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이 든 산 (1)
그곳의 맹수가 노리는 것은...
하나는 배척받는 이요, 주인 없는 산에 밀어넣어진 강요의 자람이라.
또 하나는 이름 새기지 않은 왕좌에 단단히 앉은 뜨였다 사라질 서녘이니,
살아가는 이들이여. 한 발의 실수로 떨어질 낭떠러지에 위태로운 자들이여.
탈취하려는 자로부터 자신을 지켜라.
범이 든 산 (1)
쩌적쩌적 갈라진 땅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리 쉰다. 눈물이 흘러 그들의 마실 것이 되었다.
누군가의 아이는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기에 어미가 부르짖는 절규의 목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어미의 남편은 아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러 산을 넘으려 했으나 중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 옆집의 아들은 비가 내리지 않아 식량이 없어 산으로 나무의 껍질이라도 긁어오려다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져 죽었다. 오늘은 아낙네가 다른 마을로 이동하려 했으나 또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산에서 범에게 물어뜯겨 죽었으며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흐느껴 한다.
모든 것이 산 때문이다. 예로부터 마을을 지켜준다는 산군이라는 수호신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비옥하고 물도 맑아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매번 산군께 공물을 드리며 행복하게 살아왔던 나날들이 몇 년 전, 지금으로부터 대략 5년 전부터 흉년이 들고 땅이 갈라지고 비가 오지 않고 탁한 물이 흐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산이 원인이다! 어미의 아이와 남편도, 아들도, 짐승에게 물어뜯긴 남편도!”
“산이 우리에게 주던 것을 거둔거야! 몇백년 동안 이어진 일을 갑자기 끊어버리다니….”
“…혹시 이건 누군가가 산군을 노하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은 산군을 진정시킬 방법으로 인신 공양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 산에 사람을 바치면 다른 사람들은 그 피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율서휘는 어이가 없었다. 모두가 산군이 주는 선물과 편의를 당연시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작고 하찮은 공물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인간을 돌보아주었던 것은 그나마 인간을 사랑하거나 애틋하게 여긴다거나… 어떤 형태든 정이 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그런 이가 노했다고 사람을 갖다 바친단다.
‘저것들 바보 아냐? 머리에 돌이 박혔나? 너무 굶어서 회까닥 돌아 신종 자살 방법이라도 생각하는 거야 뭐야?’
어디에나 있을 법하고 흔한 말이다. 마을의 촌장이 타지역에서 온 신기가 있다 굳게 믿는 사람의 말을 맹신하는 것처럼. 서휘의 부모님은 일찍이 두 동생만을 남겨두고 떠나셨다. 남은 동생들마저 이번 흉년에 병을 얻어 떠났다. 처음에는 감염병인가 하여 마을 사람들의 기피를 받고 쉬이 약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율서휘라는 인간은 이 마을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제 더 이상 지킬 인간도 없거니와 가족이 모두 사라진 마당에 그는 배척받는 인간이었다. 연고 없는 인간을 받아줄 만큼 마을 사람들의 탐욕은 지나치게 커져 있었고,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마을 안에서도 작은 사회의 계급이 보일 정도였다.
“산군이 노했다고 한다면 이런 행태 때문이겠지. 허튼 곳에서 원인을 찾아.”
서휘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인간이며 배척하고 배척받는 인간인 저를 저 대열에 끼우지 않을 리가 없다는 예감…. 아니,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특히 촌장이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그 옆에 바짝 붙어 소곤거리는 이방인의 기묘한 눈빛이 율서휘를 향했다. 그는 꼭 다른 이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오직 서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수상한 사람이야.
이방인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그 사람만큼은 홀린 듯이 찬양하고 선망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마을이 더 나빠지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맹신하고 의지했다. 마치 이방인의 수족이 된 것처럼 구는 마을 사람들에 괴상함을 느낀 건 오롯 율서휘 뿐이었다.
하긴. 이러니 어서 치워버리고픈 마음이 들긴 하겠구나.
한숨과 함께 겨우 시선을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 다음 공물을 바쳐야 하는 날이 왔다. 말이 공물이지 제물이었다.
그리고 전날 밤,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촌장이 부른 것부터가 수상하긴 했지만 마을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남는 건 추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 마을을 위한 제물이 희생을 거부한다고 쫓아낼 위인들이 아닌데. 무슨 짓을 해서든 기어이 잡아 오고야 말겠지. 험한 꼴을 당해 같은 결말이라면 조금 더 나은 꼴이 낫겠단 생각으로 비좁고 어두운 어둠을 헤치고 갔다. 그렇게 다다른 촌장의 집에 들어가기 직전, 둔탁한 것으로 세게 얻어맞고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곤 흔들리는 시야에 뒤를 돌아 팔꿈치로 자신을 때린 이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퍽! 확실한 타격감이 있었다. 아악! 하는 비명소리와 뒤로 쓰러지는 사람의 인영에 비릿한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서휘의 시야의 끝부분에서 다시 당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이 보였다.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이 흔들렸다.
정신이 깜빡깜빡 들었다 암전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끊기는 듯한 문장이 하나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고작… …될지….”
“도망이ㄹ…… ……하죠…?”
“저 꼴로…도망… …있겠어? 깔깔!”
“어쨌… …확실… …좋은….”
다시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온통 까만색이었다. 눈을 떴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손은 자유롭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내뱉은 그 꼴로 도망이나 칠 수 있겠냐는 조롱에 그나마 발만이 느슨히 묶여 있었다. 마음대로 말할 수도 없었고 보아하니 눈도 안대로 가려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들의 집착과 욕심을 너무 얕봤나. 이렇게나 꽁꽁 묶어둘 줄은 몰랐지.
‘망할….’
지금이 언제쯤이지? 하늘을 보지도 못하니 시간도 확인할 수 없었다. 바람이 통하는 걸 보니 창이 있거나 밖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설마 벌써 산에 가져다 놓은 건가? 아니, 그 겁쟁이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들어가긴 들어가. 제기랄. 이대로 있다가는 짐승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어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발목이 느슨하게 묶여 발을 몇 번 꿈질거리니 금방 풀리더라. 문제는 손이었다. 뒤로 묶여서는 꽉 잘도 매듭지어 쉬이 풀리지도 않았다. 재갈은 그나마 잘근잘근 물어뜯어 풀 수 있었다. 흉년이라 천도 제대로 짓지 못한 것까지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거였을까.
‘…이거 정말 잘못하면 죽겠는데…?’
체념은 빨랐다. 알다시피 그에게 남은 것이 없었다. 불결하다며 먼저 제물로 바쳐진 여인의 집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돌아가도 반겨줄 이도, 재산도, 그 무엇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뜻대로 되어줄 수는 없지. 죽을 때 죽더라도 마을 하나는 다 태워 먹고 죽어야겠다. 율서휘는 산군이란 놈이 오자마자 그를 물어뜯을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 와.’
다짐을 하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머리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꼭 이끌려가야만 하는 강한 끌림이 느껴지는 지독히도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고,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은 그런 기분까지도 들었다. …그래. 이런 것을 홀린다고 하던가. 마을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던가. 미처 풀지 못한 안대는 기억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멍한 기분이었다. 걷는 길마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풀이 신발 없는 맨발을 사락사락 스치지도 않았다. 이 기묘한 상황에서도 서휘는 오로지 끊임없이 속삭이는 말을 길잡이 삼아 걸어갔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가 다리가 아파질 즈음에 누군가의 몸과 부딪혔다. 드디어 무언가의 물체가 닿은 것이다.
다만, 그것이 무조건 제 편이라는 걸 확신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대로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도와준 건 맞는 것 같으나, 그 외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자타의적으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러나 앞에 선 존재는 서휘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따끔거렸다. 걷느라 혹사 당한 다리와 앞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긴장감에 더해 손이 묶여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입을 떼려고 했다.
“제물이라니…. 누가 그딴 걸 달라 말했던가. 산을 열어줄테니 다른 마을로 가. 처음 자립할 정도의 돈은 쥐여줄테니.”
그의 말과 동시에 안대와 밧줄이 풀리는 것이 아닌가. 결국 율서휘는 꺼내려던 말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니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혼자 살기에는 넓다란 기와집이 있었다. 온갖 짐승들이 그 집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율서휘는 지금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정확히는, 기와집 안에 말이다. 앞에 자신과 대화라기엔 미묘한 일방적인 말을 하고 있는 사내는 나름대로 수려한 외모였다.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옷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은 검은색의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사내 같았으나 사내답지 않은 듯한 굵지도 너무 얇지도 않은 선을 가지고 귀에는 붉은색의 피같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구슬을 귀걸이로 하고 있었다. 결코 값싸지 않을 달빛을 담은 듯한 은빛의 옷을 입고 그 위로는 반투명한 검은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다. 어디 가서 외모로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율서휘도 감탄한 미모에 잠시 생각을 멈추고 눈을 떼지 못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 때 쯤에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산 거 맞지? 살게 해준다는 것도 그렇고….’
너무나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아니, 명령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사내는 마치 거부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한 음성으로 곧 서휘를 산 밖으로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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