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my dearest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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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14 에멧 드림 백업본

발데시온 분관에 마련된 틸라의 개인 휴게실은 대도시 곳곳의 여관처럼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의 방을 빌려 쓰는 것처럼 편안함을 가장한 가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잠이 들겠다고 말하고 들어왔지만, 사실은 잠이 오지 않았다. 틸라는 잠깐 일자 침대 소파에 앉았다가, 이곳에 왔던 첫날 대바구니에 담겨 다과와 함께 놓였던 포도주 한 병에 시선을 뺏긴다.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거나 생각되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그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이블 위로 뻗은 손은 포도주병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문득 창밖에 가득 들어찬 밤하늘과 적막하고 환한 방 안이 영웅의 오랜 기억을 건드렸다. 

꿈은 꿈답지 않게 어둡고 컴컴하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일렁이는 물소리만 들리며 침잠하던 꿈의 그늘은 시간을 두고서 서서히 걷힌다. 그는 어느새 크리스타리움의 펜던트 거주관에 있었다. 초월하는 힘으로 보는 것보다 생생한 기억 속- 틸라 이그나시아는 마치 자신이 다시 과거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슬슬 새로운 양장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뤄두었던 낡아빠진 일기장은 마지막 장이 쓰이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있고, 저보다 좀 더 일찍 1세계에 당도해있었던 알피노 르베유르가 수면에 좋은 작용을 한다며 한 움큼 쥐여준 연녹색 허브 줄기가 침대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언제라도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정돈된 침대와 질 좋은 탄을 넣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는 난로, 스스로 사용할 일은 없었으나 다양하게 구비된 크리스타리움의 식재료들.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이유로 픽시족이 구해주었던 꽃, 작은 군집으로 이루어진 쌀알 같은 하얀 꽃다발이 화병에 꽂힌 채 말라가고 있다. 둘러본 모든 곳에 그 시절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당시에 수정공은 그를 위해 어떤 배려도 아끼지 않아서, 그는 상념에 젖은 채 예정된 모험의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책 한 권과 함께 벽 구석에 놓은 작은 의자를 창가 가까이 끌어와 액자에 담긴 것 같은 네모난 하늘을 구경하며 책을 읽고는 했다. 포도주는 이미 반쯤 마신 채로 창틀에 얹혀 있다. 손에 만져지는 팔목은 뜨겁고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풍긴다. 이곳에 당도한 이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음식다운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던 자신이 오랜만에 배를 채웠던 음식, 저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수정공의 샌드위치가 담겼던 바구니가 구겨진 포장지와 함께 깨끗이 비워진 채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모든 게 너무나도 익숙한 기억뿐이라 틸라는 저도 모르게 옛 기억 속에 새겨진 그대로 책 한 권을 꺼내 의자에 앉았다. 펼친 책에는 새까만 글씨가 가득 쓰여 있지만 읽어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레이크랜드의 빛을 몰아낸 이후엔 칠흑처럼 새까만 밤하늘이 크리스타리움에 찾아왔었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은 그의 다른 기억을 크게 자극한다. ‘그’가 이 방에 방문했던 건 크리스타리움에 밤이 돌아온 이후였었다- 에메트셀크가 꿈속에 나타난 것은 그것을 의식했던 순간이다. 

두꺼운 벨벳 소재의 검은 옷차림, 치렁치렁하게 금색 휘장을 장식한 갈레말 예복을 입은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이제야 자신이 찾아온 걸 눈치챈 게 우습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며 틸라에게 빈정거렸다. 

“당장에 등 뒤에서 칼이라도 찌를 수 있는 적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관심에 두지 않는 담대함, 넘어야 할 산이 높은 걸 나조차도 알고 있는 것을 책이나 읽고 있는 여유라니.” 

비꼬아대는 모든 말이, 모든 대화가 똑같다. 엘피스에서 만난 목부터 발끝까지 수수한 로브를 입은 에메트셀크와의 괴리감- 그러나 이쪽의 에메트셀크가 틸라에게는 더 익숙하다. 

“그리고 홀로 여유롭게 즐기는 술 한 잔이라. 우리 영웅님은 참으로, 대단하시군. 나가서 ‘밤의 축제’를 즐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틸라의 말이 에메트셀크의 말을 중간에 가로질렀다. 

꿈속의 에메트셀크는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짙은 눈화장 너머의 호박색 눈동자는 고대의 것보다 투박하고 날이 서 있었지만 틸라는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두려웠던 적은 없다. 에메트셀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대꾸한다. 

“나는 네 말을 원하지 않아.” 

“왜 내게서-” 

“난, 네 말을, 원하지, 않는다니까.” 

에메트셀크는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점점 더 그와 가까워진다. 끌어낸 멱살에 팽팽히 당겨진 카라 깃이 목을 조였다. 

“아젬을 보는 걸 멈추지 않아?” 

에메트셀크는 깊이 지쳐있는 것처럼 보였다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다시 원래대로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끌어낸 틸라의 몸을 침대 위 시트 모서리에 무겁게 내려놓는다. 삐딱하게 몸을 지지해 앉은 채로 틸라 이그나시아는 에메트셀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사회생활이라는 걸 모르는 영웅님한테, 선배로서 몸소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주마.” 

쓸모없는 대화를 시도해서 내 친절함을 망치는 걸 그만두거나, 귀찮은 불청객을 내쫓고 네가 원하는 책을 마저 읽거나- 

둘 중 하나면 충분해. 어렵지 않아, 굉장히 쉽지? 

그러니 꿈이라는 건 결국 현실과 달라질 수는 없는 종류의 환상이다.

틸라가 기억하는 건 에메트셀크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침대까지 끌어냈던 것처럼, 그 역시도 침대 옆에 서 있던 에메트셀크를 끌어당겨 침대에 뒤집어 내팽개쳤다는 것뿐이다. 그럴만한 분위기조차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순간에 단둘이 방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직접 찾아와 저를 조롱한다는 몇 가지 사실들이 영웅을 자극했다. 아씨엔이라고 말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나약하게, 불완전한 인간의 잡은 손이 이끄는 대로 에메트셀크는 좁은 침대 위에 내던져진다. 별안간 몸을 겹쳐 입술을 삼키고 코앞에서 더운 숨을 뱉어냈을 때 에메트셀크는 단 한마디조차 보태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처럼 살을 맞대고 결합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했던가? 단순한 소유욕만이 담겨 의미 없이 피부에 흩어지는 멍울의 흔적, 흐트러진 숨으로 제 아래에서 몸을 비트는 에메트셀크를 보면서, 틸라는 있는 그대로 묻는 대신 묻지 않아도 될 만큼 확실한 눈앞의 증거를 찾아 헤맨다. 더 생각해보니 의문을 가져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의 몸은 아씨엔의 그릇으로 담긴 인간의 몸뚱이일 뿐이다. 아, 그러면 이것은 조금 더 명확해지고 쉬워진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이 하는 것처럼 정을 나누는 일에 에메트셀크라는 인간은, 인간의 몸은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에메트셀크는 애당초 이곳을 방문했던 진짜 이유도 말하지 않았고, 제가 하는 행위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들 사이에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라도 있다는 듯이. 그러나 그 애정 없는 관계 속 단 한 가지의 공통점이 틸라의 내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를 안은 채 허리 아래를 움직여가며 고통과 쾌락을 나눌 적에 에메트셀크는 절대로 제 앞에서 눈을 뜨지 않았다. 그를 받아내야 할 때는 증오에 찬 에메트셀크의 목소리가 고집스럽게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라’며 제 뒤통수를 짓눌렀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얼굴을 보이면 죽여버리고 말 테다- 죽이지 않을 걸 그 둘 다 빤히 아는데도- 그 말은 위협적으로 그의 위에서 흩어진다. 틸라 이그나시아는 그의 말을 존중해준다. 어느 쪽이든 에메트셀크는 필요하지 않은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은, 다른 말을. 

“어디서 만든 상처지?”

그렇기에 그건 오래된 영화의 필름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목도한 것처럼 느껴졌다. 등 위로 잇자국을 남기며 흐트러지던 에메트셀크의 숨은 일순 멈췄다가 어떤 질문 하나를 만들어낸다. 틸라는 고개를 들어 에메트셀크의 시선이 닿은 제 손등을 들어 보였다. 매끄러운 피부 결을 두고 도드라진 흉터는 비규칙적인 붉은 무늬를 만들며 얽어든지 오래였다. 이제는 떠올릴만한 감상조차 남지 않았던 그 흉터를, 에메트셀크는 새로운 것이라도 본다는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는 항상 장갑 안에 가려져 있었으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

‘몇 번째였더라, 오늘이.’

이 시점에서의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의 눈길이 한 번도 제 손 따위의 사소한 특이점에 닿지는 못했던가. 어느새 두 사람을 밝힌 등불은 곧 꺼질 것처럼 희미한 불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불빛 속에서 에메트셀크는 가늘게 뜬 눈으로- 뜻하지 않은 관심에 가라앉은 제 마음을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언질도 없이 손목을 잡고서 손등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 들리나, 응?”

그제야 틸라는 에메트셀크가 질문을 던졌다는 걸 뒤늦게 인지한다. 조금 전까지 들끓으며 사라지지 않은 잔열이 몸 안에 선연하다. 생각을 적절히 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조차도 불쾌해져, 에메트셀크가 자신에게 하고 있듯이 평이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슈가르드, 성도에서.”

재해 이후의 새로운 만남을 시작으로, 상실을 겪는 것은 그 자체가 영웅임을 증명하는 일인 것처럼 끝없이 모험의 여로에 따라붙었다.

지긋지긋하게 많은 상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들, 더는 부서질 게 없다고 여겼던 착각 속에서, 어떤 상실은 그것을 적절히 해소할 수 없을 상황에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슈가르드에서 목도했던 희생이 그런 종류의 것 중 하나였다. 쌓았던 신뢰와 우정이 무너지고, 오랜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이의 눈동자 속에서 숫제 사람이 아닌 괴물 취급을 받았던 역광의 최후, 틸라는 제가 가진 힘을 온전히 다뤄내지 못했다. 넘실거리던 화염은 손등 위에 질척한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다. 뒤늦게 눈치챘을 때, 그는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 그대로, 새벽은 영웅의 고집스러움을 이해했다. 

“어느 정도의 성과는 인정한다만. 네 몸뚱이가 말끔한 게 곱디고운 전투만 치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언제나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만한 치유력이 있었을 텐데. 네가 아니라면 네 '동료'들에게라도."

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빛이 만든 그림자가 덮인 몸은 둥그런 윤곽으로 어른거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일그러진 눈썹 아래의 호박색 눈동자에서 점차 어둠이 걷혔다. 그 안에 경멸과 한심함이 대신 자리를 채워 노골적으로 저를 바라봤다. 

"일부러 남긴 건가."

다시 차가운 시선이 닿는다. 에메트셀크의 손은 제 손등에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았다. 그는 손목을 쥐고 한동안 흉터를 들여다보다가, 그 흉터 위에는 손가락 하나 올리지 않은 채 그대로 쥐어든 손목을 베개에 뉘어진 머리 위로 강하게 틀어 누른다. 

“그것참. 정말로…”

불이 다시 꺼지고,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동자는 에메트셀크의 형체만을 불안하게 뒤쫓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저를 보고 있을 얼굴이 눈에 그린 듯 훤했다. 틀어쥔 손목을 부러트릴 것처럼 누르면서, 에메트셀크의 들이쉰 숨이 안으로 급하게 막혀 들어간다. 이 바보 같은 만남 속에서 처음으로 그와 저 자신의 시선이 얽혀들었다고 인지하기 무섭게, 틸라는 에메트셀크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잊지 않기 위한’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까.

“어리석군."

짜증스러운 목소리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기에 아주 명확하다. 

아, 적어도 이 남자는 불완전한 인간의 자기파괴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온기는, 어째서 너는- 

꿈속의 시간은 셀로판처럼 구겨져 겹겹이 쌓인다. 미래와 과거가 엉키다가, 어느 순간 틸라는 이미 그와 몸을 섞은 지가 여러 번이었던 어느 이른 저녁에 닿아 있었다. 다시 어떤 것도 담지 못한 눈동자로, 그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꿈속에서 또다시 에메트셀크에게 내뱉는다. 

“그렇게나 내가 그 사람과 닮았어?” 

조금 전까지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며 음절로 끊어진 숨소리를 내뱉던 그 몸이 품 안에서 거짓말처럼 굳었다. 부러 말로 새기지 않고 담아만 두었다 썩기 직전이 돼서야 내뱉었던 말이 에메트셀크에게 어떻게 들렸던 건지 틸라는 알 수 없다. 에메트셀크는 단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이미 감아서 더는 감지 못 하는 두 눈을 깊은 잔주름이 패도록 질끈 감는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야.

그건 모욕이다. 너는 보잘것없이 작고 희미한 존재야, 어느 것도 닮지 않았어, 어느 것도, 

그렇게 말하면서 에메트셀크는 감은 두 눈을 뜨지 않는다.

너는 나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어.

메마른 입안에서 어떤 문장이 반복적으로 머무른다. 

나는 그 사람의 대체품이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의미 하나 없고 애정 하나 없는 관계를 가졌으면서도, 영웅은 그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의 용기를 가지진 못했다. 에메트셀크의 말을 빌려오자면 단순한 변덕으로, 어디까지나 이유 없이 제 숙소에 따로 발을 들였던 몇 번의 장난질은 그날이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꿈은 다시 미래로 감긴다. 한순간 희망이 어렸던 그의 얼굴, 금세 실망했으며 동시에 분노하던 표정, 끝이 없을 것처럼 산더미같이 퍼부어지는 마력을 이겨내고 가장 오래된 마도사를 쓰러트렸던 그 순간의 기억으로.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질끈 눈을 감은 그 몸뚱이 위로, 다시 돌아와 회유하며 어쩌면 남아있는 기억의 잔재를 건드려가며 미련을 남기던 그 목소리로.

꿈에서 깼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등허리가 땀으로 온통 젖었다 식어서 한기가 느껴진다. 모든 것이 아직 깨어나지 않고 적막했다. 틸라는 자신이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에메트셀크를 단 한 번도 증오하지 않았던 것을 인지한다.

어둠 속에서,

어떤 기억은 원하는 대로 쉽게 왜곡된다.

내 고집스러운 선택의 결과물이, 그 위에 입술의 온기가, 닿았던가? 

지나치게 알기 쉬운 꿈들이 구역질 났다. 틸라는 자신이 엘피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그들 일행은 푸르슈노를 비롯한 샬레이안 의원회에게 종말의 진상을 전하고 그들이 숨겨왔던 해답을 얻어야 했다. 잠이 들지 않기에는 피로하고 무거운 몸이다. 그러나 그런 꿈을 두어번 더 꾸었다가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질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는 어두운 방 안을 한참 동안 팔자로 서성이며 머릿속에 남아있을 꿈의 파편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끈질기게 생각을 흩뜨려놓고, 머릿속을 비우고 나서야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몸은 수면 아래로, 심해로 가라앉는다.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질 않는다. 틸라 이그나시아는 반복되는 최후의 꿈을 두려워하면서도, 꿈에서라도 다시 그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동시에 가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답 없이 질척거리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보다 눈앞이 밝다. 물속에서 뿌옇게 이지러지는 빛이 보였다. 

죽음을 예감하고 결연한 표정을 짓던 묘소 안의 여린 비술사, 미소 짓기를 바랐던 기사, 눈밭에 얼어붙은 소녀, …그 순간 왜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떠올렸는지.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별바다에 녹아든다는 것은 이 꿈과도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무심코 생각하면서 틸라는 그 빛 속으로 손을 뻗는다. 손에 닿은 빛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 온기도 촉감도 그 무엇도. 시야를 가득 채우고 부글거리던 거품이 서서히 걷힌다. 

그곳은 펜던트 거주관의 숙소가 아니었다. 아쉬움도 잠시 틸라는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날카롭게 마무리된 아치형의 창밖으로 햇빛이 부서져 긴 그림자와 함께 방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 보인다.

하나하나가 전부 큼직하게 세공되지 않은 채 금속 고리가 걸린 하얀빛의 크리스탈 덩어리들, 틸라의 손으로는 한장도 채 넘겨볼 수도 없을 거대한 책들의 산, 까맣고 매끄러운 평면 위에 가득 적힌 무형의 글씨, 창문이 없는 반대편의 벽 한쪽을 온통 도배하다시피 한 어느 대륙의 지도와 지역 곳곳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주먹만 한 고정핀…

바닥 아래에서 점점이 들려오는 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와 저 바깥의 먼 곳에서부터 먹먹한 오르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이른 저녁의 햇빛은 한가롭게 방 안을 데우며 함께 어우러진다. 틸라는 생전 처음 보는 공간 속에서 이유 모를 익숙함과 아늑함을 느낀다. 아니, 내가 이것을 본 적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이전에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는 타인의 방안에서 기억을 되짚어가며 익숙함의 이유에 대해 끈질기게 떠올려가던 때였다. 

원래부터 그 방에 놓여있던 동상처럼 우뚝이 서 있어 금세 눈치채지 못했던 남자가 돌연히 움직인다. 그 남자는 바닥 아래 푹신하게 깔린 진홍색의 러그에 발을 끌면서, 마치 틸라가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방 안을 배회했다. 걸을 때마다 언뜻 드러나는 손목은 틸라가 잠시 여성으로 착각할 만큼 여리게 보였는데, 찬장을 열기 위해 한쪽 팔을 들어 올렸을 때 반쯤 걷힌 소매 아래의 팔뚝은 반대로 굵고 단단해 보였다. 어깨선 근처까지 이곳저곳으로 삐친 백금의 머리카락은 얼굴에 걸친 검은색 가면 위로 부드럽게 흘러 조화로운 대조를 이룬다. 익숙한 차림새의 남성과 거대한 가구 틈새에서 틸라는 그가 고대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것은 초월하는 힘을 통한 과거의 장면인가? 남자는 의자 위에 앉아 한참 움직이지 않다가 소매 아래의 팔을 들어 벽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어 든다. 그러나 전혀 읽지 않은 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고, 별안간 팔을 베고 책상 위에 머리를 둔 채 음, 음, 하며 지루한 듯이 목을 가다듬다가, 어떠한 말소리 없이 낮게 목을 울리며 노랫소리를 흥얼거린다. 그 모든 게 지나치게 부산스럽고 정신이 없다. 그런데도 동시에 시선을 붙잡는다. 

“의무와 약속과 나다움은…”

계속되던 허밍은 오르골 소리가 멈추면서 함께 끊겼다. 남자는 책상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손장난하던 것을 뚝 멈추고,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가면 아래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간다. 

“…앞에서는… 아, 친애하는 나의 친구, 나 역시도 알고 있어…”

그런 다정한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가워진다. 틸라 이그나시아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다시금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친애하는 나의 친구’에게 보이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 스스로에 대한…

그즈음에 틸라는 이 무해해 보이는 -그러나 확실하지 않다, 단지 그 자신의 본능에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남자에게로 한 걸음씩 발을 옮겨가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남자는 인기척에 곧장 발아래를 내려다본다. 마치 인간이 아닌 소동물을 잡아다 옮기는 것처럼, 남자는 전혀 고심하지 않은 투박한 손길로 틸라의 허리를 쥐고 제 책상 위에 달랑 올려놓는다. 올라와 놓고 보니 책상 구석에 비친 거울 속 제 모습은 엘리디부스가 간신히 과거의 엘피스까지 옮겨 주었던 그때의 모습보다도 훨씬 작고 희미했다. 

“네가 올 줄 알았어.” 

틸라는 남자가 전에 없이 들떴다는 걸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느낀다. 너는 누구지? 입을 열어 말하려고 했지만 열린 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너는 나와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 아, 정말 신기하다! 넌 정말 작고, 또 꼬리가 있고, 꼬리라니! …웃어서 미안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해 보여. 있잖아, 나는 일부러라도 그런 표정을 남에게 보이지 않아. 대답할 수 있는 게 없는데도 ‘기분이 나쁜 거냐’고 물어오는 목소리를 견뎌야 하는 건 성가신 일이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내버려 둔 채 혼자 떠들어대던 남자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멈췄다. 

“미안, 실례했네. 네 앞에선 당연히 이런 가면 같은 게 필요할 수가 없지. 방금 막 거리를 거닐다 돌아온 참이었어. 집에서는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은데… 조금 전에 내 친구와 아주, 아주 까다로운 시간을 보내고 왔거든. 정신이 없어서, 물론 나는 원래도 정신이 없어 보이긴 해. 하하하…”

틸라는 남자의 말에서 기묘한 데자뷔를 느낀다. 이것을 제가 만난 다른 고대인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하데스의 또 다른 친구 휘틀로다이우스의 입으로, 그리고 그때 그와 함께 ‘까다로운 시간’을 보냈다던 사람은. 

눈앞의 남자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남자는 제 얼굴의 절반을 가린 검은 가면을 벗어서 가슴 위에 내려놓는다.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깔의 백금의 눈동자는 하얀 눈금들이 동공에서부터 모여 다시 빛처럼 퍼져나간다. 아래로 처진 눈매와 오른쪽 아래의 눈물점, 웃을 때마다 눈을 두어번 깜빡이는 버릇- 

“응? 너 왜 우는 거야? …왜? 뚝 해야지. 미안해, 네가 슬픈데 자꾸 웃어서. 근데 자꾸 웃음이 나와. 너도 나처럼 자기감정에 약한 인간이구나… 우는 걸 보니까 나도 슬퍼지는걸. 네가 왜 우는지 알 것 같기도 해.” 

눈앞의 ‘그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무섭게 자신과 닮아있어서, 틸라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도 닮은 게 없다’며 눈을 질끈 감았던 그 시절의 에메트셀크를 떠올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울어본 적이라곤 없는 자신이 뺨을 적셔가며 울고 있다는 것도, 아젬의 손가락이 다정하게 눈가를 문지를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아젬이라고 불리는 인간이야. 이름은 안티고니스, 내 친구들은 안티고라고 줄여부를 때가 더 많아. 내 영혼이 조각나서 나뉘기 이전의, 음…원본이라고 해야겠지, 아니, 널 앞에 두고서 스스로 나 자신을 원본이라고 말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눈물이 한참 전에 말라붙은 뒤에도 아젬은 틸라의 눈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어떤 근심이나 고민, 피로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가벼운 몸짓은 남자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젬 님…

“네가 망각의 강을 건너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걸 드러내놓고 보여주는 인간이라는 건 굉장히 매혹적이야, 나도 알고 있어. 너도 나처럼…”

분명한 발음으로 말하던 목소리는 갑자기 물에 먹힌 듯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젬은 하던 말을 멈추고 가만히 틸라를 내려다본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은 언제나 똑같다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그의 목소리 저편에서, 틸라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타인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듣는다. 그것은 귀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였다. 

“남을 조금 더 소중히 생각하는 편이지.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너는 결국 알 수 있을 거야. 네게 묻고 싶은 것들은 나 역시도 나 스스로 얻어낼 테니까.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결말에 대해서도, 이해해 줄 수…” 

아젬의 목소리와 머릿속의 목소리는 점점 뒤바뀌어 간다. 흐릿했던 타인의 목소리는 아젬의 것처럼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대신, 아젬의 목소리는 반대로 메아리처럼 멀어져갔다. 모든 것이 어두워지기 전에 아젬, 안티고니스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깊은 물 속에서 끌어올려진 것처럼, 틸라는 암전된 시야를 느끼며 멀어져가던 의식이 또렷하게 저를 붙들어 함께 현실로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아젬 님…”

“…….”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두 번째로 보았어야 할 적막한 휴게실의 천장은 보이지 않는다. 

“아젬 님?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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