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밍[2]
나나미 켄토 드림 4편
나나미는 커프스링크를 빼며 지금 스스로가 다소 멍한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사고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오래 정장을 입었던 만큼 익숙한 움직임으로 양 손목의 커프스링크부터, 시계와 넥타이를 풀어나갔다.
그 주령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쿠기사키 양과 닛타 씨를 만류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지. 그렇지만 마유 씨의 태도 변화가 너무 심해... 이해할 수가 없군. 아까 새벽에만 해도 내 힘줄을 자른다더니 했는데, 지금은 또 고전에 갈 거라고 하고. 내가 다치고 의식이 없던 상태에서 흥분했다가 머리가 식었나? 현실적으로 날 붙잡아 둘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나? 이 옷은 얼마나 할까. 수선한다느니 말했는데 내가 낼 수 있는 가격인가? 고전에 가는 거라면 일단 연락해서 생존자나 상황 확인을 해 둬야 할까?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탈의가 끝나 있었다. 나나미는 경대에 올려둔 액서세리와 정장을 보다가 수습을 포기한 채 정장만을 들었다.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니 어느 정도 주력이 회복되어 있었고, 이 정도라면 충분히 신체 강화로 두 사람을 데리고 달아날 수 있었다. 여차하면 이동하는 중에 달아나자고 생각하면서 드레스룸을 나섰다.
“끝났습니다.”
생각이 복잡한 나나미와는 달리 마유는 닫힌 드레스룸의 문을 보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까 나나미가 입었던 정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치 청춘의 소년처럼 들떠있었다. 나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뒤 그에 대해 알아보다가 예전 회사원 시절의 사진을 몇 장 구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사진을 보고 지금보다 좀 더 피로한 기색이 진하면서도 앳된 얼굴과 색다른 차림에 들떴던 기억이 생생했다.
아~ 아까 그 정장 최고로 잘 어울렸어. 그동안 몸이 더 좋아져서 핏이 더 내 취향이 되었네. 그 회사가 개인정보 보호법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서 다행이야. 돈 몇 푼에 그만둔 지 몇 년 된 직원의 사진뿐 아니라 이력서와 업무 성과 기록까지 넘겨주는 놈이라니. 이젠 더 이상 켄토에 대해 떠들고 다닐 일도 없으니 문제는 없고. 그러고 보니 실적 꽤 좋았지. 잘생기고 상냥하고 몸도 좋은데 머리까지 좋은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행운 아닌가?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 그 놈들이 금액 조금 올리니 바로 전속 제안을 받아들인 건 짜증나네. 예상보다 돈을 덜 쓰게 된 건 좋은 일이지만 켄토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닌가. 뭐 상관없지. 두어 달 정도만 전속 명령으로 묶어두고 그동안 다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편안하게 해 주면 되는 거니까.
맞다. 다른 사람들이 손대는 게 싫어서 직접 채촌하긴 했는데 제대로 쟀겠지? 수선한 옷을 보고 좀 이상하면 그때는 직원에게 재게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점심시간인데 뭘 먹을까. 적당히 고기 요리...? 그래. 오래 잤으니까 체력이 없겠지. 일단 목욕을 시키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게 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케어한 다음에 새 옷을 입으면 켄토도 기분이 좋겠지.
“끝났습니다.”
한참을 이어가던 생각이 나나미의 목소리로 멈추었다. 한 팔에 정장을 걸고 나와 어색한 표정으로 직원을 돌아보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보였다.
“다 갈아입었습니다. 악세사리는 다 들고나올 수가 없어서 방 안에 두고 나왔습니다만...”
“네. 저희가 챙기겠습니다.”
“좋아. 그럼 같이 목욕할까요, 나나미 씨?”
들고 있던 정장을 직원에게 건넨 나나미는 이번에야말로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짜증 섞인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지만 마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사흘 동안 의식이 없던 사람이 혼자 씻는 건 위험하잖아요?”
자기 말에 한 치 의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 당당함에 나나미도 잠깐 그건 그렇다고 수긍할 뻔 했다.
“지금은 다 나았고 제가 충분히 씻을 수 있습니다.”
마유는 나나미의 항변은 듣지도 않은 채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며 옆의 중년에게 말했다.
“목욕용품은 있을 거고, 손톱 케어 용품 확인해 보고 가져와. 지금 오전 11시 10분이니까 12시 30분에 맞춰서 점심 식사랑 내 옷 준비해. 메인은 고기로, 사이드는 최대한 가짓수 많게. 빵은 디너 롤 말고 바게트로. 쿠기사키 양과 닛타 씨도 같은 메뉴로.”
지시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은 마유는 부드럽게 나나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욕실로 이끌었다. 욕실에서 기절시키고 도망치자. 쿠기사키 양과 닛타 씨의 병실은 병원 카운터에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알려주지 않으면 하나하나 확인하면 된다. 기절시키고 묶어두면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어. 그렇게 마음먹고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
“자, 일단 목욕가운으로 갈아입죠.”
“이제부터 씻는데 목욕가운입니까.”
“맨살 보여주실 건가요? 전 좋지만.”
“입겠습니다.”
기절시키고 이 가운을 찢어서 묶자. 그렇게 생각하고 목욕가운을 받았다. 아직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언제쯤 기척이 사라질까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경쾌한 물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마유는 어느새 물이 가득 찬 월풀욕조의 수류를 틀어놓고 가장자리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자, 어깨까지 푹 담그시죠.”
“...하아.”
주력만 있으면 언제라도 기절시킬 수 있으니까 괜찮아. 나나미는 최대한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가운을 여미고, 허리끈도 그냥 당기는 걸로는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욕조에 들어가려니 마유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어깨를 짚으세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보이느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얌전히 손을 짚고 들어갔다. 수류에 가운 자락이 흔들리며 피부를 스쳐 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물을 먹은 천이 무거워지며 피부에 달라붙어 그런 느낌도 금방 사라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이 이상한 상황은 둘째치고 확실히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뒤로 편하게 누워보세요. 머리를 감겨드릴 테니까.”
잠깐 멈칫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유는 샤워기를 들더니 수건을 뜨거운 물로 가볍게 적셔 나나미의 눈 위에 올렸다. 곧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사이사이 따듯한 물이 스며들었다. 마유가 무언가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말을 들어주니 기분이 좋은가? 지금이라면 대답해 줄지도 모르겠군.
“갑자기 왜 생각을 바꾸었습니까?”
“응-? 무슨 말입니까?”
마유의 손이 떨어지고 물이 아닌 무게감과 점성이 있는 액체가 흘러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다시 머리카락에 닿은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액체의 무게감이 사라지고 연한 레몬향이 풍겼다.
“고전에 가겠다고 한 것 말입니다. 몇 시간 전까지 제 힘줄을 자른다는 말까지 하더니 왜입니까?”
“아, 그거요?”
마유의 손이 떨어지더니, 머리로 물줄기가 떨어졌다. 레몬향이 빠르게 흐려진다. 목과 어깨로 흘러내리는 물에 샴푸 거품이 섞여 미끈거리는 걸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총감부와 협상에 성공해서 나나미 씨가 제 전속이 되었거든요. 무기한으로, 달에 5천만씩 내는 조건입니다.”
“...하아.”
그 말에 나나미의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의심하는 질문도, 부정의 외침도, 거짓을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다. 희미한 분노조차 담겨있지 않은 가느다란 한숨이었지만 마유는 샴푸 거품을 씻어내던 손을 멈추고 나나미의 팔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팔이 경련하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날 뭘로 보는 겁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 시부야에선 날 안고 싶다, 그러다가 제가 의식을 찾으니 주술사를 그만두라, 그러지 않으면 힘줄을 자르겠다고 협박하고, 이젠 총감부와 협상해서 절 전속으로 고용했다고요?”
말하는 내용에 비해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마유는 나나미의 팔을 따라가며 손을 내려 주먹 쥔 손을 잡았다.
“너무 힘이 들어갔어요.”
“대답하세요. 당신은 절 가지고 뭘 하고 싶은 겁니까?”
“그걸 꼭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해야 합니까?”
지루하다는 기분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나미에게는 그게 한계였다. 마유에게는 사흘이었지만 나나미는 시부야에서 마유를 만난 뒤 의식이 있는 시간 동안 계속 마유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가 갈리는 짧은 소리와 나나미가 얼굴을 가린 수건을 내던진 건 동시였다.
“제대로 된 대답을..!”
외침이 중간에 멈추었다. 마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고백은 좀 더 제대로 된 곳에서, 폼 좀 잡으면서 하고 싶었는데요.”
“어,”
터무니없는 상황에 몸도 사고도 정지해 버렸다.
“널 좋아해. 켄토.”
좀 더 깊어지는 미소. 그에 따라 뚜렷하게 보이는 감정. 광기에 가까운 애정.
“널 좋아한다. 안고 싶다고 한 것도 본심이야. 너를 연애적인 의미에서, 성애적인 의미에서 좋아해. 그리고 네가 주술사 같은 위험한 일을 하면서 더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내 옆에서,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즐기면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길 바래. 그 바람이 간절한 나머지 너를 상처입혀서라도 옆에 두겠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초조한 나머지 말실수를 했어. 불안하게 했다면 미안해. 네가 내 말로는 옆에 있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총감부에 접촉했어. 이것도 네 뜻을 반하는 일이니까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만두진 않을 거야.”
어절 하나하나가 적당한 속도로 분명하게 들려왔다.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나나미는 갑자기 사고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이는 당혹감에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욕조인 걸 잊고 달아나려다가 미끄러지려는 그를 마유가 잡아 지지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당신과 나는, 그렇게 깊은 교류를 한 것도 아닌데.”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있잖아?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같이 술을 마셔달라고 부탁했던 그날이지만.”
장난스럽게 웃는 마유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맞닿았다. 가볍게 문지르고 떨어지는 담백한 키스였다. 그 짧은 입맞춤에 나나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젖어버린 가운 소매로 눈물을 닦고 얼굴을 가리려는 그의 손이 마유에게 잡혀 끌어내려지고, 이번엔 눈썹 위, 눈꺼풀, 뺨, 콧잔등에도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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