 일기에 항상 쓰여있는 것은 내가 지키고자 하는 세상. 그 의무.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알피노.

알피노, 조금만 더 버텨줘요. 이곳에서 재앙을 끝낼 실마리를 찾아 돌아갈 테니까. 당신답게 사람들을 돕고 야수와 싸우고 그들을 치유해주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몸을 지켜요. 내가 당신을 품에 안아볼 수 있을 그때까지.

그 생각으로 내게서 떠나지 않을 현실 감각을 붙들어 매었다. 정신 차려. 나는 놀러 온 게 아니야.

하지만 이 세계에도 무언가 심상찮은 조짐은 보인다. 헤르메스가 '죽음'에 대해 보이는, 고대인의 상식으로는 유난스러울 정도의 안타까움. 나는 그것을 헤르메스가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안다. '다름'은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그뿐만 아니라 내게도 있음을, 그러니 당신은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었지만... 이게 과연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이 세계의 종말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졌는지 대략이나마 아는 나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고대인이 절망의 감정으로 인해 창조 마법을 폭발시켜 야수를 만들어냈고, 현생 인류가 절망으로 인해 야수화가 된다면, 인류가 그 절망을 느낄 수조차 없도록 마음을 건드려서 행복하게 하는 약에 절어버리는 게 해답일까? 정말 그렇게 하면 인류가 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답을 제시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확실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 휴식을 취하고 조사를 이어나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내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아직도 나는 베네스의 마지막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진실을 그저 속에 삼킨 채, 만 년이 넘는 세월을 지고 살아가기로 결정한 그의. 1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나는 베네스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는데. 내 여행이 좋았냐고, 그 질문에 대해 할 대답이 남았는데.

하지만 나는 본래 이 시간대에 속하지 않은 몸. 그리고 현시대 벌어지고 있는 종말의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켜야 할 빛의 전사. 그러므로 나는 미련을 짐더미처럼 메고 끌면서도 현재로 다시 돌아왔다. 아, 베네스, 베네스. 나의 선배. 고독하고도 고독한 마지막 고대인. 한 인간이자 신이고 영웅이여. 나는 그의 의지를 대행하는 빛의 전사로서, 다시금 일어나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동료들에게 전할 것이다. 이번의 종말은 반드시 막아내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나는 발데시온 분관으로 돌아와, 쿠루루에게는 내가 돌아왔다고 간단히 말한다음 바로 휴식하겠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내게서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만큼 많겠지만, 나는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너무 지쳐 너무나도 휴식이 필요한 상태다. 지금의 내 마음을, 이 각오를 다지기 위해 힘을 쥐어짜 내 일기를 쓰고 있지만.



메테이온은 말했다. 삶에 의미 따위는 없다고. 오직 절망만이 가득 차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모두에게 안식인 종언을 노래하겠다고.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거칠고 추운 북쪽의 갈레말에 휴런으로 태어나 악의와 멸시와 일상을 함께 했고, 제국군에서는 광룡의 테라플레어에 타고 녹아 죽어가는 아군과 적군의 아비규환을 등 뒤로 하고 도망쳤으며, 빛의 전사가 되고 나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적의를 마주해야 했으니까.

메테이온의 말이 맞다.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도처에 비극이 널려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 가치가 있는, 살아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고, 그 사람이 세계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에오르제아의 수호자. 어린아이의 거창한 치기에 불과했던 그것을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 자신을 낳고 기른 자에 반해 무기를 들고 세계를 위해 맞서 싸우겠다고 함으로써, 과거부터 지금까지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의 존재는 내가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푸른 밤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길잡이 별과도 같다. 그는, 알피노 르베유르는 내게 그런 존재이다.

그러니까 나는, 허무의 노래와 맞서 싸울 것이다.
비스마르크에서 함께 차 한 잔을 즐기자, 같은 사소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각오는 다졌다. 자, 이제 동료들을 다시 만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전해줄 차례다. 당당히 걸어 나가자, 스피넬 코발트블루.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또다시 '휴게실'에 박혀 일기를 쓰고 있다. 뭔가 대단히 익숙한 흐름이다. 하지만 익숙함이야말로 이런 세상에서는 사치인 법. 그러니 내게 주어진 휴식시간을 감사히 즐기기로 하자.

알피노 팀이 갈레말드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종말이 찾아왔다는 쿠루루의 말을 듣고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갈레말드로 달려갔다. 만약에 알피노가 너무 많은 야수에 둘러싸여 있으면 어쩌지? 알피노가 그 때문에 절망에 빠져버리면 어쩌지? 그래서... 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미친 듯이 알피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만난 쪽은 알리제와 그라하였고, 알리제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상당히 위중해 보였다. 그라하가 알리제를 치유하는 동안 나는 덤벼드는 종말의 야수로부터 그들을 엄호하고는 함께 싸웠다. 그를 찾으러 이 눈밭을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알피노는 일일이 돌봐줘야 하는 아이가 아니며, 어엿한 '새벽'의 전투 인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전투가 중반에 이를 즈음 알피노와 에스티니앙이 도착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캐스팅 중에 소리를 칠 뻔했다. 알피노도 내가 무척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와 함께 합을 맞춰 야수를 쓰러뜨리고,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었다.

푸르슈노는 알피노의 말을 믿고 철학자 의회와 토의를 거친 후 '새벽'에 샬레이안의 대이동 계획을 알려줄 뜻을 내비쳤고, 나는 냉기가 살짝 가신 부자관계에 나와의 약혼 사실을 끼얹었다. '내 아들, 아니, 아들이었던 자가 약혼을...?'하고 경악하는 푸르슈노의 얼굴과 '그걸 여기서 말하나...?' 라고 경악하는 알피노의 얼굴, '당신들 진짜 이 눈밭에서 뭐 하는 거야?!'라고 어이없어하는 알리제의 얼굴이 정말 볼만했다.

아무튼 지간에 나는 이제 푸르슈노 르베유르에게도 당신의 생물학적 아들은 합법적으로 내 것이 될 거라는 통보를 했다. 사실 푸르슈노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알피노 보고 르베유르의 이름을 버리라고 말한 건 푸르슈노다.

즉 푸르슈노는 내가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이 언약에 간섭할 명분이 없다는 뜻이다. 푸르슈노는 무기를 들어 싸우는 야만스러운 에오르제아인인 내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듯하지만, 나는 이미 아멜리앙스 르베유르(이제 내 시어머니이다.)를 내 편으로 포섭했다. 푸르슈노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사건의 순서가 헷갈리는데, 푸르슈노가 제국군의 등장에 경악했으니 율루스와의 재회도 그쯤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율루스가 불편하다. 말끝마다 야만인, 말끝마다 긍지 높은 갈레안이 어쩌고 했던 인간이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새벽'을 지원하여 함께 야수와 싸워준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새벽'이 텔로포로이에게 고통받는 제국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선의가 선의를 낳은 것이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새벽'과 함께 한 모든 활동들 중에서 갈레안들을 돕는 게 제일 불편하고 신경질 났는데,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는 아니더라도 일부분은 씻겨나간 기분이었다. 갈레안도 은혜를 입으면 갚을 줄은 아는 생물이다 이거지. 하지만 조금 더 많이 노력해주었으면 한다. 아직 우리가 받아내야 할 빚의 100분의 1도 안 된다.

아무튼지간에 우리는 갑자기 위리앙제와 함께 등장한 레포릿들과 함께 비공정에 올라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종말 사태로 한시가 급해, 수면 시간과 개인위생 관리 시간 외에는 식사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해본 건 현인빵. 나는 현지인이 먼저 먹는 시범을 보이라며 알피노에게 그걸 디밀었고, 알피노는 조금 우물대나 싶었더니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니, 이카로스를 쓴 거 아냐, 저 사람?! 반대로 나는 억지로 꾹 참고 다 먹었다. 제국군 시절 먹었던 짬밥 같은 맛이다. 옛날 생각나고 참 좋다. (사실 하나도 안 좋다.)

이쯤 정리하고 대회의실로 가야겠다. 모두가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익숙하지만 매번 긴장된다. 알피노를 생각하며 힘내야지. 그나저나 알피노는 지금쯤은 화장실에서 나왔을까...?


알피노와 알리제를 부디 지켜다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랑하는 세계를 지켜다오...


푸르슈노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콱 메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려지는 눈을 억지로 연거푸 깜박여 다시 맑게 보이게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였다.

사실 푸르슈노는 내게 있어서 불편한 상대였다. 세계의 관찰자로 머물러 무기를 들어 싸우는 것을 야만적으로 보았던 샬레이안. 그리고 샬레이안의 그런 뜻에 반대하여 나온 '새벽'. 그 '새벽'의 가장 최전선에서 싸우는 빛의 전사, 바로 나. 푸르슈노가 싫어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갈레말드에서 뜬금없이 '당신의 생물학적 아들은 나와 약혼했다'라고 밝힌 것 때문에 더 안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그 눈밭에서 알피노와의 약혼 사실을 밝힌 건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나는 이걸 엄숙하게 인정하며 선언한다. 내 잘못은 아니다. 나를 멸시한 갈레안들 잘못이지.) 안 그래도 여러모로 안 좋게 생각하는 푸르슈노를 당황케 하고 싶다는 얄궂은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란대로 푸르슈노는 '왜 이런 자리에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말하느냐'라고 불쾌해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냉소했다. 이미 알피노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선언했는데 그게 왜 중요한 사실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푸르슈노를 싫어했던 이유는 내 양친이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자식에게 자신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길을 강요하는 부모. 푸르슈노가 딱 그 짝이었던 것이다. 알피노는 과거의 나와 달리 용감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자신이 정의라 생각하는 길을 걷기 위해 샬레이안을 뛰쳐나왔지만.

그런데 그는 진심을 밝히고 자식들과 화해한 이후, 내게 보였던 차가운 태도를 바꾸어, 거리를 두지만 예의 바르고 정중하며 온화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게 그렇게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그의 본심이 알고 싶었다. 푸르슈노는 알피노와 알리제를 다시 자식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러면 그... 뭐냐, 진짜로 그가 나의 장인어른이 되는 건지, (이미 마음속에서는 생물학적 장인어른 어쩌고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아니, 그래도 '진짜'라는 건...!) 그러니까 나와 알피노의 결혼을 허락하는 건지, 뭐 그런 거.

그의 본심은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물론 나와 푸르슈노의 관계는 보통의 시아버지-장인어른과 며느리-사위처럼 앞으로도 편치는 않을 것이다. 서로 오래 본 사이도 아니고, 나는 푸르슈노에게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가게 될 예정이고,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예의를 차려야 하는 관계니까. 하지만 푸르슈노는 그것을 뛰어넘어 내게 인간 대 인간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며 말한 것이다.

알피노와 알리제의 가장 강한 조력자로서, 그들의 동료로서 제 자식들을 지켜달라고.
그것은 자식을 깊고도 깊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어떠한 말로도 그 마음에 걸맞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푸르슈노는 알피노와 알리제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샬레이안의 사상을 강요했다. 그리고 연을 끊겠다는 발언까지 했었다. 그것은 알피노의 가장 가까운 사람, 약혼자로서 단호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푸르슈노를 당황하게 하려는 나쁜 마음을 먹고 저지르듯이 말하고, 남의 부모 자식 관계에 함부로 내 과거를 얹어 생각하여 냉소를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하나씩 한 셈이다.

푸르슈노가 내게 간절히 부탁한 순간, 나는 푸르슈노가 화해를 청하고자 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우리의 싸움이 실패하면 다시는 그의 앞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어른 대 어른으로서, 서로 인척의 연을 맺게 될 예정인 자로서 진심으로 사과했고, 사과를 받았다.

그 옆에서 알피노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랑스러운 나의 알피노에게 미소해주었다. 어서 라그나로크에 오르자고.

세계의 존속을 걸고 싸우러 나가는 자식들을 배웅하는 푸르슈노의 얼굴이 멀어지는 순간, 나는 알피노가 진심으로 부러웠다.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끝을 끝냈다.



아니, 이제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므로.

나는 메테이온의 공격에 우주 공간 너머로 동료들이 튕겨나가자, 망설임 없이 전송 장치를 누르고, 내 전송 장치는 던져버렸다. 두 번 다시 동료를 잃고 싶진 않았다. 나는 '새벽'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희생해가며 길을 열어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들은 내게 둘도 없는 존재이구나. 평생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 이들만큼은 이토록 차갑고 굳게 닫힌 나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했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들의 마음에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래서 가장 강한 나 혼자서 종언을 노래하는 자에게 대적하고, 동료를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들만은 무사히 돌아갔으면 했다. 설령 아이테리스를 버리고 달에서라도 살아갔으면 했다. 나 같은 건 잊어버려도 괜찮으니까. 정말로.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야말로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오로지 나와 다시 싸우기 위해서 별을 건너온 신룡과, 종언을 노래하는 자들과 싸우면서 내게 전해지는 기도를 들었다. '새벽' 모두의. 내가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 그래서 종말을 막아,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 그 기도를 듣고 있는데, 어떻게 검은 새들 따위가 말하는 절망이 나를 침식할 수 있을까. 가장 빛나는 희망은 바로 내 곁에 있었는데.

마침내 나는 종언을 노래하는 자들을 쓰러뜨렸고, 어느 차원일지도 모르는 곳에서 메테이온을 다시 만났다. 아아, 메테이온. 만 이천 년 동안 얼마나 고독하고 외롭고 슬펐을까. 멸망한 별의 증오를 제 것처럼 빨아들이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메테이온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여기, 내가 있어요. 종족 차별 때문에, 상부 때문에 억지로 전장에 서 사람에게 총을 쏜 내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해 도망친 내가. 도망쳐서 에오르제아의 영웅 행세를 하던 내가. 탐욕스러운 상인의 모략에 의해 과거가 까발려져 동료들을 대부분 잃을 뻔한 내가. 모략을 일으킬 빈틈을 만든, 오만의 소치를 자책하며 속죄를 맹세한 알피노에게 다시 한번 사람을 믿어보겠다고 대답한 내가.

절망 속에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은 내가.

그 사람을, 나아가 어렵게나마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내가.

메테이온은 나의 감정을 받아들였고, 원래의 메테이온으로 돌아왔다. 세계에서 종말은 사라졌다.

세계를 위협하는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되었으므로, '새벽'은 오늘부로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니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상실감에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있던 나를 알피노가 불러 세웠다. 자신은 알리제와 함께 갈레말드를 돕고자 하는데, 같이 가주기는 힘들지 않겠냐고.

나는... 나는 쉬이 결정할 수 없었다. 내가 인간에 절망케 한 원인이 갈레말드에서 겪었던 일인데, 그들을 또 도운다고? ...하지만 알피노가 말한 이유도 납득했다. 그들이 또 먼 옛날처럼 도탄에 빠져있으면, 살기 위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레말이 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건 보고 싶지 않다. ...한때 카르테노 평원에 파견된, 제국군 정비병 출신으로서.

그래서 나는 얼결에 알피노와 알리제와 함께 하게 되었다. 사실 마음속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척 예정자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불편함, 나를 '눈 하나 없는 애'로 불렀던 갈레안들과 당분간 부대끼고 살아야 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알피노와 함께라면 나는 '절망'에 빠지지 않겠지. 그렇다고 믿는다.

갈레말드로 향하는 비공정이 모르도나 상공을 날았다.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